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476)
476화대륙 서부 토레 왕국에서도 북서부 끝에 자리한 신전.
그곳을 책임지는 대주교 달란은 수개월 전 배교자 하먼에게 성물을 도둑맞고, 그 참회를 위해 기도실에서 폐관 수련을 이어 가는 중이었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신상을 향한 기도로 장식하는 고행.
소위 돈맛을 아는 고위 사제들은 누구나 기피하는 대륙 서북단 끝자락 신전의 대주교답게, 그의 고행에는 한 점의 요령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그 고행의 끝에서 생전 처음 신의 계시를 들었다.
– 지브릭 카셀의 강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 나의 힘을 받아들여, 신의 뜻을 지상에 설파하라.
– 이 뜻을 받드는 자, 신들의 정원에서 영생을 누리리라.
그중 첫 번째 계시가 뜻하는 바는 이해하지 못했으나, 영혼에서 느껴지는 거룩한 파동에 달란의 야윈 뺨 위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내 기도하던 자세 그대로 눈을 뜬 그의 시야에 상서로운 빛이 가득 들어찼다.
달란이 주름진 눈을 몇 번 깜빡여 빛에 적응하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로 그가 이 고행을 하게 된 이유.
사라졌던 금과 상업의 신 아게론의 성물, 아우룸(Aurum)이었다.
“이, 이럴 수가!”
밀려오는 감동에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현 교황과 같은 성녀나 성자도 아닌, 역사서에나 기록된 사도가 될 기회가 자신에게 찾아온 것이다.
달란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다스리며, 다시 한번 신께 기도를 올렸다.
그렇게 기도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왼 그는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눈앞의 성물을 향해 뻗었다.
“……신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비쩍 마른 손이 마침내 성물에 닿는 순간.
– 끄아아아악!
거대한 맹수에게 영혼째로 뜯어먹히는 듯한 고통이 그를 덮쳤다.
그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처참한 감각에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물론 입 밖으로 뱉어지지 못한 영혼의 비명은 타인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우드득.
“큼, 큼! 아, 아…….”
고개를 이리저리 비틀며 한동안 가래가 끓는 듯한 소리를 내던 달란이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육체가 너무 약해 빠졌군. 쯧, 아무리 상황이 급박하다고는 해도…….”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팔다리를 이리저리 주물러 대는 달란의 모습은, 그가 불평을 토해 내는 짧은 사이에도 빠르게 변해 갔다.
얼마 남지 않았던 백발이 풍성한 금발로 바뀌고, 주름이 자글자글하던 얼굴도 젊은 시절 꽤 인기가 있었던 잘생긴 모습을 되찾았다.
볼품없이 야윈 몸에도 근육이 보기 좋게 자리 잡자,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달란이 바뀐 신체를 이리저리 살폈다.
“흠, 육체를 개조해도 역시 8클래스 정도가 한계인가. 한심하군. 인간이란…….”
미소를 짓던 것도 잠시, 못마땅한 듯 혀를 차는 달란의 모습은 어느새 그 목소리까지도 건강한 젊은이의 것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신성의 손실이 막대하다. 괜히 시간 끌지 말고 일단 모여라.]물과 농업의 신, 아이온의 메시지가 그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쯧.
“블루가 언제부터 수장 노릇을 했다고. 예부터 드래곤족의 수장은 언제나 우리 골드였다, 아이온.”
강림하는 순간 다시 생물의 욕구를 느끼게 된 탓인지, 지시하는 듯한 아이온의 태도가 영 거슬렸다.
하지만 승천 때부터 결정된 서열을 이제 와서 바꾸는 건 불가능했다.
더구나 지금 당장 급한 것은 지브릭의 강림을 저지하는 일, 이미 지난 일을 두고 논쟁을 벌일 시간은 없었다.
“2천 년이 넘게 지나서까지 이게 무슨 개고생인지…….”
이게 다 주인 있는 양식장을 빼앗아 가려 하는 양심 없는 강도 놈 때문이다.
“가뜩이나 차원 벽은 점점 두꺼워지고 있는데.”
덕분에 천 년을 모아야 할 신성이 이 ‘강제 강림’ 한 번으로 날아가 버렸다.
심지어 그렇게 강림한 육체도 최악의 수준이니, 짜증이 치밀 수밖에 없었다.
불쾌한 표정으로 근육과 뼈의 한계를 테스트해 본 달란, 아니 아게론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더욱 찌푸렸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끝장을 보자, 지브릭.”
아문다 같은 도마뱀 새끼도 아닌 게 대체 영혼을 몇 개로 잘라 숨겨 놓은 건지.
“없애면 튀어나오고, 또 없애면 또 튀어나오고……. 징그러운 놈 같으니라고.”
이번에야말로 녀석의 남은 영혼 조각을 모두 찾아내 영구히 소멸시키거나 ‘차원 격리’를 시켜 버리고 말 것이다.
[아게론.]“간다, 가.”
자신을 찾는 목소리에 그가 혼잣말처럼 대답하는 순간.
달란의 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몇 번의 공간 도약을 하고 나니, 저 멀리 인간의 도시가 보였다.
2천 년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정도로 거대한 인간족의 도시.
그들의 성지라 불리던 그랑조차 저 도시의 반에도 못 미치는 크기였던 것으로 기억했다.
“……하여간 마음에 들지 않아.”
허공에 떠서 바글바글한 인간족들을 지켜보고 있자니,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옛날 같으면 싹 치워 버렸겠지만, 저놈들의 영혼이 주는 신성의 맛을 알아 버린 이상 그냥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가 묘한 심경으로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늦었다, 아게론.”
생소한 음성과 함께 ‘다섯’ 명의 동료가 그의 주변에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푸르스름한 기운에 휩싸인 중년인을 보며 달란, 아니 아게론의 화신이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비루한 몸뚱이 좀 고치느라.”
“배교자의 수작 때문에 차선책을 고를 수밖에 없었던 아트란과 아니마도 너보다는 먼저 도착했다. 심지어 아니마는 성국의 일까지 처리하고 왔지. 이레귤러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건 멍청한 아문다를 탓해야지. 인간 하나 제대로 못 집어삼킨 아리아 년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아드가도 아직 안 온 것 같은데?”
그가 아드가를 언급하자, 아이온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아드가는 지브릭의 화신에게 당한 듯하다.”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본체와 연결이 안 돼서 자세한 사정은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 지브릭의 화신이 이미 사도 하나 정도는 이길 수 있는 무력을 소유했다고 보는 게 옳아.”
“혹 신인의 경지에 올랐을 수도…….”
“그건 불가능하다 결론을 내리지 않았나. 신위에 닿는 것은 오직 마법만이 가능하다.”
“……그렇다 해도 최악이군. 아니, 아드가 그놈이 멍청하게 방심한 거겠지.”
코웃음을 치며 뱉어 낸 말에, 전신에 갈색 기운을 두른 땅딸막한 남자의 파동이 빨라졌다. 익숙지 않은 육체의 표정이 아닌, 에너지로써 불쾌한 감정을 드러낸 것이다.
“아드가가 그리 멍청할 리가 있나! 아이온의 판단이 맞다, 아게론. 인간의 몸에 강림했다고 신으로서의 품위까지 잊어버리지 마라.”
그러자 아게론의 파동 역시 강렬해졌다.
기껏 인간의 몸에 강림해 놓고는 본체를 따라 땅딸보가 되어 버리는 종자라니. 사도가 되고 나서 그 바탕이 된 육체가 더 열등해진 건 저 멍청한 녀석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대체 언제부터 고작 난쟁이들의 두목이 감히 드래곤에게 고개를 쳐들고 따졌단 말인가.
인간의 몸에 강림한 탓인지, 실로 오랜만에 감정의 동요를 느낀 아게론은 그 생각을 여과 없이 뱉어 냈다.
“품위? 신? 흐흐. 착각하지 마라, 아트란. 땅과 광업의 신이라 불린다고 정말 신이 되었다고 착각해서는 곤란하지. 우리는 여전히 반신(半神, Demi-god)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 말에 다른 동료들의 파동 역시 일제히 거세지기 시작했다. 지금 그의 말은 9대신의 역린을 건드리는 것이었으니까.
신이란 홀로 오롯이 존재해야 하는 법. 하등한 생물들의 영혼을 삼켜 격을 높일 필요도 없는 완전체라야 진짜 신으로 불릴 수 있다.
도대체 얼마나 높은 차원에 있는지, 하위 차원엔 관심도 두지 않는 이 세상의 진정한 창조주처럼.
“그러기 위해, 모든 것을 망칠지도 모를 변수를 제거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닌가. 각자 손해를 감수해 가며 말이다.”
이내 붉은 파동의 주인이 흥분한 동료들을 진정시켰다.
불과 음식의 신이라 불리는 아니마.
녀석은 오크족의 워로드였던 것답지 않게 성정이 차분했고, 그랬기에 신전의 일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강림한 신체를 우락부락하게 변형한 것을 보면 놈 역시 종족의 본능을 버리지 못한 것이 분명하니, 아게론으로서는 코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물론, 더 도발할 필요는 없었다.
강제 강림에 의한 신성 소모는 강림하는 순간뿐만 아니라 지상에 머무는 동안에도 내내 지속된다. 비록 처음 강림할 때에 비해면 극히 소량이지만, 불필요한 신성 낭비는 그로서도 사양이었다.
아게론이 잠잠해지자, 푸른 기운을 휘감은 아이온이 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우선 ‘제단’을 정리한다. 그리고 성군단의 뒤에서 동부를 청소한다. 화신을 죽이는 것은 덤이고.”
이미 강림 전부터 논의를 끝낸 사안임에도 다시 한번 언급하는 것은, 강림 후에 달라진 각자의 감각과 힘을 서로 조율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삐딱하게 굴던 아게론은 이미 합의된 사항을 걸고넘어졌다.
“변수가 생겼잖아. 굳이 기존 계획대로 갈 필요가 있나?”
“아게론!”
“어쨌거나 화신이 예상 이상의 무력을 가진 것은 확실하잖아. 애초의 계획보다 위험 부담이 더 커진 이상, 여기 모인 사도의 몸체 한둘 정도는 더 부서질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더더욱 죽여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몸을 지브릭이 갖게 된다면…….”
“강제 강림 상태에서 화신이 소멸하기라도 하면, 그 손해는 누가 보상해 주지?”
대화과 중구난방으로 이어지던 가운데 튀어나온 한마디.
손해.
그 단어가 다른 목소리를 집어삼켰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경쟁 관계에 있다. 다른 누군가가 더 큰 손해를 본다면 대환영이겠지만, 그게 자신이 될 생각은 없는 것이다.
“……어쩌자는 거냐, 아게론.”
“흠, 내 생각에는 지브릭의 대사제와 화신을 먼저 충돌시키면 어떨까 싶은데?”
그 말에 사도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러나 이내 아이온이 고개를 저었다.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그래, 그 몸에 지브릭이 강림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최악이야.”
“우리가 강제 강림을 한 이유가 뭐야? 지금 그 제단에 모인 힘의 양이, 화신이 없더라도 놈이 부활할 수 있는 정도이기 때문 아니었나? 그런데 거기다 화신을 갖다 바치자고?”
“지금의 대사제는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다행히도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 지브릭의 전승이 많이 끊어진 덕분이겠지.”
“그래도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면…….”
“우리가 뒤를 따르면 되지. 지근거리에서도 그 의식을 방해하지 못할 정도로 지금 우리 힘이 약해졌나?”
“……그건 아니지.”
“그럼 결론이 났네. 화신과 대사제를 충돌시키고, 그 뒤를 친다. 의식은 당연히 힘을 합쳐서 방해하도록 하고. 그렇게 하면 우리에게 ‘손해’는 없을 거야.”
처음 의견을 낸 아게론이 더욱 밝은 빛을 뿌리며 씩 웃었다.
사실 최선의 전략은 일단 합세하여 제단을 정리한 뒤 로건 맥라인을 없애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몇몇 사도의 육체가 파손될지도 모르지만, 지금 상황에선 그런 것쯤이야 감수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최선이 아닌 차선으로 의견을 모아 가고 있었다.
오직 다른 이들보다는 손해를 조금이라도 덜 보기 위해서.
그들의 추종자들이 들었다면 그 믿음이 산산이 조각날 만한 이야기였지만, 그들에겐 상식적인 합의였다.
심지어.
“만약에 이 계획이 잘못될 경우, 아게론 너의 사도를 ‘희생’하는 것을 전제로 하지.”
그 합의 끝에 도출해 낸 결론은 치졸하다 싶은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 불리한 조건에도 아게론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아. 하지만 이로 인해 모두에게 손해가 생기지 않는다면, 내가 조금 더 이득을 챙기겠다. 받아들이겠나?”
그렇게 해서라도 아이온을 앞질러 보겠다는 심산이었다. 가장 먼저 반신의 굴레를 벗어던지는 순간, 자신은 이 중에서 최고가 될 테니까.
저열한 욕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발언이었지만, 듣고 있는 다른 9대신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나 9대신 중 항상 첫 번째로 꼽히는 아이온은 그저 푸른 빛을 흩뿌리며 담담히 웃을 뿐이었다.
‘과연 모든 것이 그리 쉽게 풀릴까.’
동료이기 전에 경쟁자.
서로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