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51)
51화달칵.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패드릭이 나지막하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구나, 로건.”
조금 길어진 붉은 머리 사이로 비치는 강렬한 안광은 이전보다 더 묵직하게 다가왔다.
‘강해지셨구나.’
기대하긴 했지만, 정말로 경지가 상승할 줄은 몰랐다.
20여 년 전의 천재 기사가 기어코 십수 년간의 정체를 넘어 최상급기사로 발돋움한 것이다.
‘이로써 승산이 더 늘었어.’
로건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걸렸다.
맥라인 가문의 가장 날카로운 칼이 더 예리하게 벼려졌다.
아직은 부족한 자신, 그리고 미래의 오러유저인 로니안과 빅토르가 성장하기 전까지 충분한 방패가 되어 줄 것이다.
만족스러운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성취가 있으셨군요. 축하드립니다.”
“그래. 모두 네 덕분이다. 고맙구나, 아들.”
“예? 가주님, 설마?!”
달라진 패드릭의 성취를 전혀 느끼지 못했던 드웨인이 화들짝 놀라자, 패드릭이 그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조금은 더 든든한 가주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고생 많았네, 드웨인.”
예전보다 확실히 여유가 느껴지는 목소리와 미소.
그에 드웨인이 감격한 눈빛으로 자신의 주군을 바라보았다.
“축하드립니다, 가주님! 툭하면 일 내팽개치고 수련만 하시더니, 결국 성과를 내셨군요. 지난 십수 년간 제가 개고생한 게 헛수고가 아닌 것 같아 정말 다행입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가주님.”
욕인지 칭찬인지 애매하기는 했지만, 진심으로 기쁜 표정을 짓는 얼굴이라 뭐라 하기도 어려웠다.
패드릭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화제를 돌렸다.
“지난 석 달간 별일 없었지? 특별히 내가 알아야 할 일이 있다면 자료를…….”
쿵.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막대한 서류 더미가 책상 위에 놓였다.
패드릭이 그 서류의 산을 보며 잠시 멍해져 있을 때.
“로건 공자님이 벌인 일이 좀 많아서요. 보시고 판단하시죠.”
드웨인이 환한 웃음으로 진짜 영주의 귀환을 환영했다.
그리고 세 시간 후.
“영지민에게 식량을 배급하며 그 댐인지 뭔지 하는 공사에 동원하고, 금광을 개발한 데다가, 황무지에 개간이 가능한 땅이 무려……. 허허허허.”
패드릭은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로건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 이게 다 사실이란 말이냐?”
패드릭이 아무래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고, 그에 대한 로건의 대답은 간결했다.
“네.”
“……가 보자. 보고 판단하자.”
패드릭의 입장에서는 3개월 만에 세상이 뒤집힌 꼴이라, 서류만 봐서는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로건은 말없이 웃으며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분명 패드릭이 기억으로는 맥라인 성의 서쪽 외성 문을 지나 말을 달리면 드문드문 풀 한 포기나 보일까 말까 한 메마른 황무지뿐이었다.
하지만 3년도 아니고 고작 3개월이 지났을 뿐인 지금은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수로라니. 허, 이 황무지에 물이 흐르다니. 정말, 정말…….”
가로세로로 교차하며 삼백 미터 간격으로 깔린 개수로가 거대한 들판을 뒤덮으며, 벌써 드문드문 푸른 풀들을 피워 내는 꿈같은 광경.
그리고 열한 명의 마법사와 수천 명의 영지민이 동원되어 더 이상 황무지가 아닌 땅의 한가운데에 짓고 있는 작은 목조 건물과 거대한 황토벽이 패드릭의 눈을 사로잡았다.
“평야를 개간할 영지민들이 살 큰 마을을 짓고 있습니다. 기존 소규모 마을 크기의 수십 배는 될 겁니다. 맥라인 타운이라 칭할 생각입니다.”
“허허…….”
그 경이로운 변화를 보며 패드릭은 감격한 듯 말을 잇지 못했다.
“타운이 완성되면 내년 봄이 오기 전에 잡초를 걷어내고 농사를 짓기 위한 개간을 시작할 겁니다. 조상들이 잃었던 맥라인 평야 이상의 소출량이 나올 수도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더냐. 그런데 영지민들이 쉽게 집을 옮기려 하겠느냐?”
“예. 타운에 산다는 영지민에게 개간 우선권을 줄 생각입니다. 거기다 새로 지을 집도 현재 대다수의 영지민이 살고있는 초옥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그래. 그렇구나.”
자신이 던진 질문이었지만, 누가 봐도 패드릭은 대답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체면도 잊은 채 사방을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그, 그 댐이라는 곳 좀 직접 보자. 어찌 이런 기적을…….”
패드릭의 목소리에서 떨림이 전해져 왔다.
로건은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하는 것을 관두고, 말없이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길을 안내했다.
댐과 수문을 본 패드릭은 어찌 이런 생각을 했느냐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내친김에 광산도 들러 금광석까지 확인한 그는 연신 로건의 어깨를 두드리며 감탄하기에 바빴다.
‘이 정도면 병사모집 정도야 쉽게…….’
로건이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릴 듯한 분위기에 흐뭇한 미소로 아버지를 지켜보는데.
“확실히 네가 나보다 낫구나.”
“그렇습니다.”
“…….”
“아, 뭐 최근의 성과만 봐서는 말이죠.”
“하하하. 아니, 아니야. 맞는 말이지. 네가 석 달 동안 한 일이 내가 30년 동안 한 일보다 낫다. 내가 자식 복이 있었어. 고맙다. 정말 고마워.”
아버지의 입에서 예전에는 상상도 못 했을 말들이 술술 쏟아져 나왔다.
절로 흐뭇한 마음이 드는데 갑자기 이상한 말이 이어졌다.
“이제 영주 업무는 너에게 다 맡겨도 되겠구나. 나는 기사단이나 철저하게 단련시키는 데 집중하면 되겠어.”
“……예?”
뭘 어쩐다고요?
“내일 오랜만에 아침 식사나 같이하자꾸나. 할 얘기가 많겠어.”
당황한 로건이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패드릭은 환한 웃음과 함께 바로 등을 돌렸다.
‘그 할 얘기 저도 많은……데…….’
산길을 내려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너무나 홀가분해 보여, 로건은 차마 붙잡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오랜만에 맥라인 일가가 모두 모인 테이블에서, 패드릭은 폭탄선언을 날렸다.
“로건을 후계자로 지정하고 오늘부터 영주 업무의 대다수를 맡기겠다.”
“쿨럭! 예?!”
하룻밤 사이에 마음이 바뀌길 바란 건 역시 무리였을까.
그냥 해 본 소리이길 바랐던 로건은 씹던 고기가 목에 걸릴 뻔했다.
“그러니 당신도 그리 알고, 로건이 문제없이 역할을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오.”
“……네.”
당연히 반대할 거라 믿었던 적(?)조차 다소 창백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이번엔 또 왜 저렇게 순순히 물러나?’
로건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메리안을 바라보는데.
“형님이라면 훌륭히 해내시리라 믿습니다.”
조금은 듬직해졌다고 생각했던 동생이 기름을 부었다.
‘……야 인마, 원래 네 자리라고!’
로건이 떨리는 눈썹을 부여잡고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영주 권한으로 해야 할 일은 거의 끝났기에, 이 시점에서는 자유롭게 움직이는 편이 더 나았다.
“나는 앞으로 기사단의 수련을 맡아, 가문의 전투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데에 집중할 것이다.”
“저기, 아버지. 다시 생각을…….”
“로건. 네 대에서 맥라인이 다시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도록.”
중간에서 뚝 끊겨 버린 말을 미처 끝까지 이어 나가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는 로건을 앞에 둔 채.
패드릭은 엄숙한 선언으로 상황을 종결시켰다.
“부담스러운 것은 안다.”
“아시면 다시 생각해 보시는 게…….”
“하지만 어차피 치러야 할 일이다.”
“굳이 왜 지금…….”
“그리고 나는 네가 그 역할을 훌륭하게 해낼 것을 믿는다.”
식사가 끝난 후 청한 독대에서 로건은 다시 한번 아버지를 만류해 봤지만, 그의 확고한 마음만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이 똥고집을…….’
로건이 머리가 지끈거려 오는 것을 느끼며 한숨만 푹푹 내쉬는데.
“네가 이 자리에 미련이 없는 것은 안다.”
패드릭이 덤덤히 내뱉은 의외의 말에 로건의 고개가 다시 들렸다.
“이제 와 드는 생각인데, 너는 가문을 네가 부양해야 할 짐으로 생각하는 듯싶더구나.”
“짐이 아니라…….”
“지금까지는 가문이 네 덕을 톡톡히 봤다. 이제 이 자리에서 네 덕에 성장한, 아니 성장할 가문의 덕을 좀 누리거라. 나는 네게 짐이 아닌 권리를 준다고 생각하고 싶구나.”
예상치 못한 진솔한 말과 따뜻한 눈빛에 로건의 마음이 흔들렸다.
“이번에 수련하면서 하나 확실히 깨달은 것이 있다.”
‘예. 그러니 최상급이 되셨겠죠.’
로건이 말없이 고개를 몇 번 끄덕이는데.
“내가 늙었다는 것이다.”
“……예?”
“네가 준 검공의 검술, 철혈검은 어떻게든 수습을 했지만 그 비전이라고 하는 것은 도무지 익히지 못하겠더구나.”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이어졌다.
“그 비전을 내가 어릴 적, 포스를 막 각성했을 시절에 배웠다면 가능했을 수도 있겠지. 하나 이미 세월이 지나 나만의 흐름을 새긴 나의 포스로는 그 뭐냐, 결정체의 생성조차 불가능하겠더구나. 억지로 생성한다 한들 심장에 무리만 갈 듯하여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허…….”
“그것을 포기하며 생각했다. 이제는 내가 아닌 너나 로니안 같은 아이들의 시대가 되겠구나, 하고. 뭐 그 덕에 오랜 세월 막혀 있던 벽을 넘을 수 있었다만. 나는 이제 너희에게 길을 열어 주는 길잡이 역할로 물러나고 싶구나.”
두 번의 삶을 통틀어 처음 보는 아버지의 약한 모습에, 로건은 더 이상 반발을 할 수 없었다.
아직도 조금은 찜찜한 마음이 남아 있었지만, 기왕 이렇게 된 것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따로 움직여야 할 때는 드웨인에게 떠넘기면 되지.’
다만 업무 시간에 수련할 수는 없을 테니 억지로라도 개인 훈련 시간은 더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아니면 보통 때도 드웨인에게…….’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덩치 큰 가신이 왠지 모를 으스스한 기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는 것을 알 리 없는 로건은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아…….’
그리고 긴 한숨 끝에, 로건이 답을 내렸다.
“예. 알겠습니다.”
끼이이익.
흡족한 아버지의 미소를 보며 돌아 나오는 길.
로건이 복잡한 감정을 곱씹으며 발걸음을 옮기는데, 얼마 가지 않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누군가와 마주쳤다.
“……어머니?”
“대공자. 나와 얘기 좀 할까요?”
처음 듣는 그 어색한 존대에, 로건은 그녀의 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 역시 궁금한 점이 있었고.
“아까…… 왜 가만히 계셨던 겁니까?”
“가만히 안 있으면요? 배신자 가문의 가모가 더 이상 가문의 일에 발언할 권리가 있을까요?”
생각보다 더욱 과격한 자책 어린 어조에, 로건은 선뜻 말을 잇지 못했다.
전쟁 직후보다는 조금이나마 편안해 보였지만, 여전히 창백한 안색은 그녀의 심리 상태가 여전히 편치 않음을 보여 주었다.
“대공자가 보여 준 성과는 후계자가 되기에 충분해요. 이제 나는 그저 로니안이 잘되기만을 바랄 뿐이죠. 아니, 예전에도 그랬었죠. 그래서 대공자와 척을 진 거였고.”
“……죄송합니다.”
“대공자가 죄송할 이유는 없어요. 오히려 내가 사과해야지.”
“예?”
“대공자는 전에 내게 사과했었죠. 한심하게도 내가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내가 속이 좁아 그런 것이니, 너그럽게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요.”
의외의 말이 연이어 이어지며 로건의 말문을 막았다.
“요즘 로니안에게 검술을 가르친다면서요?”
“……예.”
다행히 로니안은 아버지와 달리 일주일 만에 포스코어를 생성하고 이미 1식 파랑참(波浪斬)을 연습 중이었다.
원래 천재라서 그런지 자신처럼 극단적인 감각의 증폭이나 신체의 변화는 없었지만, 본인이 느끼는 감각은 또 다른지 아주 신이 나서 수련 중이었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 마침 좋은 화젯거리가 나오자 입이 쉽게 열렸다.
“로니안이 천재라서 쉽게 실력이…….”
“그 아이가 요즘처럼 밝아 보이는 것이 몇 년 만인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게 그쪽이 아니었구나 싶어 움찔하는데.
“앞으로도 로니안을, 동생을 잘 부탁해요.”
새어머니가 씁쓸한 웃음과 함께 돌아서며 남긴 마지막 말이 잊고 있었던 아련한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요란하게 울다가도 자신이 안으면 거짓말처럼 울음을 그치던 아기.
작은 손발을 꼼지락거리며 방긋방긋 웃던 갓 태어난 아기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서운한 듯 쳐다보던, 지금보다 훨씬 젊고 밝은 표정의 검은 머리 미녀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 우리 아가는 나보다 형이 더 좋은가 보네.
– 헤헤. 어머니, 동생은 제가 평생 지켜 줄게요. 신께 맹세해요!
– 그래, 로건. 동생을 잘 부탁해.
평화로웠던 날의 기억.
자신의 추한 질투로 망가트렸던, 그 아름다운 날들의 기억이.
꾸욱.
부끄러움에 절로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 다시 만들어 가면 돼.’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다.
다시금 얻은 이 삶이 새삼 감사하게 느껴지는 순간.
로건은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멀어지고 있는 새어머니의 뒷모습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자식에게 존대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귀부인의 뒷모습이 멈칫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는 예전처럼 다시! 편히 말씀해 주십시오, 어머니!”
구구절절한 사과의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가슴을 울리는 외침이었다.
고개를 숙인 귀부인이 조용히 눈물을 떨구고.
방 안에서 아들의 목소리를 들은 중년인이 조용히 미소를 지을 때.
그 말을 남긴 당사자는 붉어진 얼굴로 돌아서며 황급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