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75)
75화지금 자신이 어디까지 성장했는지, 얼마나 강한 적을 상대할 수 있는지.
그 한계를 마음 놓고 시험해 볼 수 있는 대상.
로건에게 검공과의 대련은 그런 의미였다.
모든 공격이 완벽하게 막히고 반격을 당하는 것이 당연한 상대.
로건은 그런 검공을 상대로 그동안 상승한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뽐냈다.
하지만 웃으며 대련을 시작했던 검공은 왜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표정이 점점 굳어 갔다.
쾅!
똑같이 정면으로 충돌한 검이었지만 일방적으로 튕겨 나가는 것은 로건이었다.
30여 합이 흐르는 동안 부드럽게 회피하거나 절묘하게 허점을 찌르는 것이 전부였던 검공이 처음으로 힘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로건은 당황하지 않고 다시 달려들려고 했지만, 검공이 먼저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지금 뭐 하는 거냐?”
“예?”
“설마 이게 최선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그래? 그럼 확실히 최선을 다해 보거라.”
심상치 않은 검공의 어조에 로건의 표정도 확 굳어졌다.
사실상 정식으로 사제지간이 된 이후 가진 첫 수련이었다.
처음부터 스승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망설여지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로건은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를 보이기로 결심했다.
우웅.
“합!”
콰아아아앙!
기합과 함께 여덟 겹의 황금빛 파도가 검공을 향해 밀려들었다.
그리고 그 여파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번뜩이는 빛줄기가 일직선으로 공간을 관통했다.
월광의 기사 플란츠에게 중상을 입혔던 신검 비전의 연계를 선보인 것이었다.
이번엔 나름 놀란 표정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지만, 어느새 자신의 바로 앞으로 다가와 목에 검을 겨눈 스승의 표정은 차갑기만 했다.
“……어처구니가 없군. 두 번 공격하고 쓰러질 셈이냐.”
빠악.
“컥!”
검공의 검이 비기를 쏟아 낸 후 비틀거리는 로건의 다리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평범한 수련용 철검에 불과했지만 로건에겐 마치 철퇴처럼 느껴졌다.
“일어서라. 다시!”
“……예?”
“다시!”
짧지만 묵직한 호통 소리에 로건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포스는 간당간당했고, 다리는 여전히 후들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일순간 심령을 엄습하는 무시무시한 기세에 몸이 자동으로 반응했다.
“의미도 없이 포스를 쏟아 내는 바보 같은 짓이 네 최선은 아니겠지?”
신검의 비전이 순식간에 바보짓으로 전락하는 순간.
“그게 무슨……?”
로건은 멍한 표정으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내게 최선을 다한 네 ‘검술’을 보이란 말이다!”
가볍게 겨눠진 검 끝에서 살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영혼을 자극하는 차가운 냉기가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나를 더 실망시키지 마라, 로건.”
바로 얼마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검공의 분위기에 창백해진 로건이 이를 악물며 검을 들었다.
그리고 남은 힘을 쥐어짜 그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최대한의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따아아아앙!
검공의 가벼운 후려치기에 손아귀가 찢어지고 수련용 철검이 엿가락처럼 구겨져 날아갔다.
“이게 검술이라고?”
차가운 표정보다 더 냉랭한 목소리가 날카롭게 마음을 쑤셨다.
로건은 자신도 모르게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왕국 최고의 검호. 그래, 인정하지만…….’
하지만 그 자리와 명성이 자신이 쌓아 온 노력을 폄하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뿌드득.
“……제대로, 제대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찢어진 손아귀에서는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고, 후들거리는 다리는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든 상태였다.
밑바닥을 보였던 포스는 이제야 간신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로건은 그 부족한 자리를 오기로 메우며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날아간 철검 대신 연무장 한쪽에 세워져 있던 또 다른 수련용 철검을 집어 들었다.
조금 전처럼 성취를 보여 주겠다느니, 내 한계를 시험해 보겠다느니 하는 안일한 생각은 의식 저편으로 날려버렸다.
‘기필코 한 방 먹인다.’
불가능할 것이라는 이성의 외침도 애써 접어 두었다.
슥.
최소한의 힘을 최대로 활용하기 위해 가장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그 최선의 효율을 뽑아낼 수 있는 경로를 머릿속에 그렸다.
파박.
바닥을 박차는 발놀림부터 간결하게 휘둘러지는 검까지.
잡념이 없어진 만큼 놀랍도록 깔끔해진 경로가 몸으로 실현되었다.
하지만.
뻐어억!
“커어억.”
“너무 단순해!”
명치부터 퍼진 짜릿한 통증에 신음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끄, 끄으.”
당장 숨이 멎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통증이었지만, 맞은 자리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듯한 분노가 억지로 다시 몸을 일으켰다.
“항상 다음 수를 생각해라. 의도가 훤히 보이는 검은 검술이라 말하기도 민망하다!”
그놈의 검술 타령이 재차 이어졌다.
‘도대체 뭘 어쩌라는 거야!’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눌러 담으며 다시금 최선의 경로를 그렸다.
철혈검의 투로를 생각하며 ‘적’의 반격 그 이후까지 생각했다.
로건의 몸이 또다시 머릿속에서 그린 그대로 움직였다.
그렇게 다시 만들어 낸 가장 효율적인 일격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막히며 곧바로 반격을 허용했다.
빠아악!
하지만 이미 맞을 것을 각오하고 있던 로건은 통증을 억지로 감내하며 오히려 한 발 더 내디디며 재차 검을 휘둘렀다.
로건이 이번만큼은 제대로 들어갔으리라 생각하던 찰나.
퍼어억!
아까보다 더욱 짜릿한 통증이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좀 더 머리를 써! 수법이 조잡해!”
이성의 끈이 점점 가늘어지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로건은 검공에게 한 번이라도 일격을 가하겠다는 그 생각 하나만으로 계속해서 공격과 실패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이상하게 귓속을 파고드는 검공의 한마디 한마디에 자세를 조금씩이나마 고쳐 갔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이제야 나쁜 버릇을 조금 버렸구나.”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과 함께 검공의 다그침이 멈췄다.
동시에 털썩 쓰러졌던 로건의 사고 역시 정상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끄으으으.”
정신이 들자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온몸이 저릿저릿한 고통이었다.
조금 전까지 내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모를 정도로.
“로건.”
“으윽…….”
그리고 자신을 이 상태로 만든 원흉의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이가 갈렸지만.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보다 경지는 상승했을지 몰라도 검술은 그대로, 아니 오히려 퇴보했다. 빛나던 원석을 갈고 닦기는커녕 똥을 묻혀 온 걸 본 기분이다.”
다시금 신랄하게 파고드는 비난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게 무슨……?!”
“검술 수련은 하긴 한 거냐? 도대체 어떻게 경지가 올랐는지가 신기할 정도다. 기본이 무너졌어.”
“……?!”
“특별한 기술에 포스를 있는 대로 퍼붓는다고 해서 그게 강력한 검술 같으냐? 그런다고 강해지는 것 같아?”
신검 비전에 몰두해 있던 최근이 떠오르며 로건의 가슴을 섬뜩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경지의 상승은 기본 역량의 상승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재능이나 운으로 어찌어찌 벽을 넘어 봤자 결국 다음 한계만 더 높아질 뿐이야. 네 잘못된 버릇, 여기 있는 동안 내가 모조리 뜯어고쳐 주마.”
폐부를 찌르는 검공의 말에 흐릿해져 가던 로건의 의식에 조금씩 초점이 잡혔다.
‘그랬……던가.’
회귀하면서 생긴 재능과 과거의 경험이 더해져 쉽게 상위의 경지를 성취한 이후 신검 비전에만 몰두했다.
가문의 일이 바쁠 때는 그조차도 소홀히 한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가슴 한편에는 근거 없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잘하고 있어, 나도 이젠 천재야…… 라고.
‘내가 언제부터 천재였다고.’
과거로 돌아온 뒤, 모든 것이 뜻대로 풀려 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터무니없는 착각을 한 것 같았다.
“끄으으. 다시…….”
“음?”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선명한 눈빛의 로건이 힙겹게 나마 몸을 일으켰다.
‘다시 기본부터 내 역량을 가다듬는다.’
맥동하는 포스코어가 또렷하게 느껴졌다.
남보다 빠른 회복력이 이 순간만큼 반갑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한참 뒤.
로건은 의식을 잃은 채 연무장 밖으로 실려 나갔다.
처음 그를 목격한 기사들이 바로 사제를 부르려 했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하지만 검공이 오히려 그런 기사들을 만류했다.
“검술은 몸으로 배우는 것이다. 힘든 만큼 몸에 새겨질 것이다.”
그냥 내버려 두면 죽을 것 같은데요?
기사들이 눈빛으로 항변해 봤지만 검공은 흔들리지 않았고.
결국, 기사들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기절한 로건을 옮겼다.
한옆에서 그런 일련의 광경을 보고 있던 루이스가 묘한 미소와 함께 검공을 향해 입을 열었다.
“꽤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흥. 재능이나 낭비하는 녀석이 무슨…….”
퉁명스러운 어투와는 달리 검공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맺혀 있었고.
“그래도 근성 하나는 마음에 들어.”
조금 늦게 따라온 어색한 칭찬은 루이스의 눈을 크게 뜨게 만들었다.
* * * 오래간만에 만난 스승과의 수련은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큰 소득을 남겼다.
하지만 검공을 만나자마자 탈진할 정도로 수련을 하게 되리라는 것은 로건의 예상에는 없었던 일.
어쩔 수 없이 예상보다 훨씬 일찍 처소에 들게 되었고, 그것은 틈을 노리던 누군가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럼 쉬십시오, 공자님.”
“그래.”
지친 모습이 역력함에도 간단하게 수욕만 한 뒤, 침대 위에서 좌정한 채 명상을 하는 주인.
과연 언제 자는 것일까 하는 의문은 이미 거둔 지 오래였다.
‘건강하시면 됐지.’
어디 건강하다 뿐이랴. 또래에서는 역사에 손꼽히는 강자라고 영주님도 입에 침을 튀겨 가며 칭찬하시지 않았던가.
그런 주인을 걱정하는 것은 괜한 오지랖일 뿐이다.
그러니 지금은.
‘영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해야지.’
릭은 흐릿하게 웃으며 품속을 더듬었다.
장가를 가야겠다는 자신의 억지 핑계도 웃으며 눈감아 준 주인을 위해서.
릭은 최대한 소리를 죽여 총총걸음으로 움직였다.
“누구라고?”
“로건 공자님을 모시는 시종, 릭이라고 합니다. 맥라인 남작님의 전서를 전달해 드리러 왔습니다.”
남작가의 시종이 공작과 직접 대면을 청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
릭은 스스로를 공작의 부관이라 밝힌 사람이 편지를 공작 각하에게 제대로 전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끼이익.
“헙!”
“로건의 아비가? 통신으로 하면 될 것을 왜?”
갑자기 안에서 공작이 직접 문을 열고 나왔다.
심장이 튀어나올 듯 놀란 릭은 황급히 고개를 더욱 조아리며 더듬더듬 사정을 설명했다.
“그게…… 공자님이 아시면 곤란한 일이라…….”
“음? 로건이 알면 곤란한 일? 흐음, 맥라인 남작…… 재밌는 사람이었군. 이리 줘 보게.”
“예? 예! 여, 영광입니다.”
릭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게 덜덜 떨리는 손으로 곱게 접힌 편지를 내밀었다.
에스페란자 공작 각하 친전.
큼직하고 단정한 필체가 그 주인의 성정을 말해 주는 듯했다.
밀랍 봉인에 찍힌 불꽃 문양의 인장은 맥라인 남작이 직접 보내는 편지라는 확실한 증거.
검공은 망설이지 않고 봉투를 뜯어 내용을 살폈다.
피식.
존경하는 펠릭스 에스페란자 공작님께 미관말직 패드릭 맥라인이 염치없이 청을 드리고자 합니다.
“아들이 제 아비 말버릇을 배운 거였군.”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하는 편지의 내용은 그란디아 귀족의 예법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었지만, 검공은 그것이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았다.
다만.
각하께 미루어 다 갚지 못할 빚을 지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사하신 검술 덕분에 저희 가문 기사들의 수준이 한층 높아졌고, 그로 인해 큰 위기를 쉽게 넘길 수 있었습니다.
‘음?’
이어진 문장은 검공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부탁 운운하는 것은 주제넘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나, 천고의 비전을 아낌없이 전할 만큼 로건을 아끼시는 각하의 마음을 믿고 망설이다 펜을 듭니다.
“허어?”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이 연달아 이어졌지만.
로건은 이 일에 대해 모르오니, 부탁이 과하다고 여기신다면 자식을 가진 부모의 과욕이라 생각하시고 저만 탓해 주셨으면 합니다.
겸손한 남작의 말과 이어진 편지의 본론은 검공을 미소 짓게 했다.
사실 미흡한 저의 자식, 로건은 재작년 작은 아픔을 겪었습니다. ……(중략)…… 비프로스의 압박을 벗어나기 위함만은 아닙니다. ……(중략)…… 혹 이 과한 청을 들어주시겠다면, 맥라인은 각하의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허허. 재미있는 청이로군. 그래, 로건은 이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고?”
“예. 공자님은 지금 상황에서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라고 하셔서…….”
“스무 살 언저리의 아이가 여자한테 관심이 없다고?”
“예. 저희 공자님이 조금 특이하시지 않습니까.”
“허허. 그렇긴 하지.”
검공의 눈빛에 잠시 약간의 놀람이 떠올랐지만, 이어진 시종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의 제자는 여러모로 특이한 구석이 있었으니까.
“남작님은 그것이 다 과거의 상처 때문이라 생각하고 계십니다.”
“흐음…… 재밌겠군. 좋아. 내 한번 힘써 보지.”
“가, 감사합니다!”
초조한 표정으로 답변을 기다리던 릭은 펄쩍 뛰며 좋아했다.
‘그 녀석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단 말이지.’
짓궂게 웃고 있는 검공의 속내를 알았다면 그리 좋아할 수만은 없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