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52)
52화다음 날.
– 영주님께서 친히 중급 검술을 전수한다.
전날, 그 믿을 수 없는 말을 접한 맥라인의 기사들은 이른 새벽부터 연무장에 모여 있었다.
“우리 가문에 전수 운운할 만한 중급 검술이 있었던가?”
“그냥 가주님의 요령을 말씀해 주시는 것 아닐까?”
“그거야 이미 많이 조언해 주셨잖아. 그게 전부라면…….”
“에이. 그래도 허언을 하시는 분은 아닌데.”
저마다 웅성거리는 기사들의 목소리가 점차 커질 때 쯤.
연무장의 구석에서 익숙한 얼굴의 중년인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그 인기척을 눈치채자마자 기사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영주님을 뵙습니다!”
“주군을 뵙습니다!”
예의를 갖춘 정중한 인사였지만, 그런 기사들을 보며 들어서는 패드릭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정말 둘로 나뉘어 있구나. 우리 기사단이 둘이던가?”
어이가 없다는 듯한 패드릭의 목소리에 기사들이 동시에 움찔했다.
그 말대로 현재 기사들은 41명과 32명 두 무리로 나뉘어 서로 남인 듯 정렬해 있었으니까.
한쪽은 원래 맥라인의 기사였던 이들, 다른 한쪽은 테스론에서 전향한 기사들이었다.
“한때는 목숨을 걸고 싸웠던 사이니 쉽게 가까워질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한다.”
두 주군을 섬기는 것은 기사에게 평생 따라다닐 불명예에 속했지만, 타국과의 전쟁이 아닌 국내의 영지전이었다.
그것도 전 주군이 목숨을 잃고 그 핏줄마저 사라진 상황이니 테스론의 기사들이 선택할 길은 하나뿐이었고, 그것은 불명예에 속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기사의 도리를 안다면 차차 나아질 것으로 생각했거늘, 오히려…… 쯧.”
허탈한 듯 혀를 차는 어조와는 반대로 점차 강해지는 기세.
붉은 머리, 붉은 눈의 중년인이 서 있는 뒤쪽으로 비치는 새벽노을이 순간 핏빛으로 보였다.
“내가 침묵하는 사이 황당한 소문이 들리더구나. 텃세에 태업이라니,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그 소문이 사실임을 알겠다.”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차는 가주와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기사들은 하나둘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패드릭의 기세는 아직도 커지고 있었다.
“배가 불러서 그런 거야. 배가 불러서. 나는 강해지겠다고 죽도록 수련하고, 내 아들은 영지를 위해 동분서주하는데…….”
천천히 걸어오는 가주의 모습은 느긋해 보였지만, 압박감은 어느 때보다 크게 느껴졌다.
“영지를 지켜야 할 기사들이 어린애처럼 자존심 싸움이나 하고 있다니. 내가 그동안 너무 신경을 안 썼어. 암, 다 내 죄지. 내 죄야. 그렇지?”
이윽고 패드릭에게서 뿜어진 기세가 기사단 전체를 압박했다.
가장 앞에서 그 기세를 마주한 헤인켈은 가주가 한 단계 더 강해졌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모시는 주군이 수십 년의 정체기를 벗어났다는 것에 기뻐해야 하건만.
“아닙니다!”
주군 앞에 떳떳하지 못한 지금은 더욱 긴장되기만 했다.
“절대 아닙니다!”
살벌해지는 기세,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기사들 역시 그에 호응해 일제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내 잘못이 맞아.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신경을 좀 쓰려고 해. 괜찮지?”
“물론입니다!”
“그래. 그럼 일단…….”
꿀꺽.
기사들이 긴장하여 자신들의 주군을 바라볼 때.
패드릭이 집어 든 목검에서 2m가 넘는 붉은 빛줄기가 솟아올랐다.
“헙!”
“저, 저건?!”
긴가민가하던 기사들조차 자신들의 영주가 최상급의 경지에 올랐음을 확실히 목격하자 눈동자가 커졌다.
“검술은 몸으로 배우는 것이 정석이지. 차례로 튀어나와라.”
하지만 지금의 그들에게는 그것이 재앙일 뿐이었다.
암울해지는 기사들의 표정을 보며 패드릭은 얼굴을 더욱 차갑게 굳혔다.
‘개같이 구르다 보면 엄한 생각은 못 하지.’
아들에게 제대로 된 기사단을 물려주기 위해.
그는 어떤 고생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 * * 명상에서 깨어나 아침 수련을 마치고 집무실로 향하는 길.
로건은 복도에서 드웨인과 마주치자마자 인사 대신 용건부터 꺼냈다.
“병사 모집 공고는 냈지?”
“예. 겨울의 시작과 함께 양쪽 성에서 모집을 시작할 겁니다. 병사를 담당하는 페란이 갑작스러운 증원 소식에 당혹스러워하고 있지만, 돈은 많으니까요.”
뭔가 앞뒤 연결이 이상한 드웨인의 말에, 로건이 헛기침을 내뱉었다.
“크흠. 돈은 돈이고 일은 사람이 하는 거지. 좀 도울 일은 돕고…….”
“돈이 많은데 무슨 걱정입니까. 알아서 하겠죠.”
싱글벙글 웃는 드웨인의 얼굴은 정말 걱정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였다.
‘……이 아저씨도 확실히 변했어.’
한숨이 나왔지만 굳이 어떻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뭐, 앞으로는 정규 병력의 훈련도 아버지가 맡을 거야.”
“가주님은 기사들 훈련을 맡기로 하신 것 아니었습니까?”
“병사들도 넓게 보면 기사 후보생이잖아. 아버지가 맡으면 각성자가 더 많이 나올지 누가 알아?”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은 영지 관리의 기본.
아버지가 너무 일찍 전권을 넘긴 것을 후회하도록 빡빡하게 굴릴 생각이었다.
“허허. 뭐, 알아서 하십시오.”
다행히 어느 순간부터 예스맨이 되어 버린 드웨인은 전혀 반발하지 않았다.
“영지민들은 다들 일 끝내고 돌아갔지? 한 달 뒤쯤에는 다시 모아야 할 텐데 그전에는 푹 쉬게 해 줘.”
“그 마을 공사 말씀하시는 거죠? 이미 공지해 놨습니다. 영지민들 반응도 좋구요.”
“……반응이 좋다고?”
겨울이 시작되고 쉬어야 할 시간에 노동을 시키는데?
“그만큼 공자님이 보여 주신 게 있으니까요.”
“허어…….”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로건은 이 역시도 좋은 게 좋은 일이라며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식량도 주실 거 아닙니까. 거기다 어차피 자기들이 살 집인데요.”
듣고 보니 드웨인의 말도 그럴듯하긴 했다.
“그리고 병사 모집을 할 때…….”
“으아아아악!”
그 순간, 저 멀리서 로건의 음성을 씹어 삼키는 요란한 비명이 들려왔다.
그 처절한 목소리에 둘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
“…….”
“연……무장에서 나는 소리 같은데요?”
“그래. 그래 보이는데, 지금 거기선 기사 훈련이…….”
쾅!
“떠얿……!”
기괴한 비명과 함께 멀리서도 확연히 보이는 붉은 빛이 솟구쳤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응답하듯 연무장 담장 위로 솟구치는 건장한 기사의 모습도 보였다.
“사, 살려 주……!”
“영주님. 자, 자못했쓰니…….”
“론! 정신 차려! 눈 떠!
연무장에 가까워질수록 더 또렷하게 들리는 처절한 목소리들에 둘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기사단 훈련이 원래 저랬……던 가요?”
그에 로건은 바로 그 말도 안 되는 승마 훈련을 떠올렸지만.
“그럴 리가…….”
저런 곡소리가 나올 정도는 아니었다.
“뭐, 아버지가 새로 계획하신 훈련인가 보지.”
마음을 독하게 먹으셨구나.
의외의 일이긴 했지만, 로건의 감상은 딱 그 정도였다.
그저.
“저, 저는 오늘부터 병사들 훈련 담당…… 뜨헓!”
“다른 일은 전부 로건에게 맡겼다. 너희들은 한동안 나랑 수련만 하면 돼!”
기사들의 가장 중요한 의무 중 하나도 자신이 맡게 되었다는 것을 얼떨결에 알게 되었을 뿐.
‘뭐, 병사 모집도 내가 할 거니까.’
어차피 병사들의 수준을 끌어올려야 하는 그로서는 나쁘지 않은 이야기였다.
다만,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 * *
“로건 님이 대체 왜 그러신대요? 요즘 거의 그냥 독단으로…….”
요즘 이런 불만이 드웨인에게 많이 접수되고 있었다.
하지만.
“공자님이 어련히 생각이 있으시겠지. 뭘 따지고 드는 거야? 지금 예산 많아지니까 뵈는 게 없어?! 그 예산이 어디서 나오는데! 어? 그냥 로건 님이 하라면 해. 까라면 까야지!”
부하의 질문에 귀 기울이며 조금이라도 돈을 아낄 방안을 찾던 예전의 재무담당관은 사라지고 없었다.
“드, 드웨인 님?”
드웨인의 눈에는 이미 뵈는 것이 없었다.
‘관리 인생 20년. 예산 걱정 없이 서류에 사인할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일인 줄 몰랐다.’
그리고 그는 그 행복을 방해할 어떤 요인도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처, 천만 골드는 될 금괴를 다 쓰시겠다고요?! 왜요? 도대체 또 뭘 하시려고요?!”
하지만 드웨인은 지금 그에게 행복을 주었던 돈이 안개처럼 스러지는 환상이 보이는 듯했다.
“다음 달에 배로 준다니까. 걱정하지 마.”
대충 들어도 사기꾼 같은 소리였지만, 그걸 지껄이는 놈이 하필이면 예산의 주인이었다.
“그, 그래도 그 말도 안 되는 지출이 왜 필요한지는 알아야…….”
“미스릴을 살 거야. 좀 많이.”
“……예?”
“미스릴.”
“뭐를 사요?”
“미스릴을 산다고. 100㎏ 정도.”
“도대체 왜요?!”
드웨인이 발작하듯 소리를 빽 질렀다.
신의 은(銀), 미스릴(Mithril).
자체적으로 마력을 품고 있으며 제련된 강철보다 열 배 이상의 강도를 가지고 있고, 무게는 1/3밖에 되지 않는다는 희귀한 마력 금속.
철광이나 금광, 은광 속에서 희귀하게 소량만 채취되는 금속이며 그 가치는 같은 무게인 금의 1,000배에 달했다.
그러니 드웨인으로서는 미치고 펄쩍 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미스릴을 100㎏이나 사서 대체 뭘 하시려고요!”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로건은 반론을 받아 주지 않았다.
“그놈의 왜요, 왜요. 지치지도 않아?”
“……예?”
“내가 너라면 지쳐서라도 안 하겠다. 여태 내가 한 일 중 잘못된 게 있었어?”
“그, 그거야 그렇지만.”
실적이 만들어 낸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드웨인의 반발심을 묵직하게 짓눌렀다.
할 말이 많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고통받는 드웨인의 모습에 피식 웃은 로건이 이유를 말해 주었다.
“기사들 무기 좀 만들어 주려고.”
“예? 미스릴 무기라니, 그, 그 무슨 돈지랄…….”
“돈지랄이라니! 다 통짜 미스릴을 주겠다는 것도 아니야. 그 정도로 사 모아도 기사들 수를 생각하면 미스릴 합금 정도가 최선일 텐데.”
“으으, 금광 하나 캤다고 돈 개념이 사라지셨군요…….”
좌절하는 드웨인을 보며 로건은 위로하듯 말을 더했다.
“타 영지보다 박봉을 받으면서 고생해 온 기사들이야. 이제라도 할 수 있는 만큼 대우해 줘야지.”
“그, 그게 꼭 미스릴 무기일 필요가 있을까요?”
“돈도 있고, 드워프도 있고. 못할 건 또 뭐야? 한 달 치 수익만으로 그 정도면 합리적 소비지.”
“하, 합리적……. 허허허.”
자고로 과소비는 습관이었다.
이 터무니없는 소비를 합리적이라 말한다면 앞으로도 이런 일이 계속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드웨인의 상상 속, 꽃길만 펼쳐질 것 같던 미래가 실시간으로 어두워지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말려야 하는데. 말릴 수가…….’
그러나 이 과소비의 주동자는 그 자신의 말대로 실적으로 모든 것을 증명해 왔다.
더구나 사실 금광은 그의 개인 소유였으니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이미 결정했으니 그리 알아. 돈 급한 일 있으면 좀 미뤄 두고.”
의논이 아닌 통보를 남기고 떠나가는 로건.
이미 결심을 내린 듯한 그는 이제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쿵.
“……가주님, 너무 빨리 넘기셨습니다. 크흐흑.”
방문이 닫히고, 홀로 남은 행정관은 아무도 듣지 않는 곳에서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기사 전력의 확실한 강화 방안.’
무구의 질적 향상.
누군가에게는 돈지랄이었지만, 로건에게는 반드시 해야 할 일 중 하나에 불과했다.
마음 같아서는 아예 아티팩트를 선물하고 싶지만, 기사 전력 모두에게 아티팩트 무구를 주는 것은 아무리 금광을 가졌다 해도 무리였다.
‘대부분이 평기사 수준인 기사단에 통짜 미스릴 무기는 오히려 가볍기만 해서 낭비고.’
모든 걸 고려해 보았을 때 이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미스릴 합금 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 해도 최소 10%에서 최대 20%까지의 전력 상승은 충분히 기대할 수 있을 테니까.
‘내 검 정도는 통짜 미스릴로 만들어 볼까?’
상상만 해도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 역시 기사인 이상 훌륭한 무기에 대한 욕심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전생에는 미스릴 합금 무기도 구경해 본 적이 없었지만, 이제는 조금 더 욕심을 내도 괜찮을 듯싶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입니다.]필립의 단호한 한마디가 그 희망찬 기대를 바닥으로 끌어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