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76)
76화핸더슨은 배정받은 방에 짐을 풀자마자 밖으로 뛰쳐나왔다.
심장이 두근거려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유난히 다혈질이기 때문인가 싶었지만.
쾅.
“큭. 뭐야, 조장?”
“너도?”
“뭐야. 다 똑같잖아.”
거의 비슷한 시기에 방문을 박차고 나온 18조의 조원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멋쩍게 웃었다.
“못 봤다면 모를까, 어떻게 저 독수리 문양의 기사들을 보고도 참을 수가 있겠어.”
자신의 고삐를 잡으라고 붙여 준 부조장 디그롬이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소리를 했다.
그들뿐만이 아니라 기사라면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에스페란자 기사단. 겨뤄 보고 싶다.’
그란디아 최고의 기사단이라고 하면 언제나 첫손에 꼽히는 것이 검공가의 에스페란자 기사단이었다.
같이 3대 기사단 중 하나라 불리는 왕실 기사단은 왕궁 안에서만 움직이며, 또 다른 하나인 발터마인 기사단은 그 질보단 규모로 유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그들의 호승심을 자극하는 것은.
‘그 검공이 직접 키운 기사들.’
왕국에서 검을 든 기사라면 누구나 동경하는 이 나라 최고의 검호.
검공의 가르침을 받은 에스페란자 기사단.
어찌 그 실력이 궁금하지 않겠는가.
“그래. 가자. 맥라인 기사들의 실력을 보여 주자고.”
가장 앞장서서 걷는 핸더슨의 눈동자는 수도에 들어와 세련된 아가씨들을 처음 보았을 때보다 몇 배는 더 열정적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우리는 평기사가 중급이다. 자네는 몰라도 다른 친구들은 대련해 주기가 좀 그렇군. 아니면 수습기사들하고라도 대련해 볼 텐가?”
그러나, 독수리 문양의 갑옷을 입은 기사의 한 마디에 호기롭게 나선 핸더슨과 조원들은 처음부터 사기가 꺾이고 말았다.
“포스유저 하급이면 이제 수습기사로 한창 검술을 배울 때야. 우리 기준으로는.”
맥라인, 아니 대부분의 기사단에서 조장급에 달하는 중급기사가 에스페란자 기사단에서는 평기사의 자격이었다.
중급기사 200명, 상급기사 40명, 최상급기사 2명.
막연히 강력하다 알려진 에스페란자 기사단의 진짜 전력은 기가 질릴 정도였다.
‘우리 영주님이 몇 년 전까지 상급이었는데 근방에서 적수가 없었다고! 근데 여긴 뭐 이래, 젠장.’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좋다. 맥라인 기사단 18조 조장, 핸더슨. 대련을 청한다.”
“좋다.”
자존심이 상한 동료들의 표정이 일그러지긴 했지만, 그렇게 시작된 에스페란자 기사와의 대련에서 핸더슨은 의외로 평수 이상의 결과를 이루었다.
나쁘지 않은 성과였지만, 핸더슨의 마음에 조금 걸리는 것이 있었다.
“젠장. 나도 수습기사들하고라도 대련해 볼까?”
“죄다 아직 어린 애들이더라. 20대에 포스 각성 못 하면 수습기사로도 안 받아 주는 데가 여기라던데?”
“그래? 아무리 그래도 그건 자존심이…….”
“자존심이 밥 먹여 주냐.”
동료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면서 핸더슨은 조금은 멍한 표정으로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전혀 다른 스타일의 중급 검술을 익힌 에스페란자 기사와의 대련은 다시 되짚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도움이 될 정도로 인상이 깊었다.
다만…….
“조장. 그런데 그 기사 최선을 다한 거 맞아? 검술이 좀…….”
“최선을 다한 건 맞을 거야. 그래서 좀 이상해.”
하급의 끝에 다다라 곧 중급을 넘보는 디그롬의 시선은 정확했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에스페란자 기사단의 평기사.
그가 펼치는 검술은 명백히 철혈검에 비해 수준이 낮았다.
그럼에도 경지에 오른 연차의 차이인지 핸더슨과 대등하게 싸웠지만, 철혈검이 검공을 통해 맥라인으로 들어온 것으로 알고 있는 핸더슨과 디그롬에게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광경이었다.
“다들 내일부터는 수습기사들하고라도 대련해 보는 게 어때?”
“끄응. 여기서 자존심을 차리는 건 역시 좀 아니겠지?”
“그래. 그럼 해 보자고. 개망신을 당하더라도.”
그런 동료들을 보며 핸더슨과 디그롬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같았다.
어쩌면 로건 공자님이 얻어 온 철혈검은 검공께 받은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설마 대공자님이 창안한 것은 아닐 테고…….’
‘도대체 어디서 구해 오셨을까?’
생각이 뻗어 나가는 방향은 서로 달랐지만, 결론은 자명했다.
대공자가 에스페란자 공작가의 검술보다 더 뛰어난 검술을 가문에 베풀었다.
두 기사의 마음속에서 미래의 주군에 대한 기대가 조금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 * * 수도에 오게 된 표면적인 이유는 스승인 검공을 만나 그 후계자가 탄생할 때까지 머무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도, 그 시작은 스승과의 신뢰를 쌓을 필요가 있었다.
그랬기에 로건은 도착한 첫날부터 시작된 수련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수련이 통렬하게 자신의 실수를 돌아보게 만들어, 로건은 모든 계산을 잊고 한동안 수련에만 열중했다.
그랬기에 검공가에 도착하는 대로 혹여나 허튼 사고 치지 않게 기사들을 단단히 손봐 주겠다 결심했던 것을 떠올린 때는 이미 도착한 지 일주일은 지난 후였다.
‘이 녀석들 또 어디 가서 사고 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렇게 걱정하며 찾은 길에서 그는 전혀 의외의 광경을 목격하였다.
“대공자님이다! 충! 성!”
“공자님! 충성!”
“존경합니다!”
“……어, 그래.”
‘뭐야, 이것들…… 갑자기 왜 이래?’
오랜만에 마주한 녀석들의 반응이 너무 과했다.
가문 내에서 자신의 위상을 생각해도 지나치게 과한 감이 있었다.
“디그롬. 무슨 일 있었나?”
“이상 없습니다!”
“그동안 일과는?”
“에스페란자 기사단과 지속적인 대련 겸 수련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열심이군.”
확실히 이른 아침의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땀방울들이 맺힌 것이 보였다.
로건의 걱정이 무색하게 수련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에 애초에 그들을 찾아온 의도는 무산되었지만,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럼 수련은…….”
“앞으로도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공자님의 배려,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만 왜인지 모를 격한 반응이 그치질 않는 것이 의문일 뿐이었다.
굴리려 했던 놈들이 알아서 더 구르고 있으니, 딱히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다시금 반성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일반 기사들도 이렇게 열심인데. 확실히 내가…….’
로건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기사들의 옆에서 검을 들었다.
“어? 대공자님?”
“오늘은 나도 같이 수련하지.”
기사들은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에 로건의 한숨도 이내 미소로 바뀌었다.
그렇게 기사들과 함께 땀 흘리며 기분 좋게 수련을 마치고 나오는 길.
생각지도 못한 황당한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맞선……이요?”
“그래. 스물한 살의 나이에 약혼자 하나 없는 귀족가의 후계자라니, 그게 무슨 모양 빠지는 꼴이냐. 하물며 그게 내 제자라니! 그래서 내가 직접 짝을 찾아 줄까 한다.”
“있는 동안 수련에 집중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갑자기 왜……?”
“마음이 편안해야 수련도 잘되는 법이다. 나도 지금 부인을 만나고 나서야 깨달은 사실이지. ”
“…….”
몇 달 안에 왕국을 휩쓰는 내전이 벌어질 겁니다.
당신 제자는 그 전쟁에서 가장 열심히 날뛸 생각이구요.
‘……라고 말할 수는 없지. 젠장.’
이게 웬 느닷없는 날벼락인가.
로건이 경련이 일어날 것 같은 표정을 애써 관리했다.
“그래도 너무 급작스러워 당황스럽습니다. 갑자기 이런 일을 말씀하시는 이유가……?”
“글쎄. 부탁을 받았다고 해 두마. 아끼는 제자의 미래가 걱정되기도 하고.”
부탁이라는 말에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저희 가문에서 말입니까?”
“장성한 후계자가 약혼도 못 하고 있으니. 부모로서는 당연히 걱정되지 않겠느냐.”
검공은 당연한 일이라는 듯 말했지만, 로건은 얼굴을 구기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야 했다.
‘이런 젠장.’
로건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의미 없는 짓이야. 어차피 얼마 후면…….’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스승의 말을 그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일단 만나는 보겠습니다.”
하루 정도의 시간, 그 정도 낭비는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
“그래. 실망하진 않을 거다. 알아봤더니 너와 잘 어울릴 것 같더라. 수도에서도 나름 유명한 규수니까.”
스승의 입가에 맺힌 짓궂은 미소가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 * *
“예? 맞선이요? 아직도 포기 못 하셨어요?”
딸의 대꾸에 로버츠 플로이드 백작은 울컥하는 마음을 다스리며 애써 담담히 대꾸했다.
‘내가 어떻게든 네가 여자로서의 행복을 알 수 있게 해 주마.’
땀에 젖은 검은 무복과 손에 든 검.
백작가 장녀의 차림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아비의 눈에는 여전히 예쁘기만 했다.
물론 객관적으로도 미인이라고 확신하지만.
“그래. 우리 예쁜 딸의 인기가 여전하구나. 무려 펠릭스 에스페란자 공작 각하의 추천이다.”
“……에스페란자? 검공의 가문 말씀이세요?”
조금은 화색이 도는 딸의 얼굴.
하나 그것이 혼담 때문이 아님을 알기에 백작의 얼굴에 어린 씁쓸함이 조금 더 짙어졌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관심을 보이는 게 어딘가.
로버츠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딸의 관심이 더 커질 소재를 꺼냈다.
“그래. 그분의 제자라더구나.”
“검공의 제자요? 그분이 제자를?”
“그래. 아직은 아는 사람만 아는 이야기지만, 곧 유명해질 인재라더구나.”
‘그래도 너만 하겠냐만…….’
로버츠는 딸의 말투에 어린 기대감을 느끼며 목구멍까지 솟아오른 진심을 삼켰다.
어려서부터 활달했던 아이였기에 검술에 관심을 보일 수도 있다 여겼다.
검술 수련이라는 것이 어지간한 성인 남성들에게도 힘든 것이니만큼 금세 포기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것을 즐길 때도, 역시나 특이한 아이구나 하고 웃을 수 있었다.
그 딸이 열두 살에 포스를 각성하고 기사가 되고 싶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 계집애가 기사라니! 절대 안 된다! 3백 년 가문의 역사에 똥칠을 할 셈이냐!
당시만 해도 정정하던 선대 플로이드 백작, 자신의 아버지가 피를 토할 것처럼 소리를 지르던 때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났다.
그리고 딸의 나이 열다섯.
처음 만난 다섯 살 많은 약혼자를 두들겨 패 버리고 파혼을 당했을 때, 아버지는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가문 역시 무려 오러유저인 발터마임 공작의 손자를 두들겨 팬 후유증을 거하게 치러야만 했고.
그 후로 딸, 에일렌의 검술 수련은 철저히 봉쇄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일렌은 불과 2년 뒤, 이번엔 기사의 자격을 갖춘 맞선 상대를 일방적으로 구타하는 사건을 일으키며 자신이 이미 웬만한 기사 이상임을 증명해 버렸다.
– 저는 결혼 따위엔 관심 없어요!
딸이 가문에 공언하듯 외칠 즈음에야 로버츠는 반쯤 포기하고 말았다.
기사를 때려잡는 처녀.
그런 별명이 붙은 이후로는 혼담 자체가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왜 다른 여자들처럼 살려고 하지 않는지.’
로버츠는 그게 너무 답답했지만, 딸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니 이번 기회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놓칠 수 없었다.
‘공작 각하가 장담했다. 너무도 뛰어난 인재라고.’
그러니 어쩌면 에일렌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기라도 꺾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딸이 불행하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다른 평범한 여자들이 누리는 행복을 알게 해 주려는 마음이었다.
게다가 로버츠에겐 한 가지 확신이 있었다.
‘사내새끼라면 내 딸을 보고 반하지 않을 리 없어.’
검술 수련 때문인지 건강하고 날씬한 몸매.
그리고 이십 년 전 수도 제일의 미인이라 불리던 어미를 닮아 또렷한 이목구비에, 비단결 같이 찰랑이는 붉은 머리카락은 정상적인 그 나이 또래 남자라면 충분히 빠져들 만큼 아름답다 믿었으니까.
“검공의 제자라니, 궁금하긴 하네요.”
그래. 계속 관심을 가져라. 기왕이면 다른 쪽으로도 좀.
“제발 절대! 이번에는 폭력을 쓸 생각은 말거라! 알겠지?!”
하지만 딸의 반응은 미지근하기만 했다.
“……그 사람이 예의를 지킨다면요.”
애타는 아비의 마음만이 시꺼멓게 썩어 갈 뿐이었다.
* * *
“에일렌…… 플로이드 공녀님?”
자신과 같은 붉은 머리와 마치 그와 맞춘 듯한 붉은 눈이 독특한 인상을 주는 멀끔하게 생긴 청년.
자신을 처음 봤을 때 흔들리는 눈빛을 보이는 남자들은 수도 없이 만나 보았다.
‘그중 제대로 된 놈은 하나도 없었지.’
– 포스를 각성했으니, 아이는 튼튼하게 낳겠구려.
개소리를 지껄인 발터마임 공작 자제는 아직도 덜 때린 게 후회가 될 정도였으며.
– 여자가 포스를 각성해 봤자 뭐 얼마나 강하겠소. 한 손으로 상대해 주리다. 아, 아가씨는 무기를 쓰셔도 되오.
자기와 남의 수준차도 느끼지 못하는 머저리를 한 손으로 패 준 것이 왜 잘못인 건지는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마법사를 불러 포스를 봉인하고 조신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겠다는 정신 나간 소리를 지껄이던 다른 맞선 상대들 역시 마찬가지.
오직 외모만 보고 껄떡대는 한심한 수컷들.
이자도 그놈들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자, 검공의 제자라는 소리에 미약하게나마 가지고 있던 기대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로건 맥라인 공자님.”
장미가 연상되는 붉은 머리칼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옅은 크림색의 이브닝드레스에 반짝이는 목걸이로 포인트를 준 에메랄드빛 눈동자의 미녀는 놀랄 만큼 아름다웠다.
하지만 로건의 눈빛이 흔들린 것은 결코 그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하급의 극한, 중급에 가까운 포스.’
수도 그랑에서도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처자가 몸 안에 갈무리한 포스마저도 놀라울 정도라는 것.
고작 열여덟 살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식하고서야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그래, 플로이드 가문. 왜 처음 들었을 때 생각을 못 했지?’
3년 내전이 만들어 낸 수없이 많은 소문.
그중에는 플로이드 가문과 관련된 소문도 하나 포함되어 있었다.
무너진 가문에 피어난 강철의 장미, 에일렌 플로이드 3년의 내전 중 허망하게 스러져 간 그란디아의 인재들.
그중 대표적인 한 사람이 생각지도 못한 모습으로 그의 앞에 서 있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