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481)
481화
“내가 어쩌길 바라는가, 신들이여.”
지금 지상에 남은 사도들은 자신을 처리할 힘이 없다.
아니, 정확히는…….
‘그러기 싫은 거겠지.’
승격한 로건의 눈에는, 사도들의 괴물 같은 신체에서 뻗어 나와 상위 차원으로 연결된 영혼의 실이 보였다.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
그 통로를 통해 이어진 본체의 격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이 갔다. 사도와 본체 사이, 막막하게까지 느껴지는 차원의 벽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신들이 그 벽을 넘어 영혼의 일부를 사도의 육신에 강제로 이식할 때, 신성에 얼마만큼의 타격을 입었는지도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의 날 처리하려면 저 위의 골드 드래곤처럼 본신의 일부를 강림시켜야 할 테고, 그렇게 되면 손해가 더욱 막심하실 테지.’
그 사실을 아는 이상 로건의 태도는 여유로울 수밖에 없었다.
“아게론을 도와 지브릭을 정리하라. 그 정도 힘은 있는 것 같으니.”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공통의 대리자로 삼아, 영원토록 권세를 누릴 수 있게 해 주마.”
9대신의 대적자에서 대리자라니.
단숨에 뒤바뀐 팔자에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당신들의 영혼을 받아들여 스스로 양식이 돼라? 날 바보로 보는 것인가?”
“무엄하다!”
“경지에 올랐다고 신을 우습게 보는가!”
“어리석은 인간종이라 뒤를 생각지 못하는 모양이구나!”
우우우우우웅.
다섯 사도의 기세가 로건의 전신을 압박해 왔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조금도 위협이 되지 않았다.
신인의 경지에 ‘반쯤 발을 걸친’ 것과 ‘완전히 넘어선’ 것.
그 작은 차이가 범접할 수 없는 격차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본체의 경지가 로건보다 높은 사도들 역시 그 상황을 금세 깨달았다.
“……우리가 신성을 늘리는 과정을 짐작하는가 보군.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협의점을 못 찾을 것도 없겠지.”
푸른 용인, 아이온의 사도가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신인의 경지에서는 수명조차 무한하니, 그대는 이 인세에서 영원한 지배자가 돼라. 단지 우리의 대리인으로서 존재하면 되는 것이다.”
“아이온! 무슨 소릴 하는 것이냐!”
“운명을 바꾸는 자다. 시간 회귀자란 말이다!”
“이 녀석이 지배자가 되면 인간 전체의 운명이 바뀐다! 우리의 작업이 더는 통하지 않게 된단 말이다!”
“나라고 그것을 모를까.”
다른 사도들의 반발을 단숨에 일축하는 한마디.
푸른 용의 사도는 오연한 눈길로 로건의 붉은 눈을 바라보았다.
“그대가 그 변화를 우리에게 이끌면 된다.”
“뭐?”
“9대신의 대리자로서 우리의 신성을 강조하고, 그대 스스로를 상징으로 삼아 염원의 힘을 모집하라. 그리고 그것을 우리에게 바치면, 그대가 만들어 낸 운명의 흐름 역시 결국 우리에게 다시 이어질 터.”
“호오.”
“과연…….”
“……일리가 있군.”
“그리하면 그대 역시 언젠가는 신위에 올라 우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것이다.”
다른 사도들의 반응에 미소를 지은 아이온이 뱀처럼 쭉 찢어진 눈동자로 로건을 응시했다.
그러나 로건의 입에선 사도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반문이 튀어나왔다.
“내가 거절한다면?”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네놈이 미친 게로구나!”
“제정신인가?”
“주제를 알아야지!”
“이제야 간신히 9클래스에 도달한 자가 감히!”
사도들이 일제히 분노를 쏟아 내자, 푸른 비늘로 뒤덮인 손이 그 소란을 막아섰다. 샛노란 눈동자가 유독 차분해 보였다.
“거절한다면 그대의 모든 핏줄은 사후에 우리의 양식이 될 것이다. 혹여나 그대가 죽는다면, 그대 역시 그리되겠지.”
아이온의 사도는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내가 여기서 당신들을 전부 처리해도 마찬가지겠고. 그렇지?”
“사도의 육체는 본신이 아니니, 그래 봤자 그대는 우리의 큰 분노만 사게 될 뿐이다.”
“여차하면 천년 적공을 깨서라도 이 자리에서 네놈을 때려죽일 수도 있고.”
거대한 붉은 오크가 콧김을 내뿜으며 살벌한 협박을 더했다.
그래, 그렇겠지.
신인의 경지라 한들 이들의 눈엔 그저 그런 수준일 테니까.
“받아들이겠다면, 다른 조건은?”
로건은 한발 물러나는 척 사도들을 떠보았다.
그러자.
“다른 사소한 조건은 필요 없…….”
“아니지. 버려진 자들은 처리해야지.”
“아, 그렇군. 새롭게 운명을 써 내려 가기 전에, 변한 역사에 태어난 생명을 살처분하라. 그것이 유일한 조건이다.”
역시나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 붙었다.
“뭐, 애초에 사람을 양식으로 생각하는 놈들의 말 따윈 따르고 싶지 않아.”
“뭐라?”
“네놈이!”
“승격의 법열에 주제를 잊은 모양이구나!”
“누가 나서서 저 건방진 놈의 영혼을 찢어라! 신성의 일부는 내가 보전해 주겠다!”
푸른 용인이 그리 외쳤지만, 서로 눈치만 살필 뿐 선뜻 나서는 사도는 없었다. 그 누구도 손해를 감수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 기묘한 침묵에 로건은 폭소할 수밖에 없었다.
“푸하하하!”
어찌 우습지 않을까.
아무리 격의 차이가 확실하다 해도 때로는 무모한 싸움에 뛰어들기도 하는 것이 인간이다. 가족을 위해, 동료를 위해,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을 자처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이라는 이들의 행태가 고작 이런 수준이라니, 너무도 추하지 않은가.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너희 같은 하찮은 종자들에게 고개 숙일 일은 없을 것이다.”
로건은 신들을 비웃으며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감히 네놈이……!”
“한낱 자존심 때문에 영원히 후회할 짓을 벌이는가? 주변의 사람을 아끼는 자인 줄 알았는데?”
“아끼지. 그러니까 이러고 있는 거고.”
“뭐라?”
“내가 왜 이 쓸데없는 대화를 이어 가고 있었을까, 어리석은 것들아.”
“……무슨 소리냐?”
“이제는 이 세계에서 꺼질 시간이다, 신들이여.”
로건은 싸늘한 한마디와 함께 힘을 끌어 올렸다.
“이놈이!”
솟구치는 로건의 기세에 사도들이 일제히 힘을 뿜어냈다.
하지만 로건은 그들의 분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이내 한없이 가속되는 의식 속에서, 심장에 자리한 ’10개’의 포스코어가 상호 작용하며 엄청난 힘을 뿜어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모자라지.’
지금 하고자 하는 건 막연한 상상 속에서만 시도해 본 수법.
경지가 오른 지금에야 그 가능성의 윤곽이 보이기에 처음으로 구현해 보려는 것이지만, 아직은 힘이 다소 부족했다.
그러니 9클래스, 신인의 경지에 오른 권능으로…….
‘인과를 조작한다.’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하루에 딱 한 번 쓸 수 있었던 특성을 다시 한번 초기화하는 것뿐.
그러나 그것이 이끌어 낼 결과 때문인지, 한순간 어마어마한 양의 염원의 힘이 소비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그만큼 그 파괴력은.
우우웅.
‘더욱 엄청날 테니까.’
심장에서 ’11개’째의 포스코어가 튀어나오며 일순 영혼이 끝없이 확장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한순간에 세상 전체가 감각의 범위 안에 들어오는 느낌. 정말로 ‘신’이 된 듯한 전능감이 영혼을 전율케 했다.
그리고 그 순간, 로건은 확신했다.
막연한 상상을 현실로 구현해 내는 게 정말 가능하리란 것을.
“감히!!!”
콰직.
또 한 단계 경지가 올라선 로건은 곁에서 시끄럽게 구는 날파리들부터 처리했다.
푸른 용이, 붉은 오크가, 녹색의 엘프와 갈색의 드워프가, 그리고 흰색의 용인이 솟구친 황금빛과 함께 한순간에 찢겨 나갔다.
– 기필코 후회할 것이다.
– 저주받을지어다!
– 감히 우리를 적대해!?
– 네놈이 신계에 오를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 필멸자여, 그대의 최후를 즐겁게 기다리고 있겠노라!
지금의 자신보다 거대한 격의 소유자들이 저마다 경고를 남기며 사라졌다.
하지만 로건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너희들도 꺼져라!]그 영혼의 외침에 상공에서 한창 힘을 겨루던 황금빛 드래곤이 순식간에 목이 꺾여 추락했다.
– 네, 네놈이……!
다른 신들에 비해 그 힘이 한층 약하게 느껴지는 아게론이 저주의 말을 제대로 뱉어 내기도 전에 이 세상에서 추방되었다.
동시에.
“네, 네가 감히 어떻게?! 나조차 이루지 못한 것을!!”
어느새 머리와 눈동자 색이 검붉게 변한 선조가, 한창 싸우던 상대가 한순간 사라져 버린 것도 인식하지 못한 듯 발악을 해 대며 검은 기운을 뿜어냈다.
하지만 그 순간.
“사라져라, 타락한 선조여.”
이어진 로건의 한마디에 지브릭은 비명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고대에 인류를 구한 영웅, 그리고 인류 전체를 디딤돌로 삼으려 했던 선조의 어이없는 최후.
하지만 감상에 잠길 시간은 없었다. 아직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으니까.
‘나를 이 시간에 있게 한 영혼들이여, 이제 그대들의 한을 영구히 끊어 내겠습니다.’
혼잣말과도 같은 다짐이었지만, 그 순간 유난히 고양된 영혼이 마치 그들의 대답처럼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창안자조차 닿지 못해 꿈으로만 남겨 두었던 신검의 10번째 비전이 너무도 쉽게 이해되었다.
‘간다!’
우우우웅.
버릇처럼 숨을 고르며 각오를 다진 로건의 손에서, 태양처럼 강렬하게 빛나는 검이 하늘을 꿰뚫을 듯 높이 솟구쳤다.
대륙의 어디에서도 볼 수 있을 만큼 거대한 황금빛 검이.
‘운명을 바꿔서라도 인류를 구하고자 했던 당신의 유산. 그 바람이 이것에 있다고 믿습니다, 검신이여.’
시공참(時空斬).
번쩍.
하늘을 꿰뚫는 검이 그대로 세상을 밝히고.
시간과 공간을 잘라 내는, 온전한 신의 힘으로만 발현되는 권능이 그 순간 세상의 벽에 닿았다.
* * * 거대한 황금빛 기둥은 맥라인 전역에서도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도련……님?”
아니, 이제는 폐하지.
‘나도 참…….’
릭은 왕실 시종장이 된 지금까지도 습관처럼 튀어나오곤 하는 호칭에 자책했다. 저 멀리에서 갑자기 솟구친 황금빛 기둥을 본 순간, 누군가가 떠오른 탓이었다.
찬란한 황금빛을 상징처럼 삼았던 사람.
맥라인의 대공자, 자신의 주인, ……오래된 친구.
그리고 이제는 대륙 최강국의 군주이자 자랑스러운 왕으로 불리는 사람.
그 사람을 떠올리자 저 놀라운 이변도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뭐, 보는 사람도 없으니 오랜만에…….
“무사히 돌아만 오십시오, 대공자님. 이 릭이 성대한 잔치를 준비해 놓겠습니다. 그리고 라일라가 임신을 했어요. 제가 공자님보다 먼저 아빠가 됩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제 아이에게 축복을 내려 주세요.”
릭은 다시 한번 주변을 살핀 후, 조심스럽게 속삭이듯 말했다.
“해 줄 거죠, ……형?”
아주 어렸을 때처럼, 신분의 차이를 몰랐던 그때처럼 제 주군을 불러 본 순간.
[그러마.]“헙!?”
들릴 리 없는 목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
놀란 릭이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들?”
북쪽 하늘에서 솟구친 황금빛 기둥을 본 패드릭은 느닷없이 큰아들이 생각났다.
어느 순간 자신의 손을 떠난 아들.
그리고 이제는 대체 무엇을 짊어지고 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을 만큼 커 버린 녀석.
시간을 거슬러 돌아왔다는 말이, 그 전생의 이야기가 가슴을 아프게 찌른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을 무렵.
아들은 아직 욱신거리는 제 가슴에 무거운 돌을 던졌더랬다.
– 모든 것을 끝내러 갑니다.
굳은 얼굴, 무거운 목소리로 꺼낸 말에도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자신은 그저 마음으로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신이시……. 아니, 아니지. 내 아들을 적대하는 신이면 엿이나 먹으라지.’
황급히 고개를 저은 패드릭은 황금빛 기둥을 보며 간절히 두 손을 맞잡았다.
‘너에게, 아니 네 자식에게라도 내가 진 빚을 갚으마. 위한다는 명목으로 네게 무심하게 굴었던 빚을 전부 갚으마. 그러니 무사히 돌아만 와 다오, 제발!’
당연히 답이 들려올 리는 없었는데.
[그러겠습니다.]왜인지 아들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아 패드릭은 더욱 간절히 기도를 이어 갔다.
“아, 씨. 도통 손에 안 잡히네.”
하마르는 혼잣말로 투덜거리며 느와르를 조각하던 칼을 내려놓았다.
전쟁이 승리로 끝났다는 소식은 들었다.
자연히 마도 공방의 업무는 대폭 줄어들었고, 자신 역시 한결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모처럼 취미 생활을 즐기던 중이었는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
어수선한 마음에 괜스레 창문을 열어젖히니, 저 멀리서 기다렸다는 솟구쳐 오르는 황금빛 기둥이 보였다.
느닷없는 이변이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놀랍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왠지 모를 그리움과 친근함마저 느껴졌다.
하마르가 그 어울리지 않는 감정에 오히려 당황하던 순간, 문득 그 부근에서 전장을 정리하고 있을 주인이 떠올랐다.
‘이제 타렌은 드워프들의 도시가 되어 간다, 주인. 주인은 약속을 완벽하게 지켰다. 그리고 내 약속은 아직 10년이 남았고.’
크흠.
혼자 떠들긴 좀 머쓱하지만 보는 이도 없는데, 뭐.
“돌아오면 맥주나 한잔합시다. 남은 10년, 아니 20년이라도 원하는 건 다 만들어 줄 테니까 몸 성히만 돌아오쇼.”
[약속한 거다?]“엑!?”
갑작스레 소름 끼치는 목소리를 들은 것만 같아 화들짝 놀란 하마르가 황급히 창밖을 살폈지만, 보이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제국 북서부, 이름 없는 산맥…… 아니, 이제 들판이 되어 버린 황무지에서 조금 떨어진 숲속.
“폐하!?”
“형님!?”
“여보!!!!”
“다, 다행이다!”
로건의 명으로 멀리 보이는 산맥을 향해 빠르게 나아가던 맥라인의 초인들은 갑자기 솟아난 황금빛 기둥을 보며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산맥 자체가 먼지처럼 사라지고, 무시무시한 폭풍이 몰아치는 전장.
그곳에 있을 군주를 구하기 위해 얼마나 애써 달려왔던가.
하지만 하늘을 뚫을 듯 솟구친 저 엄청난 기운은 분명 그들의 군주, 로건의 것이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력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또 뭘 하시는 건지…….”
“아무튼 무사하시길 바랍니다!”
“제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엄청난 에너지의 파동에, 그들은 그저 간절히 두 손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 아오오오오오!
갑작스러운 포효와 함께 거대해진 티르의 몸에서 빛기둥과 비슷한 황금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내 찬란한 황금빛 빛줄기가 기둥을 향해 빨려 들어가듯 쏘아져 나갔다.
* * * ‘신계를 이 세상과 끊어 낸다.’
로건이, 시공참이 노리는 것은 오직 그 한 가지였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모든 염원의 힘을 쏟아 냈음에도 차원의 벽은 굳건하기만 했다.
게다가.
– 푸하하하. 어리석은 놈!
– 어림없는 짓을…….
– 하찮은 발악이다.
– 역시 인간이란 한심하군.
– 모든 것을 걸고 부딪치다 산화하라, 인간.
– 네 놈이 저지른 불경의 대가는 그 영혼으로 받도록 하지.
– 우리 아홉이 찢어 가지면 손해는 좀 메꾸겠는걸.
– 어리석은 인간아.
– 그대로 부서져라.
그 차원 벽 너머에서 저주를 퍼붓는 ‘아홉 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탓일까.
처음에는 그 가능성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자신감이 조금씩 사그라드는 듯했다.
바로 그때.
– 아오오오오오.
익숙한 포효와 함께 로건의 것과는 조금 다른 염원의 힘이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티르!’
그 힘이 전해진 순간,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마음이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 형.
– 아들.
– 주인.
릭과 아버지, 하마르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 우리 폐하께서는 신이 내린 영웅이야.
– 이제 더 이상 전쟁은 없겠지.
– 폐하께서 무사하신 이상 우리 왕국은 건재하다.
자신의 울타리 안에 있는 모든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유는 각양각색이었지만, 그 모든 사람이 오직 한 가지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니 부디 우리 폐하께서, 형이, 아들이, 남편이 무사하길.
그 마음들이 흔들리던 로건의 정신을 바로잡아 주었다.
‘힘이 아니라 의지가 부족했던 거야. 기껏 신인의 경지에 올라 놓고 마음이 흔들렸다니.’
섭리를 정면으로 거역하는 데에서 전해진 압박감이 자신의 영혼을 짓누른 탓일 것이다.
하지만 그 압박감은 이제 다른 마음이 밀어 냈다.
그러니 이제…….
‘끝내자!!’
그렇게 온전한 확신과 함께 내리쳐진 황금빛 검이.
– 안 돼!!!!!!!!
신들의 차원을 이 세계에서 분리시켰다.
그날.
대륙에서 신성력이 사라졌다.
에필로그
“아빠빠빠.”
탁, 탁.
“어어, 그래. 아빠, 아빠 여기 있어. 아빠 때리면 안 돼, 우쭈쭈.”
쪽.
제 얼굴을 짓누른 손을 살며시 떼어 내고 오동통통한 볼에 입을 맞추자, 엄마를 쏙 빼닮은 붉은 머리 푸른 눈의 아기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고 뿌듯해지는 웃음.
하지만 그 행복감을 온전히 즐기기도 전해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폐하! 공주님은 저희에게 맡기시지…….”
옆에 서 있던 시종장, 라일라가 얼굴 가득 당황함을 띄운 채 그리 말하자 로건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괜찮네.”
“내버려 둬. 저이의 요즘 낙이야.”
왕비, 에일렌까지 웃으며 말렸지만 라일라는 여전히 안절부절못했다. 골렘 마스터 클레이튼이 만들어 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요람과 대륙 최강자의 품속도, 아기 공주를 향한 유모의 걱정은 막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하이고, 그래도 황제 폐하의 위엄이 있는데……. 예, 뭐. 마음대로 하십쇼.”
라일라가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물러나자, 한옆에 있던 드웨인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무언의 항의를 보냈다.
하지만 그를 무시한 채 고개를 홱 돌려 버리는 시종장을 보며, 드웨인은 깊은 한숨과 함께 군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폐하, 그래도 지금은 대전에 나가 보셔야 합니다.”
“왜?”
“그게…… 청원이 물밀듯 몰려오고 있습니다. 로니안 공작 각하와 루이사 공작 부인께서 대신 응대하고 있습니다만, 버겁습니다.”
“또 그 얘기인가.”
“예. 떠나간 신들이 다시 돌아오길 바라는 기원제를 성웅이신 황제 폐하께서 주관해 주십사 하는 이야기로 요즘 왕국이 난리입니다.”
“성녀는 뭘 하길래?”
“성녀님이야 규율을 깨고 빅토르 녀…… 험, 험. 빅토르 경과 결혼한 뒤로 발언권을 많이 잃으셨지요. 아시면서…….”
피식.
그래, 그랬지.
“기원제 같은 거, 의미 없다고 전해.”
“예!?”
“인간이 올바르게 살며 부덕을 씻어 내면, 언제고 신은 돌아오신다.”
“아…….”
“그렇게 전해.”
“……예.”
결국 안 가겠다는 말이다.
시무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드웨인이 힘없이 돌아섰다.
저 덩치의 털보가 저런 표정을 짓는 모습이 우습기보다는 안쓰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시공참으로 잘라 내 버린 신들의 차원이 어디에 있는지는 자신도 모른다. 돌이키려야 돌이킬 수도 없는 것이다.
‘물론, 알아도 돌려놓을 일은 없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웃음 짓는 로건의 손에, 어느새 맥라인 ‘제국’ 전역에서 모여든 염원의 힘이 다시금 맺혀 들었다.
물론 그 대다수는 로건 자신이라기보다는 9대신의 대리자에게 전해진 힘이었지만.
– 인간들에게 실망하고 떠나신 신들께서 다시 돌아오시길.
그 또한 쓸모는 있었다.
“후.”
한차례 입김을 불자 그에게만 보이는 기운이 세상으로 퍼져 나갔다. 그 기운은 곧 신의 부재, 정확히는 신성력의 부재로 인해 절망에 빠진 이들의 마음에 조금이나마 힘을 불어넣을 것이다.
정작 본인들은 잘 느끼지 못하겠지만.
그리고, 이렇게 세월이 흐르다 보면 언젠가는.
‘회귀도, 신도 필요 없이 인간 스스로 앞날을 개척하는 시대가 되겠지.’
자신이 꼭 그렇게 만들 것이다.
– 성웅이신 로건 폐하께 바라옵니다. 우리 가족 행복하길…….
– 내일의 먹거리를…….
– 장사 좀 잘 되길…….
– 아이를 가질 수 있도록…….
지금도 인지 영역을 조금만 더 넓히면 크고 작은 목소리들이 수도 없이 들려왔다.
“처음엔 그저 가족을 지키고 싶었을 뿐인데…….”
어쩌다 보니 그 ‘가족’의 울타리가 너무 커져 버렸다.
하지만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
그리고 또…….
“지킬 것이다.”
언제까지나.
붉은 눈에 어린 결연한 의지와 함께, 신이 사라진 시대가 또 하루 저물어 갔다.
-멸망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