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59)
59화
“……어스 월(Earth wall)!”
클레이튼이 나직이 시동어를 외자, 선이 그어져 있던 마을의 경계를 따라 100m 길이의 흙벽이 솟아올랐다.
우우우웅.
쿵.
“우와아아아아!”
장관에 감탄하는 인부들의 환호성.
그 환호성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십장들이 여기저기서 소리를 질렀다.
“다들 뭐 해! 흙 다져!”
폭 1m, 높이 3m의 흙벽은 인부들의 삽질이 더해지며 부피와 높이는 조금씩 줄어들었지만, 더욱 단단해지며 일정한 굳기로 튼튼한 외벽을 형성해 갔다.
로건은 땀을 흘려 가며 마법을 유지 중인 클레이튼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다시 한번 무리한 조건을 들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단순히 계약에도 없는 공사를 넉 달이 넘도록 함께하며 고생하고 있기에 하는 말이 아니었다.
마탑을 짓고자 하는 이에게 잘 지어진 성의 안쪽도 아닌, 이제 막 공사를 시작하는 개척 마을의 중심부를 권했으니.
클레이튼이 흔쾌히 수락했으니 망정이지, 상식적으로는 모욕을 받았다며 길길이 날뛰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로건 님, 예가 과합니다. 연 1천만 골드의 지원금을 약속하셨는데 성이면 어떻고, 마을이면 어떻겠습니까.”
“하하.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구요.”
“왕국 최대의, 성보다 큰 마을의 중심이라니. 오히려 흥미롭지요. 불만은 전혀 없습니다.”
흐릿한 미소와 함께 나온 진지한 어조는 깊게 고민하지 않아도 그것이 진심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확실히 농민들이 대단위로 함께 거주하는 개척마을이라는 것은 그에게도 생소한 개념이었다.
카일 같은 교역 도시를 제외하면, 현시대 대부분의 영지민들은 영주의 집이자 영지의 상징인 성을 중심으로 성 밖 곳곳에 마을을 만들어 각자 생활했다.
가신들이나 기사, 병사들 혹은 대장장이 같은 중요 기술직들이나 성안에서 살 뿐 영지 인구의 대다수가 성 밖에 사는 것이다.
그런데 성보다 큰 마을을 만들어서 영지민들을 한데 모여 살게 한다니, 들어 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공자의 계획대로 된다면, 맥라인이나 테스론 성보다도 이 타운이라는 곳이 영지의 중심이 될 겁니다. 보통은 이 정도 평야면 가운데 성을 지어…….”
“굳이 그럴 필요 있나요. 괜한 시간 낭비지. 영지민들이 농사짓고 살기 편하게 만들어 놓으면 충분합니다.”
“역시…….”
“예?”
“아니, 아닙니다.”
다수의 영지민이 한자리에 모여 있으면 반란의 위험도 커지기 마련이다.
보통의 영지에서 영지민을 십수 개의 마을로 나눠 놓는 것은 그런 위험성 때문이기도 했다.
그에 대한 로건의 답은 간단했다.
“그거야 영지민들을 착취하지 않으면 될 일이지요. 잘 살게 해 주겠다는데 반란이 일어나겠습니까.”
“정말…… 대단하십니다.”
클레이튼의 삭막한 얼굴에 따스한 미소가 걸렸다.
‘여타 귀족들과 생각의 근본이 달라.’
로건으로서는 미래 제국의 정책이 성공하는 것을 보았기에 따라 하는 것뿐이지만, 클레이튼의 눈에는 그저 비범한 젊은이일 뿐이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아직 양심이 건재한 로건은 그런 감탄의 눈빛이 부담스러워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공사 관련이건 마탑 관련이건 간에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여유가 되는 대로 즉각 지원하겠습니다.”
상대방이 필요 이상으로 적극적으로 나와주는데 자신도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야 좋은 관계를 지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이 타운 공사가 실패해서 유령마을이 되면 그때는 저희 학파에 조금만 더 신경 써 주십시오. 텅 빈 마을에 외롭게 있기는 싫……. 하하, 농담입니다. 재미……없으셨나요?”
더럽게 재미없는 농담에 안색이 굳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크, 크흠. 죄송합니다. 제가 농담에 재주가 없어서……. 큼, 그럼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인데 이 흙으로 만든 외벽, 정말 괜찮겠습니까? 혹시나 이곳이 침략을 받는다면…….”
또 분위기를 흐릴까 말끝을 흐리기는 했지만, 클레이튼의 말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로건의 대답은 빠르고 단호했다.
“하하, 아닙니다. 이곳이 전장이 되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좋은 날에 제가 또 괜한 말을 했나 보군요.”
“아닙니다. 정말 이곳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그렇게 놔두지 않을 것이니까요. 이곳은 그저 맥라인의 중심으로만 남아 있으면 됩니다.”
“역시 민생을 생각하시는 마음이…….”
클레이튼은 또다시 감탄하며 웃었지만, 로건의 속내를 알았다면 절대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그전에 우리가 다른 곳을 쳐들어갈 생각이니까.’
로건은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클레이튼이 무슨 오해를 하든 계획이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만족스러웠다.
* * * 로건이 직접 나서서 진행해야 할 일들은 대부분 이미 실행되었거나 안정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영주 대행의 일과 업무도 시간이 갈수록 빨리 끝났다.
“확인했고.”
쾅.
“이것도 확인했고.”
쾅.
“자, 난 그럼 이만 수련하러…….”
“고, 공자님. 제대로 검토는 하고 도장을 찍으시는 겁니까?!”
“그럼 드웨인이 한 번 더 검토하고 이상 있으면 다시 올려!”
“이, 이러시면 제가 혼자 일하는 것과 무슨 차이점이…… 벌써 갔냐…….”
털썩.
“야 이 애비보다 더한 놈아! 가문 말아먹……진 않았지. 에휴, 썩을 내 팔자야…….”
물론, 그것은 한 행정관의 비자발적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나만 강해지면 돼!’
다행히 로건의 그 소망도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었다.
우우우웅.
스팟.
자그마한 소음과 함께 로건의 검 끝에서 황금빛 선이 쏘아졌다.
아주 잠깐의 순간 피어난 그 빛은 눈앞의 거대한 바위를 뚫고 그 뒤의 아름드리나무를 몇 개나 관통한 뒤에야 사라졌다.
바위와 나무에 남은 것은 동전만 한 크기의 상흔뿐.
하지만 로건은 그 상흔이 설령 강철이라도 가볍게 뚫어 버릴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신검 비전 2식.
무쇠 가르기(斷金斬, 단금참).
일반적인 기사, 포스유저는 꿈도 못 꿀 강력한 일격을 펼쳐 낸 로건은 구슬땀을 흘리면서도 환히 웃을 수 있었다.
그렇게 불과 한 달 뒤.
“맥라인 타운 중앙에 지은 3천 가구의 집이 완성되어 공사 인부로 참여한 이들부터 서서히 이주를 시키고 있습니다.”
성벽 관리 담당이던 배불뚝이 루펜은 갑자기 늘어난 업무에 살이 쏙 빠졌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부하의 건강에 좋은 일이라 생각하는 로건은 루펜의 퀭한 모습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저 반가운 보고 내용에만 관심을 둘 뿐이었다.
“생각보다 빠른데? 바로 개간 시행하는 거지?”
“예. 마법사님들이 적극적으로 협력해 주셔서 생각보다 속도가 붙고 있습니다. 2주 정도 뒤에 하마르 님이 점검을 오실 때쯤이면 목표로 했던 네 개 구역, 총 1만 가구가 완공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역시…….”
클레이튼을 비롯한 골렘 학파 마법사들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들은 정말 ‘노가다 전문’이라는 별명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생산적인 마법사들이었다.
“확실히 마법이 좋긴 좋아.”
만족스럽게 미소를 짓던 로건은 문득 보고를 되새기다 한 가지 어색한 단어에 생각이 미쳤다.
“그런데…… 점검하러 온다고? 하마르 지금 거기 없어?”
“초반에 마탑 시공 시작하고 시범 목재 가옥 열 채 정도 지으신 뒤부터는 가끔 점검만 하고 계십니다. 공자님께서 시킨 일이 아닌가요?”
“아니, 특별히 언급은 안 했지. 효율적으로 일이 진행만 되면 문제 될 건 없긴 하지만, 그래도 마을 일이 중요한 건데…….”
“아, 그 무기를 만드시는 일이 바쁘다고…….”
“아, 그것 때문이었군.”
대번에 이해한 로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존 병사와 새로운 병사들에게 줄 석궁. 그것만 해도 1300개였다.
과거의 속도를 생각하면 그것만 마무리하는데도 앞으로 석 달은 더 있어야 할 것이다.
‘역시 고생이 많아. 석궁 제작이 끝나는 대로 바로 기사들 무기 만드는 일도 시켜야 하니 이쯤에서 좀 다독여 줘야겠어.’
로건이 흐뭇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 * * 스각스각.
꾸우욱.
철컥.
“휴우…….”
맥라인 성에서 대장장이로 일하고 있는 죠셉은 또 하나의 석궁을 완성하고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마흔을 넘어서는 나이에 도제처럼 새로 일을 배우려니 죽을 맛이었지만, 이런 신무기의 부품을 만들고 조립하는 일은 중년의 나이에도 발전하는 기분을 안겨 주었기에 불만은 전혀 없었다.
‘영원히 부품만 만들게 할 줄 알았는데.’
드워프 하마르의 공방으로 불려 온 그와 그의 동료 다섯은 한 달 전부터 본격적으로 무기 제작에 참여하게 되었다.
원래 하던 부품 제작은 자신들의 도제들에게 맡겨 놓은 채, 무기를 조립하는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솔직히 예상치도 못한 행운이었다.
이 일이 끝나더라도 이 제작 공정을 기억하고 있는 한 앞으로 굶을 일은 없을 것이다.
‘아니, 떼돈을 벌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아직은 어디까지나 상상에 불과할 뿐이었다.
장밋빛 미래에 관한 생각을 몇 번 머리를 흔들어 털어 버린 죠셉은 완성한 작품을 들고 하마르에게 다가갔다.
“하마르 님, 또 하나 완성했습니다. 그럼 이걸로 오늘 할당량은…….”
“인생은 즐거~ 아, 그래? 그러면 저기 가져다 놓고 쉬어.”
책상에 앉아 콧노래를 부르며 작은 철목을 조각하던 드워프가 시선과 손놀림은 그대로 조각품에 고정한 채 발가락으로 창고를 가리켰다.
짧은 다리를 억지로 쭉 뻗어 발가락질(?)을 하면서도 손놀림은 완벽하게 섬세한 조각을 하는 모습.
다소 웃기기도 했지만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하루에 두 개만 만들고 쉬어도 되는 건지……. 제가 좀 허투루 돈을 받는 것 같아서요.”
“괜찮아. 너희들 다 합쳐서 한 달에 200개 할당량만 채우면 되는데 뭐.”
여전히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내뱉는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그래도…….”
“일찍 끝내 봤자 그 악마 주인 놈이 또 다른 일을 시킨다고. 사람이 좀 여유가 있어야지 말이야. 지가 안 쉰다고 다른 사람도 안 쉰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이렇게 쉬엄쉬엄해야 일도 효율이 오르지.”
“하하. 예, 그건 그렇…… 허읍!”
웃으며 대답하던 죠셉은 갑자기 자신의 어깨를 잡아 누르는 강인한 힘에 놀라 헛숨을 삼켰다.
그가 고개를 돌린 순간.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 한 사람과 눈이 마주치며 죠셉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보고하던 죠셉이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내었지만 하마르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200년 전 자신의 첫사랑 느와르의 모습은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했다.
그 아름다운 눈동자를 조각하는 동안은 잠시의 한눈도 팔 수 없었다.
“최선을 다해야 할 텐데. 이렇게 놀아도 돼?”
“최선을 다한다는 게 다른 게 아니에요. 쉴 건 쉬어 가면서 일정에 딱 맞추면 되는 거지. 안 그래?”
“아, 그래서 타운 공사에도 안 가는 거구나.”
“그래. 설계도도 만들어 줬고, 기초 가옥 몇 개 지어 주며 시범 보였으면 됐지. 내가 거기서 종일 죽치고 있어야 할 필요가 뭐가 있어. 일은 효율이야, 효율. 근데 너 갑자기 말이 짧아졌다?”
오늘따라 말이 많은 죠셉 놈의 태도가 거슬리긴 했지만, 요즘 기분이 좋은 하마르는 관대하게 넘어가기로 했다.
“이렇게 안 놀고 일을 도우면 영지 일이 훨씬 빨리 마무리되지 않을까?”
“거참, 내가 몇 번을 말해? 우리는 최선을 다해 일정만 맞추면 되는 거야. 근데 너 그 말투 좀 재수 없다. 되게 듣기 싫은 목소리야. 존대도 안 하고…….”
“아, 다 내 잘못이구나. 그럼 내가 일정을 너무 넉넉하게 잡았네. 그래, 다 내가 잘못했네.”
“그렇…… 어억?!”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하마르가 본능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아름다운 느와르의 눈동자에 생채기가 났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불길한 예감에 등골이 서늘해지고, 끼긱거리며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돌리자.
한창 내성에서 서류와 씨름하고 있거나 검술 수련을 하고 있어야 할 주인 놈이 서 있었다.
기묘하게 번득이는 붉은 눈동자와 경련을 일으키는 눈가, 당장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듯 움찔거리는 손이 굉장히 불길하게 느껴지는 모습으로.
“주, 주인. 굳이 여기까지 왜. 하, 하하하.”
“이야, 우리 하마르. 볼살도 포동포동한 것이 보기 좋네. 요새 삶이 아주 편한가 봐?”
분명히 웃고 있는데 왜 이렇게 무서워 보일까.
“나는 그것도 모르고, 고생한다고 맥주랑 먹을 것까지 바리바리 싸 들고 왔네. 바보같이 말이야.”
흘깃 주인의 뒤편을 보자 맥주로 가득한 오크통과 통돼지 바비큐 같은 것이 보였다.
왜 저 향기로운 냄새를 미리 맡지 못했을까.
맡았다면 일하는 척이라도 했을 텐데.
‘아름다운 느와르. 당신과의 추억이 내 이목을 흐렸구려. 덕분에 난…… 어흑.’
엄습하는 암울한 예감에 고개를 떨구는데.
“에이. 왜 울어, 우리 ‘효율적’으로 일하는 대장인님께서. 좀 더 놀아, 놀아. 거기 대장장이들, 맥주 좀 마시고 쉬어. 오늘 일과 끝났다며!”
크게 소리치며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어깨에 척 올린 팔.
양팔 사이로 번들거리는 붉은 눈동자가 하마르의 눈앞에서 짙은 살기를 뿜어냈다.
“이번 달 내로 석궁 다 만들고, 타운 공사까지 마무리 지어. 딱 한 달 준다. 못하면…….”
스윽.
서서히 목을 긋는 엄지손가락을 본 하마르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