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467)
467화노인, 카셀 마탑주가 황제의 변화를 느낀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리갈에서 제국군의 세뇌를 위해 준비하고 있던 대규모의 마법진.
그것을 통해 다가오는 제국군의 상태를 미리 파악하려 한 시도에, 뜻밖에도 믿기지 않을 만큼 거대해진 황제의 영혼이 걸려든 것이다.
‘……황제?’
처음에는 당연히 착각이라 생각했다.
기껏해야 자신과 비슷한 수준, 그나마도 전승의 힘이라는 편법으로 그만한 경지에 오른 황제가 그사이에 어떻게 저런 격을 보유할 수 있을까.
하지만 제국군이 가까워질수록, 그 중심에서 느껴지는 황제의 존재감은 점점 커지기만 했다. 도저히 착각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말도 안 돼!’
그 순간 탑주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이대로 리갈에서 동맹의 자격으로 황제를 마주할 것인지 아니면 회피할 것인지.
‘마주치면 도망갈 수 없다.’
도무지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황제는 무려 몇 단계나 뛰어넘는 말도 안 되는 성장을 이룬 것 같았다.
‘8클래스…… 설마 그조차도 뛰어넘었나? 아니, 아닐 거야. 그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덜덜 떨릴 정도의 위기감이 찾아들었다.
상황이 그렇게 되니 황실과 카셀 마탑의 오래된 원한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기존의 계획을 전부 접어야겠어.’
원래는 지금 제국이 처한 상황을 이용해 제국의 정예들을 세뇌한 뒤, 맥라인을 격파하고 나면 제국까지 집어삼키려는 생각이었다. 최종 명령권을 황제에게 준 듯하면서도 변경의 가능성을 몰래 남겨 뒀던 것이다.
자신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글렀다.
수준이 다르다고 자부하는 마학적 성취도 월등한 격의 차이 앞에선 무의미했다.
‘그런 수작을 부렸다가는 바로 끝장이 나겠지.’
황제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목덜미에 칼이 들어온 느낌이었다.
결국 탑주는 어중간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장로들과 나는 자리를 피하겠다. 너희는 남아서 황제의 지시를 따르도록.”
“……예?”
부하의 반문에 굳이 설명을 하진 않았다.
어떻게 된 건지는 추후에 알아봐야겠지만, 어쨌건 지금은…….
‘황제가 대륙 최강자다.’
그렇다면 잠시간 고개를 숙이며 때를 기다리면 그만이다.
그리고 믿는 구석도 있었다.
“로건 맥라인을 생포해서 우리에게 양도하겠다는 약속만 상기시키도록.”
“……예, 탑주님.”
언약의 힘은 강력하다. 저 정도 격이라면 더더욱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는 구체적인 약속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탑주는 리갈을 떠났다.
그리고 한참 뒤.
제국군의 세뇌 작업이 끝난 후 그 약속을 상기시킨 부하들이 모조리 참살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제국군 내부에 심어 놓은 간자들까지 모조리 쓸려 나갔다는 소식과 함께.
* * *
“황제, 정녕 미친 건가…….”
마법의 본질은 의지로 세상을 움직이는 것.
그리고 마법사의 의지는 ‘말’의 형식을 빌려 자연의 힘, 즉 마나를 움직인다.
그렇기에 언약의 무게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말장난으로 슬쩍 빠져나갈 수는 있어도, 대놓고 약속을 어길 수는 없는 이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마법사가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마도사의 경지에 오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시전자의 말에 진실한 의지가 아닌 거짓이 담기면 마법의 힘은 약해진다. 그리고 그것은 경지가 높아질수록 더욱 강력한 족쇄가 되어 마법사를 옭아맨다.
이것은 결코 미신이나 추측 따위가 아닌 검증된 사실이었다. 대마도사인 자신만 해도 편법으로 약속을 우회하면 한동안 7서클의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되니까.
카셀 마탑처럼 세대마다 꾸준히 대마도사를 배출해 온 황실이라면 이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지금 황제는 사절을 아예 죽여 버리기까지 했다.
맥라인을 정벌하기 위한 동맹의 약속을 가장 극단적인 방법으로 어겨 버린 것.
제대로 된 대마도사가 미래의 발전 가능성을 포기할 리 없으니,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둘 중 하나였다.
황제가 정말 미쳐 버렸거나.
“……신인의 경지에 올라 본인의 의지만으로 자연의 힘을 맘대로 다룰 수 있게 되었거나.”
혼잣말을 내뱉는 노인의 눈썹에 경련이 일었다. 애써 부인해 봐도, 그럴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깨달아 버린 것이다.
상정했던 최악의 경우가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때, 노인은 확신할 수 있었다.
“……맥라인은 끝났군.”
결코 좋은 일은 아니었다.
돌아가는 꼴을 보았을 때, 황제에게 다시 접근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나온다는 건 황제가 로건 맥라인을 살려 둘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운명을 바꾸는 자는 그분의 강림을 위한 필수 제물이었다.
그런데 균형을 맞추기 위해 편을 들었던 쪽이 너무 강해지면서, 그 제물의 수급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을 듯했다.
“으으음.”
노인은 눈을 감은 채 전황을 예상해 보았다.
완벽하게 세뇌된, 공포를 모르는 제국의 병력이 루스펠하임에 들이닥치고, 그 선두 혹은 뒤쪽에서 하늘과 땅을 뒤집는 대마법을 연달아 시전하는 황제의 모습을.
그 사이에 오러마스터인 제물을 몰래 빼내 올 수 있을까?
“……답이 없군.”
절로 탄식이 새어 나올 만큼 막막한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 로건 맥라인을 빼낸다.’
그렇게 마음을 굳힌 노인은 남아 있는 장로 넷과 함께 은밀히 루스펠하임으로 향했다.
* * * 결전의 당일.
노인은 신인의 감각에 걸리지 않도록 멀찍이 떨어져서 전쟁이 심화되기만을 기다렸다.
‘오러마스터인 만큼 그렇게 쉽게 당하지는 않을 거야. 그 틈을 노린다.’
로건 맥라인의, 제물의 목숨만 붙어 있으면 된다.
노인은 날카로운 눈으로 전장을 주시했다.
그러다 전장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가장 긴장하고 있지 않을까 싶어 헛웃음이 나올 때.
그는 짐작과는 전혀 다르게 진행되는 전쟁을 보며 일순간 넋을 놓고 말았다.
황제가 무려 9클래스급의 마법을 시전해 냈다.
거기다 갑자기 존재감이 커진 로건 맥라인은 그 마법을 무효화한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들의 세뇌 마법을 역으로 이용하기까지 했다.
그러다 종국에는 또 하나의 9클래스 마법이 제국군을 타격했고, 이내 황제가 본격적으로 나선 성벽에서는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황금빛이 하늘과 땅을 반으로 갈라 버릴 기세로 솟구쳤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그 여파로 생겨난 폭풍은 앞선 과정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었다.
“이, 이게…….”
이미 끼어들 타이밍을 노리긴 어려운 상황이었다.
자신들의 마법이 역으로 이용되고 로건 맥라인이 신인의 경지에 오른 듯한 퍼포먼스를 보여 준 데다가 예상과는 너무나도 다른 결과까지.
전장의 모든 장면이 노인의 상식을 뒤엎고 있었다.
“타, 탑주님. 저게 가, 가능한 겁니까?”
“흘. 흐흐…….”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일까.
순간 머릿속이 멍해지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다만 그런 와중에도, 미묘한 감각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가 차원과 영혼의 속성을 다루는 대마도사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장의 중심지에서부터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까지, 찰나의 순간 공간이 연결되었다는 걸 감지해 낸 것이다.
‘황제…….’
그 순간, 노인의 머릿속에 다른 선택지가 떠올랐다.
– 고귀한 핏줄에는 수많은 업(業)이 쌓인다. 핏줄에 쌓인 업은 그 자체로 신위에 닿을 계단이 되니. 후인은 고귀한 핏줄을 신체(神體)로 예비하여 쌓아 올린 영육의 단 끝에 올려라. 그리하면……
다시금 생각난 예언에서 비롯된 또 하나의 가능성.
고귀한 핏줄의 정점.
황실의 직계, 바로스를 이미 신체(神體)로 예정해 두었지만, 그것이 어찌 신인의 문턱을 두드리는 황제의 몸만 할까.
‘그 정도의 신체라면 로건 맥라인을 제물로 쓰지 않더라도 그분이 강림하실지도 몰라.’
자연스레 그런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물론 신인을 사로잡아 세뇌한다는 것은 지금 그의, 카셀 마탑의 전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상황이 절묘했다.
황제는 온전한 9클래스라고 하기에는 큰 허점을 보였다. 게다가 황제가 마지막 격돌에서 큰 상처를 입었다는 것 또한 확실했다.
무엇보다.
‘지금 우리의 전력으로 로건 맥라인을 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뜩이나 극상성의 힘을 지닌, 그리고 이제는 반쯤 신인의 경지에 도달한 오러마스터를 사로잡아 제물로 삼는다?
그것은 절대 불가능할 듯했다.
물론, 포기할 수도 없었다.
‘신들이 떠나는 시기의 징조, 운명을 바꾸는 자의 출현, 이 혼돈의 시기까지.’
그 운명을 바꾸는 자가 하필이면 대륙 최강의 오러마스터라는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예언과 맞아떨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이상의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아.”
“예?”
“……따라와라. 황제를 잡는다.”
“예!?”
“타, 탑주님? 무슨 말씀을……!”
“아, 안 됩니다!”
“무립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장로들이 일제히 반대의 목소리를 토해 냈다.
평상시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 모두가 탑주의 명에 절대복종하도록 세뇌된 이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전장에서 보여 준 황제의 퍼포먼스는 그 세뇌를 깨트릴 정도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지. 그저 진심으로 충언이라 생각하는 거다.’
전장에서 한참 떨어진 인식 장애의 결계 안에서 6클래스의 마도사들이 벌벌 떨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
그 모습에서 조금 전 자신의 모습이 비쳐 보이는 듯해 탑주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강행한다. 따르라.”
“……예.”
무거운 표정의 노인, 그 뒤를 더욱 무거운 분위기의 검은 로브들이 유령처럼 따랐다.
그리고 놀랍게도, 탑주의 그 모험은 애초의 각오보다도 훨씬 성공적이었다.
“지브릭이시여! 역시 그분께서 우리를 돌보고 계신다! 으하하하하!”
루스펠하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숲속에서, 탑주는 크게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피를 토한 채 의식을 잃고 쓰러진 황제를 발견한 것이다.
그것도 막막할 정도로 거대하게만 느껴지던 영혼의 격이, 더 이상 신인의 수준이라 할 수 없을 만큼 한층 격하된 상태로.
어찌 된 영문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보였다.
듬성듬성 구멍이 난 거대한 영혼.
‘영혼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아마도 그 상처 때문에 격이 한 단계 낮아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8클래스급, 거기다 제국의 황제다.
신체(神體)로서 이보다 적합한 육신은 존재하지 않을 듯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정도 영혼의 상처라면 깨어날 수 있을 리가! 푸하하하하!”
굳이 세뇌할 필요도 없는 완벽한 신체가 나타났으니 어찌 웃지 않을 수가 있을까.
“황제를 데리고 그곳으로 간다. 그리고 의식의 규모를 키운다.”
“예?”
“하, 하지만 운명을 바꾸는 자는 어떻게?”
“놈을 유인할 방법은 생각해 둔 것이 있다.”
생포가 아닌 유인.
보다 확실한 신체가 마련되었으니, 의식이 이루어지는 순간 로건 맥라인이 거기에 있기만 하면 될 것이다.
‘희생자의 규모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다. 엄청난 에너지가 ‘제단’에 모였을 테니, 오러마스터라 해도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쓰러진 황제를 보는 순간 이미 탑주의 머릿속에 계산이 선 것이다.
“이 모든 게 그분께서 우리를 지켜보신다는 증거다.”
영혼이 환희에 차오르며 자연스레 목소리가 떨렸다.
“……예?”
부하가 이해를 하든 말든, 탑주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역대 마탑주들이 고귀한 핏줄의 정점이라고 생각한 황실, 그중에서도 최고인 황제. 심지어 고대에서도 대마도사의 기준이 되었던 8클래스의 존재까지 손에 넣었으니까.
본래대로라면 절대 불가능했을 황제를, 그것도 역대 전승의 힘을 훨씬 넘어선 초인을 신체(神體)로 쓸 수 있게 되다니.
“그분께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진심으로 환호하는 탑주의 목소리가 고요한 숲속에 오랫동안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