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6)
6화
“어…….”
“흐음…….”
“저런…….”
로건과 리이나를 번갈아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던 그때.
‘썩을…….’
로건은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욕설을 억지로 삼키며 표정 관리를 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분명 어린 시절의 리이나는 활기차고 귀여운 아이였다.
두 아이는 분명히 친했고, 한정된 시기에나마 정말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하지만 시간이 그녀를 변하게 한 것일까.
– 당신이 정말 나와 어울린다고 생각하시나요? 주제를 알고 좀 꺼져 주세요. 어린애한테도 지면서 칼은 왜 차고 다니는지…….
전생의 이 시기.
감정적으로 극한에 몰려 있던 그를 폭발시켰던 그녀의 귓속말.
수십 년을 후회하게 한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그의 기억에 생생한 이상, 저건 그냥 개소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참아야 했다. 아직은 나서야 할 때가 아니었다.
그렇게 그가 굳은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대전의 분위기는 묘한 쪽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가문에 매여 있는 몸. 그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도 없으니, 그저 직접 남작님과 로건 공자를 만나 뵙고 사죄를 드리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미녀의 얼굴은 노소를 막론하고 남자의 마음을 뒤흔드는 확실한 무기였다.
“저런…….”
“공녀의 마음씨가…….”
“이래서야 소문이 축소된 것이 아닌가…….”
대전에서 그 얼굴에 흔들리지 않는 이는 시녀들을 제외하면 오직 둘뿐이었다.
“그래서 울브스의 이유가 뭔가요? 리이나 양? 그 어쩔 수 없는 이유를 듣고 싶은데.”
그 둘중 한 명의 말에 리이나가 순간 멈칫했다.
‘잘한다!’
설마 새어머니를 응원하게 될 줄이야.
로건이 눈썹에 경련이 일어나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을 때, 새어머니 메리안이 끼어든 것이다.
“……죄송합니다. 저로서는 알 수 없는 이야기인지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자신의 혼사임에도 이유를 전혀 모른다는 말인가요?”
“저는 여자입니다. 출가하여 다른 집안의 사람이 될 몸. 아버지께서는 가문의 중요한 일은 제게 상의하지 않으십니다.”
“그럼 결국 아무 이유도 없이 파혼을 통보하러 왔다는 거로 받아들여도 되나요?”
이어진 두 여자의 기 싸움 가운데, 아내의 말에 패드릭의 얼굴이 다시금 살벌하게 굳어졌다.
“대신, 이 파혼으로 인한 원인이 저 리이나 울브스와 저희 가문에 있음을 명백히 밝히고 그에 대해 사죄를 하려 합니다.”
리이나의 서글픈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사죄라…… 상처 입은 맥라인의 명예를 사죄라는 말 한마디로 끝내겠다는 건가?”
듣는 이가 서늘해질 정도의 싸늘한 목소리. 패드릭의 표정 역시 더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에 입술을 질끈 깨문 리이나가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힘겹게 다시 말을 이었다.
“……울브스 가문은 이 파혼에 대한 대가로 300만 골드의 배상금을 지급할 의사가 있습니다.”
‘좋아!’
로건이 지금껏 기다렸던 말에 눈을 빛냈고, 대전에 모인 모두의 시선이 다시 상석으로 쏠렸다.
객관적으로 보기에는 리이나가 망설일 만한 이야기였지만, 실상은 돈을 줄 테니 받고 꺼지라는 말과 다를 바 없었다.
더구나 그 말을 들은 당사자가 맥라인 가문의 가주 패드릭 맥라인이었으니 뒷일은 불 보듯 뻔했다.
“감히!!”
마치 화산이 터진 듯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
“큭!”
무력이 높지 않은 일부 가신들이 비틀거리고, 어느 정도 수련을 한 이들조차 장내를 잠식한 살기에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으윽……!”
“아가씨, 제 뒤로!”
리이나의 안색 역시 창백하게 변하는 순간, 뒤에 있던 호위기사 록페른이 앞으로 뛰어나가 리이나의 정면을 가로막았다.
그 단순한 움직임이 패드릭의 기세를 가르고 리이나의 숨통을 텄다.
“울브스의 기사, 록페른이 맥라인 남작님께 간청드립니다. 부디 진정하시고 대화를 이어 가 주십시오!”
패드릭 못지않은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대전을 울리며 살벌한 기세를 완화시켰다.
그러자 패드릭이 토해 내던 분노를 잠시 멈추고 기사를 노려보았다.
“상급 기사? 고작 그 나이에? 제법이로군.”
서른 즈음 되어 보이는 나이.
록페른이라 이름을 밝힌 기사는 놀랍게도 패드릭과 같은 경지였다.
저런 천재라면 분명히 미래의 오러 유저로 기대를 받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정말 오러 유저가 된다는 것은 아니지. 나처럼…….’
씁쓸한 패드릭의 감상과는 별개로, 상급 기사라면 울브스 가문의 차녀인 리이나의 호위를 홀로 책임질 만한 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살심이 일었다.
“울브스 기대주의 목숨이라. 그 정도면 손상당한 맥라인의 명예와 바꿀 만하지.”
장내 전체를 뒤덮던 패드릭의 살기가 한 곳으로 집중되자, 록페른의 안색도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표면상이야 같은 경지라고 해도 패드릭이 상급 기사가 된 지는 벌써 20년이 넘었다.
그 이후로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기에 쌓아 온 힘의 수준이 달랐다.
그것을 누구보다 록페른이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러지 않으실 거라 믿습니다.”
“안타깝군. 지금 내 기분을 조금이라도 짐작한다면 헛된 믿음이라는 걸 알 텐데.”
“저희 가주님은 남작님께서 명예를 아시는 분이라고 장담하셨습니다. 어린 공녀님이나 후배를 핍박할 사람이 아니라고도 하셨지요. 저는 그 말씀을 믿습니다.”
록페른이 울브스 백작을 언급하고 명예를 운운하자 패드릭의 눈빛이 흔들렸다.
“돈으로 명예를 사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불가피한 사정으로 생긴 물의에, 두 가문의 우의를 보존하고자 하는 성의 표시로 받아들여 주십시오.”
거기에 리이나의 말까지 더해지자 패드릭은 이를 으득 갈았다.
‘카이런 울브스…….’
이 이상 상대를 압박한다면 자신은 명예를 모르는 자가 될 뿐이다.
먼저 자신과 가문을 모독한 것이 상대방이라 한들, 그 대상은 고작 서른이 넘은 기사 하나와 성인도 되지 못한 여자뿐이었다.
‘이걸 노리고 이들만 보낸 것이냐.’
오랜 친구이자 동문인 은발의 남자를 떠올린 패드릭이 조용히 분노를 안으로 삼켰다.
그러자 장내를 잠식했던 숨 막히는 기세가 거짓말처럼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당돌한 꼬마가 당찬 숙녀가 되어 찾아왔구나. 튼튼한 방패도 데리고.”
리이나의 파리하게 질렸던 안색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을 확인한 패드릭은 굳은 얼굴로 선언했다.
“비록 그 방문이 아름다운 뜻은 아니나 손님은 손님. 맥라인은 손님을 핍박하지 않는다.”
리이나와 록페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그러나 울브스의 그 일방적인 제안 또한 받아들이지 않겠다.”
이어지는 패드릭의 단호한 선언이 다시 그들의 안색을 굳어지게 만들었다.
“파혼의 대가로 맥라인 가문이 요구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리이나와 록페른이 긴장된 표정으로 패드릭의 말을 기다렸다.
“사절인 리이나 울브스는 당사자인 내 아들에게 정중하게 사과하라. 다른 보상은 사양하겠다.”
명예를 아는 자의 담담한 목소리가 장내를 가득 채웠다.
“……역시 가주님.”
“저것이 진짜 귀족이지.”
“과연…….”
대다수의 가신들이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
“영주님! 파혼의 당사자로서 제안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던 로건이 이 분위기를 뒤집기 위해 나섰다.
‘반드시 받아 내야 해.’
돈.
그것이 이번 사건에서 그가 꼭 얻어 내고자 했던 목표이자, 훗날을 위해 반드시 챙겨야 할 것이었다.
‘말로 사과받고 말겠다고? 미친 소리지.’
300만 골드면 무려 맥라인 예산 1년 치의 돈이었다.
그것도 카이로스 가문의 지원을 포함한.
그가 보기에는 그 보상을 거절하는 아버지도, 동조하는 가신들도 몽땅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소수의 행정관만이 자신처럼 정상적인 생각을 하는지 썩은 안색이었다.
‘상거지 가문에서 지금 무슨 배짱으로 돈을 거절해. 당장이라도 지원이 끊기면 파산할 형편에.’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저 돈을 받아내야 차후의 위기를 헤쳐나갈 발판을 만들 수 있다.
“무엇이냐, 로건? 말해 보아라.”
“저는 울브스 가문의 사과 조건을 받아들였으면 합니다.”
“뭐라?!”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 상식적인 대처는 아버지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지금 내 말을 뒤엎겠다는 말이냐, 로건?”
표정을 굳히며 정색한 아버지의 분노가 그에게 그대로 쏟아졌다.
담담한 어조였지만 날카로운 기세가 로건의 온몸을 뒤덮으며 그를 살벌하게 몰아세웠다.
‘큭! 과연…….’
상급 기사는 상급 기사. 기세만으로도 지금의 자신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문제는 이런 아버지도 이 지역에서나 방귀 좀 뀔 뿐, 왕국 전체를 두고 보면 강자 축에 끼지도 못한다는 것.
최상급 기사나 초인으로 분류되는 오러 유저들 앞에서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하수에 불과했다.
하물며 제국에는 오러 유저뿐만 아니라 전설에나 나오는 오러 마스터도 존재했다.
‘이 정도도 못 견뎌서야……. 앞으로 아무것도 못 해.’
로건은 이를 악물고 쏟아지는 기세를 견뎌 내었다.
비록 소량의 성과지만 심장에 자리 잡은 핵이 로건을 도와주고 있었다.
“파혼의 당사자로서 의견을 낼 권리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제 의견이 가문에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로건은 결연한 눈으로 아버지의 시선을 마주 바라보았다.
“……도움? 틀렸다. 로건. 명예를 버려서 돈을 구할 만큼 맥라인은 곤궁하지 않다.”
‘아니, 곤궁합니다. 카이로스의 지원 없으면 당장이라도 파산이잖습니까.’
로건은 당장이라도 그리 외치고 싶었지만, 공식 석상에서 입에 담을 수는 없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로건은 기사 가문에 먹혀들 수밖에 없는 다른 이유를 들먹였다.
“바로 그 명예 때문입니다!”
“내 말을 뒤집는 것이 오히려 명예 때문이다?”
“송구하오나 울브스 백작가는 저희 가문보다 작위가 높은 가문입니다. 그리고 동부의 변경백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울브스 가문이 동부의 맹주라고는 하나, 저희가 로드(Lord)로 섬기는 가문은 아닙니다. 그러니 그저 사과만 받고 끝내시면 저희 가문이 울브스에 굴복했다는 소문이 나올까 두렵습니다.”
웅성웅성.
꾸준히 생각해 온 핑계에 조용했던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다행히 어느 정도는 먹힌 것 같았다.
특히나 항상 예산에 쪼들리던 관리들은 로건의 말에 얼굴에 화색까지 돌았다.
그 틈을 타 위축되어 있던 리이나가 나섰다.
“울브스는 결코 그런 도리를 모르는 가문이 아닙니다. 저희는 맥라인의 명예를 최대한 존중하여……”
하지만.
“일방적으로 파혼을 요구하러 온 주제에 도리를 말하는 건 우습지 않습니까, 공녀님?”
본론이 나오기도 전에 로건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요정 같은 미모의 전 약혼자를 바라보는 로건의 두 눈은 냉소적이기만 했다.
처연한 표정을 ‘연기’하는 미녀의 얼굴은 가증스러웠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스치는 기억은 회상임에도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전생에서는 혼약의 당사자라는 이유로 근신 중에 끌려 나와 대전에 참석했고, 아버지의 공언으로 면전에서 사과를 받았다.
어린 시절, 예쁘고 활달했던 꼬마 친구가 숨 막히는 미인이 되어 눈물을 흘리며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
그 이유가 파혼이라는 것에 가슴이 아프고, 자신의 처지가 더욱 처량하여 같이 눈물을 흘렸다.
아름다운 자신의 약혼녀도 그 ‘어쩔 수 없는’ 운명에 진정으로 슬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당신과 마지막 추억을 만들고 싶습니다. 오늘 밤 제 방으로 와 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자신에게 속삭이는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보며 사랑의 도피라도 하겠다 결심했다.
어차피 맥라인 가문의 공자로서는 망한 인생,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모든 것을 걸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날 밤.
몰래 숨어든 처소에서 마주한 그녀는 이상하게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단도로 스스로 옷을 찢었다.
“꺄아아아악!”
어린 숙녀의 비명이 저택에 울려 퍼지고, 그녀는 자신에게 그 단도를 던졌다.
얼떨결에 뽑아 든 장검으로 그 단도를 쳐 내는 순간.
방 안으로 뛰어 들어온 록페른이 그를 제압했다.
그리고 저택의 모든 시종들이 그 광경을 보았다.
대공자가 장검을 들고 휘두르다 기사에게 제압당하고, 그 앞에 아리따운 공녀가 찢어진 옷을 부여잡으며 눈물을 흘리는 광경을.
그것도 한밤중에 그녀의 방 안에서.
“아, 아니야! 리이나. 당신 왜 그러는 거야! 당신이 날 불렀잖아!”
로건의 처절한 외침은 변명이 되어 버릴 뿐이었다.
이미 지은 죄가 가득한 상황, 가족들도 그를 믿지 않았다.
그리고.
“당신이 정말 나와 어울린다고 생각하시나요? 주제를 알고 좀 꺼져 주세요. 어린애한테도 지면서 칼은 왜 차고 다니는지……. 덕분에 일이 편하게 되었네요. 고마워요.”
끌려나가던 순간 들린 작은 속삭임.
그 목소리에 이성이 끊어진 로건은 발작하듯 반항했고, 그것으로 거짓은 완전히 진실이 되었다.
그 결과, 맥라인 가문은 울브스에 사과하고 막대한 배상금까지 물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원래 망나니였던 가문의 문제아가 쫓겨난 것은 그저 덤으로 취급될 뿐이었다.
로건이 채 성년이 되기도 전에 겪었던 그 사건은 그 후로도 그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아주 안 좋은 쪽으로.
‘내가 너 때문에 여자를 못 믿게 됐다. 이 빌어먹을 년아.’
로건은 속으로 이를 갈며 겉으로는 태연히 다시 입을 열었다.
전생의 원한은 전생의 것일 뿐. 당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으신 것이 맞다면 보상을 받아달라 권하는 것이 정상 아닙니까? 지금 공녀님은 왠지 저희가 그 보상을 거절하기를 바라시는 것 같은데요.”
그 말에 대전의 분위기가 또다시 바뀌었다.
“그, 그러게?”
“확실히 좀…….”
“받지 말라고 설득하는 모양새인데.”
좌중의 소리를 들었는지 잠시 당황하던 리이나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울브스의 대표로서, 혼약의 당사자로서 다시 한번 진실한 마음으로 사죄를 드리겠습니다. 영주님께서 어떤 선택을 하시건 저는 약속한 금액을 지급하겠습니다.”
처연한 표정을 한 미인의 눈빛이 다시 상석을 향했다.
그 시선을 받은 맥라인 남작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