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5)
5화 ‘우, 운이야. 운일 뿐이야.’
도미넌은 애써 현실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현실을 인정하면 그에게 남은 것은 파멸뿐이다.
그러니 눈앞의 대공자는 자신보다 약해야 한다.
아니, 약한 것이 맞다.
스스로를 세뇌한 도미넌이 핏발이 선 눈으로 다시금 목검을 들었다.
“우와아압!”
그러고는 기합과 함께 온몸을 붉게 물들이며 로건의 눈앞으로 쇄도했다.
‘오버히트. 무리하는군.’
하지만 그 대상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오버히트는 짧은 한순간에 본신이 가진 능력 이상의 위력을 끌어내기 위해 몸에 심각한 부담을 주는 수법.
그만큼 일격의 위력은 증가하지만, 로건과 도미넌의 실력 차이는 그 정도로 메꿀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네가 자초한 일이다.’
로건의 눈이 차갑게 빛나고, 이내 그의 검이 바람처럼 휘둘러졌다.
뻐어억.
“크, 크윽. 다시…….”
꽈아앙!
“아, 아직.”
퍼억!
“이, 이럴 리가…….”
대련이 진행될수록 도미넌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멍하니 풀어졌고, 몸엔 부상이 늘어났다.
하나같이 치명적이지 않은 부위였지만, 거기에 실린 힘 하나하나가 도미넌으로서는 일순간에 전투 불능이 될 만한 수준의 강타였다.
그런데도 도미넌이 아직 기절하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로건이 힘을 조절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누구보다 잘 체감하는 이는 대결하고 있는 상대방이었다.
“이, 이럴 수가…….”
아무리 스스로를 세뇌하며 현실 도피를 한다 한들 이쯤 되면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망나니로 생각했던 대공자가 자신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단순히 신체 능력만이 아니라, 검술의 경지조차 그보다 뛰어났다.
‘내가 방심한 것이 아니었어.’
그 순간 도미넌은 전의를 잃었다.
그가 자신보다 강한 적을 상대로도 굴하지 않고 투지를 불태울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10년째 실력이 정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제가 졌…….”
뻐어억.
“커헉!”
전의를 상실한 도미넌이 항복의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목검이 그의 입을 강타했다.
그때부터 로건의 목검이 이전까지와는 달리 급소를 가리지 않고 사정없이 전신을 난타했다.
뻐버버벅.
‘쉽게 끝내면 안 되지.’
전생에서 용병으로 굴렀던 세월만 10년이었다.
그간의 경험은 위계질서가 필요한 단체, 특히 무기를 든 거친 사내들의 모임에서는 한번 기강을 잡을 때 확실히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본보기를 보이는 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도.
기사단 역시 넓게 보면 ‘무기를 든 거친 사내’들의 모임.
‘이미 몇 번의 기회를 준 것으로 자비는 확실히 보여 줬고.’
이제 남은 단계는…….
‘처벌!’
전생의 경험을 되새긴 로건은 목검을 더욱 빠르게 휘둘렀다.
“흐어…….”
“저런 잔인한…….”
결투의 흐름을 읽고 있는 이들에게서 동정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말리려 하는 이는 없었다.
이미 로건이 결투를 신청한 사유가 알려진 마당이었다.
이 상황에서 곧 은퇴를 앞둔 기사 하나를 돕기 위해 ‘저’ 대공자와 척을 지고 싶은 이는 없었다.
지켜보는 모든 이가 대공자의 실력이 평기사 수준을 훌쩍 넘어섰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허어…….”
“……저 실력은 진짜야.”
“어떻게 석 달 만에 저렇게 될 수가 있지?”
“포스를 각성했다면 그럴 수도 있긴 한데…….”
“그래도 검술 자체가 이렇게 확 바뀔 수가 있나?”
로건은 주변의 수군거림을 모두 듣고 있었다.
그리고 이 퍼포먼스의 의도가 충분히 충족되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로건은 무자비하게 휘몰아치던 검을 멈췄다.
“끄으으으…….”
털썩.
신음성과 함께 가족이 와도 알아보지 못할 고깃덩어리 하나가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그것에 신경을 쓰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 * * 로건 대공자가 기사를 이겼다!
소문은 순식간에 내성을 휩쓸었다.
전혀 믿을 수 없는 사건이었지만 워낙 목격자가 많았고, 그만큼 화제가 된 일이었기에 모두가 그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그리고 그 시간, 소란의 주인공은 진작 만나려고 했던 사람과 이제야 독대하고 있었다.
“제법이더구나. 각성을 이룬 것 같은데. 수련 중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역시 지켜보고 있었어.’
예상했던 질문은 아니었지만 대답은 지체 없이 나왔다.
“……그저 욕심을 버리고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수련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충실하게 안을 채운 포스가 느껴졌습니다.”
보통 사람이 듣기에는 헛소리로 들릴 만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로 로건이 전생에 포스 유저가 되었을 때 얻은 깨달음이었다.
가문의 복수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 맹세하던 그때.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개인적인 모든 욕심을 내려놓았던 시기의 깨달음.
마흔이 넘어서야 겨우 깨우친 진리였다.
죽도록 고생하며 극한의 수련을 견뎌 낸 끝에 자신의 한계를 넘어 포스를 각성하는 일반적인 기사가 들었다면 황당할 것이다.
그러나 먼저 그 길을 걸었던 상급 기사인 패드릭 맥라인은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움의 깨달음이라……. 네가 확실히 변하기는 한 모양이구나.”
로건이 아버지의 모습에 일이 생각대로 잘 풀려 가고 있다고 여길 때였다.
“그런데 그런 깨달음을 얻고 나와서 처음으로 한다는 짓이 기사 폭행이냐?”
“그자는 그럴 만한 죄를 지었습니다. 아버지께서도 병사들에게 자초지종을 듣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그랬지.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녀석을 그렇게까지 만들 필요가 있었느냐?”
“예. 있었습니다.”
“왜?”
“녀석은 자신이 모시는 주군의 핏줄을 기만하고 가지고 놀려고 했습니다. 그대로 내버려 뒀다면 가문의 기강을 해치는 독이 되었을 겁니다.”
로건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고, 패드릭은 그런 아들의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응시했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로건은 입 안이 긴장으로 바싹 말라 가는 것을 느꼈다.
피식.
“확실히 도미넌의 잘못이 크다. 애초에 본분을 잊고 너를 기만한 것이니.”
‘……에? 이렇게 쉽게?’
로건은 순간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니 특별히 처벌은 하지 않겠다. 그러나…….”
‘역시 그래도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
로건이 다시 바짝 긴장하며 집중하는 찰나.
“손속이 너무 과했다. 당분간은 자중하도록.”
“……예?”
너무나 의외의 말에 멍하니 반문하고 말았다.
“왜? 무슨 처벌이라도 받고 싶으냐?”
“아, 아닙니다.”
“자중하라고 한 말은 네가 잘했다는 말이 아니다. 착각하지 말고 다시는 허락 없이 이런 일을 벌이지 마라. 너는 아직 공식적으로 지위를 받은 적도 없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너도 따로 알아 둬야 할 일이 있다.”
“예?”
“곧 울브스 가문에서 리이나가 방문한다는구나.”
“아…….”
마침내 기다렸던 때가 왔다.
“그래. 너도 리이나도 내년에 성년이니까 그럴 때가 되었지. 통신구도 이용하지 않고 카이런 울브스의 친필 서한을 가지고 온다니, 당연히 그 일일 것이다.”
로건의 입에서 나온 탄성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한 패드릭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약혼녀가 실망하지 않게 사고 치지 말고 단단히 준비하고 있거라.”
아무래도 생각보다 가벼웠던 처우의 이유가 이것 때문인 듯했다.
‘하지만…… 아마도 아버지가 생각하시는 것과 반대의 일일 겁니다.’
파혼.
가문의 명예를 다시 한번 바닥에 처박는 사건.
전생의 이 당시엔 상처 입은 자존감에 미쳐 날뛰던 자신만큼은 아니더라도, 아버지 역시 극히 분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로건은 무어라 말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 * * 도미넌과의 사건이 있은 지 삼 일 뒤.
내성은 대공자와 관련된 또 다른 소문으로 떠들썩해졌다.
대공자의 약혼녀가 맥라인을 방문했다.
‘드디어…….’
로건이 기다렸던 소식을 들으며 각오를 다지는데, 릭이 환한 얼굴로 찾아왔다.
“우와아! 좋으시겠어요.”
“뭐가 말이냐?”
“제가 방금 다른 시종들 얘기를 듣고 왔는데, 말도 안 되게 예쁘게 자라셨대요!”
“그러니까 뭐가?”
“울브스 가문의 차녀요! 공자님의 약혼녀! 저도 어렸을 때만 봤는데 정말…….”
“벌써 내성에 들어왔다더냐. 준비해야겠군.”
“……네? 그게 다에요?”
“그럼?”
“와! 내 약혼녀가 왕국에서 유명한 미인이란다! 부럽지 인마! 이래야 정상인데?”
“……넌 대체 날 어떻게 보고 있는 거냐?”
“그야, 망나니…… 하하. 노, 농담입니다. 아니, 그…… 죄송합니다.”
로건은 조용히 한숨을 쉬며 옛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리이나의 방문.
그것은 예상치 못한 파혼 선언과 더불어 정신 줄을 놓아 버린 자신이 발작하듯 ‘그 일’을 저지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뭐 그 짓이야. 다시 안 하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아도 가문은 소란스러워질 것이었다.
사실 가솔들은 울브스 가문의 차녀가 방문한 목적이 무엇인지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저 다른 귀족 가문에서 손님이 온다니 약혼이나 결혼 같은 좋은 일로 잔치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있을 뿐이었다.
실제로 가주의 지시로 하인들이 연회를 준비하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파혼이 선언되는 순간 그 모든 게 취소되고 난리가 날 것이다.
그 미래를 알고 있는 단 한 명의 사람은 이 떠들썩한 광경에 씁쓸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다 무의미한 짓. 돈만 얻으면 된다.’
과거의 가장 큰 죄를 짓게 했던 사건을 이번엔 새로운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전생대로 내버려 둔다면 그냥 사라질 그 돈을 어떻게든 잡아야 한다.
다시금 전생의 기억을 되새김질하며 계획을 점검하는데,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가주께서 부르십니다.”
“……알겠다.”
싱글벙글 웃음이 가득한 릭과는 달리 방문을 나서는 로건의 발걸음은 묘하게 전투적이었다.
* * *
“리이나 울브스 공녀 드십니다!”
쿠궁.
유난히 우렁찬 시종의 목소리와 더불어 대전의 문이 열리고, 일단의 무리가 안으로 들어섰다.
“와…….”
“말도 안 돼…….”
“공자님 좋으시겠다…….”
리이나 공녀와 일행이 모습을 드러내자 대전 여기저기에서 일제히 탄성이 번졌다.
제게도 마찬가지로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며 로건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리이나 울브스.’
백옥같이 흰 피부와 흑요석을 닮은 새카만 눈동자.
그녀가 우아하게 걸음을 옮길 때마다 허리 근처에서 찰랑거리는 은빛 머리칼은 새하얀 드레스와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그런 그녀의 뒤를 따르는 이들은 늑대 문양 갑옷을 입은 기사 하나와 시종 넷.
왕국 3대 부호 중의 하나인 울브스 백작가의 행렬치고는 너무나도 단출한 인원이었지만, 그것을 초라하게 느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그들의 가장 앞에서 걸어 들어오는 리이나 울브스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꿀꺽.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고요해졌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고고하게 대전의 중심부까지 걸어온 그녀가 패드릭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남작님.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고운 목소리에 대전이 다시금 술렁였다.
‘하여간 대단하군…….’
저 아름다운 외모와 목소리에 낚여 거하게 실수한 적이 있는 한 사람, 로건만이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뿐이었다.
형식적이지만 화기애애한 인사가 오간 뒤, 그녀는 시종에게 건네받은 백작의 친서를 낭독했다.
“……그런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해 혼약을 파기하기를 요청합니다. 카이런 울브스 올림. 이상입니다.”
그녀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대전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장황한 미사여구가 들어가 읽는 데 30분이 넘게 걸린 친서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오러 유저가 될 줄 알았던 너는 이십 년이 넘도록 발전이 없고 약혼의 대상인 네 아들은 최악의 상태니, 우리가 굳이 격 떨어지게 너희와 함께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여기서 그만하자.
……라는 말이었다.
웃으며 리이나를 보던 패드릭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모두가 그의 눈치를 보며 숨을 죽였다.
“특별한 사유도 없이 파혼이라. 울브스에서 우리 맥라인을 모욕하고자 함인가.”
싸늘해진 패드릭의 목소리가 지극한 분노를 싣고 대전을 뒤덮었다.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처럼 공기가 날카로워진 그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남작님. 혹시나 그리 생각하실까 염려되어 제가 직접 사절이 되기를 청했습니다. 오해를 풀어드리고 싶어서 말입니다.”
처연한 표정.
“어린 시절 제가 이곳에 1년 가까이 머물렀을 때, 그날들의 기억이 아직 생생합니다.”
물기 어린 목소리.
“아름답고 고요한 이곳에서 로건 공자님과 만든 추억들, 어린 마음에 남겨진 그 소중한 순간들을 이렇게 버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시선을 돌려 로건을 바라보는 리이나의 양 뺨을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