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81)
81화
“끊기다니. 섭섭하게 그게 무슨 말인가. 과거 가문의 실수는 실수고, 혈연은 혈연이지. 지난 십여 년간 우리 카이로스가 지원해 온 금액을 생각하면, 한 번의 실수는 눈감아 줄 수도 있지 않겠나?”
“안타깝군요.”
“뭐?”
“그 실수가 벼랑 끝에서 떨어지려는 혈연을 외면하는 것만 아니었어도 그럴듯했을 텐데 말입니다.”
로건의 말에 베론의 얼굴이 작게 경련했다.
그 역시 애초에 무리한 일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한참이나 어린, 그것도 항렬상 조카에게 이렇게 면박을 당할 줄은 몰랐다.
단독 대면보다 파티에서 자연스럽게 말을 걸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30분 전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로.
물론 그보다는 로건에 대한 분노가 더 컸다.
‘잠깐 명성 좀 얻었다고 애송이가 간이 부었구나.’
역시나 생각 없이 지르고 보는 망나니의 성격이 어디 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러니 설득도 쉬울 것이다.
베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가까스로 마음을 다스렸다.
“그것은 정말 우리 가문의 치명적인 실수였네. 늦었지만 내가 가문을 대신하여 정식으로 사과하겠네.”
“늦은 건 알고 계신 모양이군요.”
그 말에 또 울컥할 뻔했지만, 이미 개망신을 각오하고 온 상황이었기에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사죄를 원한다면 바라는 대로 하겠네. 무엇을 원하는가? 핏줄끼리 영영 안 보는 것보다야 적당히 사죄를 받고 화해하는 것이 낫지 않겠나?”
계속 삐딱하게 나오는 로건을 향해 베론이 백지 수표를 내보였다.
그러나.
“흠. 정말 사과를 위해 오신 겁니까? 그럼 보상만 받아도 다른 말은 하지 않는 겁니다?”
또다시 이어진 얄미운 대답에 베론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어디서 약을 팔아.’
로건은 일그러지는 베론의 얼굴을 보며 대놓고 비웃었다.
무언가 아쉬운 게 있으니 이제 와 이런 되지도 않는 수작을 부리는 것일 터였다.
“사과가 아닌 다른 할 말도 있으신 거라면 사죄는 안 받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돌아가십시오.”
로건이 확실히 선을 그으며 선언하는데, 상대의 반응이 예상과는 달랐다.
“도와주게.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겠네. 지난 잘못보다는 미래를 봐 주게.”
거의 직각으로 숙인 고개와 절실한 말투.
완전히 백기 투항을 하는 베론의 모습은 로건으로서도 의외였다.
‘호오?’
그가 아는 카이로스 가문, 특히 사이먼 카이로스는 이런 일을 할 자가 아니었다. 자신이 벌인 일에 대한 후회나 반성을 할 인간이 아니니까.
그리고 그 유일한 후계인 베론 카이로스가 아버지를 거스르지 못한다는 것은 그와 관계된 모든 이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이 역시 사이먼 카이로스 윗선의 뜻이군.’
흘깃 눈을 돌려 바라본 파티장의 또 다른 중심 세력.
요르단 발터마임 공작과 대척점에 선 왕국 유일의 6서클의 마법사 후안 더글라스 공작이 이쪽을 흘깃 쳐다보다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역시나 직접 나서지는 않는 모양새.
검공의 제자라는 타이틀이라고 해 봤자 공작들에게는 이렇게 간을 보는 수준이었다.
다만 공작들의 작은 기침에 그 아랫사람들이 몸살을 앓고 있을 뿐.
‘비프로스건 카이로스건, 왕국 3대 부호 중 두 사람도 결국 공작들 수작에 이리 놀아나는 꼴이네.’
자신과 가문이 맺은 그 악연들도 진짜 넘어야 할 산들에 비하면 그저 작은 언덕일 뿐이라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렇다면 당장은 이용해 먹어야겠지.’
마침 왕국 최대 부호, 아니 상단들에게 필요한 것도 있었다.
‘그 정도면 필립을 확실하게 도울 수 있을 거야.’
비프로스는 사실상 이미 칼을 겨눈 상태.
어지간한 헛짓거리를 해도 쉽게 넘어오지 않을 테지만, 카이로스라면 얘기가 달랐다.
“흐음. 삼촌, 조카에게 굳이 과한 예의를 차리실 필요는 없습니다. 뭐, 혈연끼리 작은 부탁 정도야 뭐가 어렵겠습니까. 안 그래요?”
로건의 혓바닥이 지극한 욕심을 숨긴 채 가볍게 춤을 췄다.
“……고맙네. 조카.”
반색하며 조금이나마 환해지는 베론의 얼굴.
하지만 그런 그의 얼굴은 구석진 자리로 옮겨 이어진 로건의 말을 들을수록 점차 딱딱하게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1왕자 전하를 만나 뵙는 거야 어렵지 않지요.”
“……알겠네.”
하나 그에게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선택지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멀리서 그 모습을 본 로저 비프로스의 시선이 싸늘해졌지만, 로건은 신경 쓰지 않았다.
비프로스와 카이로스.
그 악연들이 지나간 후에도 로건에게 접근하는 귀족들은 많았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상대하는 것도 피곤한 일인지라, 로건은 스승의 핑계를 대며 정중한 짧은 인사로 수많은 대화를 거절했다.
그렇게 복잡한 파티의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갔을 때.
“모두 주목해 주십시오. 이제 이 파티의 가장 중요한 행사가 있을 예정입니다. 공녀의 무사한 성장을 기원하며, 공녀의 이름을 지어 줄 명사를 모시겠습니다. 그분은…… 에?”
에스페란자 공작가의 가신이자, 명예 백작위를 가지고 있는 레프만은 자신에게 준비된 대본을 읽다가 깜짝 놀라 다시 자신의 주군을 바라보았다.
검공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다소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대본에 있는 이름을 불렀다.
“……공작 각하의 제자이신. 로건 맥라인 공자입니다.”
‘저 사람 표정 참.’
왜 아기씨의 성명식을 네가?
노회한 귀족답지 않게 레프만 백작은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만큼 스승을 향한 충성심이 강하기 때문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로건은 애써 표정을 관리한 채 상석으로 향했지만.
포근한 비단에 싸여 큰 눈으로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귀여운 아기를 마주하자 절로 다시 웃음이 지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넘치는 사랑으로 태어나자마자 오러샤워를 받은 아기는 생기가 넘쳤고, 그만큼 더 사랑스럽게 보였다.
그리고 로건이 살포시 조심스럽게 아기를 안아 드는 순간.
“꺄아?”
아기가 아주 작은 손을 뻗어 포대를 감싼 로건의 손가락을 잡고는 그를 향해 환히 웃었다.
찌잉.
무슨 의미가 있는 행동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그저 우연일 뿐이라 생각하면서도 가슴 벅찬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벅찬 마음으로 찬란한 별빛처럼 반짝이며 자신을 응시하는 아기의 눈을 보는 순간, 열심히 고민 중이던 다른 이름 후보들이 싹 사라지고 하나만이 남았다.
“이 아이의 이름은 스텔라(Stella). 고대어로 별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밤하늘을 밝히는 찬란한 빛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꺄륵!”
해사하게 웃는 아기의 모습이 마치 자신의 이름이 마음에 든다는 듯한 느낌이라 로건 역시 환히 웃을 수 있었다.
“……로건 맥라인 공자가 선택한 이름은 스텔라. 공작님, 공녀님의 이 이름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받아들이겠다.”
“공녀님의 이름이 정해졌습니다. 스텔라 에스페란자. 새롭게 태어난 에스페란자 가문의 별을 모두 축복해 주십시오!”
“와아아아!”
쏟아지는 함성과 박수 소리 속에서 로건은 자신이 안고 있는 아기와 계속해서 눈을 마주치며, 조심스레 공작 부인에게 건네주었다.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드는 아이의 표정이 튕겨 나온 크림슨 주교의 신성력이 남긴 찜찜한 기분을 모두 날려 버렸다.
* * * 스텔라 에스페란자의 성명식은 그와 검공과의 관계가 얼마나 돈독한지를 왕국 전역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확고한 후견인의 명성을 등에 업은 그를 만나고자 하는 이들의 초대장은 성명식 바로 다음 날부터 수없이 이어졌지만.
로건은 그 순간 이미 수도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제 곧 겨울이다.’
그 말은 내전을 준비하기 위해 영지로 돌아가야 할 시기가 다가왔다는 것.
수도의 동향을 확인하며 만에 하나 전생에서 알려진 바와 다르진 않을까 하는 의심을 지웠고, 스승과의 신뢰도 돈독히 쌓았다.
그것이 3왕자와의 만남으로 바로 연결되지 않은 것은 아쉬웠지만, 에일렌이라는 인재를 얻은 것만으로 수도행은 처음 예상보다 더 큰 성과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 황무지, 아니 신 맥라인 평야의 예상 소출량만 해도 과거 맥라인의 20배를 넘어갈 것으로 생각됩니다. 더구나 아직 인력이 부족해 남아 있는 땅도 있으니, 내년이면…….
– 금액으로 따져도 3천만 골드는 충분합니다. 테스론과 실반의 세수만 해도 천만이 넘습니다. 공언했던 대로 정말 세금을 적게 걷자 실반 영지민들이 환호하고 있습니다.
– 예? 올해 소출만으로도 3, 4년은 충분히…… 팔지 말라고요? 왜…… 이, 일단 알겠습니다. 돈이야 충분하니까요.
자신이 떠나 있던 사이 맥라인에서 벌어진 변화도 마음을 든든히 하기에 충분했다.
‘준비는 잘 되고 있어.’
돌아가서 제대로 마지막 정비를 하고 거사를 치르자.
로건이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는데.
“돌아가려는 것이냐?”
갑자기 들린 익숙한 목소리에 로건은 상념에서 깨어나 고개를 돌렸다.
“스승님!”
“그래. 덕분에 성명식은 잘 치렀다. 안사람이 고마워하더구나.”
“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스텔라 곁에 있지 않으시고……?”
무려 주교씩이나 되는 고위 신관의 신성력을 튕겨 내는 아기.
자신의 회귀만큼 기이하고 중요한 이야기라 스승에게도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더 아기가 걱정되었기에 로건의 말에는 진정성이 담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마음을 느꼈는지 스승이 미소를 지었다.
“아기에게 오러샤워는 이미 충분하다. 과하면 몸만 상할 뿐이야. 이제 수고한 제자의 수련이나 다시 챙겨 주러 왔다.”
“아, 스승님.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말씀드렸듯 슬슬 영지로 돌아가 봐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비프로스 문제도 있…….”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예?”
그동안의 수련은 매번 탈진 지경에 이르러서야 끝났기에, 로건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간 무리한 수련을 따라오느라 고생이 많았다. 이제 기본은 잡혔으니 다시 쓸 만한 수법 하나를 가르쳐 주겠다.”
“네?!”
“더 놀라운 비전을 가지고 있으면서 놀라기는. 끌끌.”
“스승님. 그건…….”
검공은 제자의 반응에 슬쩍 입꼬리를 올렸지만, 여전히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고대의 비전. 내가 한때 비하하기는 했다만, 적절히 잘 쓴다면 내 비기보다 나을 수도 있다. 다만 잊지는 마라. 그보다 중요한 게 뭐라고?”
“……기본입니다.”
“그래. 나는 지금 네게 그 기본을 극대화할 수 있는 비기를 전해 줄 생각이다. 따라오거라.”
모순적인 말이었지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스릉.
연무장에 들어선 검공이 매끄러운 소리와 함께 검을 꺼내 들었다.
“내가 평생을 정립해 온 무술의 근본은 적의 움직임을 제약하고, 내 움직임을 극대화하는 데에 있다.”
우웅.
설명과 함께 검공을 중심으로 오러가 솟구쳐 올랐다.
동시에 연무장 전체를 짓누르는 거대한 압력이 느껴졌다.
“궁극적으로는 전장에서 공간을 지배하고자 하는 것. 네가 배운 이 중압검은 바로 그 생각이 구체화 된 첫 번째 수법이다. 견딜 만하느냐?”
‘전혀요.’
로건의 생각은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못했다.
그저 이를 악물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강력한 압력이었다.
그 모습을 본 스승이 가볍게 웃으며 힘을 거뒀다.
“흐억!”
휘청.
직접 공격에 당한 것도 아닌데 순간적으로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새삼 초인이라 불리는 이들의 역량에 놀라는데.
“그래. 내가 스스로 자부할 만큼 꽤 괜찮은 수법이긴 하지. 하지만 네가 가진 비전은 공격의 수단으로서는 내 비기보다 뛰어나다. 그러니 무겁게 누르고, 소리를 자르고, 번개를 따라잡는 것으로 이어지는 내 검술 비전은 굳이 더 가르칠 필요가 없겠더구나.”
“그럼……?”
“그렇다고 그렇게 대놓고 실망하지는 말고 눈 부릅뜨고 보거라. 이게 더 멋진 것이니.”
그 말에 로건이 집중력을 끌어올리며 스승을 보는데, 멀쩡히 서 있던 스승의 신형이 일순간 흐릿해졌다.
‘음?’
로건이 어리둥절한 찰나, 투명해진 스승의 모습이 사라지고 어느새 목덜미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흡?!’
로건이 깜짝 놀라 돌아본 곳에는 검을 살짝 들어 올린 스승이 의연한 자세로 서 있었다.
“허…….”
“보았느냐?”
“……전혀요.”
“그래. 그렇겠지. 겪어 본 감상은?”
로건은 그 물음에 선뜻 답할 수가 없었다.
확실히 대단한 움직임이었고, 그 진행 과정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그렇게 대단한가?’
왕국 최고의 검호로 이름 높은 검공이 자신의 검술 비전 이상으로 자부심을 가질 정도로?
중압검 때와 달리 체감적으로 확 느껴지지 않았다.
어차피 검공 정도 되는 초인이라면 정면으로 덤벼 와도 그가 반응할 수 없는 속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정상이었으니까.
그런 그의 심리를 뚫어 보았는지, 스승은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모든 무술의 기본이 뭐지?”
“하체와 보법이지요.”
로건의 대답은 곧바로 나왔지만, 표정은 떨떠름했다.
그리고 검공 역시 그 이유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포스를 사용하지 못하거나, 그 수준이 낮은 이들에게만 적용되는 논리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냐?”
로건이 차마 그렇다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그럼 내가 왕국의 다른 오러유저인 요르단이나 루터, 위켄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 그 이유가 검술이 아니라 이 운신법 때문이라 하면 이해하겠느냐?”
“……?!”
“그만큼 이 귀신의 그림자는 어떤 검술 비전 못지않은 뛰어난 수법이니라.”
‘귀신의 그림자라…….’
검공의 명성과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음침한 이름이었지만, 스승의 어조에는 강한 자부심이 엿보였다.
“플란츠라는 놈과의 싸움에서 고전을 했다지? 그 전에 네가 이 수법을 배웠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조금의 자극이 더해지자.
“배우고 싶으냐?”
“물론입니다!”
로건의 붉은 눈동자에 다시금 불길이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