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468)
468화
“이동?”
“예, 장로님. 이곳은 적들이 추적할 것을 대비한 함정일 뿐입니다.”
히죽 웃는 난쟁이, 반조니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여기가 아니라고? 그런데 탑주는 왜…….’
루이사는 입술이 바짝 마르는 듯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도 의심스러웠지만, 장로인 자신도 탑주의 허락 없이는 못 나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턴 이곳이 ‘의식’의 장소라고 아예 확신하고 있었다.
도착한 장소는 대륙 북부의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산맥에 자리한 커다란 동굴. 내부에는 수백 명도 거뜬히 묵을 숙소까지 지어져 있었다.
누가 봐도 의심스러운 상황이니, 동굴에 들어서기 직전 로니안에게 몰래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큰일인데.’
만약 맥라인에서 여기로 누군가를 파견한다면.
그래서 그들이 함정에 걸려들기라도 한다면, 이곳을 카셀 마탑의 마지막 피신처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맥라인에게도 적으로 찍혀 버릴 것이다.
당장 동굴 근처에 남겨 둔 ‘암호’를 지우고 싶었지만, 다시 나가기는커녕 불안한 티도 낼 수가 없었다.
“……알겠다. 그럼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지?”
“도착하시면 알게 될 겁니다. 그때까지 편히 쉬시길.”
“탑주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내가 가장 높은 지위일 텐데? 나는 알아야 하지 않겠나.”
“아, 장로님.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군요. 죄송하지만, 이 일의 최종 책임자는 장로님이 아니라…… 접니다.”
반 조니가 의미심장하게 웃자, 그 얼굴의 절반을 차지한 보랏빛 점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네놈이 오러유저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카셀 마탑은 그분의 뜻을 따르는 마도사들만을 지휘자로 인정한다. 너는…….”
“그 정점인 탑주께서 직접 명령하신 겁니다. 설마, 그 뜻을 거역하시겠다는 겁니까?”
놈의 미소에 등골이 서늘해지며 불안감이 엄습했다.
장로인 나를 두고 이놈을?
‘뭔가 알게 된 건가? 세뇌가 깨질 때 신호라도?’
순간적으로 최악의 상황이 떠올랐지만, 이내 이성이 그 가능성을 부인했다.
카셀 마탑은 배신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탑주가 알았다면 이놈이 먼저 암습이라도 했을 거야.’
아무리 자신이 마도사라 해도 지근거리에서 오러유저에게 암습을 당한다면 결코 당해 낼 수 없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불안하던 마음이 좀 진정되는 듯했다.
물론 차분하게 생각할 이성이 돌아왔을 뿐, 상황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위기감이 한층 강해지기만 했다.
“그럼 납득하신 걸로 알겠습니다. 출발은 바로 내일 아침입니다. 쉬십시오.”
반 조니가 돌아서고 나서도 루이사는 쉽게 잠이 들 수가 없었다.
‘왜……?’
탑주는 자신이 아니라 저 난쟁이를 이번 일의 리더로 삼았을까.
‘내 세뇌가 깨진 것을 알았다면 바로 죽이라 했을 거야. 배반자로 의심된다 해도 마찬가지일 테고.’
그건 확실했다.
그렇다면 이 길 너머에는…….
‘내가 알면 안 되는 일이 숨겨져 있겠군.’
게다가 살아남은 다른 장로들은 전부 전장으로 향하고, 자신만 여기로 왔다.
그 말인즉.
‘그러면서도 내가 필요한 일일 테고.’
거기에 해당하는 것이 뭐가 있을까.
고민을 이어 가도 좀처럼 답이 떠오르지 않던 그때.
똑똑.
– 루이사, 얘기 좀 하자꾸나.
문밖에서 아버지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동한다는 거 들었느냐?”
“예, 저도 몰랐어요.”
“다음 목적지는 정말 그 의식을 하는 곳일까?”
“……무슨 뜻으로 하는 말씀이시죠?”
“아무리 탑주가 제국 편을 들기로 했고, 네가 맥라인과 연이 있다고 한들, 그가 필요한 전력을 전장에서 배제할 사람이더냐?”
“……아니죠.”
그제야 그녀는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달았다.
“탑주가 저를 제거하려 한다는 건가요? 그랬다면 진작 손을 썼겠죠.”
“그래, 그랬겠지. 한데 다른 속셈은 없는 것 같더냐? 예를 들면 사방왕부의 핏줄이 필요한 일이라든가. 너는 장로이니 알 만한 정보가 있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음? 그게 무슨……?”
“조금 전에 이 안가로 들어온 인물들이 있었다. 그중 몇몇이 소란을 피웠는데, 얼굴을 보니 내가 아는 이들이더구나. 서아왕부의 둘째 에리나와 남조왕부의 적자 그랜던이었지.”
“……예?”
“사방왕부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탑주의 손길이 닿았다는 건 딱히 이상하지 않아. 하지만 왜 하필 그 아이들이 여기 있는 거지? 무력도 별로인 데다가, 내가 보기에는 카셀 마탑의 마법을 익힌 것 같지도 않더구나.”
그 말에 루이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왕족들을 모아서 뭘 하려고?’
이 중요한 시기.
마도사인 자신을 전력으로 차출하지 않을 정도라면, 분명 의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제물.”
스스로 뱉어 낸 말에 놀란 루이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다음 날.
반조니가 말한 이동은 그 경로부터 상당히 의외였다.
“동굴 안으로?”
“산맥 반대편으로 연결된 동굴입니다. 설마 다시 밖으로 나갈 줄 아셨습니까?”
반조니의 목소리엔 비웃음이 섞여 있는 듯했지만 루이사는 반응하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카셀 마탑의 정예들은 대다수가 마검사.
그리고 그 수장이 눈앞에 있는 반조니였다.
‘함정이지만, 실제로 이어지는 길이기도 하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로니안에게 남긴 정보도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행이야.’
– 몸조심해요.
마지막 통신에서 들었던 마지막 인사.
자신보다 한참 어린 청년의 목소리를 떠올린 루이사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고는 그런 스스로에게 놀라 눈을 부릅떴다.
‘……한심한 생각을.’
백척간두에서 생명을 걸고 모험을 해야 하는 시기에 남자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남자?
“푸흡.”
순간 어처구니가 없어 심각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앞서 걷던 난쟁이가 돌아보며 인상을 썼다.
“제가 등 뒤에서 웃는 소리를 아주 싫어합니다, 장로님. 주의해 주십시오.”
분노로 이글거리는 갈색 눈에는 언뜻 살기까지 보였다.
말만 존대지 당장 칼부림이라도 날 것 같은 기세다. 실제로도 등에 메고 있는 제 몸만 한 검을 뽑아 들고 싶은 듯 손이 움찔거리고 있었다.
‘그래, 이놈이 정상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장로인 자신에게 대놓고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다. 그건 앞으로 벌어질 일이 결코 제게 좋은 방향은 아닐 것임을 확인시켜 주는 짓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너한테는 관심 없으니 신경 꺼, 난쟁이.”
까득.
이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반 조니의 몸에서 살기가 솟구쳤다. 일부러 선택한 자극적인 단어가 콤플렉스를 제대로 건드린 모양이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기세로 살기를 줄기줄기 뿜어내던 반 조니가 이내 깊은숨을 내쉬었다.
“후우……. 당신이 탑의 장로가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서 피를 봤을 것입니다. 탑주님께 감사하십시오.”
내뱉는 말은 대놓고 시비조였지만, 놈은 살벌한 눈을 거두고 다시 뒤로 돌아섰다.
“우리가 선발대입니다. 출발할 테니 조용히 따라오십시오.”
그리고 영혼과 차원의 속성을 다루는 마도사인 루이사에겐 그 모습이 굉장히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미친놈이 미친 짓을 하지 않고 명령에 따른다라…….’
감각을 한층 끌어올리자, 흥분한 놈의 기세 속에서 이제는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교묘한 마법의 흔적이 느껴졌다.
‘역시 세뇌…….’
세뇌가 걸려 있다면, 당장 자신을 해칠 생각은 없다는 뜻이다.
그 사실을 확인한 루이사는 무거운 눈빛으로 반 조니의 뒤를 따랐다.
‘진짜 의식을 치르는 장소. 그것을 확인하면…….’
등 뒤의 마검사들이 흉흉한 시선을 던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커다란 동굴은 갈수록 좁아졌다.
게다가 자연적인 것인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는 몰라도, 거의 백여 미터 간격으로 길이 두 갈래 혹은 세 갈래로 나뉘었다.
그리고 반 조니는 단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오른쪽 첫 번째.’
루이사는 갈림길마다 로니안과 약속한 표식을 마법으로 남겼다.
그 교묘한 마력의 흔적은 그 파동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고, 그조차도 일행이 모두 지나가고 한 시간은 지나야 나타날 것이었다.
문제라면…….
‘함정이란 걸 깨달은 뒤에도 내 표식을 믿어 줘야 할 텐데.’
걱정스러운 마음에 자꾸만 걸음이 느려졌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였다.
사실 걱정거리야 맥라인과 제국의 전쟁부터 시작해서 차고도 넘쳤으니, 지금으로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옳았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루이사는 이후 반나절이 넘도록 불안한 마음을 내려놓지 못했다.
몇 되지 않은 횃불의 빛에 의지해 끝이 안 보이는 어둠 속을 걸어가는 것은 기사급 체력을 갖춘 마도사에게도 심리적으로 버거운 일이었다.
거기다 심각한 고민까지 있다면 더욱이.
하지만 눈앞에 보이기 시작한 빛과 거기서 느껴지는 거대한 에너지는 루이사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건…….”
“여기가 바로 우리의 대업이 이뤄질 장소입니다. 어떠십니까?”
자랑스레 외치며 두 팔을 쫙 벌린 반 조니의 뒤로, 그야말로 광활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널찍한 광장이 보였다.
그 바닥에는 루이사의 지식으로도 알아볼 수 없는 고대의 언어가 빼곡하게 적힌 마법진이 은은한 회색빛을 뿜어내고 있었는데, 광장 전체를 환히 밝힐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우우우웅.
“……놀라워.”
자신이 처한 상황을 떠나, 마도사로서는 감탄할 수밖에 없는 규모와 에너지를 다루는 마법진이었다.
루이사의 시선이 홀린 듯 그 마법진 곳곳을 훑어보고 있을 때.
먼 곳에서 그 몰입을 깨트리는 소음이 들려왔다.
우르르르르르릉!
그들이 지나온 길 너머에서 전해져 오는, 마치 지진과 같은 진동과 굉음.
동굴 안에 있는 그들로서는 가장 경계해야 할 소음이었기에 자연히 모두의 고개가 돌아갔다.
“이건……!?”
“허? 침입자가 있어?!”
“뭐!?”
반 조니의 말에 루이사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이렇게 빨리?
맥라인은 아직 제국과 전쟁 중일 텐데?
“뒤쪽에서 따라오던 사람들은?! 아버지가……!”
여러모로 마음이 조급해진 그녀와 달리, 반조니는 금방 냉정을 되찾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호오, 듣던 것보다 사이가 좋으셨나 봅니다? 뭐 괜찮을 겁니다. 아마 저택이 무너진 것일 텐데, 지금쯤이면 후발대도 거리를 꽤 벌렸을 테니까요. 웬 놈들인진 모르지만, 스스로 무덤을 판 거나 다름없습니다.”
오러유저의 신체 능력을 마도사가 의심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아직은 서로 이용 가치가 남아 있으니 믿어도 될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도 태연한 반조니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침입자가 있는데 최소한의 대비는 해야 하지 않겠나? 누군지도 모르는데?”
“괜찮습니다. 이번 함정에서 살아남았다 한들 미로에서 헤매다 죽을 테니까요. 탑주께서 초인이 아니고서야 미로에 걸린 환상 마법을 뚫지 못할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이제 대륙에 남아 있는 초인급의 사람들은 죄다 루스펠하임에 있지요.”
“……하지만 우리도 나가는 길이 막힌 것인데?”
“그 또한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곳에 구비된 물자가 충분하니까요. 설마 마도사씩이나 되시는 분이 햇빛 좀 못 본다고 컨디션에 문제가 생기진 않으시겠죠?”
“……그거야 물론이지.”
“그럼 차분히 탑주님을 기다리시며 의식을 준비하시면 되겠습니다. 아, 숙소는 마련되어 있습니다.”
“준비? 난 따로 지시받은 바가 없는데?”
“평소대로 수행하며 마력을 정갈히 하시면 될 겁니다. 모든 것은 그분께서 주관하시니.”
이 흐릿한 웃음의 의미는 뭘까.
줄곧 마음에 걸렸던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린 루이사의 표정이 절로 굳어졌다.
그런데 그 순간.
콰아아아앙!
또다시 동굴을 요란하게 울리는 소음이 전해졌다. 조금 전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서 난 소리라는 것을 루이사도 알 수 있었다.
내내 침착하던 반 조니의 얼굴에도 경계심이 떠올랐다.
“……벌써?”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루이사가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