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69)
69화
“내가 연장자인 만큼 첫수는 양보하겠네.”
“아닙니다. 선수를 취해 이득을 봤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양보 따위 없어도 무조건 내가 이긴다.
상대가 멍청이가 아닌 이상 그 말뜻을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천재라 불리다 보니 좀 경솔하군. 자네를 위해서라도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가르쳐 주겠네.”
표정을 굳힌 라몬 퍼시발이 램프턴의 검을 꺼내 들었다.
그 순간 검의 힐트에 박힌 마정석이 진동하며 그의 전신에 은은한 서광이 어렸다.
“오오!”
“멋지군.”
“아티팩트라는 것이 저리 아름다운 효과를 내던가?”
주변 관객들은 감탄하기 바빴지만, 로건은 속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나 여기 있다고 소문내는 것도 아니고…… 죽기 딱 좋겠네.’
아무래도 백작은 실질적인 효과보다는 눈에 띄는 화려한 효과가 들어간 아티팩트를 선물로 준 것이 아닌가 싶었다.
모르긴 몰라도 램프턴이라는 놈은 아마 그 이름처럼 전장에서 램프 노릇이나 하다 뒈졌을 것이다.
챙.
별다른 마법 효과는 없는데도 룩스는 검집을 나온 순간부터 은근한 빛을 발했다.
적에 비하면 수수하기만 한 검 본연의 아름다움이었지만, 무구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한눈에 그 가치를 알아보았다.
완벽한 균형. 예리하고 튼튼한 검신.
검은 그 본 목적에 충실하게만 만들어도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했다.
보물 수집가와 뛰어난 기사들의 눈빛이 대번에 바뀌었다.
하지만 라몬 퍼시발은 그것을 알아볼 만한 눈썰미가 없었다.
“그렇게 예쁘기만 한 검으로 아티팩트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후에 무기가 부족해서 졌다는 말을 들을까 걱정되네만.”
“그럴 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로건의 차분한 대답에 라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조심하게.”
쿵.
앞으로 내디딘 발이 강하게 바닥을 차는가 싶더니, 라몬의 호리호리한 몸이 전면으로 쏜살같이 쇄도해 왔다.
그 눈빛은 진지했고, 내뻗는 검에도 신체와 비슷한 은은한 서광이 어려 있었다.
마치 악을 참하기 위해 돌진하는 이야기 속 옛 기사처럼 멋스러워 보이는 모습.
무구의 영향도 있었지만, 로건이 실력을 숨기고 있었기에 여유가 있다고 생각한 라몬이 연출까지 의도적으로 신경 쓴 것이었다.
‘적당히 상대해 주어야겠지.’
지금 그들을 지켜보는 관객들 가운데는 문나이트, 플란츠도 있었다.
기세는 숨길 수 있지만, 최상급기사의 눈을 확실히 피하려면 좀 더 제대로 연기를 해야 할 필요가 있을 듯싶었다.
콰아아앙!
“큭!”
적당히 비틀거려도 주고.
스각.
“흡!”
피부도 조금씩 긁혀 주고.
“끝이…… 헛!”
가끔씩 날카로워 보이는 반격도 해 주고.
“제법!”
챙! 챙! 챙!
조금은 투지도 보여 주면서.
마지막 일격은 운도 좀 따른 것처럼 극적으로.
“후우우. 제가 운이 좋았군요.”
그리고 라몬의 목에 갖다 댄 검이 긴 날숨과 함께 흔들릴 때.
포스코어로 신진대사를 후끈하게 돌려 전신에 땀이 나게 한 것은 연기에 방점을 찍은 완벽한 연출이었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상대 배우는 그것에 동의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이, 이건 실수, 실수입니다! 백작님! 제가 이 검에 익숙하지 않아서…….”
상대인 로건이 아닌 연회장의 상석을 보며 사정하는 라몬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지만.
“그만!”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그만하라고 했다, 라몬. 네가 나를 실망시키는구나. 특히나 그 태도가.”
비프로스 백작의 반응은 싸늘했고, 라몬을 보는 눈빛 또한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억울하다면 상대에게 말을 해야지, 왜 내게 고하는 것이냐! 아니면 설마 지금 내가 준 보물 때문에 졌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냐?”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각하!”
사색이 된 라몬이 바로 그 자리에 엎드리는 바람에, 정작 대련의 상대였던 로건만 뻘쭘한 상황이 되었다.
“쯧쯧, 끝까지……. 아, 이거 승자에게 환호를 보내는 것을 잊었군. 추한 꼴을 보여서 미안하네, 로건 공자. 자네가 이겼어.”
“감사합니다. 백작님.”
“내 사람이 자네를 무시하고 실수를 했으니, 내 특별히 비고를 개방하여 자네가 직접 아티팩트를 고르게 해 주겠네.”
“오오!”
“역시 백작님!”
“참 통이 크시다니까…….”
“자 다 같이 젊은 영웅에게 박수를 보냅시다!”
“우와아아아!”
백작의 말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하지만 차가운 얼굴부터 다시금 미소를 띤 지금의 가면과도 같은 모습까지, 백작의 그 극적인 표정 변화가 로건에게는 우습기만 했다.
‘어떻게든 잡아 둘 거라 이거지? 그러니 뭘 주든 상관없는 거고.’
백작은 아마 무슨 아티팩트를 주건 간에 그저 잠시 소재를 옮겨놓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뜻대로는 되지 않을 거다.’
로건은 모처럼 속마음을 감추지 않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때.
“가, 각하! 잠시 좀…….”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뛰어 들어온 한 남자.
시종으로 보기엔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예복을 걸친 이가 백작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뭐라 보고를 전했다.
그러자 백작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면서 다시 뭐라 속삭이자 남자는 황급히 다시 연회장 밖으로 뛰어나갔고, 백작은 환한 얼굴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마침 이 사람과 연이 있는 귀한 분께서 과분하게도 연락을 주셨습니다. 직접 오지 못한 것이 아쉬우시다며 친히 마법 통신을 보내 주셨는데 여러분이 계신 자리에서 축사를 해 주고 싶으시답니다.”
로저 비프로스 백작이 단순한 연락만으로도 저리 좋아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자리에 모인 모두가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다급하게 뛰쳐나갔던 남자가 거의 사람 몸통만 한 수정구를 들고 다시 구르듯 뛰어 들어왔다.
“조심하게! 이 사람아,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쯧쯧.”
비프로스 백작가 정도 되니 마법 통신구의 크기도 다르다며 감탄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백작은 자신이 있던 상석의 의자에 통신구를 옮겨 놓고는 부드럽게 웃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작 각하. 이렇게나마 건강하신 모습을 뵈니 이 필부의 마음이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너무 과한 예의는 비례라고 했네, 백작. 좋은 날 스스로를 너무 낮추지 말게나.]“아닙니다. 감히 제가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소개하겠습니다. 왕국 최강의 초인이자, 왕실을 지탱하는 기둥. 검공, 펠릭스 에스페란자 공작 각하이십니다!”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마법 통신을 보내온 주인공을 소개하는 백작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가득 번질 때.
지켜보던 로건의 얼굴도 처음으로 그와 비슷해졌다.
[……하며 왕국의 든든한 기둥인 백작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본인은 아쉽게 발걸음을 못 했지만, 참석하신 여러분들은 로저 비프로스 백작의 큰 배포를 직접 확인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제 부족한 축사는 이것으로 끝입니다. 파티를 즐기시고, 백작의 건강을 기원해 주시기 바랍니다.]“아하하하. 감사합니다, 공작 각하!”
비프로스 백작의 입꼬리가 찢어질 듯 귀에 걸리는데.
[어? 그런데 거기, 로건 아니더냐?]수정구에서 흘러나온 예상치 못한 말에 그 표정이 단숨에 굳어 버렸다.
푸흡.
‘연기 진짜 못하시네.’
어찌나 어색한지 아까 마신 와인을 도로 뱉어 낼 뻔했다.
하지만 정작 ‘부탁’을 한 당사자로서 자신이 판을 깰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1왕자파에도, 2왕자파에도 속하지 않는 현 중립 세력의 최고 귀족, 검공의 축사.
백작이 무슨 파벌이건 절대 거절할 수 없을 것이라는 예상은 제대로 들어맞았다.
‘이제부터 잘해야지.’
로건은 수정구가 잘 보이는 연회장의 가운데에서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스승님.”
인사와 함께 담백하게 내뱉은 한 마디에 연회장이 일순간에 고요해졌다.
“스승?!”
“검공이?!”
“허…….”
“어쩐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던 연회장은 금세 술렁이며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로 채워졌다.
점점 더 딱딱해져 가는 백작의 얼굴 너머로 공작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네가 왜 거기……? 아, 네 본가 역시 서남부였던가.]“그렇습니다.”
[연락도 없는 무심한 제자 놈 얼굴을 이렇게나마 보게 되니 황당하구나. 그래, 수도에는 언제 올라올 것이냐? 내 분명히 파티를 준비한다고 했거늘.]“죄송하지만, 가문 간의 문제로 잠시 비프로스 성에 머물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백작님께서 거절할 수 없는 권유를 하셔서…….”
로건은 나 지금 협박당하고 있다는 말을 고상하게 빙 돌려 말했고.
[백작. 그게 정말이오?]검공은 간단한 되물음으로 복잡한 가문사를 잠시 접어 두게 했다.
“하하, 그게……. 아, 아닙니다. 검공께서 찾으신다는데 제 볼일이야 뒤로 미뤄도 괜찮습니다.”
[오, 그런가? 그래 주면 나야 고맙겠네. 로건, 조만간 수도에서 보자꾸나.]“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이미 짜 놓은 각본대로였지만, 마지막 말만큼은 진심이었다.
미세하게 일그러지는 백작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무척이나 통쾌했다.
* * * 다음 날 아침.
– 좋은 인연을 두었구려, 로건 공자. 하지만 내 제안은 유효하니 다시금 잘 생각해 보길 바라오.
로건이 파티가 끝날 무렵 백작이 한 말과 그 굳은 표정을 떠올리며 피식거리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백작님께서 보고로 안내를 명하셨습니다.”
마지못해 왔다는 기색이 역력한 기사의 딱딱한 태도가 로건은 오히려 기꺼웠다.
오늘도 저녁에 파티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그는 참석할 생각이 없었다.
‘구실도 있겠다. 아티팩트만 챙겨서 떠나야지.’
이 일만 아니었다면 어제 바로 떠났을 것이다.
물론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진짜 중요한 건 다 치워 놨겠지.’
검공의 연락이 차라리 오늘이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봤지만 부질없는 바람이었다.
일이 생각대로 풀린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인가.
로건은 고개를 흔들어 욕심을 털어 버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기사의 뒤를 따랐다.
“둘러보실 시간은 한 시간, 백작님께서 어떤 보물이건 단 한 점을 허가하셨습니다. 나오실 때 검문을 받을 수 있으니 이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상급기사 셋을 포함한 18명의 기사가 지키고 있는 거대한 석문.
그 석문 앞에서 주의사항을 듣고 나자, 무려 열 명의 기사가 좌우로 나뉘어 기합을 내지르며 문을 밀기 시작했다.
“으아아압!”
“하아압!”
쿠구궁.
기사들의 고함과 함께 서서히 열리, 아니 밀리기 시작하는 석문.
그 상상치 못한 보안 장치에 로건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티팩트를 보관한 비고를 여는 데 필요한 것이 순수한 물리력이라…….’
대체 누구의 발상인지 헛웃음을 삼키며 지켜보는데, 기사들의 노동은 무려 1분 가까이나 계속되었다.
쿠궁.
육중한 소리와 함께 마침내 문이 열리고,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드러났다.
그런데.
“어……? 고작?”
정작 열린 문의 두께는 1m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고작 저걸 밀어내는데 기사 열 명이 용을 썼다고?’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마법적인 효과는 아닌 것 같은데…….
생각을 깊게 할 시간은 없었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시간은 한 시간입니다. 그 후엔 문을 닫을 것입니다.”
로건은 의문을 풀지 못한 채로 땀을 뒤집어쓴 기사들의 원망 섞인 눈빛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돌로 만든 좁은 계단을 걸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넓고 환한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을 둘러보는 순간, 로건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와…….”
수백 평은 될 것 같은 넓이의 석실.
지하임이 분명한 거대한 석실은 천장에 박혀 있는 빛나는 야명석 때문에 조금도 어둡지 않았다.
스스로 빛을 발하는 희귀한 보석, 야명석(夜明石).
천장에 박힌 수백 개의 야명석만 팔아도 수천만 골드는 나올 것 같았다.
물론 그 야명석들이 밝히는 석실 안, 구석에 있는 작은 물건 하나만으로도 그 가격을 가뿐히 뛰어넘을 듯 보였지만.
‘대략 30개 정도인가.’
얼핏 보이는 아티팩트의 숫자, 그중 절반이 무구였다.
하지만.
“역시 다 치우셨다 이거지?”
갑옷과 무기, 기타 등등의 세 분류로 나눠 놓은 듯했는데, 구획마다 가장 깊은 곳에는 원래는 무언가 들어 있었을 유리 상자들이 텅 빈 채로 다수 놓여 있었다.
‘남은 것은 잘해야 어제 그것들 수준…….’
그나마도 안내자나 설명이 없으니 아티팩트가 무슨 효과를 가졌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겉으로는 대범한 척하는 백작의 쪼잔함에 새삼 혀를 찰 수밖에 없었지만, 그 심리가 또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뭐든 최소 천만 골드짜리 아티팩트가 공짜인데. 뭐, 나야 감사하지.”
로건은 즐거운 마음으로 아티팩트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포스코어를 익히며 증폭된 감각은 아티팩트에 내재된 마력의 질과 크기조차 세세한 차이를 느낄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로건은 그것만으로도 아티팩트의 효용 일부분은 짐작할 수 있었다.
마력이 흐르는 검과 창, 무구들은 일단 지나쳤다.
룩스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거니와, 얼핏 느껴지는 마력만 봐도 어제 연회장에 나온 물건들보다 좋아 보이는 것은 없었으니까.
로건은 적당한 갑옷이나 챙겨 볼 생각으로 갑옷 쪽을 둘러보았다.
‘이건 전격 마법인가? 입은 사람도 감전되라고? 이건 불꽃? 갑옷을 공격용으로 써? 허 참…….’
특별히 뛰어나 보이는 게 없는 고만고만한 물건들 가운데서 그나마 나은 것을 골라내자니,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최종적으로 로건이 고른 물건은 세 가지였다.
강력한 경도에도 불구하고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상체 갑옷.
순간적으로 실드 마법을 전개하는 건틀릿.
몸을 가볍게 만들고 충격을 튕겨 내는 효과가 있는 각반.
그 가운데서 무엇을 고를까 고심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어?’
스아아.
아티팩트를 살펴보느라 주변에 퍼트린 미약한 포스가 갑자기 한군데로 쏠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