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74)
74화
“……그 정도냐.”
“더 심한 것도 있습니다.”
“뭐?”
국무회의에서 고위 귀족들이 서로 난투극을 벌였다는 것보다 심한 게 뭐가 있을까 했는데.
“처음 시작은 1왕자파인 팔룬 데이비스가 재무대신으로 승차하자 경쟁자였던 2왕자파의 래리 클레트가 팔룬의 비리를 왕에게 고발하면서부터였습니다.”
– 데이비스 백작은 청렴해야 할 재무대신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자 팔룬 역시 래리의 비리를 고발했고, 결국 서로 물고 뜯는 폭로에 폭로가 이어졌다.
웃기는 것은 그 과정에서 1왕자파와 2왕자파의 귀족 다수가 같이 얽힌 비리가 밝혀졌다는 것.
그 즉시 두 사람은 서로 고발을 취하하고 질시 어린 농담이었다며 사과를 건넸다.
서로 제시한 증거까지 사이좋게 인멸해 가면서.
사실상 파벌 싸움을 하느라 왕실을 농락한 셈이었다.
“……병신들이 따로 없군. 그런데도 왕실이 가만히 있었다고?”
“어쩌겠습니까. 힘이 없는데. 뭐 그나마 왕이 두 그룹의 경쟁 사이에서 나름대로 이득을 취해 가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왕실로서는 나쁘지 않은 선택 같습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생각해 보면 로저 비프로스의 행동도 같은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었다.
당장 왕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걸 확인했지만. 그다지 다행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길이 막막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니까.
‘하필 그나마 사람 같은 3왕자가 세력이 없어서 문제란 말이지.’
로건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왕은 본디 젊었을 적부터 후사가 없었고, 불혹이 가까워지자 귀족들의 권유로 후궁들을 들였는데 바로 거기서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왕의 후계자를 생산하여 권력을 확고히 하려는 두 공작의 바람이 하늘에 닿았는지, 후궁으로 들인 두 공작의 딸들이 거의 동시에 임신하고 똑같이 아들을 낳은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후대의 풍운을 예고하는 것이었는데 그 후 십 년 가까이 지난 19년 전, 왕비가 마흔이 넘은 나이로 수태를 하여 3왕자를 낳았다.
받쳐 줄 외척 세력도 없지만 엄연한 정실인 왕비의 자식.
그 탄생이 결코 축복받지만은 못했을 것이라는 건 누구나 짐작 가능한 일이었다.
심지어 그 3왕자가 자라면서 보여 준 무재와 성품은 건국왕의 재래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뛰어났다.
더구나 비교 대상이 다혈질에다 오만하여 한 해가 멀다 하고 번갈아 사고를 치는 두 형이었다.
자연스레 3왕자가 진짜 왕재(王才)라고 소문이 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왕 역시 3왕자를 아꼈지만, 1, 2왕자의 외척인 두 공작은 3왕자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온갖 구실을 갖다 붙여 그가 세력을 확대하는 것을 막았다.
왕이 힘을 써 3왕자의 입지를 올리려고도 해 봤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나마 왕이 오래 살기라도 했으면 차후에 어찌 될지 몰랐겠지만, 올겨울 3왕자가 성년이 되기 직전에 왕이 급사하면서 본격적인 내전이 벌어졌다.
3왕자의 입장에서는 최악일 일들이 연달아 일어난 것이었다.
1왕자는 외조부인 6서클 마도사 후안 더글라스 공작의 후원을 받고 있었고.
2왕자는 단일 세력으로는 왕국 최대의 귀족이자, 가장 젊은 초인이라는 외조부, 요르단 발터마임 공작의 세력을 등에 업고 있었다.
결국, 그들 중 누구와도 세력을 겨룰 수 없었던 3왕자가 가장 먼저 숙청되려 할 때.
– 선왕의 뜻이오. 3왕자의 목숨을 보전해 주겠다면, 내가 새로운 왕의 칼이 되겠소이다.
중립 귀족의 태두, 양대 파벌 모두가 탐내던 이의 선언으로 3왕자는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물론 왕궁 깊숙이 유폐되어 평생 방 밖으로도 나오지 못하게 되지만.
그리고 그렇게 내전을 통해 나라의 저력을 갉아먹으며 왕이 된 1왕자와 후안 더글라스 공작은 자신들을 반대했던 모든 귀족을 숙청하며 이 나라의 전력을 바닥까지 끌어내렸다.
5년 뒤 제국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도 끊임없이 나라를 망쳐 놓은 폭정.
심지어 그 왕은 제국 전쟁 당시 로니안을 멋대로 이용하며 가문조차 지키지 못하게 만들었고, 결국 그랑을 지키는 방패로 남겨 두고 도망쳤다.
‘그놈은 절대 왕이 되게 하지 않는다.’
절대로 전생의 역사가 반복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기존의 흐름을 비틀 필요가 있었다.
‘2왕자 또한 1왕자와 별다른 바 없는 놈. 누군가 왕이 되려면 3왕자가 되어야 해.’
물론 어려운 길이었지만,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이었다.
1, 2왕자파가 나라를 초토화시키는 3년 전쟁부터 빨리 끝내야 하고.
그 두 가지를 모두 완수하려면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물론 생각해 놓은 바는 있었지만…….
“……개고생을 죽어라 해야겠지.”
“예?”
“아니, 수고했어. 최대한 빨리 임포릭을 정리하고 검공가로 와. 한동안은 거기 묵을 테니.”
“예에?”
“그 뒤에 또 해야 할 일을 알려 주지.”
놀란 눈의 필립을 뒤로 한 채, 로건은 일행을 이끌고 검공의 저택으로 향했다.
* * *
“신분 확인 끝났습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기사의 말에 로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핸더슨을 비롯한 기사들은 검공이 1년 중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저택이라는 말에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리기에 바빴지만, 로건은 굳이 탓하지 않았다.
‘그란디아의 기사라면 누구나 그럴 만하지.’
인연을 맺어 보겠다 임포릭 하나 들고 찾아왔던 과거의 자신도 그랬으니까.
물론.
“공자님. 공작가의 하녀와 제가 잘 되면 가문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저기 저 예쁜 하녀에게 저를 좀……. 아, 아파요! 손, 손! 농담입니다, 농담!”
다른 곳에 매료된 릭 녀석은 좀 단속이 필요했지만 말이다.
기사의 뒤를 따라 걸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맞은 편에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입고 있는 기사용 정복이 잘 어울리는 온화한 인상의 삼십 대 남자.
그는 앞선 기사의 경례를 받고는 이내 일행의 앞에서 살짝 고개를 숙였다.
“로건 공자님이시죠? 저를 따라오십시오. 공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다른 분들은 그대로 에르만 경을 따라가시면 됩니다.”
지난번에 저택에 방문했을 때는 보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분명 익숙하게 느껴지는 그 이상한 기분에 그를 자세히 보는 순간.
“아……!”
로건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왜 그러시는지요? 제가 무슨 실례라도?”
“아, 아닙니다. 제가 아는 분과 많이 닮으신 듯하여…… 혹시 성함이…….”
“아, 이런! 제 소개를 잊었군요. 루이스 하이온. 펠릭스 공작님의 부관입니다.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역시…….”
“예?”
“아닙니다. 안내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부드러운 웃음과 함께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을 로건은 감회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로건이 기억하는 루이스 하이온은 지금의 유한 인상과는 달리 굳건하고 단단한 인상이었다.
떠올릴 때면 얼굴을 십자로 가로지르는 두 개의 기다란 칼자국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역전의 용사.
‘루이스 대장. 그리도 말을 안 하더니, 이곳 출신이셨구려.’
로건의 상념은 아득한 시간을 뛰어넘어 한 편의 추억으로 머릿속에 펼쳐졌다.
– 모시던 주군을 지키지 못한 기사가 출신을 말해 무엇하겠나. 그저 그란디아의 독립을 위해 남은 생을 바칠 뿐. 자네도 그런 것 아닌가?
로건은 당시에 차마 아니라고 답할 수 없었다.
복수심에 불타올랐던 자신과는 달리 이상을 품고 있었던 그란디아 해방 전선의 지도자.
그리고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날의 상황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히 떠올랐다.
– 부탁하네. 고대어에 해박한 사람이 지금은 자네밖에 없어. 무조건 외우게. 여차하면 책은 태우더라도, 내용은 머릿속에 담아 재능있는 이에게 전해야 해. 혹시 그것조차 안 될 경우에는…….
그때 그가 신검 비전과 함께 건넸던 또 다른…….
‘음? 또 다른 물건?’
찌이잉.
“윽!”
“음? 공자! 왜 그러십니까?”
조금 앞서 걷고 있던 루이스가 놀란 얼굴로 로건을 부축했다.
이내 같은 사람의 체온과 목소리가 옛 기억을 뒤덮으며, 떠오르려던 기억이 일순간 사라져 버렸다.
“아…….”
“괜찮으십니까?”
무언가 중요한 기억이었던 것 같은데, 두통이 사라지면서 기억 역시 백지처럼 지워졌다.
“아, 감사합니다. 루이스 대…… 부관님. 제가 잠을 좀 설쳐서 그런가 봅니다.”
“……젊을 때 몸을 더 잘 다스려야 합니다. 당장 괜찮은 것 같아도 나이가 들면 다 후유증으로 돌아오지요. 관리 잘하십시오.”
머나먼 미래, 아니, 과거라고 해야 할까.
뭐라고 해야 할지 애매한 전생의 그 시간 속에서도 그가 자주 하던 말이었다.
그때보다 한참은 어린 지금의 루이스도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저게 그의 말버릇이었나 보다.
그 말을 듣자, 멍했던 정신이 확 돌아오는 것 같았다.
‘무슨 기억이든 이제는 지나간 시간 속의 일. 이번 삶에서는 일어나지 않게 하면 그만이다.’
아쉬워할 이유도, 애써 떠올려야 할 이유도 없다.
로건은 가벼운 한숨과 함께 미련을 털어 버리며 다시 루이스의 뒤를 따랐다.
이상하게 맥동하는 포스코어의 반응도 인식하지 못한 채로.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예.”
루이스와의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문 안쪽에서부터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들어오고 뭐 하는 거냐!”
피식.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겨우 수습하며 로건은 검공의 집무실 문을 열었다.
끼이익.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것은 환한 미소의 금발 중년인과 그 옆에 서 있는 만삭의 귀부인이었다.
부부의 표정은 너무나도 밝아 보였다. 특히나 겉모습만 중년인인 칠순의 노인은 어째 이전에 보았을 때보다 더 기력이 쌩쌩해 보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건강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데, 먼저 인사에 답한 것은 검공이 아닌 부인이었다.
“당신이 그 로건 공자로군요. 남편에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우리 부부가 큰 신세를 졌네요.”
둥글고 순한 인상의 공작 부인은 그 말을 하면서 얼굴에 미미한 홍조를 띠었다.
마흔이 다 된 나이라고 알고 있는데 부끄럼을 타는 모습이 여전히 소녀 같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사모님. 과연 듣던 대로 아름다우시군요. 스승님께서 그리 자랑하신 이유를 이제야 알겠습니다.”
“어머? 이이가요?”
못 믿겠다는 얼굴로 남편을 바라보자, 그 남편이 살짝 붉어진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놈이 보자마자 실없는 소리는! 아부 좀 하지 마라. 내가 그런 연기까지 하지 않았으면 오지도 않았을 매정한 놈이.”
“에이, 아닙니다. 그래도 왔겠지요. 지금은 아니겠지만요.”
잠시 서로를 노려보는 사제의 모습에 부인이 어리둥절할 때, 두 사람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그래, 로저 놈 표정이 어떻더냐?”
“직접 보셨어야 하는 건데요. 정말 최고였습니다. 크크크.”
직접 만나는 것은 고작해야 이번이 두 번째.
스승과 제자가 되기로 한 것도 마법 통신으로 이어진 일방적인 통보로 만든 인연이었지만, 서로가 서로의 인생에 남긴 족적이 너무 크기에 기간과 상관없이 깊은 정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튼, 다시 한번 후사를 얻으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아, 아직 아이의 성별은…….”
“그게…….”
“상관없다. 남아면 어떻고, 여아면 어떻더냐. 우리 부부의 한을 치유해 준 고마운 아이다. 귀하게 키울 것이야.”
검공은 부인의 손을 다독이며 흐뭇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남아 선호 사상이 극심한, 이 시대 그란디아 왕국의 귀족으로서는 하기 힘든 이야기.
하지만 검공의 얼굴에 떠오른 훈훈한 표정엔 진심이 담겨 있었고, 공작 부인의 얼굴 역시 행복해 보이기만 했다.
‘잘된 일이야.’
그저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한 일이 이렇게 예상치 못한 좋은 결과도 가져왔다는 것이, 여전히 묘한 감흥을 만들어 주었다.
‘뭐, 궁극적으로는 다 마찬가지일까?’
가족을 살리고 가문을 보존하겠다는 자신의 목적.
그것을 이루는 것만으로도 이 나라의 백성들은 노예로 팔리고 유민이 되어 유랑하던 전생보다는 행복해질 확률이 높을 것이다.
새로운 시각. 그 작은 깨달음이 절로 입가에 미소를 만들었다.
검공과 그 부인의 행복한 모습이 로건에게 지금 잘하고 있다고, 앞으로도 잘 해낼 수 있다고 희망을 전해 주는 것 같았다.
“역시 생각이 다르십니다. 멋지십니다, 스승님.”
“어허. 아부 좀 하지 말래도. 경지는 하루가 다르게 상승하는 녀석이 기사로서 갖춰야 할 태도는 점점 사라지는구나. 더욱 높은 경지에 닿기 원한다면 평소의 행동과 습관도 그에 맞추려고 노력하거라. 말도 조금은 아끼고.”
그 희망찬 감정도 잠시, 바로 이어진 검공의 충고에는 가슴이 뜨끔했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예? 아, 뭐든 말씀하십시오, 사모님.”
“곧 태어날 이 아이. 이 아이의 이름을 공자가 지어 줄 수 있을까요?”
“……예?!”
생각지도 못한 말에 로건이 눈을 크게 떴다.
“나와 부인이 쭉 상의해 온 일이다. 모든 것이 네 덕이니, 태어날 이 아이의 운명 역시 네가 열어 주면 좋겠다고. 어떠냐? 설마 거절하지는 않겠지?”
그란디아의 문화에서는 이름을 지어 주는 일을 운명을 열어 준다고 말했다.
왕국 사람들에게는 이름이 가진 힘이 아이가 앞으로 살아갈 운명의 길을 만들고 밝혀 준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만큼 이름 짓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귀족들은 아이가 태어난 즉시 이름을 지어 줄 고명한 인사를 수배하고, 성명식이라 부르는 파티까지 준비했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것을 자신에게 맡기겠다고?
아무리 로건 덕분에(?) 태어난 아이라고는 하나, 사실상 일종의 선물과 다름없었다.
사교계에서 로건의 지위를 격상시켜 줄 선물.
부담스럽긴 하지만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입니다.”
안색이 굳은 로건의 표정에 혹시나 하던 부부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피어났다.
“그래. 고맙다. 당신은 이제 들어가 쉬시구려. 내가 안 나와도 된다고 했는데.”
“그래도 예의가 있지요. 부탁하는 마당에…….”
“그 부탁이란 게 결국 보답…… 에잉, 역시 나는 말재주는 별로다. 그냥 몸으로 이야기하자.”
“예?”
“이렇게 짧은 기간 내에 어찌 이리 실력이 향상됐는지 신기하기 그지없구나. 일단 실력부터 보자.”
갑자기 투기를 보이는 검공의 모습에 로건 역시 웃으며 대답했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