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480)
480화 ‘확실히 이 세상은 변수가 많아 흥미롭다.’
물과 농업의 신 아이온,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온의 사도는 그렇게 생각했다.
굳이 두 존재를 구분 짓는 이유는 명확했다. 인간의 몸에 깃든 신은 그 인지 능력과 사고 능력이 줄어들고, 육체에 남겨진 욕구까지 일부 계승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본질이 같다고 한들 인식의 수준이, 바라는 바가 다르다면 어찌 동일한 존재로 볼 수 있겠는가.
물론 금과 상업의 신, 아니 옛 골드 드래곤의 로드 아게론처럼 본성이 워낙 거친 탓에 인간의 잔재에 그리 영향을 받지 않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어쨌건 아이온의 사도는 이 사태를 제법 흥미롭게 보고 있었다.
그 때아닌 여유는 상황이 어찌 전개되든 풀어낼 자신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가 빙의한 인간이 아이온의 사제답게 굉장히 느긋한 품성을 지니고 있던 것도 한몫했다.
‘거짓이 아니었구나.’
화신으로 예정되었던 놈이 지브릭의 파편을 오히려 소멸시키는 것을 보고, 비로소 확신을 얻었다.
세상을 보는 시야가 달라지면 생각도 달라지는 법.
신으로서의 격이 한없이 낮아져 본래의 지혜는 대부분 상실했지만, 저변의 사정을 파악하기에는 충분했다.
다만.
– 감히!!!!!!
지브릭의 남은 파편이 다시금 제단의 모든 힘을 끌어들이기 시작했을 때는 그로서도 미간을 좁힐 수밖에 없었다.
3백 년 전에도 한 번 보았던 것처럼, 지브릭 놈은 본인의 마법적 흔적이 남은 후손에게만 쓸 수 있는 강림 술식의 조건을 스스로 비틀고 있었다.
그저 자신의 피가 조금이라도 섞여 있으면 된다는 식의 변환.
지브릭이 현세를 떠난 지 무려 2천 년이 지났으니, 대륙의 인간들 대다수에게 지브릭의 피가 퍼졌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즉, 그 조건은 사실상 인간이면 된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로 인한 에너지나 신성의 손실 역시 크겠지만, 놈으로선 감수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대로 소멸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어쨌거나 지브릭은 쪼개진 영혼의 일부만으로 10클래스에 반쯤 걸쳐진 부활 술식을 즉석에서 개조해 내는 놀라운 광경을 보여 주고 있다.
‘역시…….’
신룡의 일족으로 태어났어야 할 영혼이 하위 종족인 인간의 몸에 잘못 깃든 것 같았던, 그 말도 안 되는 천재성은 어디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 봤자 파편에 불과하지.’
사도들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들이 멍청해서 일을 이렇게 대충 처리한 것이 아니다.
죽여도 죽여도 다시 나타나는, 자꾸만 양식장의 고기들을 탐내는 기생충을 제거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이미 강구해 놨다. 지금 사도를 통해 본신의 일부를 드러낸 게 계획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이 정도면 많이 소모된 것 같은데.”
“제단에 모인 힘이 생각보다 훨씬 크다.”
“역시 종들의 시야로 본 것이 너무 한정적이었나.”
용인족 출신 아사론의 사도와 드워프 출신 아트란의 사도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이며 아이온의 말에 힘을 실었다. 다른 사도들 역시 한눈에 인과를 파악했을 터인데 말이다.
저들도 이렇게 작은 존재가 되니, 드래곤에게 종속적이었던 종족의 본능이 드러나는 모양이었다.
아이온의 사도는 그것이 꽤 우스웠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다만 의연하게 입을 열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흘러가면 곤란하지. 더 이상 손해를 따질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아게론, 나서라. 약속대로 네 사도가 희생할 순간이다.”
아게론의 금빛 비늘이 부르르르 떨렸지만, 대답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
거부하고 싶은 마음도 이해는 하지만 이것은 엄연한 ‘약속’이다.
아게론의 사도로서는 지킬 수밖에 없을 테니, 아이온의 사도는 여전히 여유로운 마음으로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반면, 로건은 전혀 여유로울 수가 없었다.
‘안 돼!’
처음 면류관이 날아올 때까지만 해도 방법이 있다고 생각했다. 지켜보는 사도들도 있고, 일전에 지브릭의 영혼을 물리친 기억도 있으니 굳이 최후의 수단을 쓸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팔찌가 빛을 발함과 동시에 지브릭의 영혼이 황제의 몸에 들어가려 하는 것을 보자 생각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는, 그 순간 야위어 가는 클레이튼과 루이사의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흘깃 사도 쪽을 바라보았으나 이상하게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고, 그들의 본질이 워낙 드높은 탓에 마음의 파편조차 읽히지 않았다.
까드득.
로건은 이를 갈며 마음을 굳혔다.
‘어쩔 수 없다.’
사도는 나중에 생각한다. 이 자리에서 지브릭의 강림을 두고 볼 수는, 내 사람들의 죽음을 지켜볼 수는 없으니까.
우우우웅.
심장에 자리한 9개의 포스코어가 일순간 강렬히 공명하며 하나의 코어를 더 토해 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를 속박하던 마법진의 힘이 뜯어져 나갔다.
우드드드득.
“오호라?”
“저럴 수가!”
“저게 가능하단……?”
사도들의 감탄 어린 음성이 울려 퍼지기가 무섭게 로건의 손에 들려 있던 애검 룩스가 찬란한 황금빛을 뿌리며 휘둘러졌다.
쩌어어어어억.
신검 비전의 9식, 인과를 뒤바꾸는 광령참의 일격이 마법진과 지브릭의 영혼, 그리고 황제의 몸을 단숨에 갈랐다.
하지만.
“……놀랍구나.”
어느새 몸을 일으킨 황제, 아니 지브릭은 들어 올린 오른팔과 로건을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푸스스스.
먼지처럼 부서지는 지고의 팔찌.
한때 교황까지 세뇌했던 무상의 아티팩트는 그 존재의 의의를 다하고 부서져 내렸다.
그리고 이내, 그 자리에서부터 어두운 잿빛 기운이 안개처럼 퍼져 나갔다.
순식간에 크기를 불린 회색 안개에, 당장이라도 그 육체를 소멸시킬 듯 퍼부어졌던 로건의 황금빛 기운이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던 지브릭의 시선이 뒤쪽에 쌓인 제물들로 향하는 순간.
그들의 몸이 한층 더 마르는가 싶더니, 솟구치는 붉은 기운과 함께 잘린 왼팔이 새로이 돋아났다.
원래보다 묘하게 더 하얘 보이는 팔을 이리저리 뜯어보던 지브릭은 이내 자신의 힘과 대치하는 황금빛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우우웅.
“생명의 힘으로 이런 격을 다루는 것이 가능했던가. 새삼 아쉽구나. 너를 포기하느라 손실이 너무 컸어.”
여전히 마법진의 속박에 묶여 있는 사도들을 한 번 확인한 지브릭의 시선이 다시 로건에게 향했다.
“내 후손아, 시간을 거스른 아이야. 내 손해에 대한 대가를 네가 치러 줘야겠구나.”
지브릭이 새하얀 왼손을 들어 올리자, 잿빛 기운이 더욱 증폭되며 황금빛을 압박했다.
우우우웅.
콰콰콰콰콰콰콰.
우르르르릉.
“흐읍!”
쏟아지는 잿빛 기운이 황금빛을 밀어 내기 시작하자, 드넓은 동굴 광장 전체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그그그극.
‘빌어먹을.’
로건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미 특성 발현의 한계까지 도달한 상황.
하지만 부활한 지브릭의 힘이 생각보다 너무 강했다.
그저 영혼으로 존재했을 때와 육체를 얻은 후의 차이가 이렇게나 클까 싶을 정도로.
심지어…….
‘회복한다고?’
자신과 대치하는 와중, 작은 파편에 불과하던 지브릭의 혼이 황제의 몸에 남아 있던 영혼의 잔재를 삼키며 그 덩치를 불려 가는 것이 보였다.
게다가 그에 따라 지브릭의 힘이 증폭되는 것 또한 느껴졌다.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에 로건이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질끈 깨물던 그때.
“역시 편법이었나. 더 기대할 수는 없겠군.”
“아게론, 아직도 망설이는 것이냐?”
“약속을 지켜라.”
“더 늦기 전에”
“저 육신조차 지브릭에게 빼앗기기 전에.”
“……알겠다. 빌어먹을.”
사도들이 있는 방향에서 의미를 이해하기 힘든 목소리가 연달아 들리더니, 갑자기 거대한 황금빛이 터져 나왔다.
자신의 황금빛과는 무언가 다른 찬란한 광채.
로건이 그 의미를 이해하기도 전에 지브릭의 표정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꽈아아아아아아앙!!
“아게론!!? 어떻게!?”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내 주마, 지브릭.”
정신이 혼미할 정도의 굉음에 뒤이어 아게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로건은, 그제야 동굴 광장의 천장 부분이 뻥 뚫려 나갔다는 것을 자각했다.
몇백 미터는 될 법한 암벽에 뚫린 거대한 구멍 사이, 까마득하게 높은 하늘 위로 어지럽게 얽혀 드는 황금빛과 잿빛이 보였다.
우르르르르르릉.
그 여파만으로 산이 깎여 나가고, 광장이 무너지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초고대에 사라졌던 진정한 신인들의 힘이 현세에 나타난 것이다.
잠시간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로건은 추락하는 암석의 파편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 순간에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빌어먹을.”
콰콰콰쾅.
그리고 반사적으로 오러를 운용해, 막 집채만 한 바위에 깔릴 뻔한 클레이튼과 루이사의 몸을 들어 올렸다.
아주 잠깐 망설이긴 했지만, 어쩌면 사돈이 될지도 모를 동익왕까지 챙긴 그가 무너지는 동굴을 탈출하려 할 때.
번쩍!
상공에서 부딪치던 두 기운이 일순간 정면으로 충돌하며 강렬한 빛의 폭발을 일으켰다.
눈부시게 아름답지만, 파멸의 힘이 담긴 빛.
머리 위에서부터 모든 것을 분쇄하며 쏟아져 내리는 빛줄기에 맞서, 로건은 오러를 한껏 끌어 올렸다.
“젠자앙!!!”
자기 자신과 세 사람의 몸을 모두 감싼 채 최대한 권능을 동원해 공간을 단절하고 영혼을 보호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소멸시켜 버릴 기세로 쏟아지는 빛이 시야를 새하얗게 물들인 것도 잠시.
이내 그 끔찍한 힘의 유동이 사라지고, 로건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황금빛과 잿빛이 반반씩 얽혀 형성된 거대한 구 모양의 빛 덩어리를.
‘정말 엄청나군.’
직전처럼 빛이 번뜩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 구 안에서 전해지는 거대한 힘만큼은 지나치리만치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보니 주변 환경은 한 박자 늦게 눈에 들어왔다.
“……으음.”
굳건히 솟아 있던 산맥은 어디로 갔는지, 자신은 모든 것이 박살 나 버린 황무지의 크레이터 안에 버티고 서 있었다.
‘산이, 산맥이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이런 자들이 횡행하던 아득한 고대는 얼마나 무시무시한 시대였을지 가슴이 시리게 체감할 때쯤.
한옆에서 귀에 거슬리는 기괴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힘겨루기에 들어갔나.”
“우리 중 하나가 돕는다면 더 빨리 끝날 텐데.”
“그럼 네가 하던가.”
“천 년간 모은 적공을 날리고 싶진 않다. 차라리 사도의 몸을 버리는 게 낫지.”
“그래도 지브릭이 이긴다면, 그래야 할 텐데?”
“설마 아게론이 고작 파편 하나를 처리 못 할까.”
어느새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선 다섯 괴물이 저마다 한마디씩을 뱉어 냈다.
“사도…….”
로건이 신음처럼 한마디를 흘리는데, 그중 푸른 비늘을 단 사도가 그 목소리에 응답하듯 그를 돌아보았다.
“인상적이었다, 지브릭의 후예여.”
어?
이상하게 적대감이 느껴지지 않는 어조에 로건이 오히려 당황하던 순간.
“인간치고는 확실히 대단하지.”
“우리의 대리인으로 삼는 것도 좋겠어.”
거대한 엘프의 모습을 한 사도와 드워프 형상의 사도도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왜 이러지?
어리둥절한 그를 보며, 거대한 오크 모습의 사도가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면 신탁을 조정해야 하는데, 크흠. 그럼 내 면이 서질 않아.”
“그래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흰 비늘의 용인족 사도 역시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푸른 비늘의 용인족 사도가 로건의 정신을 번쩍 일깨우는 말을 내뱉었다.
“그래. 편법인 줄 알았더니, 얕게나마 신인의 경지에 올라 있었군. 그것도 마법이 아닌 힘으로 말이야.”
“아…….”
로건은 비로소 자신이 특성을 쓰고도 탈진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연이은 전투로 인한 정신적 충격이 간당간당하게 넘보고 있던 한계의 벽을 결국 넘어서게 만든 것이다.
그것을 자각하자마자 불안하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착 가라앉았다.
자신의 의지가 주변을 완벽히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
의지만으로 세상의 법칙을 뒤틀고, 인과를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이 그제야 든 것이다.
“하…….”
온전히 격을 갈무리한 영혼이 주변을 훑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한순간에 읽히는 사도들의 사정과 저 위의 상태.
사도들이 왜 이렇게 나오는지를 마침내 파악한 로건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