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67)
67화성문 사이로 보이는 수많은 인파.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사람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거대한 거리.
“밀 한 포대 최저가~!”
“쌀 한 바가지 단위로 싸게 팔아요!”
“제국산 비단 있습니다!”
와글와글.
교역 도시 카일에 못지않게 즐비한 사람들과 중부의 하룬에 못지않게 수많은 상인.
성문 바로 뒤부터 시끌벅적한 대로변은 이곳이 정말 서남부의 중심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듯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로건과 페레타 일행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그 가장 앞에서 이쪽을 보고 서 있는 한 사람이었다.
비프로스 가문의 상징인 불꽃 속에 피어오른 장미의 문양을 갑옷에 새긴 열 명의 기사들, 그중 가장 앞에 선 기사.
빛나는 은발에 눈동자까지 은빛이 감도는, 그 특이한 외모에 어울리는 냉랭한 인상을 지닌 새하얀 피부의 중년인.
“월광의 기사, 플란츠?”
“최상급기사가 직접 마중을…….”
“그 문나이트가 직접?”
비프로스가 보유한 두 명의 최상급기사 중 한 명인 데다, 워낙 눈에 띄는 외모 덕분에 더 유명한 사람이었기에 기사라면 대부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등장은 비프로스가 후계자 일행을 크게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알려 주는 일이었다.
물론.
“먼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소. 따라오시오.”
본인의 뜻에 따른 행동이 아닌 듯 플란츠의 태도는 딱딱하기만 했지만, 아무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서남부의 최강자 중 한 명이 길잡이를 한다는 것에 기사들은 오히려 황송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심지어 방금까지만 해도 얼굴을 붉히고 있던 플론조차도 마찬가지였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플란츠 경.”
“반갑소.”
차가운 응대에도 뭐가 그리 좋은지 로건을 만났을 때와는 사뭇 다른, 굽신거리지 못해 안달이 난 모양새였다.
하나 로건은 플론의 행동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촌구석 애송이 둘을 마중하는데 최상급기사에 상급 둘이라…….’
이쯤 되면 과한 마중이 아니라 압박이라 봐야 정상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던 그는 우연히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은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눈앞에서 연신 고개를 숙이는 금발 머리를 무시하며 쏘아보는 눈빛.
그 눈빛에는 짙은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로건 역시 기대하는 바가 있어 그 눈빛을 피하지 않자, 은색 눈동자의 주인이 직접 다가왔다.
“저쪽이 페레타면, 이쪽이 맥라인의 공자님이신가?”
“로건 맥라인입니다, 플란츠 경.”
“……이거 확실하군. 놀라워. 그 나이에 중급기사라고?”
로건의 인사는 본체만체한 플란츠가 불쑥 뱉은 말이 주변에 파장을 몰고 왔다.
“뭐?”
“저 공자가?”
“단순히 검만 좋은 게…….”
수군수군.
페레타 일행을 포함해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며 로건은 조금 다른 이유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통했다!’
일반적으로 상급기사의 경지부터는 동급 혹은 그 이상의 기사들만이 느낄 수 있는, 숨길 수 없는 특유의 날카로운 기세가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상급기사의 경지, 포스코어 3성을 달성하면서 그 미세한 기운도 컨트롤할 수 있게 되었다.
작정하고 기세를 갈무리한다면 일반인처럼도 보이게 할 수 있을 정도였는데, 그 점은 아버지도 굉장히 신기하게 여겼다.
그리고 그것이 홀로 비프로스 행을 결정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다.
‘실력을 숨길 수 있다.’
그것이 다른 최상급기사에게도 통한다는 것을 새삼 확인했으니, 기분이 좋지 않을 리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먼 훗날이나마 플란츠 경만큼 무명을 떨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중입니다.”
“훗. 나 정도로 만족해서야 되겠는가. 그 재능이면 적어도 초인급은 노려야지. 아무튼, 만나서 반갑네.”
플론을 대했던 것과는 차이가 뚜렷한 응대였고.
당연히 그 모습 뒤로 플론의 불쾌한 표정과 그 일행의 한숨 소리가 이어졌다.
시끌벅적한 대로를 천천히 걸은 일행은 두어 시간이 지나서야 내성에 들어섰고.
무리의 선두에서 걷던 플란츠는 내성 안쪽의 화려한 5층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오는 도중 이 두 후계자의 무리에 로건의 수행원은 없다는 사실을 안 비프로스 측에서 황당해하긴 했지만, 다행히 더 이상의 트러블은 없었다.
“이곳이 비프로스의 영빈관이오. 퍼시벌과 루프만의 후계자들은 이미 도착해 있으니 공자들도 내일 저녁 파티가 있을 때까지 푹 쉬면서 기다리시오.”
“비프로스 성이 참 인상적이더군요. 외출해서 구경 좀 하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내성의 구역 몇은 출입이 제한되겠지만, 다른 곳은 우리 기사를 동행하면 충분히 가능할 걸세. 영빈관의 담당자에게 말하면 될 것이네.”
“알겠습니다.”
까딱.
비프로스에 막 도착했을 때와는 다르게 로건이 오히려 웃으며 답하고 플론은 그저 고개만 까닥였다.
이내 플란츠가 별다른 반응도 없이 돌아서자.
“흠. 시종도 없이 온 자가 파티복이나 있으려나.”
플론은 곧바로 로건을 돌아보며 날을 세웠다.
물론.
“내 방은 어디지?”
로건은 놈을 신경도 쓰지 않고 영빈관의 시종을 찾았다.
플론이 이를 악물고, 그 주변의 기사들 역시 분노한 기색이었지만.
‘상황 파악도 못 하는 놈들. 저들은 더 두고 볼 것도 없다.’
저런 놈들이 후계자고 기사들이면, 내전 즈음에 페레타를 점령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도 않을 것 같았다.
로건은 씩 웃으며 페레타 일행에게서 등을 돌렸다.
‘백작이 과연 무슨 말을 할까.’
파티복은 일부러 가지고 오지 않았다.
무슨 파티건 이곳에서 갑옷을 벗고 돌아다닐 생각은 없었으니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곳, 조상의 잃어버린 옛 땅.
그에게는 한없이 긴장해도 모자랄 곳이었다.
* * * 다음 날 저녁.
똑똑.
“파티 시간입니다. 연회장으로 모시겠습니다.”
정중히 문을 두드린 시종은 로건이 갑옷 차림 그대로 문을 나서자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시골 촌놈이라 파티를 해 본 적이 없어서 말이오.”
하지만 귀족이 스스로 촌놈을 자처하는 말에는 어떤 말도 보탤 수 없었다.
결국.
“맥라인 가문의 로건 공자 드십니다!”
시종의 외침과 함께 연회장에 들어서는 순간, 로건은 내부에 존재하는 모든 이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어머. 뭐야, 저 갑옷 차림은?”
“촌놈이라 예의도 모르나.”
“저건 좀…….”
수백 평은 될 듯한 널찍한 연회장은 벽마다 걸린 그림과 장식들로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높다란 천장에 매달린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눈부시게 빛나며 그 화려함을 더해 주는 가운데.
유일하게 갑옷을 입고 등장한 로건은 자연스레 많은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그를 보는 모든 이가 비웃거나 눈살을 찌푸리는 와중에도 로건은 그 사이를 당당히 걸어 연회장 안쪽에 도착했다.
높다란 상석, 붉은 비단에 쌓인 계단 위쪽에서 붉은 장미의 문양이 그려진 화려한 예복을 입은 중년인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맥라인의 아들, 로건이 이 땅의 지배자이신 로저 비프로스 백작님을 뵙습니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정중하지만 평범한 인사였지만 그 말을 하는 이가 다름 아닌 ‘맥라인’이라서일까.
다소 굳은 표정이었던 백작은 푸른 눈을 빛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래. 잘 왔다. 그런데 요즘 맥라인이 잘나간다고 하던데, 파티복도 준비하지 못했느냐?”
백작, 지역의 로드와는 어울리지 않는 세속적 말투에 귀족의 예법도 뭣도 없는 단도직입적인 하대.
하지만 로건은 그런 것에 흔들리지 않았다.
“파티에 익숙하지 않아 몸에 익은 복장이 차라리 나을 것 같았습니다. 무례였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수도에서는 꽤 많은 파티에 참석한 줄로 아는데?”
움찔.
‘그걸 알아?’
이번엔 조금 긴장하긴 했지만 로건은 다시 표정을 감추고는 품속에서 화려한 포장이 된 상자를 내밀었다.
“그래서 생신 선물로 당시에 이룬 성과 중 일부를 가져왔습니다. 임포릭, 남자에게 참 좋은 건강식품이지요.”
포장을 아무리 화려하게 해 봐야 임포릭이 카록의 고기라는 것을 이제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특히나 그 구매에 직접 뛰어들고 있는 비프로스라면 더욱.
백작의 생일 선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백작은 로건의 선물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여기까지 왔다는 건 맥라인이 내 뜻을 따르겠다는 것으로 봐도 되겠지?”
“각하의 뜻이 평화를 위한 것이라면 맥라인은 언제나 앞장설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 흐음. 역시 젊은 영웅이라 생각이 깨어 있어. 반발할 줄 알았는데.”
나라의 평화 말이야, 이 양반아.
백작의 묘한 눈길을 받으며 로건은 속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좋아. 잠시 파티를 즐기고 있게. 잠시 후 내 자네를 거창하게 소개해 주겠네.”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
백작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주변에 늘어서 있던 다른 이들의 인사를 받기 시작했다.
‘퍼시발. 루프만.’
서른 전후로 보이는 다른 가문의 후계자들.
그들은 역시나 백작을 한두 번 만난 것이 아닌 듯, 스스럼없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백작 역시 격의 없이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 중 백작이 말을 거는 것은 각 영지의 후계자들뿐.
파티의 목적이 단순한 친목 도모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확신하게 하는 행동이었다.
‘여기까지는 모두 예상 범위였지만…….’
로건은 이 짧은 대화 중에도 신경을 곤두세워 백작을 살피는 것만으로 이곳에 온 또 하나의 목적을 달성했다.
비록 그것이 썩 달가운 결과는 아니었지만.
‘정말 5서클이었군. 쓰읍.’
상식을 초월할 정도로 예민하고 날카로워진 그의 감각으로도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을 만큼, 백작의 심장에 자리 잡은 마나 서클은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모종의 수단으로 서클을 감추고 있는 듯한 느낌.
그리고 그것은 전생에 들었던 소문이 사실이었음을 짐작하게 해 주었다.
바로 비프로스 백작이 내전에서 엄청난 무용을 선보였다는 소문이었다.
전생에서야 패배한 2왕자 세력의 이야기라 그리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5서클 마법사라면 그럴 수도 있지.’
최상급기사와 동일한 전력으로 취급받는 5서클 마법사.
특히 전쟁이라는 대규모 힘겨루기에서는 그 이상의 효용성을 발휘하는 강력한 전력.
맥라인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이점조차 상쇄할 수 있을 비프로스의 숨겨진 힘이었다.
생각보다 쉽게 알아냈지만, 그렇다고 쉽게 넘어가기는 힘든 정보였다.
‘여전히 전력의 차이가 커. 무엇보다 백작과 최상급기사 둘. 하아…… 어쩐다…….’
로건이 미간을 찌푸리며 홀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백작님의 말씀이 있겠습니다. 모두 주목해 주십시오!”
큰 목소리와 함께 함께 연주되던 곡이 멈추고, 좌중의 시선이 상석으로 집중되었다.
“먼저 이 부족한 본인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모인 내외의 귀빈들께 감사 인사를 드리겠소. 그리고…….”
내외라고 하기엔 서남부 지역 외부의 귀빈은 몇 없는 것 같은데.
“직접 오시지는 않았지만, ‘태양의 눈물’을 하사해 주신 2왕자 저하께도 끝없는 감사와 존경을 표하는 바이오.”
그 말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기대대로의 반응인지, 여유로운 웃음과 함께 백작의 말이 이어졌다.
“오랜 기간, 우리 왕국 서남부의 귀족들은 다른 지역과 달리 서로 흩어져 지내 왔소.”
상황은 로건이 예상하던 흐름 중 하나로 흘러가고 있었다.
“과거의 복잡한 사정이야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 다 아는 만큼 굳이 설명은 하지 않겠소. 이제는 그 무의미한 관례와 헛된 약속들을 뒤로하고 우리가 하나로 뭉쳐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오. 유력한 다음 대 왕위 계승자이신 2왕자 전하께서 우리 서남부의 지지를 원하고 계십니다!”
로건이 와인 잔으로 입가를 가리며 불쾌한 표정을 감추는데, 백작이 갑자기 손을 들어 그를 가리켰다.
“마침, 2백 년 전 우리 서남부 분란의 시작이자 끝인 맥라인 가문의 후계자가 이 자리에 와 있소이다.”
가뜩이나 혼자 있던 로건의 주변 사람들이 더욱 멀어졌다.
그런데.
“로건 공자는 대단한 젊은이입니다. 최근 두 번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맥라인의 성세를 구축한 주역이자, 불과 21살의 나이에 중급기사의 경지에 오른 불세출의 천재. 제가 아는 최상급기사들도 저 나이에 저만한 성취는 이루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이어진 칭찬에 사람들의 시선이 확 바뀌었다.
“왕국의 기둥인 오러유저, 초인들에게 충분히 비견될 만한 인재지요. 지금도 갑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수련에 집중하는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아마 최근의 파혼 사건도 너무 수련만 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와하하.
어색한 농담에 이어진 아부 섞인 웃음이 대전에 가득 퍼졌다.
“저는 그런 인재를 겁박하거나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제안을 하나 하고 싶습니다. 로건 공자!”
“……예?”
“2왕자 전하의 외조부 되시는 발터마임 공작 각하께서 자네 같은 인재를 찾고 계시다네. 혹시 자네만 괜찮다면 내가 그분의 제자로 추천을 해 줄까 하는데, 어떤가?”
비프로스 백작의 말이 끝나는 순간, 대전이 후끈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