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80)
80화로건과 검공이 왕을 알현하고 돌아온 지 채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모두가 기다렸던 일이 벌어졌다.
수련 도중 소식을 들은 검공이 화들짝 놀라 안채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날, 에스페란자 가문의 후계자가 태어났다.
“으하하하!”
근처에 있는 것도 아닌데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서민의 아기였다면 따뜻한 아랫목에 누이고 외인의 접근부터 막았을 날.
검공의 저택은 몇 주 전부터 준비해 온 검공의 ‘딸’을 위한 파티 준비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란디아 귀족들의 전통이면서도 보통은 아들이 태어났을 때만 하는 탄생 파티.
검공의 유별난 자식 사랑이라 생각하면서도 수도의 귀족들은 대부분 그 초청에 응했다.
그리고 애초에 수도에 온 목적이 이 파티였던 로건 역시 당연히 파티에 참석했다.
– 맥라인 가문의 후계자. 로건 맥라인 공자 듭시오.
시종의 호명과 함께 연회장의 문이 열리자, 여기저기서 로건을 응시하는 이들이 보였다.
불과 작년, 임포릭 때문에 상경하여 수도의 파티장을 기웃거릴 때와는 상황이 너무도 많이 달라졌다.
검공의 제자.
그 타이틀 하나만으로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넘쳐 났다.
“정말 어려 보이는데…….”
“이제 스물한 살이라잖아.”
웅성웅성.
호기심 어린 시선이 무던히도 쏟아졌다.
물론 단순히 시선뿐만은 아니었다.
“로건 공자. 잠시 얘기를…….”
“로건 공자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로건이 당황할 정도로 적극적인 접근도 많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에 대한 주목은 오래가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그의 바로 뒤에 이어 이날의 가장 중요한 손님이 방문한 것이다.
– 그란디아 왕국 주재, 연합교단 주교. 크림슨 메튜 님이 방문하셨습니다!
시종의 외침과 함께 들어서는, 새하얀 머리카락을 단정히 빗어 넘긴 머리 위에 백색의 기다란 법관을 쓴 인자한 인상의 노인.
입고 있는 법복 역시 옷에 그려진 아홉 개의 원을 제외하고 순백의 색상이었다.
인자함의 상징과도 같은 노인의 등장에 모든 귀족이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런 노인 역시 상석에 있는 파티의 주인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후손을 얻으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공작 각하.”
“감사합니다, 주교님. 이리 직접 와 주시다니 삼생의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검공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마주 고개를 숙였다.
보통 한 교단의 대사제급 이상의 지위는 검공이라고 무시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닌 까닭이었다.
그 정중한 예의에 노인이 너털웃음을 보였다.
“어찌 아랫사람을 보내겠습니까. 이 나라의 대들보, 검공의 자식이 태어났는데 제가 직접 축성을 해야지요.”
“하하.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란디아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대륙 귀족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필수적으로 신의 축복을 받게 했다.
사람들은 그 축복이 후세의 능력과 품성에 영향을 준다고 믿었다.
사제를 불러 아이의 축성을 하지 못할 정도라면, 그것이 바로 몰락 귀족의 특징이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9대신 중 다섯 번째 신. 나무와 생명의 신인 아그나의 축복은 아이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모든 부모가 바라는 일.
그중에서도 최고위 사제라 할 수 있는 주교 크림슨 메튜의 축성이니, 검공이 저리 좋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게 연회장에 모여든 모든 이들이 집중하는 가운데, 주교는 상석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연회장의 가장 안쪽에 있는 높은 자리.
평상시라면 파티의 호스트인 공작의 자리였겠지만, 지금은 파티장에 어울리지 않는 단아한 모양의 작은 침대가 있었고.
그 위에는 자그마한 아이가 부드러워 보이는 이불에 싸인 채 잠들어 있었다.
곱슬한 금발 머리의 아이는 다소 창백한 안색의 엄마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제 몸을 안아 들 때까지도 곱게 잠들어 있다가, 이내 낯선 이의 손길을 느끼고 깨어나 울음을 터트렸다.
“으아아앙!”
“세상을 굽어보는 아홉 신께 미천한 종이 청하나이다…….”
아이를 번쩍 들고 중얼거리기 시작하는 크림슨 주교.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아이의 울음소리 위로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더해지자, 이내 새하얀 신관 법복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흰 빛이 점차 강해지며 그의 몸과 아기를 감싸기 시작했다.
‘저게 신성력이구나.’
로건은 이번 생에 처음 보는 신성력을 보며 감각을 집중했다.
전생에는 그저 아무런 힘의 유동도 느끼지 못하고 갑자기 상황이 변하는, 기적 같은 것으로만 생각했다.
중하급 사제들의 신성력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감각은 달랐다.
‘포스보다 근원에 가깝고, 마나보다 은밀하다. 이래서 다른 사람은 잘 못 느끼나 보군.’
이미 자신의 감각이, 정확히는 인지 능력이 경지를 한참 벗어난 특별한 것임은 체감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저 새롭게 느낀 신성력의 특징을 뇌리에 새기며 축성 과정을 감상했다.
“오오!”
“과연 주교님!”
“저리도 뚜렷한 신성력이라니!”
주변이 소란스러워질 때, 주교의 손에 들린 아기는 그 빛이 신기한지 어느새 울음을 멈추고 크고 푸른 눈을 끔뻑이며 주변을 쳐다보고 있었다.
“생명의 신 아그나의 이름으로 새로 태어난 에스페란자의 후손을 축복합니다.”
번쩍!
마지막으로 쏟아진 새하얀 빛이 연회장을 가득 메웠다가 사라지고 나자, 주변에서는 박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공작 각하. 축하드립니다!”
“이토록 강렬한 빛이라니, 큰 사람이 될 것 같습니다!”
“경하드립니다. 공작 각하!”
쏟아지는 박수갈채 속에서, 검공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빈객들의 환호에 연신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하지만 연회장에 모인 모든 사람 중 단 두 사람.
크림슨 주교와 로건만은 웃고 있지 않았다.
‘신성력이 아기의 몸에서 튕겨 나갔다?’
로건은 마지막의 그 환한 빛이 축복이 극대화된 것이 아니라, 아기의 몸에서 튀어나온 빛이라는 것을 정확히 읽을 수 있었다.
그도 그것을 느꼈으니, 당사자인 주교가 어찌 그것을 모를까.
당혹스러운 표정의 주교는 이내 다시 울기 시작한 아기를 생모에게 맡기며 다시금 새하얀 빛을 일깨웠다.
“고생하셨습니다, 공작 부인. 아이와 함께 잠시 편히 쉬시지요.”
다시금 쏟아지는 새하얀 빛.
무리하게 파티장에 나와 있던 공작 부인의 안색이 조금 편안해지고, 아기 역시 그 따스한 빛을 즐기는 것인지 울음을 그쳤다.
하지만.
‘또?’
아이의 몸은 여전히 신성력을 튕겨 냈다.
이번에는 태연한 척하던 주교 역시 티가 나게 안색이 굳어졌다.
“무슨 일이십니까, 주교님?”
“아, 아닙니다. 각하. 아이가 너무 예뻐서 순간적으로 넋을 잃었나 봅니다.”
하지만 주교의 안색은 결코 편치 못했다.
검공 역시 그것을 느낀 것인지 살짝 안색을 굳혔지만.
“오, 오래간만에 축성을 드렸더니 피곤했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먼저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돌아가 봐야겠다는 교단의 주교를 말릴 수는 없었다.
“여러분! 파티를 즐기시고!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축하합시다! 모두 잔을 드시오!”
검공은 급작스러운 주교의 퇴장을 뒤로 한 채 파티의 분위기를 돋우기에 바빴다.
그렇게 소수의 마음에 의구심을 남긴 주교가 돌아갔지만.
그 광경을 똑똑히 보고 느낀 로건의 마음에는 한줄기 불안감이 맴돌았다.
‘……왜지?’
그냥 별것 아닌 우연일 수도 있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그럴 확률이 더 높았다.
신성력도 크게 보면 이능의 한 갈래니, 아기가 거기에 반발하는 특이 체질일 수도 있지 않은가.
로건은 그렇게 생각해 보려 했지만 찜찜한 기분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오랜만이군, 로건 맥라인.”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금발에 푸른 눈의 중년인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잔을 들어 올리는 것이 보였다.
“네. 오랜만에 뵙습니다, 비프로스 백작님.”
“그래. 생각보다 안색이 좋아 보여서 유감이군.”
무려 백작씩이나 되는 자의 유치한 시비에 로건이 피식 웃었다.
“덕분입니다.”
“……여전히 혓바닥은 매끄럽고.”
“건강하니까요.”
“건방진 것도 여전하고.”
“그게 제 매력입니다.”
로건은 일부러 히죽 웃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얄미울 정도로.
콰직.
챙그랑.
백작이 들고 있던 와인 잔이 깨져 나뒹굴면서 주위의 시선이 몰렸다.
“아아, 이런 실수를. 나이를 먹으니 자꾸 손이 미끄러진단 말이야.”
로저 비프로스는 작게 한숨을 내쉰 뒤, 능청스러운 얼굴로 시종을 불러 더러워진 손을 닦았다.
이내 사람들의 관심이 사그라들고, 그에게 몰렸던 시선이 다시 상석의 검공에 옮겨진 이후.
백작은 로건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은밀히 속삭였다.
“우연히 검공의 제자가 된 덕분에 목숨을 보전한 줄 알아라. 그 덕에 높으신 분들의 관심도 끌고, 참 운 좋은 놈이구나 넌.”
“물론 제가 운이 좋다는 건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회귀도 하지 못했을 테니까.
이것만큼은 비꼬기 위한 것이 아닌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 대답 역시 백작의 얼굴을 일그러트리기에는 충분했다.
“그래. 높은 분을 만나서도 계속 그따위 자세를 유지해 주길 바라네.”
“……높은 분?”
“로메인 폰 그란디아. 2왕자 저하께서 너를 만나기를 원하고 계신다. 물론 난 네가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라지만.”
살짝 돌려 말하기는 했지만, 바보가 아니라면 알아들을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2왕자 진영에 서라. 뒈지기 싫으면.
사실상 협박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로건은 백작의 굳은 표정을 보며 또 빙그레 웃었다.
“왕자 저하께 저를 소개해 주신다면 저야 영광이지요. 제안에 대해 신중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건방진…… 왕자님의 명령을 제안으로 받아들이는 거냐?”
“실제로 제안이실 텐데요? 아니면 제가 스승님과 함께 저쪽으로 가시길 바라십니까?”
로건이 슬쩍 파티장의 반대편을 가리키자, 백작의 안색이 더욱 굳어졌다.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로 잠시 침묵하던 로저 비프로스는 이를 악물며 돌아섰다.
“조만간 날을 잡아 연락하지. 혹시나 이 또한 기만이라면 상상치 못할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로건은 멀어지는 로저 비프로스를 보며 속으로 웃었다.
‘지금 시점에 무슨 말을 못 할까.’
내전이 벌어지기까지는 이제 몇 달 남지도 않았다.
만남을 차일피일 미루기만 해도 그 후로는 왕자건 공작이건 그에게 신경 쓸 시간도 없을 것이다.
그저 변경백 정도의 지위를 가지고서도 2왕자의 전령 노릇이나 하는 비프로스 백작이 우스울 뿐이었다.
어차피 결국 적이 될 마당에 협박은 기도 안 찰 뿐이었고.
‘본인이 원해서 말을 전한 것도 아니겠지. 아마…….’
로건의 시선이 비프로스 백작이 향하는 파티장의 한쪽, 그 중심부에 서 있는 거한을 향했다.
2m를 훌쩍 넘는 덩치에 거대한 맞춤형 파티복 사이로 보이는 어마어마한 근육.
짙은 회색빛 머리 색이 마치 바위처럼 보이는 거인.
‘열화검, 요르단 발터마임.’
왕국에 단 셋뿐인 공작 중 하나이자, 초인인 오러유저, 그리고 2왕자의 외조부.
로건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도 잠시 돌아봤지만, 그저 무심한 듯 스쳐 지나갔다.
마치 너는 아직 나와 대화할 자격이 안 된다는 듯한, 네깟 놈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모습.
‘뭐, 내가 아니라 스승님을 원하는 것일 테지.’
로건이 웃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그의 귓가에 또 다른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지. 결정은 신중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조카님.”
“음?”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넘긴, 조금은 창백한 안색의 중년인.
그를 보자마자 로건의 표정이 절로 일그러졌다.
“베론…… 카이로스 공?”
존대는 해 주고 있지만 달갑지 않아 보이는 기색이 역력한 어조였다.
하지만 그런 불편한 답변에도 베론은 반색하며 다가왔다.
“하하하. 오랜만이야, 로건 공자. 이리 장성한 모습을 보니 집안 어른으로서 너무 뿌듯하고 자랑스럽네. 그런데 좀 전의 말은 너무 성급했어.”
그 적극적인 모습에 로건은 절로 입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 외삼촌? 누가? 내가? 하하. 꼬마 도련님. 우리 선은 지킵시다.
아주 어린 시절, 로건의 마음에 큰 생채기를 남겼던 자신감 넘치던 젊은 청년은 조금 나이를 먹더니 자신감 대신 뻔뻔함이 잔뜩 늘어 있었다.
당연히 로건은 그가 원하는 대로 순순히 받아 줄 생각 따윈 없었다.
“집안 어른? 누가 말입니까? 설마 당신이?”
“물론 자네와 내가 직접적인 혈연은 없지. 하지만 맥라인과 카이로스가 사돈 관계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겠나?”
베론 카이로스는 앞서 나타났던 로저 비프로스와 비견하기에는 한참은 부족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1왕자파에서는 그나마 맥라인과 연이 닿은 집안이기는 했다.
물론.
“흐음, 이미 끊긴 인연 아니었습니까?”
로건 입장에서야 남보다 못한 사이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