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71)
71화
“경지를 숨긴 것도 모자라 그조차 초월한 움직임이라. 허, 엄청난 아티팩트를 숨기고 있었군. 로건 공자.”
억지로 변조한 목소리가 아닌 깔끔하고 중후한 목소리.
문나이트, 플란츠는 정체를 숨기는 것을 포기했다.
애초에 먼저 나서지 않으려 했던 것도 자신의 특이한 포스 때문이 아니었던가.
은빛 포스블레이드를 보인 이상, 발뺌은 필요 없었다.
“그 아티팩트는 수업료 삼아 가져가도록 하지. 갑옷 안에 있나?”
“허? 수업료?”
“세상의 무서움을 가르쳐 줄 수업이지. 겁도 없이 혼자 다니는 귀족 도련님이 복귀 중에 강도를 당하는 수업.”
“문나이트라는 이름이 부끄럽지도 않나?”
“……안 그래도 부끄러워서 강도 높게 수업하려고, 자네가 좀 멀리 와 줘서 그나마 다행이야.”
플란츠의 음성에서는 여태까지와 달리 살기가 진동했다.
“도망 못 가게 포위해.”
나지막한 한 마디를 부하들에게 던진 그는,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스팟.
좀 전의 공격은 그저 인사치레였다고 주장하는 듯한, 세상을 대각선으로 베어 버릴 것 같은 기세가 담긴 참격.
로건은 올라간 신체 능력을 바탕으로 그 검을 실낱같은 차이로 비껴 냈다.
그대로 안으로 파고들며 반격을 하려는 찰나.
로건은 섬뜩한 살기를 느끼며 그대로 뒤로 굴렀다.
촤아악.
그가 있던 공간을 가르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사라지는 은빛 광채.
아슬아슬하게 그것을 피해 낸 로건이 식은땀을 흘렸다.
‘채찍?’
순식간에 지나가기는 했지만, 길게 늘어난 은빛 포스블레이드가 마치 채찍처럼 검의 방향과는 전혀 상관없이 휘둘러진 것으로 보였다.
그것이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듯.
이내 채찍 같은 은빛 광채가 사방의 공간을 점유하며 로건의 전신을 노려 왔다.
스각.
촤아악.
쾅!
“큭!”
쉴 새 없이 덮쳐오는 검을 받아치는 것도 버거운데, 검 끝에서 2m가 넘는 포스의 칼날이 채찍처럼 불규칙하게 쏟아졌다.
휘둘러지는 검과 포스의 움직임은 점차 빨라져, 이내 환상처럼 주변을 감싸는 은빛 물결을 만들어 냈다.
검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은빛의 향연.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본 다른 복면인 중 하나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월광…….”
물론 그 은빛 물결의 중앙에 있는 로건은 죽을 맛이었다.
중압검은 아까부터 쓰고 있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이를 악문 로건은 가지고 있는 수를 전부 꺼내 들기로 마음먹었다.
“합!”
로건의 검에 황금빛이 일렁이며 이내 여덟 겹의 금빛 파도가 은빛 물결에 맞서 쏟아졌다.
“헛!”
꽈아아아앙!
은빛 물결만큼 정교하진 않았지만, 강력한 힘으로 모든 것을 밀어내는 황금빛 파도가 공간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은빛과 황금빛의 포스가 서로 맞부딪히며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사방으로 퍼질 때.
번쩍!
자욱한 먼지 사이로 황금빛 선이 순간적으로 번뜩이며 공간을 가로질렀다.
“뭐, 뭐야!”
“기다려. 플란츠 님의 포스는 굳건해.”
적들의 음성이 아니더라도 로건 역시 느끼고 있었다.
흙먼지 속에 감춰진 로건의 안색은 절망감으로 파랗게 질려 있었다.
‘젠장! 감촉이 없어. 실패다.’
신검 비전의 1, 2식. 파도 가르기(波浪斬)와 무쇠 가르기(斷金斬)를 연달아 시전한 덕에 로건은 탈진 상태에 빠졌다.
그 때문에 전방에서 쏟아지는 살기의 방향이 명확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읏!”
그저 본능적으로 검을 앞세운 채 몸을 뒤로 날리는 것이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임기응변이었다.
쾅!
“읍!”
하지만 그것으로는 공격을 완전히 막아 낼 수 없었고, 충격에 못 이겨 데굴데굴 구른 로건은 간신히 일어섰다.
그러자 가라앉은 흙먼지 사이로 복면이 날아가 얼굴이 드러난 플란츠의 모습이 보였다.
모발과 눈동자에 피부까지, 원래 새하얗게만 보이던 그의 얼굴이 왜인지 조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느껴지는 기세를 보니 아쉽게도 그것은 부상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짜릿했다. 방심했으면 죽을 뻔했어. 놀랍군.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설마 이것도 아티팩트는 아닐 텐데. 이게 말로만 들었던 검공의 비기인가…….”
‘생각보다 수다스러운 놈이었군.’
후우우.
쿨럭.
심호흡을 하며 몸을 추슬러 보지만 쉽지 않았다.
그나마 풍신의 부츠로 증폭된 능력이 없었다면 좀 전의 공격에 그대로 피를 토하고 쓰러졌을 것이다.
‘역시 아직 놈을 상대하긴 무리인가.’
월광의 기사 플란츠는 이미 십수 년 전부터 최상급기사로 이름을 날렸던 이였다.
상급에 오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몸으로 이 정도까지 한 것도 선전이라고 자평…….
“……할 리가 있겠냐!”
“뭐라고?”
카악, 퉤.
목구멍까지 솟구친 피를 뱉어 내자 잠시나마 속이 편해졌다.
“그 검공의 비기 하나 더 보여 줄 테니 기다려 줄래? 내가 아직 미숙해서 그런데.”
탈진한 몸, 바닥이 난 포스, 자신보다 강력한 적.
이제 기댈 것은 허세와 운밖에 없었다.
다행히.
“오! 그래? 좋아 받아 주지. 한 번 선보여 보시게, 도련님.”
흥분한 기색의 놈이 방심 또는 오만의 극치를 보여 주었다.
‘좋아!’
그리고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로건은 최선을 다해 검 끝에 힘을 모았다.
이제 그가 믿을 만한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신검 비전 3식.
상급에 오른 지 한 달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간신히 방향만 잡아 가던 비기.
‘할 수 있다.’
우웅.
근육에 힘이 빠지고 포스조차 간당간당하며, 앞에선 강적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도저히 집중할 수 없는 최악의 조건이었다.
하지만 떨리는 팔과 다리를 포스로 감싸 안아 억지로 고정하고,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기력을 동원해 새로운 비기의 포스패턴을 따라 움직였다.
‘아무리 검공의 제자라는 배경이 있다 해도 죽이지 않는 게 고작이야. 풍신의 부츠와 룩스를 빼앗고 폐인을 만들 거다. 정신 차려!’
자신이 비프로스 백작이라면 할 법한 일을 떠올리며 독기를 키웠고, 그 생각은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우웅.
약간의 시간은 걸렸지만 의지대로 따르는 포스.
심상에 구축해 둔 이미지가 서서히 실체를 갖춰 갔다.
“됐…….”
로건이 이를 갈며 검을 휘두르려 하는 순간.
그는 어느새 눈앞에 와 있는 플란츠의 모습을 확인하고 두 눈을 부릅떴다.
“죽어!”
놈의 검은 정확히 그의 심장을 노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생명의 위기를 맞닥뜨려 극대화된 감각에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시간 속에서 로건은 비로소 놈의 오른쪽 가슴에 뚫린 동전만 한 구멍을 보았다.
조금 전의 무쇠 가르기가 만들어 놓은 것이 분명한 흔적.
그리고 놈의 입가에 흐르는 약간의 피.
그것은 성취감이 아닌 허탈함을 가져다주었다.
‘이놈…….’
로건은 상기된 안색과 흥분된 어조가 오히려 놈의 허세였다는 것을 그 순간에야 깨달았다.
흐려진 감각 탓에 손맛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시야도 좁아진 것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허세에 놈이 넘어갔다고 여기고 쓸데없이 시간까지 끌어 주었다.
속은 것은 놈이 아니라…….
‘나.’
창백한 얼굴로 이를 악문 적의 모습이 가까워지는 순간.
로건의 분노가 미완의 비기에 힘을 불어넣었다.
우웅.
순간 로건의 머리 위로 10m에 이르는 황금빛 기둥이 생겨났다.
검의 형상을 한, 너비만도 1m가 넘는 거대한 거인의 검이 솟구친 순간.
순간적으로 극대화된 감각 속, 느려진 시간 안에서.
오직 그만이 정상적인 속도로 움직였다.
그리고 로건은 그대로 그 검을 수직으로 내려찍었다.
“죽어!”
“너나 뒈져!”
꽈아아아아앙!
엄청난 충돌음과 함께 거인의 검이 강타한 자리.
우르르르릉.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연신 흔들리고, 어스름한 그믐달 빛을 아예 덮어 버리는 자욱한 흙먼지가 피어났다.
“플란츠 경!”
“단장님!”
히이이이잉!
“우리 말이?!”
“다, 단장님부터 찾아!”
시끄럽게 소리치던 상급기사 3인방은 조금의 시간이 지나 흙먼지가 가라앉은 뒤에야 그들의 대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십수 미터는 될듯한 길이의, 깊숙이 갈라진 지면의 바로 옆에서 허탈한 눈빛으로 주저앉은 모습으로.
쿨럭.
“……내가, 내가 피했어. 차라리 같이 죽었어야 했는데.”
피를 토하면서도 끝없이 같은 말을 중얼거리는 최상급의 기사는 갈라진 지면에서 도무지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눈에는 미지의 무언가를 본 인간에게나 느껴질 법한 막연한 공포가 서려 있었다.
* * * 쿨럭.
두두두두.
로건은 달리는 말 위에서 연신 피를 토해 냈다.
싸움의 여파로 인해 죽어 버린 자신의 말 대신 적들의 말을 빼앗아 튀는 것까지는 뜻대로 되었지만, 다른 것이 너무 아쉽기 그지없었다.
‘죽일 수 있었는데…….’
플란츠. 적의 최상급기사를 끝장낼 수 있었다.
마지막 놈의 검격에 내부가 진탕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미련이 남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 역시 달리 생각하면 욕심이었다.
‘풍신의 부츠가 없었으면 내가 죽었겠지.’
거기다 중상을 입은 탓인지 놈의 힘도 많이 떨어져 있었다.
덕분에 내부가 흔들린 정도로 끝난 것이었다.
하지만.
‘다음번엔…… 이길 수 있다.’
상급기사의 경지로도 최상급기사를 이길 수 있었다.
경지가 오를수록 그 능력의 차이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는 것을 고려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자신이 가진 비전과 보물들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그런 확신을 얻은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그렇게 안도감이 들었기 때문일까.
로건은 흐려져 가는 의식을 더는 붙잡지 못했다.
히이이잉.
쿠당탕.
기수 없이 홀로 달려 나가는 말의 뒤쪽으로 일어나는 흙먼지 사이로 나뒹구는 그림자.
보통 사람이라면 중상을 입고도 남았을 사고임에도 떨어진 기수의 입가에는 미소만이 걸려 있었다.
* * * 맥라인 영지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비프로스로 떠났던 대공자가 2주가 지난 다음에야 말도 없이, 그것도 거지꼴로 되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말에서 졸다가 떨어져서. 하하하.”
어처구니없는 핑계를 대며 웃는 대공자였지만, 무어라 따져 묻는 사람은 없었다.
오직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
“말은 버렸어도 그나마 검은 챙겨 왔구나.”
“검만 챙겼겠습니까. 놈들한테서…….”
“역시나 비프로스 짓이더냐?”
풍신의 부츠를 얻은 일을 설명하고 자랑을 하려는데, 아버지가 무거운 안색으로 말을 끊었다.
“예. 나름대로 준비를 한다고 했는데, 위험할 뻔했습니다. 그쪽에서 저를 굉장히 높게 평가해 주더군요.”
“……눈과 귀가 있다면 당연히 그래야겠지. 아무튼, 무사히 돌아왔으니 다행이다.”
‘아마도 저 때문이 아니라 검공 스승님 때문이겠지만 말입니다.’
뒤늦게나마 아들에게 자부심을 품기 시작한 아버지의 기대가 조금 과한 느낌이 있었지만, 그건 당장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비프로스에게 정식으로 항의를 해……서는 안 되겠구나, 그렇지?”
“그렇습니다. 지금은 그냥 참으시지요.”
귀환길에 월광의 기사 플란츠와 상급기사 셋의 공격을 받았다.
맥라인이 그리 주장한다면 비프로스는 한마디로 일축할 것이다.
그래서 증거는 있냐고.
이제 고작 21살의 로건이 그런 강력한 전력의 공격을 받았는데 무사히 돌아간 것이 말이 되냐고.
그다음에는 실추된 명예 운운하며 시비를 걸 것이다.
아직은 그래서는 곤란했다.
“당장은 제가 백작의 생일에도 참석하고 선물까지 받아서 나온 것으로 되어 있으니, 어떤 핑계로도 시비를 걸기 힘들 겁니다.”
“……가문이 힘이 없어서 네가 수모를 당하는구나. 이 아비가 널 볼 면목이 없어.”
“그 수모를 갚아 줄 날이 머지않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지금처럼만 해 주시면 됩니다.”
“그래. 그래 주마. 절대 이 일을 잊지 않도록.”
뿌드득 이를 갈며 전의를 다지는 아버지를 보며 로건은 내심 미소를 지었다.
‘그래. 지금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내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가문이 계속해서 전력을 다지는 사이, 자신은 또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그 녀석들부터 다듬어 주고, 그다음에는…….’
로건의 시선이 수도 그랑이 있는 동북쪽의 하늘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