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78)
78화
“푸하하하!”
“공자님! 지금 웃음이 나오십니까?! 미치셨어요? 아무리 취향이 이상해도 그렇죠. 가문에 보고도 안 하시고 약혼이라뇨!”
릭은 가슴을 두드리며 열변을 토해 냈다.
그러나.
“약혼 안 하면 에일렌 공녀의 상처에 대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데? 니가……?”
“왜, 왜 접니까! 때린 건 공자님이잖아요!”
억울한 표정의 릭이 한 발짝 물러섰다.
“어쩔 수 없잖아. 보물이 눈앞에 있는데 찜해 놔야지 어떡해.”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 미친……이 아니라. 그, 그 용맹한 아가씨와 약혼하겠다고 하면 영주님도 펄쩍 뛰실 겁니다! 검공께서 장난치신 거라니까요!”
“아닐걸.”
“아니, 그 미…… 끄응. 그 아가씨도 그래. 왜 고개를 끄덕여서는. 도대체 그때 무슨 말씀을 하신 거예요! 평생 여자 한 번 제대로 만난 적 없는 분이 도대체 어떻게 한 방에…….”
“너 지금 그게 궁금한 거지.”
“뭐, 그것도 약간 궁금……이 아니고! 공자님! 저는 그냥 충심으로!”
“그럼 안 말해 준다?”
“흠흠. 뭐, 알면 좋죠…….”
“안 알려 줘.”
“아, 진짜!”
피식.
로건은 난리를 치는 릭을 외면하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벌써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때의 흥분된 감상이 생생했다.
물론 릭이 짐작하는 것과 이유는 조금 달랐다.
‘검술 센스도 로니안 못지않았어.’
고작 허점을 몇 번 지적해 주며 몰아쳤을 뿐인데 그 자리에서 바로 검술을 수정했다.
그 모습에 로건은 곧장 제 생각을 바꾸었다.
무슨 짓을 해서건 반드시 그녀를 잡아야겠다고.
미래에 초인이 될 가능성이 큰 인재라는 판단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란디아에서 초인이 될 가능성이 있는 여기사가 나온다?’
꼭 그렇지 않아도, 만약 에일렌이 실력 있는 여기사로 유명해지기라도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나라의 가장 안 좋은 병폐 하나를 제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여성 병력을 육성할 계기가 되어 줄 수도 있어.’
옆 나라 아레스 제국은 성별에 상관없이 인재를 우대했고, 그 기조는 군대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재능이 있다면 성별을 가리지 않고 고등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것이 무술이건 마법이건 상관이 없었다.
그렇기에 제국에 존재하는 여기사나 여자 마법사는 그란디아에 없는 또 하나의 강력한 무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은 미래에 그런 제국과 맞서 싸워야 했다.
‘사용할 수 있는 패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천년 그란디아 왕국 근간에 뿌리박힌 사상.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은 단순히 가문의 세력을 확대하는 것만으로 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생각대로만 풀린다면…….
‘그 가능성의 대가가 약혼이라면, 아니 결혼이라도 싸게 먹힌 거지.’
탈진한 그녀를 일으켜 주며 귓가에 속삭이듯 건넨 말.
그 말은 릭의 짐작처럼 로맨틱한 말이 아니었다.
그녀의 소문과 상황, 그리고 이 실력을 고려했을 때 그녀가 좋아할 것으로 생각한 ‘제안’이었다.
– 대단한 재능입니다. 저와 함께하시죠. 맥라인으로 오십시오. 여자로서가 아니라 기사로서. 자유로운 수련과 대련, 그리고 명성을 떨칠 수 있는 전장을 약속하겠습니다. 물론 형식상 약혼은 해야겠지만.
상기된 얼굴의 에일렌이 복잡한 표정을 짓다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두 귀족 자제 간의 거래는 성립되었다.
예상치 못한 소득에 흥이 절로 솟구쳤다.
생각지도 못한 보물을 얻었으니 그럴 수밖에.
더구나 속 시원한 대련, 온전한 해방감에 상기된 에일렌의 미소는 정말로 아름…….
짜악!
“으와! 손자국 남겠다! 뭐 하시는 거예요, 공자님! 진짜 미치셨어요?!”
“아, 아니. 정신 좀 차리려고.”
“무슨 정신을 얼마나 차리시려고 자해를 합니까? 피 나잖아요! 피!”
호들갑을 떠는 릭의 얼굴을 보며 로건은 살짝 두근거렸던 가슴을 짓눌렀다.
“그러게, 피 나네. 쓰읍.”
로건은 손가락에 묻어 나온 피를 보며 속으로 자신을 향해 맹렬히 비난을 퍼부었다.
‘벌써 느슨해진 거냐?! 정신 차려, 로건! 여자는 무슨 여자. 여자 품에서 죽고 싶어서 그래!’
에일렌은 자신의 재능을 떨칠 기회를 얻고.
자신은 제국을 상대할 또 하나의 인재를 얻는다.
그래. 이것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담긴 거래일 뿐이다.
‘거래만으로 충분하다.’
계속해서 속으로 되뇐 말에 들뜬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난 스승님을 뵈러 갔다 오마.”
“갑자기 피를 내신 다음에 그런 말씀을 하시면 제가 어찌 받아들여야 합니까…….”
“괜찮아, 괜찮아. 별거 아냐.”
“별거 같은데요.”
로건은 투덜대는 릭을 애써 설득하지 않았다.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오히려 그에게 궁금한 게 생겼으니까.
* * *
“왜 에일렌이냐고?”
“예. 단순히 저를 결혼시키려고 하신 건 아닌 것 같아서요.”
“허허. 녀석, 그 아가씨가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이구나!”
“스승님!”
“크흠. 그래, 재촉하기는. 음, 두 가지 이유에서 그 가문을 선택했다.”
“두 가지나요?”
“그래. 우선 플로이드 백작가는 파벌에 속해 있지는 않지만, 수도에서도 제법 영향력을 발휘하는 가문이다. 중앙 정계에 연줄이 없는 맥라인을 대변해 줄 수 있는 가문이지.”
“……비프로스가 참아야 할 이유가 더 늘어나는군요.”
이제 내전이 멀지 않은 시기였기에 로건 자신은 별로 신경 쓰지도 않았던 이유.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상태인 검공으로선 타당한 이유였다.
“그래. 그리고 다른 게 더 중요한 이유인데…….”
짐짓 진지한 검공의 목소리에 로건이 집중하며 귀를 기울였다.
“꿍꿍이 가득한 놈과 왈가닥 처녀를 붙여 놓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서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마음에 들어할 줄은 몰랐구나! 푸하하하!”
“으…….”
무릎에 놓여 있던 로건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수련에 관해서는 엄하기 이를 데 없는 스승이 그 외에 상황에서는 자주 이런 엉뚱한 면모를 보였다.
세상에 알려진 검공의 위명이 실시간으로 깨어지는 느낌이었다.
남의 인륜지대사에까지 장난을 치다니.
혹시나 다른 이유가 있을까 했던 로건은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뭐. 이유야 어쨌든 잘됐으면 된 거지.’
그렇게 애써 위안하며 스승의 장난을 잊으려는데.
“그래. 아가씨도 만나고, 그렇게 얼굴도 빨개지고. 그러니 딱 그 나이 또래 같구나.”
“예?”
“네가 어깨에 진 짐이 얼만큼인지, 얼마나 무거운지는 나야 모른다. 하지만 젊은 놈이 항상 굳은 표정으로 세상 근심 다 짊어진 얼굴을 하고 있으니 그리 보기 좋지는 않더구나.”
“…….”
“모든 것을 네가 혼자 짊어질 필요는 없지 않느냐. 마음을 넓게 쓰거라. 주변 사람을 믿고, 좀 더 여유를 가져라. 늙은이의 주책일 수도 있다만, 소문을 듣다 보니 에일렌이라는 아가씨라면 너에게 좀 여유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훅하니 들어온 진심.
가슴으로 느껴지는 따뜻한 배려에 로건은 더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저밖에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저 순간적으로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시 다잡을 뿐.
“그러니 기왕이면 나처럼 늙어서 후회하지 않도록 애도 빨리 만들고.”
“스승님!!”
“푸하하하!”
* * * 에일렌과의 일 이후, 로건의 일상은 오히려 아주 단조로워졌다.
검공가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오직 수련만을 거듭했다.
약혼에 관한 일을 아는 사람들이 점차 이상하게 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련에만 집중하는 로건.
그 수련에는 자신의 호위로 따라온 18조 기사들과의 대련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게 수도에 도착한 지 어느덧 3주가 지나 늦가을의 정취가 진해지기 시작할 무렵.
로건을 따라온 인물들에게 전환점이 생겼다.
촤아악.
쓰러진 핸더슨의 얼굴에 찬물이 가득 부어졌다.
“푸헙! 에퉤퉤. 어떤 놈이……!”
“나다.”
“……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자님.”
그를 기절시킨 것도 로건임에도 핸더슨은 일어나기 무섭게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단순히 사회생활용의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진심 같았기에 로건의 양심이 살짝 찔려 왔다.
그리고 그 반응은 18조의 기사들 대부분이 대동소이했다.
왜인지 모르지만 공작가에 온 이후로 오히려 더욱 충성심이 강해진 듯한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로건은 하려던 말을 쉽게 입에서 꺼낼 수 없었다.
하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이 말을 위해 지난 일주일간을 이 녀석들에게 힘을 쏟은 것이기도 했으니까.
“흠. 다들 오기 전보다 조금씩은 나아졌지?”
“예. 그렇습니다!”
“수도에 온 보람이 있었나?”
“예! 그렇습니다!”
성문으로 들어설 때 하던 짓을 생각하면 매일 밖으로 돌아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던 놈들.
하지만 정작 저택 안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않고 수련만 하는 놈들은 자신만큼 수련 중독 같았다.
그러니 더 믿고 생각한 일을 맡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제군들에게 개인적인 부탁이 있다.”
“예?”
“들어줄 수 있겠나?”
“무엇이든지 명령하십시오, 공자님!”
충성심을 빛내는 기사들.
그러나 로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길어질수록, 그들의 표정은 점차 미묘하게 변해 가기 시작했다.
* * *
“하, 정말 기사들을…….”
최근 간신히 수도에서 임포릭 사업을 정리한 필립은 로건이 데려온 기사들을 보며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모두 내 ‘부탁’을 수락했으니 소개해 주지. 여기가 조장 핸더슨. 자네 호위 책임을 맡게 될 거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니, 근데 이게 정말…….”
당황하는 필립을 본 로건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는 디그롬. 머리 쓰는 건 부조장인 이 친구와 상의해.”
“아니 로건 님, 근데 정말…….”
“이쪽부터 지미, 누에즈, 램버트, 켈딘.”
“정말 기사들을 이렇게 돌려도 괜찮으시겠어요?”
“그래서 본인 의견을 물었는데 다들 괜찮다던데? 안 그래?”
“……예.”
기사 여섯 명의 목소리가 한 사람 목소리보다 작았다.
절대 자의가 아니라는 것의 방증이었지만, 이어진 로건의 말에는 기사들도 조금은 생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3개월. 겨울이 되기 전까지뿐이다. 그만큼 너희에게 맡길 일이 중요하니까.”
물론 그럴수록 필립은 더 불안해졌다.
“그렇게 불안해할 필요 없어. 그냥 지난해 하던 일의 확장판일 뿐이야. 바로…….”
별일 아니라는 로건의 말에도 그의 초조함은 더해져만 갔다.
“올해 지나기 전까지 무구와 전마를 최대한 많이 구해서 영지로 보내. 이전에 사들였던 트리탄 영지의 목재도.”
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을까.
“……또 무슨 짓을 꾸미시는 겁니까?! 시절도 수상한데 직접 전쟁을 일으키기라도 하실 생각이세요?”
“에이. 날 전쟁광으로 보는 거냐?”
“그런데 왜 전쟁 물자를 사 모으시는 건데요!”
“그냥 혹시나 해서야.”
“혹시는 무슨 혹시입니까! 그런 말 하실 때마다 매번…….”
더 따지고 들려던 필립은 혹시나 그 짐작이 현실이 될까 애써 뒷말을 삼켰다.
그러다 흔들리지 않는 로건의 표정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사실상의 항복을 표했다.
“……그런데 얼마나요?”
“3천만 골드의 예산을 주지.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을 구해 봐.”
“예?!”
필립의 외마디 비명과도 같은 되물음에도 로건의 표정은 굳건했다.
실반을 손쉽게 점령하면서 로건은 확신을 얻었다.
‘석궁기마병의 수를 더 늘리면 하급기사단 정도는 병사들만으로 감당할 수 있어.’
수천의 병사만으로 작은 기사단 하나를 전멸시킬 수도 있다.
대륙의 상식을 바꾸는 일.
말과 무구의 유지 비용 때문이라도 병사 수의 한계는 분명히 있겠지만, 충분히 도전해 볼 만한 일이었다.
거기다.
‘장기적으로는 기마병이 아니더라도 문제없어. 징집병에게 석궁만 훈련하게 해서 써먹어도 충분히 제 역할은 할 거야.’
전생에 보았던, 하늘을 뒤덮는 화살 비를 쏟아 내던 제국의 석궁 병사들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전력을 만들어 내야 했다.
그러려면 일단 전시가 아닐 때 자원을 최대한 끌어모아 놓아야 했다.
하지만 필립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아으으. 미치겠네. 공자님, 공자님이 상행위에 대해 잘 모르셔서 하는 말인데요. 아마 생각하시는 물량의 반도 구하지 못할 겁니다.”
“뭐?”
“그만한 수요가 발생하는 순간, 가격도 천정부지로 오를 거라는 말입니다. 특히나 말은요! 돈 준다고 말이 막 새끼를 더 치고, 어? 막 팍팍 자라고 그러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뭐? 허…… 내가 너무 늦게 말했나? 전쟁 전이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이런…….”
“전쟁 전?! 분명히 전쟁 전이라고 하셨어요!? 지금 전쟁 생각하신 거 맞잖아요!”
“아니야.”
로건은 뜨끔했지만 뻔뻔하게 얼굴에 철판을 깔았고, 필립은 그냥 부들부들 주먹을 떨 수밖에 없었다.
“간단히 말씀드릴게요. 3천만 골드. 단순히 생각해서 무구, 말, 목재에 삼 분의 일씩 나눠 쓴다고 해도 가격이 천정부지로 솟구쳐 오를 겁니다. 특히 말은요!”
필립은 못 해도 세 배는 뛸 것이라 강력히 주장했다.
그리고 그걸 일일이 사들여서 맥라인에 보내려면 상인 길드를 통해도…….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러니 설득을 해야 했다.
그런데.
“하아……. 어쩔 수 없지. 그러니까 잘 조절해 봐.”
“……?!”
가격이 세 배로 뛸 것이라는 말도 먹히지 않았다.
“웬 말과 무기를 그만큼이나 삽니까! 그만한 병력도 없잖아요? 왜 그런 미친 짓을…….”
반드시 합리적인 설득으로 이 미친 짓을 말려야 했다.
“기본 구매 단가를 현 시세의 두 배로 잡고 거기서 더 싸게 사들일수록 차액의 3% 성과급.”
“최선을 다해 수행하겠습니다.”
……뭐, 품 좀 팔면 못할 일도 아니었다.
어이없다는 기사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필립은 최선을 다해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 그리고 몇 가지 부탁도 있는데…….”
“그럼 그것도 성과급에…….”
“물론이지.”
무릇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