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77)
77화플로이드 백작가는 수도 근방에 꽤 큰 영지를 가진 개국공신의 후손으로, 전생에는 중립 세력이었다가 내전이 시작되고 한참 뒤 무슨 이유에서인지 돌연 2왕자파로 참전하여 멸망의 길을 걸었다.
1왕자파가 유리해진 전쟁 말기, 눈치를 보는 다른 귀족들의 본보기가 되어 사라졌던 가문.
그리고 그 마지막에는 갓 성년이 지난 가문의 영애가 내성 문을 가로막고 기사 100명을 베어 버렸다는 믿을 수 없는 소문이 함께했다.
시대, 아니 나라를 잘못 태어난 여기사, 에일렌 플로이드.
여성의 지위가 낮은 그란디아 왕국의 특성상 그녀의 이야기는 더욱 유명해질 수밖에 없었고.
그녀의 최후는 내전 후 온갖 음유시인들의 입을 통해 노래가 되어 왕국 전역에 알려졌다.
‘다양한 이야기가 만들어져 퍼졌었지.’
물론 그 대부분은 그녀를 소재로 한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들뿐이었지만.
그만큼 그녀의 마지막이 그란디아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음은 틀림없었다.
그리고 로건은 지금 전생의 소문이 허황된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그녀의 나이를 생각하면 쉽게 도달하기 힘든 경지.
게다가, 여러모로 검술 수련에 몰두하기 힘들었을 귀족가의 아가씨라는 환경을 고려해 본다면…….
‘로니안이나 빅토르 못지않은 재능일지도.’
어쩔 수 없이 시간이나 대충 때우고 돌아갈 생각으로 나왔던 자리에서 뜻밖의 인재를 만났다.
로건의 눈동자에 호기심과 동시에 아쉬움이 어렸다.
‘내전이 몇 달 남지 않았다. 약혼 따위 의미 없어.’
차라리 약혼이 아닌 결혼이라면 그것을 구실로 이 인재를 맥라인에 묶어 둘 수 있다.
하지만.
이제 처음 만났는데 몇 달 안에 결혼까지 한다는 건 그란디아의 귀족가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내가 특별히 여자를 꼬시는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당장 이 재능 있는 처자를 맥라인에 데려올 방법이 없었다.
“……아깝다.”
“예?”
“아, 아닙니다. 공녀님. 말이 헛나와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
“…….”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을 무겁게 짓눌렀다.
“흠. 우선 차라도 한 잔…….”
“아, 예. 그럼…….”
“…….”
“…….”
억지로 대화를 시도해 보지만, 계속해서 이어지는 적막.
결국 로건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공녀님 역시 원해서 나오신 건 아닌 것 같군요.”
“예?”
“저 역시 마찬가지인 자리인지라. 서로 말을 맞추고 자리를 파하시는 건 어떠실까요?”
그 말에 상대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의미 없는 시간 낭비를 하지 말자는 얘기신가요?”
“예. 그렇습니다.”
“음. 그럼 의미 있는 시간을 가져 보는 건 어떠세요?”
“예?”
말이 통하는 정도를 넘어 갑자기 태도를 바꿔 흥미를 보이는 상대.
마치 시간 낭비라는 말이 기꺼운 듯한 표정이었다.
거기다 이런 제안이라면 혹시 역으로 자신을 유혹하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만약 그렇다면 조금이나마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랐다.
“……의미 있는 시간이라고 하시면?”
두근두근.
로건이 떠오르는 기대감을 감추며 에일렌을 바라보는데.
“검공 각하의 제자라고 들었습니다. 혹시 저와 검을 겨뤄 주실 수 있나요?”
“예?”
이어진 이야기에 로건은 헛웃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검공 각하의 제자이신데도 수준이 가늠 안 되는 것을 보면 분명 저보다 고수이실 거라 생각됩니다. 그래도 대련…… 곤란하실까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지만, 그만큼 신선하기도 했다.
간절한 표정의 에일렌을 보며 로건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어린 나이에 이런 재능을 가진 분과의 대련이라면 저 역시 환영이죠.”
* * *
“아가씨!”
바로 곁에서 에일렌을 챙기며 평생을 살아온 몸종, 라일라는 에일렌의 소매를 붙들고 발을 동동 굴렀다.
흠칫한 에일렌이 조금 멀리 앞장서 걷고 있는 로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들리진 않은 것 같았다.
“소리 좀 낮춰! 들리겠어!”
“아으으.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아가씨! 백작님이 절대 그러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내가 못 살아.”
“예전이랑은 경우가 달라! 이건 정식 대련이라고. 라일라, 나 못 믿어?”
에일렌이 떳떳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라일라는 단호하게 반박했다.
“못 믿죠. 못 믿어요. 제가 아가씨를 어떻게 믿어요? 아유, 진짜.”
푸흡.
왜인지 멀리서 웃음을 참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 좀 낮추라니까!”
붉어진 얼굴로 소리를 지르는 에일렌.
하지만 앞서 걷고 있는 로건의 상황도 그녀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공자님! 여자랑 대련이라니요! 설마 진짜로 하실 건 아니죠? 절대 안 됩니다!”
다급한 와중에도 소리를 낮춰 작게 소리를 지르는 릭.
그 표정이 너무 절실해 보여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웃지 마시라고요! 공자님이 대련이랍시고 여자를 때렸다는 소문이 나면 제가 영주님한테 죽습니다. 절대, 절대로 그러시면 안 돼요. 아시겠죠?”
간절한 목소리에 로건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
이 아가씨의 검술 실력이 지닌 포스 경지의 반만 되더라도 그런 소문은 안 날 것이다.
로건은 그런 생각에 한 말이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릭은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행히 상대는 그런 소문이 날 여지조차 막아 버렸다.
– 소문이 나면 곤란해요.
에일렌의 요청에 로건은 스승의 가르침을 받을 때만 상용하던 검공의 개인 연무장을 열었다.
연무장을 지키던 기사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봤지만 로건은 그 궁금증을 풀어 주지 않았다.
그 역시 죽음을 맞이한 뒤에야 유명해진 이 아가씨의 실력이 궁금할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잘하면…….’
가능성 있는 인재를 얻을 기회이기도 했다.
그렇게 담담히 대련을 준비하는데,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를 찔러 왔다.
“아가씨! 이왕 이렇게 된 거 화끈하게 이기세요!”
“이 여자가 미쳤나! 우리 공자님이 어떤 분인 줄 알아?!”
“웃기시네! 그쪽이야말로 우리 아가씨는 좀 알고?!”
초조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던 두 시종.
두 사람은 꼭 닮은 표정만큼이나 비슷한 마음이었다.
‘일이 이렇게 된 거, 맞선은 이미 망했다.’
‘이왕 망한 거, 적어도 우리 주인이 이겼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단 둘뿐인 참관인만이 존재하는 가운데.
간편한 무복으로 갈아입은 에일렌이 로건의 앞에서 수련용 철검을 들어 올렸다.
“에일렌 플로이드. 혼자서 10년간 검술을 수련해 왔습니다.”
검을 세우고 자세를 취하면서 건네는 인사말.
어디 영웅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예스러운 자기소개였지만, 로건은 웃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그 말의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었으니까.
“혼자서?”
그것을 비웃음으로 오해했는지, 에일렌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전 기사도 이긴 적 있습니다. 얕보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나중에 방심했다는 말을 듣고 싶진 않습니다.”
“아, 실례했군요. 놀라서 그만. 안심하십시오. 방심이라니,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이 아가씨가 큰일 날 소리를.
혹여나 그런 말이 스승의 귀에 들어갔다가는 단순히 골병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오히려.
“봐 드릴 생각은 전혀 없으니 다소 거칠더라도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단호한 로건의 말에 에일렌은 오히려 호기롭게 눈을 빛냈다.
그리고 잠시 후.
뻐어어억!
“컥!”
단숨에 갈비뼈 몇 대는 날아갈 듯한 충격이 에일렌의 옆구리를 후려갈겼다.
지켜보고 있던 라일라와 릭이 아찔한 표정으로 자신의 옆구리를 움켜쥘 정도였다.
에일렌은 치밀어 오르는 고통으로 입을 벌린 채 털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단 한 수.
강하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차이가 날 줄은 몰랐다.
아무리 검공의 제자라지만, 몇 살 차이도 나지 않는데.
“이, 이익!”
상기된 얼굴의 에일렌이 고통을 참고 일어섰다.
그리고 투지에 찬 눈으로 신중히 로건의 주변을 돌았다.
탓!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오는 움직임.
파아앙!
살벌한 파공음을 내는 철검은 완벽하게 로건의 사각을 노렸지만.
빠아악!
퍼어억!
“악!”
단숨에 철검을 쳐 내고 그녀의 머리통을 내려치는 로건의 검에는 인정사정이 없었다.
푸슉.
에일렌의 이마에서 거짓말처럼 솟구치는 피.
비명은 지켜보고 있던 이들의 입에서도 터져 나왔다.
“아, 아가씨!!”
라일라의 얼굴이 자신이 검을 맞은 것처럼 창백해졌다.
손이 덜덜 떨리고 금세라도 까무러칠 것 같은 라일라의 옆에서 릭 역시 그에 뒤지지 않는 창백한 표정으로 망연자실해 있었다.
‘마, 망했어. 난 끝났어.’
릭은 그저 울고 싶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여자를 패는 남자로 흉명을 날리는 로건과 가문에서 치도곤을 당하는 자신의 모습이 겹쳐서 그려지고 있었다.
뻐어억!
“큭!”
다시금 강렬한 통증이 옆구리를 파고들었지만, 에일렌은 주저앉지 않았다.
몇 번째인지 다 세지도 못할 통증에 익숙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피, 그것도 자신의 머리에서 피가 솟구치는 광경은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전신을 사정없이 두들기는 철검이 만들어 낸 끔찍한 통증도.
대련을 청할 때만 하더라도 이런 식이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아찔한 통증이 자신의 낭만적인 꿈속에 끼어들어 이질적인 현실을 만들어 낸 것만 같았다.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무심하게 내려다보는 상대의 붉은 눈동자가 마치 고작 거기까지냐고 비웃는 것 같았으니까.
‘어떻게든 한 대는 갚아 주고 말 거야!’
눈가에 흘러내린 피를 손을 들어 가볍게 털어 냈다.
손에 묻은 피처럼 시뻘겋고 재수 없는 저 눈동자에 피멍이 들게 해 주고 싶었다.
“그 눈에 피는 닦고…….”
탓!
“죽어!”
상대가 말을 하는 틈을 노린 일격.
이미 대련을 넘어서 극단적인 사심이 들어간 공격이었지만.
그것조차도 그에겐 소용이 없었다.
따아악!
반 박자 늦게 튀어나와도 언제나 먼저 자신을 막아서는 철검.
오히려 휘두르던 검을 틀어 이어진 공격을 간신히 막아 낸 것이 운에 가까웠다.
“판단 좋았습니다.”
당연히 비겁하다 할 줄 알았는데 칭찬이라니.
그러나 지금의 에일렌에게는 그것도 약 올리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동작은 좀 더 간결하게!”
빠아악.
짜릿한 통증과 함께 다시금 눈앞이 흐릿해졌다.
‘재, 재수 없어! 이 자식.’
사람을 놀리는 것도 아니고.
통증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눈물이 차올랐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에일렌의 몸은 다시 최대한 간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생전 처음 느끼는 온몸의 짜릿한 통증.
하나 그 통증에 비해 상처가 심하지 않으며, 그 통증을 심화하지 않기 위해 불필요한 동작이 확연하게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지금의 그녀는 인식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앞에서 검을 들고 서 있는 로건은 변화하는 에일렌의 모습을 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스승님이 날 볼 때 이런 심정이었겠구나.’
재능은 넘치는데 그 재능을 살리지 못했다.
혼자 수련했다는 것이 사실인 듯 나쁜 버릇도 많았지만, 몇 번 건드려 주는 것만으로도 바로 자세가 수정되었다.
그녀의 재능은 소문이나 음유시인의 이야기 따위가 아닌 진짜였다.
‘그러니 더욱 확실하게 마무리 지어야지.’
결심이 서는 순간, 또다시 달려드는 에일렌이 보였다.
“으아압!”
비명인지 기합인지 모를 괴성.
백작가 영애의 입에서 나왔다기에는 다소 품위가 떨어지는 소리였지만, 그 괴성이 만들어 낸 결과는 무시할 수 없었다.
지그재그로 움직이는 보법에 맞춰 변화하는 검은 무작정 정면으로 달려들던 처음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로건의 철검은 너무도 쉽게 그녀의 검을 쳐 내고 명치를 파고들었다.
뻐어억!
아마도 한동안은 절대 움직일 수 없을 충격일 것이다.
심리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로건이 검을 거두는 순간, 에일렌의 몸은 힘없이 허물어졌다.
그런데도.
“다, 다시. 다시 해요. 다시…….”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고 외치는 듯한 간절한 목소리.
어떻게든 땅을 짚고 일어서려는 에일렌의 모습은 처절하기까지 했다.
‘투지도 합격.’
로건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정리했다.
지금 하고자 하는 일은 앞으로의 일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하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로건은 굳은 결심을 하며 손을 내밀었다.
“도와 드리겠습니다, 공녀.”
“다시, 다시 하자니까요!”
“다음번에 또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씨이…….”
로건은 웃으며 쓰러진 에일렌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몇 마디 말을 속삭였다.
“어……? 예?”
묘한 표정이 된 에일렌이 한참 후 고개를 끄덕였고.
곧 그 몇 마디 말은 이 말도 안 되는 대련보다 더욱 믿기지 않는 상황을 만들어 냈다.
지켜보고 있던 시종들이 멍해지는 것을 넘어 사고가 정지된 채로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할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