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79)
79화수도에 올 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에일렌이라는 인재를 얻었다.
검공과의 대련을 통해 검술 수련에 대한 실마리도 얻었다.
일이 술술 풀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여전히 막막한 부분도 남아 있었다.
‘왕…….’
필립을 통해 알아본 수도의 동향은 여전히 큰 변화가 없었다.
내전이 일어날 조짐도, 왕실이나 왕에 대한 안 좋은 소식도.
예상과는 달리 전혀 건진 것이 없었다.
녹스를 통해 무려 백만 골드를 주고 알아본 왕실의 비밀이라는 정보도 고작 1, 2왕자 파벌의 세력 구도뿐이었다.
겉으로는 반대 파벌 소속이라던 이들도 몇몇 있었지만.
‘내전이 일어나는 즉시 다 밝혀지는 정보 따위.’
괜한 돈 낭비를 한 것 같아 속이 쓰렸다.
물론 그것으로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아직 내전을 준비하는 귀족은 없다.’
왕의 죽음.
그것은 전생에서 알려진 것처럼 정말 급사인 것이다.
왕국의 귀족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그것에 대한 확신을 얻은 것만으로도 수도에 온 보람이 있었다.
‘그래. 그것만으로 됐어.’
스승의 신뢰를 얻어 3왕자와 안면을 텄으면 완벽했겠지만.
억지로 찾아가 봐야 의심만 받을 뿐이다.
어차피 3왕자를 왕으로 만들 생각이니, 후에 내전이 벌어지고 나서 만나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그러니 지금은 더 이상 아쉬워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얼마 후면 스승의 아이가 태어날 테니 슬슬 이름도 고민해 봐야 했다.
성명식이 끝난 후, 에일렌을 데리고 귀환하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무렵.
로건은 스승으로부터 뜻밖의 소리를 들었다.
“어딜 간다고요?”
“왕궁.”
“제가요?”
“그래. 어서 채비하고 나를 따라오너라.”
느닷없는 검공의 말에 로건은 어안이 벙벙했다.
“언질도 없이 갑자기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나 역시 갑자기 들은 말이다. 하지만 전하께서 부르신다는데 어쩌겠느냐.”
“……예?”
“내가 제자를 들였다는 소문을 들으신 모양이다.”
“…….”
넋이 나간 듯한 제자의 표정을 보며 검공은 살포시 미소 지었다.
이 나라의 귀족으로서 마땅히 섬겨야 할 왕에 대한 경의를 보인다고 생각했으니까.
섬겨야 할 군주보다 자신을 더 높게 보는 귀족들에게 질릴 대로 질린 검공의 입장에서는 그런 제자의 모습이 기꺼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당사자의 생각은 전혀 달랐지만.
‘왜? 어째서?’
시골 남작의 후계자가 왕을 만날 기회는 없다고 생각해 처음부터 고려하지도 않았던 일이었다.
의문은 들었지만 따지고 들 틈은 없었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새로운 가능성이 갑자기 열렸다.
그러니…….
“무조건 가겠습니다!”
적극적으로 문을 두드릴 수밖에.
* * *
“충성! 에스페란자 공작 각하, 신분 확인되셨습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우아한 선의 조형을 강조한 거대하고 새하얀 정문이 좌우로 갈라지며 내부의 화려한 자태를 드러냈다.
정문 양옆으로 이어진 울타리인지 예술품인지 모를 장벽도 아름다웠지만, 역시나 내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왕국 최고의 정원사가 심혈을 기울여 관리하는 드넓고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하지만 그 정원조차 멀리서 보이는 압도적인 광채의 황금빛 궁전을 돋보이게 하는 장식에 불과했다.
후일 그 정복자조차도 ‘망가트리기 아까운 예술품이다. 그대로 보존하라.’라고 했을 정도로 아름다운 궁전 그랑피아.
제국 전쟁 후 수십 년 동안 총독부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어 그 아름다움만큼 속을 쓰리게 만들었던 왕국의 상징.
이번 생에는 처음 보는 왕궁의 모습이 이제는 흐릿해졌다고 생각한 전생의 기억들을 떠오르게 했다.
‘어떻게든 막아 낸다.’
가슴이 무거워진 만큼 다시 각오를 다지며 주먹을 불끈 쥐는데.
“부담되느냐?”
“예?”
“걱정할 필요 없다. 전하께서는 인재를 아끼시는 분이니, 이 만남은 너에게 득이 되면 득이 됐지 실이 되진 않을 것이다.”
“……예.”
물론 득이 될 것이다. 조금은 다른 의미가 되겠지만.
로건은 여전히 무거운 눈빛으로 앞서 걸어가는 스승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 *
“이 나라의 주인을 뵙습니다.”
쿵.
스승을 따라 예법에 맞춰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자 머리 위쪽으로 조금은 나른한 느낌의 늙은 목소리가 울렸다.
“어허, 이 친구. 매번 그리 예의를 차릴 필요 없다고 말하는데도…….”
“윗사람부터 지키지 않는 예의를 누가 따르겠습니까. 지킬 것은 지켜야 합니다.”
검공, 펠릭스 에스페란자는 딱 그다운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왕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여전하구만. 변함없는 모습이 든든하긴 하네그려. 그래, 내 오랜 친우여. 고개를 들라. 그리고 그 제자 역시. 얼굴을 보고 싶구나.”
명령에 따라 고개를 들자, 원래의 색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온통 새하얀 머리와 수염의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 위에 올려진 황금빛 왕관과 화려한 비단 정복, 그리고 손가락마다 끼워진 번뜩이는 반지들이 과하게 화려해 보이는 혈색 좋은 노인.
이 노인이 바로 후세에 무능한 왕의 대명사로 불리는 그란디아 왕국의 국왕, 사무엘 폰 그란디아였다.
‘꽤 건강해 보이는데…….’
과거에도 사무엘 폰 그란디아는 건강했다.
그러니 누구도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병약한 모습을 보였다면 문제가 생기기 전에 후계 구도가 확립되었겠지만, 그가 젊고 정정했기에 누구도 서둘러 후계를 확립하려 들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왕국이 반으로 갈려 내전에 돌입한 것이었다.
‘이번 역시 다르지 않겠지.’
로건은 건강한 왕의 모습에 되레 안도를 느꼈다.
역사는 아직 그가 알고 있는 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렇게 마음을 다지며 생각을 정리하는데.
국왕이 로건을 이채가 도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허허. 확실히 자네가 제자로 삼을 만큼 패기가 있어 보이는군. 초면에 짐을 이렇게 뚫어지게 쳐다본 젊은이는 처음이야.”
“아. 죄송합니다, 전하.”
“오. 아니, 아니야. 스승도 예가 과한데 그런 것까지 배울 필요는 없어. 짐은 패기만만한 젊은이를 좋아한다.”
“패기만큼 무재도 출중합니다. 세의 불리함을 딛고 영지전을 연달아 승리로 이끈 용맹함과 지혜도 있으니, 앞으로 왕국을 이끌어 나갈 대들보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호오. 과연, 그런가. 자네가 제자로 삼을 만하군. 그런데 대체 어찌 연이 닿았는가.”
“그게, 제가 과거에 상처가 있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왕세자 시절에…….”
그렇게 스승과 왕의 추억 여행이 시작되었다.
로건은 반쯤 병풍이 된 기분으로 긴 시간 동안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해 애쓸 수밖에 없었다.
“아하하하. 그런 인연이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했어. 로건이라고 했나. 정말, 정말 고맙구나.”
“……예?”
“사실 너를 보자고 한 것은 그저 너의 무엇이 내 오랜 친구의 관심을 끌었는지 궁금해서였다. 그저 뛰어난 무재 정도일 줄 알았지. 그런데…….”
왕은 잠시 말을 끊고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길로 검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로건은 그 말을 들으면서도 왜 왕이 자신에게 고맙다는 것인지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방금 전 왕과 스승의 대화에 귀 기울이지 않은 탓이라 자책하며 섣불리 입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이 친구의 상처는 내가 이 친구에게 가지고 있는 부채감의 근본이었다. 너무 미안해서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수도 없는 상처였지.”
“아…….”
“그 상처를 치료해 준 것은 이 친구의 한을 해결해 준 것이기도 하지만, 내 마음의 짐을 덜어 준 것이기도 해. 그러니 내가 고맙다고 할 수밖에. 고맙구나, 정말 고마워.”
“전하. 말씀이 과하십니다.”
“전혀 과하지 않아. 자네가 없었다면 나도 이 자리에 없을 텐데 그게 무슨 말인가!”
신하와 주군, 주군과 신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서로를 지극히 생각하고 있음이 티가 났다.
“왕이 되어서 그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지 않을 수가 없지. 제대로 된 선물이라도 주는 것이 맞겠어.”
“전하. 그러실 필요까지는…….”
“아니. 아니야. 유일한 친우라고 할 수 있는 이의 은인인데 보답을 해야지.”
끼어들 수 없는 왕과 스승 사이의 대화였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단어가 들렸다.
‘선물?’
그것도 왕의 선물이라면, 절대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로건의 몸이 본능적으로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감사합니다, 전하!”
“로건!”
검공의 안색이 굳어지는 순간.
“크하하하! 그래, 검공의 제자라면 그 정도 호기는 보여야지. 이리 가까이 오너라.”
“전하. 정말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충분히 보답하겠습니다.”
“어허! 괜찮대도. 내가 그간 자네에게 얼마나 미안했는지 아는가? 마땅히 보답해야지. 이리 오너라, 로건.”
“예, 전하.”
로건은 뒤통수에 꽂히는 스승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면서도 종종걸음으로 왕의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왕이 자신의 왼손에 끼고 있던 푸르스름한 빛의 팔찌를 빼내 들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로건의 감각에도 팔찌에 담긴 농밀한 마력이 느껴졌다.
팔찌를 본 검공이 기겁하며 앞으로 나왔다.
“전하! 그건 너무 과합니다!”
“괜찮네. 내가 여기서 다칠 일이 뭐 얼마나 더 있겠나. 재능을 가진 젊은 기사가 써 주면 이 나라를 위해서도 좋겠지.”
로건이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보물이었다.
정확히 어떠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겉으로 느껴지는 마나만 하더라도 최소 5클래스급.
그렇다면 전설에나 나오는 7클래스, 혹은 7서클의 대마도사나 만들 수 있다는 보물이었다.
즉, 현세에 다시 구하기 힘든 아티팩트라는 소리였다.
스승이 저리 난색을 드러내는 것도 당연해 보였다.
아무리 얼굴에 철판을 깔았더라도 이런 물건을 겸양도 없이 대충 받을 수는 없었다.
로건의 손이 욕심과 달리 잠시 움츠러들었다.
그러자 왕이 손을 더욱 내밀었다.
“내 친구의 한과 내 한을 동시에 풀어 준 대가라고 생각하거라. 받거라, 어서. 마음이 변하기 전에.”
왕의 얼굴에 보인 웃음을 보니 농담이라는 것이 뻔했지만.
한 번 더 겸양했다가는 혹시나 정말 물릴까 두려워 로건은 재빨리, 하지만 최대한 공손하게 왕의 선물을 받아 들었다.
“과분한 은혜,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로건! 그리 쉽게 받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왕실의 보물…….”
“펠, 그만하게! 내가 자네에게 해 준 것이 없는 만큼 자네 제자에게 해 주는 셈 치게나.”
“전하. 어찌 그런 말씀을…….”
왕이 그렇게까지 나오자, 검공도 더는 만류할 수 없었다.
“로건 맥라인. 너 역시 짐의 선물을 과분하다고 여기느냐?”
“……과분한 만큼 소중히 사용하겠습니다.”
“크하하하. 그래, 배포는 스승보다 낫구나.”
왕은 그렇게 한참을 웃더니, 다시 미소를 지으며 로건을 바라보았다.
“더없이 좋은 인연으로 만난 사이. 이 선물이 그 인연을 더 좋은 미래로 이끌어 주기를 바라노라.”
“전하…….”
“당부컨대 스승을 하늘처럼 모시고, 자네 스승처럼 이 나라를 위해 일해 다오.”
나라를 위해.
너무도 당연한 말이 왜 이렇게 무겁게 들리는 것일까.
로건은 앞으로 자신이 하려는 일이 정말 이 나라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위한 것인지 아직도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었다.
‘반드시 제국을 막아 내겠습니다.’
처음 보는, 그리고 아마도 마지막으로 보게 될 왕의 얼굴을 보며.
로건은 천천히, 그러나 진심을 담아 부복했다.
“예, 전하.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왕을 알현한 이후 돌아 나오는 길.
사제는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그러다 내궁을 거의 나와서야 스승이 조용히 입을 뗐다.
“전하께서 마음이 많이 약해지신 모양이다.”
“예?”
“그리 말을 많이 늘어놓는 분이 아니셨다. 너를 만나고자 하신 것도 그렇고, 심중에 다른 고민이 있으신 게 아닌가 걱정이 되는구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뭐?”
로건의 담담한 한마디에 검공이 우뚝 멈춰 섰다.
“제가 본 전하는 고민이 있다면 스승님께 그대로 말씀하실 분이었습니다. 말씀이 없으셨다면 스승님께서 굳이 아실 필요가 없는 일이겠지요.”
“……그래. 그렇지. 네 말이 옳다. 나도 늙으니 노파심만 늘었나 보군. 허, 제자 놈이 왕실의 보물을 덜컥 받아서 나와 버렸으니 심기가 흔들린 거야.”
갑자기 튄 엉뚱한 불똥에 로건이 움찔했다.
본능적으로 팔찌를 찬 왼 팔목을 가리는데.
“재생의 팔찌. 5클래스급 래피드 힐링(Rapid Healing) 마법이 내장된 아티팩트다. 단 한 가지 마법만 내장되어 있는 만큼 무척 강력하니, 상급 사제의 신성 주문만큼 효과가 있을 것이다.”
스승이 아티팩트의 정확한 효력을 얘기해 주었다.
상급 사제의 신성 주문.
치명상도 단숨에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만한 수준의 경상으로 바꿀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이었다.
마법의 치료 주문이 신성술보다 효과가 미약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실상 마법으로 할 수 있는 최대치의 회복 주문을 내장한 아티팩트인 셈이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가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의 최고급 보물이었다.
“……제가 이런 걸 받아도 되겠습니까?”
“이제야? 넙죽 받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 딴청이냐. 음흉한 녀석.”
“아하하……. 이렇게까지 대단한 물건일 줄은 몰랐지요.”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였기에 로건은 그저 멋쩍게 웃어 보였다.
“그래. 그런 대단한 물건을 얻었으니 나도 마음이 놓인다.”
“다 스승님 덕분입니다. 감사…….”
“지금까진 죽기 직전까지만 굴렸는데 이젠 좀 선을 넘어도 되겠어. 오늘부터 각오하거라.”
미소 짓던 로건의 입가에 순간적으로 경련이 일었다.
하지만 로건은 곧바로 마음을 다잡았다.
“최선을 다해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성장을 위한 시간.
시련이 클수록 성과 역시 커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