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7)
7화
“그럴 필요 없다, 리이나 공녀. 내 뜻은 변하지 않는다. 로건, 맥라인의 명예를 돈과 바꿀 수는 없다.”
“예?”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왜? 어째서?
황당함을 담은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지만, 아버지의 굳은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옆에서 비웃음 섞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새어머니와 고개를 끄덕이는 다른 가솔들의 모습까지.
눈으로 박혀 드는 그 모든 모습에 로건은 정신이 아찔해져 옴을 느꼈다.
‘도대체 왜……?’
울화가 솟구치고 가슴이 답답했다.
실리를 포기하고 명예를 챙기겠다는 것이 귀족가에서 그리 나쁘게 취급받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도 상황을 봐 가면서 해야지. 지금 가문 상황에 돈을 거부한다는 게 말이 돼?!’
로건이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아버지의 태도는 굳건했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왜 저러는 거야.”
“지금 차였다고 자존심 상해서 객기 부리는 거 같은데.”
“그게 남작님 말씀을 거역할 정도인가.”
“대공자가 원래 좀…….”
가솔들의 수군거림은 9할이 그를 향한 비난이었다.
뻔뻔하게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리이나의 표정이 이 상황을 예견한 승리자의 미소처럼 느껴졌다.
그 모든 모습이 세차게 그의 머리를 때리고 나서야 로건은 깨달았다.
자신이 아직도 안일하게 상황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내가 잘못 생각했어. 이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서 가문을 변화시키겠다고?’
어느 세월에?
바뀐 모습을 보여 주며 천천히?
‘그러다 다 죽는다.’
가슴속에 찬바람이 확 불어닥치는 듯했다.
영지전이 고작 9개월 남았다.
‘포기할 것은 포기하자.’
어떻게 해서든 가문을 살리기만 하면 된다.
일단은 가문과 상관없이 스스로 힘을 갖추어야겠다.
그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리이나 공녀님, 그렇다면 저는 파혼의 당사자로서 요구하겠습니다. 가문의 뜻과 상관없이 제가 개인적인 자격으로 그 배상금을 받겠습니다.”
“로건!!”
터져 나오는 패드릭의 노성이 장내를 뒤흔들고,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사나운 기운이 뒤에서 그를 덮쳤다.
‘큭!’
우우웅.
그의 심장에 자리한 포스 코어가 전신에 힘을 불어넣으며 자칫 꺾일 뻔한 그의 무릎을 바로 세웠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신검의 비전이지만 아직은 미숙할 뿐, 상급 기사의 힘에는 비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직접적인 무력행사도 아닌 기세의 압박 정도는 뿌리칠 힘이 있었다.
“저는 말뿐인 사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뭐라?!”
“허공에 흩어질 말 한마디로 보상될 명예라면, 그 가치도 그만큼 가벼울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네가 정녕 내 뜻을 거부하겠다는 것이냐.”
자신의 기세를 받아 낸 아들의 반항에 놀란 것인지, 아니면 분노한 것인지 패드릭은 복잡한 표정으로 자신의 아들을 노려보았다.
“파혼의 당사자로서 그 정도 주장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울브스는 맥라인 가문의 대표이신 남작님의 뜻에 따르고자 합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패드릭 맥라인 남작님.”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듯 보이자 리이나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로건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가주의 권위를 치켜세우는 이야기였다.
‘가주의 체면을 지키라는 말이겠지.’
로건의 사나운 눈길이 다시금 그녀를 향했다.
그때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고민하던 패드릭이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맥라인 가문의 대표로서는 진정을 담은 사과로 만족한다. 하나 그 당사자인 로건이 그 사과의 진정성을 어찌 판단하는지는 당사자에게 맡기겠다.”
“여보!”
“가주님?!”
웅성웅성.
금세 대전이 시끄러워졌다.
그만큼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그 말에 여전히 조금은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던 리이나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잠시 소란스러웠던 가솔들의 웅성거림이 잦아들자, 패드릭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잘 생각하거라, 로건. 명예가 손상된 것을 돈으로 받는다면, 앞으로도 네 명예가 계속해서 돈으로 거래될 여지를 주는 것이다.”
패드릭은 로건이 진정으로 변화했다면 이 대목에서만큼은 스스로 ‘올바른’ 선택을 내리리라 믿었다.
그렇기에 가주로서의 권위를 접으면서까지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이었다.
그러나 로건의 결심은 굽힘이 없었다.
“저는 파혼의 당사자로서, 울브스 가문의 배상금을 받겠습니다.”
그 선언에 패드릭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새어머니의 표정에는 비웃음이 떠올랐다.
* * * 놀랍게도 리이나는 300만 골드라는 거금을 전장을 통한 신용 거래도 아닌 금화 궤짝으로 그 자리에서 지급했다.
쿠웅.
정작 그것을 요구한 로건 역시도 자신의 허리까지 오는 거대한 궤짝에 가득 담긴 금화를 보고서는 표정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써 울브스 백작가와 맥라인 남작가의 파혼이 성립하였음을 선언합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금화 궤짝을 내려놓고 돌아서는 리이나의 표정은 분명히 미세하게나마 일그러져 있었다.
로건은 그것을 보며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확신했지만, 아버지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조금은 변한 줄 알았더니, 더 나쁘게 변했구나.”
‘다 가문을 위해서입니다.’
“모두가 너에게 명예의 가치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내 탓이겠지.”
평생 보지 못한 양의 금화 더미를 앞에 두고도, 한숨을 내쉰 아버지의 표정은 씁쓸하기만 했다.
패드릭은 그대로 대전을 나서자, 그를 따라 돌아선 기사들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그 와중에 새어머니는 오히려 무언가 얻은 것처럼 환하게 미소 지으며 뒤를 따랐다.
그것이 지금 자신의 결정이 가문에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확실히 느끼게 해 주었다.
그 모습을 무표정하게 지켜보던 로건은 다시금 결심했다.
‘가문 내의 평판에 연연하지 않겠다. 일단 영지전부터 이기고 본다.’
하지만 영지전을 위해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계산하면서도 마음 한편이 무거워지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 * * 쾅!
화려한 사두마차의 안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록페른의 물음에도 마차는 한동안 침묵만이 감돌았고, 대답은 한참 뒤에나 들려왔다.
“……괜찮아요.”
“분하십니까?”
“뭐가 잘못된 걸까요?”
“네?”
“조금 과한 금액을 얘기하면 오히려 남작은 분명히 체면 때문이라도 거부할 것이다. 내 예상은 분명히 맞았어요. 그런데…….”
“로건 대공자가 그렇게 나올 줄은 예상을 못 했지요.”
“그 돈독 오른 망나니가…….”
쾅!
다시금 요란한 소리가 들렸지만 록페른은 굳이 마차 안을 들여다보는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로건 대공자가 소문과 많이 다른 듯합니다.”
“소문보다 돈독이 더 오른 거요? 아니면 명예를 모르는 거요?”
“저는 그런 감정적인 요인은 모르겠습니다. 다만 대공자가 포스 유저라는 건 확실하지요.”
“……무력도 있었다는 건가요?”
리이나는 의외라는 반응이었지만, 록페른은 단호했다.
“예.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굉장히 빠른 성취지요.”
“……소문처럼 망나니만은 아니라는 거군요.”
패악질만 일삼고 노력을 안 한다면 아무리 천재라 해도 포스 유저의 경지에 오를 리 없었다.
그것도 아직 열아홉의 나이였다.
“예. 그럴 리가 없지요. 아무래도 헛소문인 듯합니다.”
록페른은 로건이 생각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음을 강조하여 리이나를 위로하고자 했지만, 리이나가 그 의도를 모를 리 없었다.
“……그렇다고 한들 내가 당했다는 것은 변치 않아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저희가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처지였고, 적들의 앞마당이었습니다.”
“됐어요. 날 위로하려 하지 말아요, 록페른.”
“이제 굳이 신경을 쓰지 않으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이제 걸림돌도 사라졌으니 고귀한 집안과 연을 맺으실 텐데 고작…….”
“흥! 그거야 당연하죠. 하지만 이 분함은 언젠가 반드시 갚아 줄 거예요.”
“원하시는 대로 이루어지실 겁니다, 아가씨.”
화려한 사두마차는 빠른 속도로 맥라인 영지를 벗어났다.
* * * 리이나가 떠나간 다음 날.
맥라인 가문은 파혼이라는 충격적인 소식과, 망나니 대공자가 요정 같은 미녀에게 가주의 명을 거역하면서까지 거액을 뜯어냈다는 소문으로 떠들썩했다.
로건은 파혼의 당사자임에도 동정이 아니라 독하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정작 로건은 자신을 향한 손가락질과는 상관없이 자꾸만 미소가 새어 나왔다.
“드디어…….”
남들이야 어찌 보건, 그에게는 최악의 트러블이 생겼던 시간이 무사히 지나간,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 순간이었다.
회귀했던 이후 내내 영혼을 무겁게 조이고 있던 족쇄 하나가 떨어져 나간 듯한 홀가분한 느낌.
마음 같아선 하루 내내라도 통쾌하게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마냥 들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자 그 유쾌함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가문의 힘을 길러 위기를 넘기겠다는 생각이 ‘내가 직접’ 위기를 해결해야겠다는 것으로 바뀌자, 그 부담감이 100배는 늘어난 것 같았다.
‘침착하자. 위기는 지금부터 시작이야.’
당장 코앞으로 닥친 일이 많았다.
가문 내의 평판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지만, 적어도 아버지가 직접 나설 만한 명분이 생기는 것은 피해야 했다.
가문 내에서는 이 이상 대놓고 사고를 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밖으로 나가야지.’
로건은 마음을 다지며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되새겨 보았다.
‘일단 돈은 다 쿠퍼스 뱅크에 입금했고.’
그란디아 왕국과 제국 서부에서 가장 많은 지부를 두고 있는 쿠퍼스 뱅크는 대출이 많은 맥라인 영지에도 그 지부를 두고 있었다.
덕분에 입금하려 할 때 그 돈으로 대출 상환부터 하겠냐는 소리를 들었지만.
‘어림없지.’
본래의 계획대로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다만 어제의 경험이 그의 생각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일단 내가 따로 힘을 길러야 해.’
미래의 정보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점은 둘째 치고, 회귀한 그와 가문의 가솔들, 특히 아버지와 생각의 차이가 너무 크다는 것을 절실하게 체감했다.
가문 내에서 무엇을 바꿔 가려 했던 생각은 그 순간 사라졌다.
‘외부에서 힘을 만들어 와야 한다. 그러니 우선…….’
똑똑.
한창 이런저런 궁리를 하며 계획을 점검하고 있는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당연히 릭이겠거니 하고 한 말이었지만, 방으로 들어온 것은 뜻밖의 거한이었다.
“하하. 기침하셨습니까, 대공자님.”
“음?”
얼굴을 뒤덮은 구레나룻에 여느 기사보다도 거대한 체격.
약간은 상기된 얼굴의 중년인이 어색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며 들어섰다.
“드웨인?”
“예, 공자님. 드웨인입니다.”
드웨인 필스너, 언뜻 보기에는 기사 같은 체격이었지만 그는 엄연히 행정관이었다.
그것도 가문의 내정을 책임지는 재무담당 관리였다.
그의 아버지, 패드릭 맥라인이 가장 신뢰하는 가신이기도 했다.
그 말은 즉, 자신과 별로 안 친한 사이로 저렇게 웃음을 보일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로건이 의혹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데 문밖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아악! 밀지 마!”
“어허! 내가 먼저 왔…….”
우르르르.
드웨인의 뒤쪽으로 낯익은 얼굴들 몇이 연이어 쏟아져 들어왔다.
“대공자를 뵙습니다.”
환한 웃음을 짓는 대머리는 루겔 하이스.
평상시에는 로건을 보기만 해도 멀리 돌아가던 식량 담당 관리.
“대공자께 문안 인사드립니다.”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띠고 있는 뚱보는 페란 도일.
병사들의 장비 담당자로, 평상시에는 마주친다 해도 로건의 눈조차 쳐다보지 않은 채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사라지던 이.
“어허, 이 사람들이. 내가 먼저 왔는데……. 하하, 대공자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연신 땀을 훔치며 인사를 하는 배불뚝이는 성벽 관리 담당자 루펜.
로건의 기억으로는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밖에도 하나같이 모두 관사에서 종종 본 얼굴들이었고, 하나같이 평소에는 로건을 슬슬 피해 다니기 바빴던 자들이었다.
“대공자님…….”
“인사를…….”
그런 인물들이 지금은 하나같이 서로 눈에 띄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로건에게는 퍽 재밌는 상황이었다.
전후 사정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게 다 무슨 일이지?”
로건은 입가의 미소를 감추며 무심한 듯 물었다.
꿀꺽.
‘잘 말해야 한다, 드웨인.’
드웨인에게는 이 순간이 인생의 고비처럼 느껴졌다.
맥라인의 재무행정관이라는 자리는 그야말로 힘겹기 짝이 없는 자리였다.
자신이 이곳 태생이라는 점과 가주와의 의리가 없었다면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은 자리.
언제나 모자란 예산을 쥐어짜서 영지 전체의 살림을 꾸려야 하고, 모자란 돈은 가주의 처가에 애걸하다시피 구걸하여 해결해야 했다.
가끔은 자신이 행정관인지 거지 두목인지 헷갈리는 가혹한 자리가 바로 맥라인의 재무행정관이었다.
하지만 지금 말만 잘하면 적어도 수년간은 편안한 잠자리가 보장될 기회가 왔다.
더구나 상대는 앞뒤 못 가리는 철부지일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자신감이 생겼다.
“하하하. 그냥 인사를 드리려고 왔습니다. 어제 공자님의 모습을 정말 인상 깊게 보아서요.”
“응?”
“부당한 외부의 압박에 조금도 굴하지 않으시고 당당히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모습. 그야말로 맥라인 가문의 후계자로 어울리는 멋진 모습이었으니까요.”
동경에 찬 눈빛과 슬며시 내미는 엄지.
드웨인이 제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최대의 아부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는데…….
“뭔 개소리야?”
철부지의 반응이 예상과 많이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