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475)
475화성도 노비엔스의 중심지인 중앙 신전.
그 안에서 허드렛일을 담당하던 노사제, 드골은 평소처럼 신전을 청소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물론 그가 섬기는 불과 음식의 신, 아니마께 드리는 기도는 빼먹지 않았다.
한데 그날따라 기도 후에 유난히 기분이 좋은 것이, 무언가 특별한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밤 그는 정말 기묘한 꿈을 꾸었다.
붉은 피부, 타오르는 불꽃의 기세를 가진 거대한 덩치의 거인이 그를 향해 손을 뻗는 꿈을.
그 모습은 마치 이제는 남부 산맥에서나 볼 수 있다는 몬스터 종족, 오크를 크게 확대한 것 같았다.
아무리 꿈속이라고 해도 무서울 법한 상황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 배교자가 수작을 부렸구나. 어쩔 수 없다. 너로 해야겠다. 손해를 좀 더 보더라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영혼을 울리는데도 왠지 모를 감격에 눈물이 흘러내릴 뿐이었다.
그 거인이 바로 자신이 모시던 신, 아니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상상하던 것과는 전혀 달라 보이는 신의 모습도, 감격에 벅찬 나머지 이상하게 느낄 겨를이 없었다.
– 나를 받아들이겠느냐?
신의 음성이 다시 울림과 동시에 작은 홀 모양의 붉은 성물, 플람마(Flamma)가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어찌 거부할 수 있을까.
꿈속에서나마 신을 영접한 드골은 목이 부러질 듯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자신이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 신이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이내, 성물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마침내 드골이 성물을 손에 쥔 순간.
– 끄아아아아악!
그는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던 최악의 고통과 함께 자신의 존재를 잃었다.
잠시 후.
– 파장이 생각보다 더 낮군. 쯧.
드골은 기괴한 목소리와 함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 육체도 너무 나약하구나. 하여간 인간이란…….
우드드드득.
요란한 소리와 함께 골격이 재구성되고, 어디선가 뿜어져 나온 붉은 기운이 그의 온몸을 휩쓰는 순간.
노쇠한 드골의 모습 대신 2m에 가까운 근육질 거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갈색 머리에 번들거리는 붉은 피부.
이전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자신의 몸을 슬쩍 내려다보던 드골, 아니 아니마의 화신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동안 허공을 응시했다.
“……아드가가 가장 먼저 강림한 것 같은데, 왜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지? 이상하군.”
건장한 청년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그에 대답하듯 멀리서 누군가의 영파가 전해졌다.
[아니마, 신전에 강림했는가.]“그렇다, 아이온. 계획대로 성국을 움직인 후 합류하겠다.”
[기다리겠다.]한발 먼저 강림한 동료와의 통신을 끝낸 사도는, 그대로 숙소의 지붕을 박차고 도약해 신전의 상공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이내.
[들어라! 신의 뜻이 직접 이 땅에 강림하였으니, 신의 종들은 그 뜻을 받들지어다!]사람이라면, 특히나 사제라면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신성한 영파가 노비엔스의 하늘과 땅을 울렸다.
* * *
아니마의 목소리는 불안감에 선잠을 청하던 일리아의 뇌리에도 또렷이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전해지는 강렬한 느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이런……!”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사태.
유력한 사도 후보 둘을 거의 감금해 놓았음에도 신전의 다른 곳에서 사도가 강림했다.
‘세상에 많고 많은 신전과 사제 중에서 하필…….’
절로 탄식이 나왔지만, 한편으로는 이미 각오했던 일이기도 했다.
‘이제 와 도망칠 수도 없다.’
일리아는 결심한 듯 입술을 질끈 깨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평소에도 습관처럼 법복을 입고 생활했던지라 옷을 갈아입을 필요도 없었다.
‘이게 내 최후인가.’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중앙 신전이 사도에게 먹히는 것만은 막겠다는 의지가 타오를 뿐.
애초에 신과 대적하며 온전히 살아남을 것이라 기대하는 게 더 우스웠다.
‘더 돕지 못해 죄송합니다, 로건 폐하. 부디 내 몫까지 힘내 주세요, 하먼 경.’
다만, 아직 이루지 못한 일들이 조금 아쉬울 뿐이었다.
아쉬움과 미안함이 묻어나던 그녀의 얼굴에 이내 한 줄기 슬픔이 어렸다.
‘……미안해요, 빅토르 경.’
맑게 웃는 청년의 얼굴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우리, 다시 만나진 못하겠군요.’
자신도 모르는 새에 가슴속에 새겨진 지극한 슬픔을 깨닫고 스스로 놀라던 순간.
– 성하! 사도께서 강림하셨습니다. 아니마 님의 사제분들이 전부 증언하고 계십니다!
교황이라면 응당 감격했어야 할 말, 하지만 그녀에겐 사형 선고와도 같은 말이 들려왔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일리아는 어느새 흘러내린 눈물을 황급히 닦고는 애써 담담하게 대답했다.
“알겠다. 곧 나간다.”
– 예, 성하.
일리아는 도무지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천천히 자신의 방을 나섰다.
* * *
– 신의 이름으로 선포하니, 로건 맥라인은 신의 대적자다! 그를 척결하고 그가 이룬 모든 것을 지워라!
사도의 선포에서는 피 냄새가 물씬 풍기는 듯했다.
하지만 그에 두려움을 느끼기에 앞서, 강렬한 의문이 그 말을 들은 사제들을 사로잡았다.
자연히 모든 사제의 시선은 막 중앙 신전의 입구로 걸어 나오던 일리아에게 몰렸다. 로건 맥라인을 신이 내린 영웅이라 선포한 것이 바로 그녀, 교황이자 성녀인 일리아 가본이었으니까.
“성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사도께서 하시는 말씀과 성하의 명이 너무 상이합니다!”
“교황 성하!”
전설에 따르면 사도가 강림할 시 모든 사제가 그 뜻을 맹종하여 신의 뜻을 이룬다고 하였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사도의 음성을 듣고도 일리아의 의견을 묻는 사제들의 행동은 예외적인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아니마의 대사제이자 원래 사도 후보였던 오스틴 전 교황의 시선이 가장 뜨거웠다.
“성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혼란으로 물든 사제들의 모습에 일리아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모든 상황이 그녀의 높은 명망 때문일 테지만, 그런 것에 감동하기엔 상황이 너무 좋지 못했다.
‘……어차피 예정되어 있던 죽음이다. 조금 앞당겨졌을 뿐이야.’
이왕 이렇게 됐으니 숨겨 왔던 진실을 모두 밝히고 장렬히 산화하리라.
“사실은……!”
마음을 굳힌 일리아가 입을 연 순간, 상황이 그녀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너, 아문다의 배교자야. 얌전히 내 뜻을 따르라. 그리하면 용서받을지니.]“……!?”
그녀의 뇌리에만 울리는 사도의 목소리. 그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일리아의 눈이 부릅 뜨였다.
뭐……? 용서?
[너의 부덕은 성전의 결과물로 다시 평가하겠다. 그러니 내 뜻을 따르라. 내 뜻을 따른다면 네게도 구원의 길이 열릴 것이다.]개소리!
‘구원은 무슨, 영혼을 잡아먹기나 하겠지.’
자신도 모르게 신을 비웃던 일리아는 순간 화들짝 놀랐다.
로건 국왕이 마음을 읽는다는 말을 들었으니, 신도 가능할 터인데…….
그런데 사도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어찌하겠느냐. 배교자로 여기서 영혼까지 불타오를 테냐, 내 뜻을 따를 테냐.]‘뭐지? 분명 마음을 읽었을 텐데?’
관용을 베푼 것은 아닐 것이다. 신들의 불같은 성미는 이미 넌덜머리가 날 정도로 겪었으니까.
그렇다면…….
‘내 마음을 읽지 못한다? 신들은 불가능한가? ……그건 아니겠지. 설마, 내가 아문다의 영혼에 물들어서?’
일리아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따져 가며 머리를 굴린 끝에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어찌 되었건, 이것은 기회다.’
아문다의 감정은 읽었다. 신들은 이번 일로 무언가 큰 손해를 본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정말 시간에 쫓기는 걸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상황이라면 자신을 바로 처벌하지 않는 것도 설명이 된다. 교황이 또다시 바뀌는 순간, 성전이건 뭐건 시간은 확실하게 지연될 테니까.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일리아는 그 자리에서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구역질이 날 만큼 불쾌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참아야 했다.
“죄송합니다, 사도님. 제가 불민한 탓에 신의 뜻을 전하는데 오류가 있었습니다. 책임을 통감하며 성전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일리아는 속내를 애써 감춰가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모든 게 너희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멀리 보이는 사도의 표정에 언뜻 차가운 비웃음이 떠오르는 듯했지만, 그렇게 다짐하면서 이를 갈았다.
그런데 그 순간.
[좋다.]“윽!”
사도의 대답이 떨어짐과 동시에 손등이 타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타오르는 불꽃의 문양. 한때는 친근하기만 했던 그 문양이 더없이 기괴한 모습으로 그녀의 손등에 새겨져 있었다.
– 새 교황이 내 뜻을 따르니, 그에게 새로운 성표를 남긴다.
“우와아아!”
뒤이어 사도의 선포가 이어지자, 일리아를 지켜보던 사제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한 신의 성녀인 교황이 또 다른 신의 선택까지 받은 믿지 못할 상황.
그 전대미문의 순간을 목격했으니, 감격적이다 못해 눈물이 벅차오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일리아의 머릿속에만 울리는 목소리는 사제들이 기대한 것과 전혀 달랐다.
[내 뜻에 반할 경우, 영혼이 불타는 고통을 겪을 것이다.] [명심하라. 너는 죄인이니.] [오직 성전의 결과로 그 죄를 씻을 수 있을 뿐이다.]빌어먹을 신들.
일리아가 입술을 질끈 깨무는데.
– 들어라.
다시금 모두에게 들리는 사도의 목소리와 함께, 일리아에게 몰렸던 뜨거운 시선들이 다시 하늘로 향했다.
– 신을 따르는 모든 이에게 전하라. 로건 맥라인과 그가 이룬 모든 것을 파괴하라. 특히 버림받은 자들을 철저히 박멸하라. 그것이 9대신의 뜻이다!
사도는 그 말을 끝으로 이내 사라져 버렸고, 그로 인한 변화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 제국이 아닌 맥라인 정벌!
제국과 카셀 마탑을 정벌하기 위해 모인 성군단이 그 출병의 목적지를 바꾼 것이다.
다만, 사도가 너무 빨리 자리를 비운 것에 따른 부작용이 있었다.
“버림받은 자는 뭐야?”
“그, 있잖아. 신성력이 통하지 않는 이들.”
“그런 사람이 있어?”
“간혹 있었는데, 이번에 대륙 동부에서 갑자기 늘어났다더라고. 이제는 그 수가 꽤 많다던데…….”
“그럼 애들을 죽여야 한다는 거야?”
“……그렇……겠지?”
“……찜찜한데.”
“그래도 신의 말씀이니까.”
“그래도 난 좀…….”
그 과격한 메시지에 대한 반감이 제대로 수습되지 않은 것이다.
그 덕에 일리아가 성군단의 미흡한 점을 지적하며 출병 기간을 미루기 시작했을 때, 사제들의 반발은 생각보다 약했다.
“예? 또요?”
“식량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더군요. 준비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3일만 더 미루시지요.”
그 말을 하는 순간, 일리아는 자신의 영혼이 뜨거운 화염에 불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으윽, 빌어먹을 신이…….’
하지만 이미 완전히 잠식되었다가 다시 소생까지 해 본 몸이다.
일리아는 영혼이 불타는 고통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태연한 표정을 연기했다.
“하지만 성하, 사도께서는…….”
“시일을 말씀하지 않으셨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요.”
오스틴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한발 물러나자, 일리아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성전입니다, 성전. 그러니 더욱 꼼꼼히 준비하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그럼 그렇게 진행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아, 그렇다면 일단 로건 왕이 교적(敎適)이라는 것을 세상에 선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소문이야 퍼지고 있습니다만.”
“……그것도 단속하세요.”
“예?”
“소문이 퍼지면 그들도 미리 대비할 것 아닙니까. 적들이 늦게 알수록 좋습니다.”
그 순간 영혼이 불타는 고통이 한층 강렬해지며 일리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윽!”
“성하!?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닙니다. 피곤해서 그렇습니다.”
“……아, 예. 그러실 만하지요.”
“아무튼 공표는 미룹니다. 이의 없으시지요?”
“예, 알겠습니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오스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교황께선 이미 또 다른 신의 성흔까지 받지 않았는가.
9대신이 완전무결하다고 믿는 그로서는 생각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돌아서는 오스틴을 보며, 일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성전을 미룰 핑곗거리는 아직 더 있어.’
지금은 식량, 다음 번엔 병기, 그다음에는 병사들의 훈련 상태…….
하지만 아무리 시간을 끌어 봤자 한 달 이상은 어려울 게 분명했다. 사도의 뜻에 반할 때마다 타오르는 자신의 영혼이 완전히 소멸할 때까지 버티더라도 말이다.
‘로건 폐하, 죄송하지만 이게 제 최선입니다.’
까맣게 타들어 가는 속을 숨긴 채, 일리아는 간절히, 정말 간절히 로건에게 기도했다.
맥라인의 성웅, 로건 맥라인. 그가 어떻게든 해 주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