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47)
47화 ‘나는 어디? 여긴 누구?’
아득한 양의 서류 더미.
시야를 가리는 거대한 종이의 향연은 어떤 저주보다 더 로건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쿵.
내려찍는 직인은 기계적이었고, 눈은 허공의 어딘지 모를 지점을 흐릿하게 훑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제대로 확인은 하고 도장을 찍고 계신 겁니까? 어, 그 서류는 내성 수리 관련한 건데? 그건 의논도 안 했잖습니까! 공자님! 자꾸 이렇게 대충 일하실 겁니까?!”
악마는 계속해서 그를 쥐어짤 뿐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일하시는 건 본 적이 없는데?”
로건이 뒤늦게나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괴리감에 대해 항의했다.
“당연하죠. 대부분은 제 선에서 처리하니까요.”
“……뭐?”
악마의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로건의 붉은 눈에서 불길이 쏟아졌다.
“그런데 왜 나한테는 이걸 다 들이밀어!”
“후계자가 되실 분이니 이제 영지 사정을 속속들이 알아야죠!”
“나 후계자 아니야!”
“에이, 그걸 누가 인정합니까!”
오히려 버럭 소리를 지르는 드웨인의 모습에 로건은 정신이 멍해졌다.
‘아, 그런가? 후계자로 인정받는 게 아니라 후계자가 아니라는 걸 인정받아야 하나?’
순간적으로 상식에 혼동이 오는데, 드웨인은 정신을 차릴 틈을 주지 않았다.
“아직 전후처리가 끝나지 않아서 양이 많은 것도 있습니다. 테스론 성 것도 일부 있구요. 거기 관리 놈들 중 하만 테스론이랑 같이 한탕씩 해 먹은 놈들이 워낙 많아 싹 정리해 버리는 바람에…….”
투덜투덜 이어지는 드웨인의 불평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지려 하는데.
“안 그래도 행정관이 부족해서 쥐어짜이고 있는데, 그나마 로건 님이 좀 봐주셔서 저희가 살 것 같습니다.”
며칠간 반복된 익숙한 전개, 한계까지 밀어붙인 후에 나오는 달콤한 칭찬이 들려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드웨인의 작전이 통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죽을 것 같은데?”
“그럼 나중에 영주 되시면 행정관 좀 더 뽑아 주십시오. 아니다, 지금 더 뽑아 주셔도 되고요. 하하.”
“끄으응.”
“로건 님의 그 공사 때문에 서류가 많아진 겁니다. 워낙 대규모여야죠. 전후 처리도 채 안 끝났는데 말이지요…….”
음흉하게 웃는 드웨인의 속셈이 다 읽혔다.
댐 공사 건을 들먹이면 내가 더 이상 어쩌지 못한다는 것을 완벽하게 파악한 것이다.
“그래. 한다, 해. 이번 것까지만 처리하면 공사 건도 끝이지?!”
이게 끝이 아니라면 너를 끝내 버리겠다.
살기까지 담긴 위협 어린 어조에 드웨인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최고 행정관의 악의가 담긴 영주 대행 업무가 끝나고.
로건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선산을 올라 저물어 가는 석양을 배경 삼아 검을 들었다.
‘공사가 끝나면 병사를 모집하고…….’
머릿속에는 여전히 가문의 전력을 증대시킬 방법에 관한 생각이 가득했지만, 검을 휘두르는 순간만큼은 온전히 집중하려고 애썼다.
‘가문만이 아니라 나도 강해져야 한다.’
전생에 보았던 압도적인 강자들을 상대할 힘이 필요했다.
그들을 상대할 만한 인재를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한 방편이지만, 그것은 쉽지 않았다.
녹스에 맡긴 의뢰도 아직 단 한 건의 정보조차 올라오지 않았다.
‘내가 강해져야 해. 비전의 힘이면…….’
이뤄질 것 같지 않은 막연한 기대를 품고 검을 휘둘렀지만, 다행히 정신을 조금씩 집중할수록 검에 힘이 붙고 몸놀림도 정교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포스코어로 증폭된 감각은 자신의 미세한 변화조차도 자각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났으니까.
로건에게 수련은 막연한 기대가 조금씩 희망이 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그랬기에 육체의 능력을 최대한 쥐어짜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수련이 오히려 정신적으로는 휴식처럼 느껴졌다.
물론 이제는 잠을 완벽히 대신하고 있는 명상 수련을 통해 쌓인 피로를 완전히 풀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로건의 일상은 바쁘게 흘러갔다.
처리해야 할 서류가 조금씩 줄어들면서 대행 업무 시간보다 수련 시간이 더 길어졌을 즈음, 로건에게 좋지 않은 소식 하나가 날아들었다.
* * *
“사고?!”
업무 시간 중 갑자기 전해진 소식은 그를 벌떡 일어서게 하기에 충분했다.
“예. 광산의 갱도 중 하나가 무너졌다고…….”
“으음. 어쩐지 다 잘 풀린다 했다.”
“그런데 우리 영지에 언제 광산이…….”
“근데 왜? 왜 무너졌대? 얼마나 큰 사고야? 하마르는 뭐 하고?”
붕괴 스크롤을 사용하긴 했지만, 그 역시 철저히 하마르의 감독하에 필요한 만큼만 이용되었다.
광산 개발의 목표를 무엇보다 안정성에 두고 드워프가 감독했는데 사고라니?
“그게…… 하마르가 있는 곳이 무너졌답니다. 그런데 공자님, 듣긴 들었는데 대체 무슨 광산이…….”
“하마르가?! 그걸 먼저 말했어야지!”
쾅!
로건은 바람처럼 집무실을 박차고 나섰다.
인부들뿐만이 아니라 귀중한 재원인 하마르까지 갇혔다.
그렇다면 넋 놓고 뒤에서 지시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혹시 죽기라도 하면 안 돼!’
하마르가 빠진다면 그가 그린 큰 계획의 톱니바퀴가 어그러졌다.
이 중요한 시기에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드워프가 광산 작업을 하다 갱도를 무너트리다니. 무슨 그런 웃기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달래며 로건은 빠르게 말을 달렸다.
한편 집무실에 홀로 남겨진 재무담당 행정관은 존재조차 몰랐던 광산의 사고 소식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도대체 무슨 광산이냐고!!”
* * * 두두두두.
급한 마음에 채찍질에 포스의 힘까지 더해지자 영주의 애마인 거대한 흑마, 파이어런은 두 시간 거리를 불과 반 시간 만에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 대가로 입에 거품까지 보였지만, 로건은 뒤도 보지 않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돌진했다.
히이이잉!
“다 비켜!”
“공자님이다!”
“다 물러서!”
로건을 발견한 인부들 역시 빠르게 길을 터 주었다.
“무너진 갱도가 어디야?”
“들어가시면 세 갈래 길 중 가운데입니다. 가장 깊게…….”
로건은 대답을 다 듣지도 않고 빠르게 내달렸다.
갱도를 밝히는 희미한 등불들을 순식간에 지나치며 광부가 말한 세 갈래 길 중 가운데로 접어들자, 사고 때문인지 미약한 등불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황금빛을 뿌리는 눈동자는 그대로 어둠을 꿰뚫어 보았고, 로건은 아무런 지장도 없이 어둠 속을 내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진 돌덩이 앞에서 등불을 든 광부들이 암벽을 두드리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쉿, 공간이 울리면 갱도가 또 무너질 수 있습니다.”
테스론 성에서 구해 냈던 광산 전문가 중 한 사람, 페일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그의 경고에 로건이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저희야 잘 모릅니다. 보통 때처럼 하마르 님이 갱도 아래로 내려가셨는데…….”
“표정이 좀 안 좋긴 하셨습니다. 근래에 좀 과로를 하셨거든요.”
“스크롤 사용할 때 실수하신 것 아닐까요?”
5서클 대지의 마법사보다 지반 상태를 잘 읽는 하마르가 실수를 했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지만, 눈앞에 쌓여 있는 갱도를 가득 메운 암석 더미는 분명 현실이었다.
“그래서 지금 상태는 어떤데? 얼마나 무너진 거야?”
“대략 50m가 넘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 마법 스크롤이 지지대들까지 무너트린 것 같은데, 다행히 연쇄 작용은 멈췄지만 다른 지지대도 점검해야 합니다. 이대로라면 구조 작업만 며칠은…….”
’50m라고?’
뒷말은 잘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 정도 거리면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비켜 봐.”
“예? 혹시 지금 스크롤을 쓰실 거라면…….”
“나 바보 아니야. 비켜.”
나직한 목소리에 담긴 기세에 페일이 침을 삼키며 뒤로 물러섰다.
그 자리에 선 로건은 암벽에 손을 대고 정신을 집중했다.
미약한 포스가 솟아올라 암벽 더미 사이를 파고들었다.
로건은 최대한으로 증폭된 감각을 더욱 곤두세워 익숙한 기운을 찾아 포스의 실을 뻗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짧지만 한없이 길게 느껴지는 시간 끝에, 로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너진 암벽 더미의 깊숙한 안쪽에서 하마르의 기운을 확실히 느낀 것이다.
하마르와 비슷한 온기를 가진 인부들 십여 명의 기척까지도.
“아직 다 살아 있어.”
로건은 일단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는 생각에 한숨을 돌렸다.
“다만 다친 사람이 많군. 하마르까지. 기절한데다가 출혈도 있는 것 같고. 젠장.”
“예? 공자님?”
“어, 어떻게 그런 걸…….”
“알 거 없고. 이거 치우고 하마르 꺼내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적어도 일주일, 아니 삼 일은 걸립니다. 그것도 모든 것이 잘 풀린다고 가정했을 때입니다. 하마르 님도 없는데 그 이상은 무립니다.”
로건이 시선을 돌리자 광부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로건은 뿌드득 이를 갈았다.
하마르가 아무리 강인한 드워프라지만 삼 일 이상 피를 흘리고 암석 더미에 깔린 채로는 무사할 것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공기는 통하는지, 숨을 쉴 수 있을지…….’
시간을 오래 끌 경우, 하마르나 인부들의 생존을 장담할 수가 없었다.
‘어쩌지…….’
하마르를 확실하게 구할 수 있을 방법은 이미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누구보다 적합한 인력이 지금 가문에 있었으니까 ‘대지의 마법사…….’
하지만 심중에 격렬한 갈등이 일었다.
‘마법사들을 동원했다가 비밀이 새어 나가면?’
아직은 광산의 존재가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 되었다.
단지 단기 고용자들일 뿐인 마법사들을 믿을 수 있을까?
차라리 자신이나 기사들을 동원해 광부들의 지시를 받아 작업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혔지만, 섣부른 짓을 하다가 2차 붕괴라도 일어나면 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대지의 마법사들을 동원하는 것보다 확실한 방법은 없었다.
‘어쨌건 하마르는 어떻게든 구해야 해.’
게다가 당장은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지금 시점에 하마르를 대신할 인재는 없었다.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하는 수밖에.’
그리고 이런저런 합리적인 이유들을 떠나서.
전생의 경험이 가르쳐 준 교훈이 그의 머릿속에 새겨져 있었다.
– 내 사람인 이조차 지키지 않는다면, 주변에 아무도 남지 않는다.
“그래. 그렇지…….”
머릿속을 복잡하게 흔들던 갈등은 빠르게 지워졌다.
로건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빠르게 갱도를 나섰다.
* * *
“대공자님이시다!”
“대공자님!”
두두두두.
말을 타고 지나가는 순간에도 여기저기서 인부들이 인사했지만, 지금은 그 인사를 받아 줄 시간이 없었다.
“오, 로건 님. 오랜만…….”
“클레이튼 님! 잠시 저와 따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반가운 인사조차 끊어 버린 다급한 요청에, 클레이튼은 굳은 표정으로 잠시 공사 현장을 비울 수밖에 없었다.
“광산……이라는 말입니까? 더구나 사고?”
로건의 간략한 이야기를 들은 클레이튼은 크게 놀라며 흔들리는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설명만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렇습니다. 클레이튼 님, 부디 하마르와 인부들을 구해 주십시오! 그 대가는 확실하게 챙겨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드워프 양반이 바쁘던 게 여기랑 그곳을 왔다 갔다 하기 때문이었구려. 어쩐지. 허허, 알겠소이다. 사람들이 위급하다는데 가서 도와야지요.”
“감사합니다. 이 대가는 반드시…….”
클레이튼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고개를 숙인 로건을 보았다.
‘광산이라…….’
어쩐지 붕괴 스크롤을 전혀 안 쓰는 것이 이상하다 싶었다.
무언가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광산 개발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여태 비밀로 할 정도면 평범한 구리 광산 같은 것은 아닐 텐데.’
아니, 구리 광산이라 할지라도 노예 하나와 인부들 몇 명을 구하기 위해 숨겼던 비밀을 밝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도 고용한 마법사에 불과한 자신에게 따로 대가를 치르겠다는 약속까지 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역시 일반적인 귀족은 아니라는 거겠지.’
능력이 있는 젊은이라는 것은 이미 영지에 동행해 올 때부터 알고 있었다.
거기다 부역의 의무가 있는 영지민을 강제로 동원하지도 않고, 식량이라는 대가를 줘 가면서 노동을 시키는 넓은 마음은 그도 감탄할 정도였다.
거기다 이번 사건에서 보여 주는 행동까지.
‘훌륭해!’
최근에 그가 만난 가장 훌륭한 젊은이였다.
‘이런 젊은이가 돈도 많아. 이번 공사가 실패하더라도 이 영지는 계속 발전하겠군.’
이런 젊은이를 볼 때마다 흐뭇한 마음이 드는 것이 가끔은 자신이 늙어 가는 증거가 아닌가 싶었지만,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릭! 애들을 불러라. 전부 나와 함께 간다.”
클레이튼의 대처는 재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