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82)
82화
“발걸음은 좀 더 가볍게. 뒤꿈치가 땅에 닿는 것은 도약하는 한순간이면 충분하다.”
“아직 부자연스럽다. 발목과 발가락의 유기적 움직임에 더 신경 써라. 거기서는…….”
몇 시간 동안 이어진 질책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줄어들었다.
그리고 조언 한마디, 한마디에 확확 변해 가는 로건의 움직임을 보며 검공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역시 대단한 재능이야.’
불과 몇 시간 만에 흉내 내는 것을 넘어서서 완전히 체화할 것처럼 터득하고 있다니.
수십 년 동안 귀신 그림자를 전해 줄 만한 재능을 가진 인재를 만나지 못한 것이 이 녀석을 만나기 위함이었나 싶었다.
‘남에게 전해 들었다면 믿지도 못했겠지.’
속으로는 끝없이 감탄이 나왔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목소리는 사뭇 달랐다.
“아직 둔하다. 움직임은 가볍게, 포스의 움직임은 무겁게! 발끝으로 온몸을 밀어 내듯이. 그리고…….”
천재에게 과도한 칭찬은 독일 뿐이었다.
그랬기에 지난 한 달간 계속해서 허점을 지적해 왔다.
검술도 검술이지만 겸손을 가르치기 위하여.
물론.
‘본인은 묘하게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람이 겸손해서 나쁠 건 없었다.
검공은 뿌듯한 미소를 감추며 연신 로건을 재촉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 더 흐르자.
검공도 로건의 움직임에서 더 이상 지적할 곳을 찾지 못하게 되었다.
스윽.
몸을 움직이는 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로건의 몸이 잔영을 남기며 수십 미터를 미끄러졌다.
한순간에 공간을 삭제하듯 이동하는 검공만큼은 아니었지만, 근처에서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면 실체가 없는 유령이 소리도 없이 달려드는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좋다. 스스로 더 연마해서 체화하는 과정만 거치면 되겠다. 잘했다!”
평생의 비기가 불과 다섯 시간도 되지 않아 완전히 해부되었음에도 검공의 표정은 홀가분하기만 했다.
가능한 칭찬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번만큼은 다른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정작 움직임을 멈춘 로건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음? 어디 문제가 생겼느냐? 혹여나 내상이라도…….”
“아, 아닙니다. 스승님.”
“그런데 표정이 왜 그러느냐?”
“그게…… 분명 놀라운 운신법입니다. 제 스스로 이전보다 두 배는 빨라진 것을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런데 이건 기사가 만든 수법이 아닌 것 같습니다. 마치…….”
“암살자 같으냐?”
검공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표정으로 웃자.
로건은 살짝 망설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예상치 못한 스승의 대답에 두 눈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전하께서 아직 왕세자이실 적에. 막 기사가 되었던 부족한 나를 호위기사로 삼아 주셨었다. 알고 있느냐?”
“……예.”
“그리고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전하는 즉위 전부터 정적이 많으셨지. 차마 입에 올리기 힘든 경험을 많이 하셨다.”
“…….”
“수많은 암살자가 찾아왔고. 그 와중에 젊은 나이에 로열나이트로 임명되었다고 들떴던 애송이는 오히려 최전방에서보다 더 많은 피를 흘리게 되었다.”
로건은 수십 년 전, 지금보다 훨씬 젊은 금발 머리 청년이 왕좌를 가로막고 피를 흘리는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었다.
“혼자서 누군가를 지키고 또 몰려드는 적을 베기 위해, 그 애송이는 끝없이 상상하고 또 상상했다. 어떤 암살자들보다 더 빠르고 은밀하게 움직이고, 한 번의 칼질에 공간을 장악하는 무술을.”
“아…….”
“처음에는 막막하기만 했던 목표였지만, 어느새 그 애송이는 중압을 만들어 내고 음속 가르기를 터득했다. 그리고 귀신 그림자를 이루고 나서야 어느 정도 그 목표를 달성했다 느꼈다. 그리고 그때야 오러를 각성할 수 있었지.”
검공이 오러를 각성하게 만든 계기. 그 말은 즉.
“귀신 그림자는 내가 오러유저가 된 단초를 제공한 내 무술의 정화다. 만들어 낸 나조차 기적으로 생각할 만큼 대단한 수법이지. 단순히 이론을 알고 터득했다 자만하지 말고, 검술과 함께 평생을 수련하거라. 나 역시 아직 그 끝을 보았다고 여기지 않으니.”
“……알겠습니다.”
초인으로 향하는 길.
검을 수련하는 자라면 그 말에 가슴이 뛰지 않는 이가 있을까.
로건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데.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던 스승이 좀 전과는 다르게 조금 망설이는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돌아가려는 너를 잡은 것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예?”
“혹시 3왕자님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느냐?”
로건은 그 순간 무의식적으로 탄성을 지를 뻔했다.
포기하고 있던 얼굴도장 찍기의 가능성이 불쑥 눈앞으로 다가왔으니까.
“3왕자님이요?”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하며 간신히 표정 관리를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스승이 조금 미안한 듯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래. 아 물론 네가 파벌의 제안을 다 거절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명색이 중립을 표방하던 내가 엉뚱한 권유를 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만…….”
‘아니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로건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는 검공의 말을 들으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3왕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차기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중립 세력의 태두.
검공 펠릭스 에스페란자의 이야기는 이미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 중립이지 아마도 내심…….
‘망나니인 1, 2왕자 말고, 왕재를 타고난 3왕자가 왕이 되길 바라고 계시겠지요.’
어쩌면 스승을 중심으로 하는 중립 세력은 3왕자파의 다른 이름일지도 몰랐다.
로건은 그렇게 짐작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더욱 3왕자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기도 하고.
로건은 그런 내심은 감춘 채 스승의 물음에 답했다.
“이 나라 ‘유일의’ 왕재라는 소문 정도는 들었습니다.”
“……허허. 다른 데서는 그런 말을 대놓고 하지 말거라. 사달이 날 수도 있어.”
검공의 대답에서는 그 내용과는 달리 약간의 자부심이 묻어 나왔다.
로건은 자신이 제대로 정답을 맞혔음을 확신했다.
“혹시 3왕자님께서 저를 만나고 싶어 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분 역시 내가 제자를 들였다는 말에 궁금하셨던 모양이다. 하지만 절대 강요는 아니다. 굳이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그분을 만나지 않아도 된다. 내가…….”
“만나 뵙겠습니다.”
“……응?”
너무 쉽게 나온 응답에 말을 꺼낸 검공이 오히려 당황했다.
“제자로서 어찌 스승님의 권유를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는 일정 정도야 조금 늦춰도 상관없습니다.”
“……생각은 하고 말하는 거냐. 너와 네 집안을 험한 길로 들일 인연이 될 수도 있다.”
“만나 뵙는 것뿐이지 않습니까. 어차피 파벌도 없는 분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그렇긴…… 하지.”
미묘하게 바뀌는 스승의 얼굴을 보며 로건은 속으로 웃었다.
‘역시 뭐가 있어.’
확신과 더불어 스승에게 고마운 마음도 함께 느껴졌다.
검공, 펠릭스 에스페란자는 다른 이에게 이렇게 쉽게 감정을 내보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유독 자신에게는 인간적인 모습을 자주 보여 주고 있었다.
길지 않은 인연임에도 그만큼 마음을 터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에, 로건 역시 웃으며 쉽게 말을 할 수가 있었다.
“아니면 제게 따로 바라시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흐음. 이 의뭉스러운 녀석이 뭔가 꿍꿍이가 있나 본데…….”
로건은 내심 뜨끔했지만,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꿍꿍이라뇨? 먼저 말씀을 꺼내신 것은 스승님입니다.”
“하. 그래, 그렇지. 어찌 되었건 왕자님을 뵙게 되거든 각별히 입조심을 하여라.”
스승의 경고가 협박이 아닌 염려에 기반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로건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상황의 전개가 생각보다 매우 빨랐다.
“그럼 네 의사도 확인했겠다, 길게 끌 필요는 없겠지. 바로 가자꾸나.”
“……예?”
일국의 왕자를 만나는 일이 이렇게 쉬웠던가?
아무리 실권이 없는 왕자라도?
짧은 반문에 여러 가지 의문이 담겼지만, 스승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 공작과 그 제자는 복면을 뒤집어쓰고 수도 밤거리의 지붕을 내달리고 있었다.
탓.
스슥.
지붕의 끝을 한 번 밟은 복면인이 단숨에 공간을 이동한 듯 20여 미터의 거리를 넘어 지붕 반대편에 나타났다.
그 뒤를 따르는 다른 복면인의 움직임 역시 그보다는 못하더라도 귀신 같기는 마찬가지.
설령 누군가가 두 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었다고 해도 자신이 잘못 봤다고 여길 만큼 소름 끼치는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그중 뒤를 따르던 복면인의 입에서 나직이 불만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러려고 귀신 그림자를 가르치신 겁니까?”
“뭐, 겸사겸사.”
어이없다는 제자의 표정을 무시하며 검공은 다시 소리 없이 밤하늘을 내달렸다.
부족한 경지로 그 귀신같은 움직임을 쫓아야 하는 로건으로서는 이를 악물고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달조차 뜨지 않은 밤.
그랑 내성에 즐비한 대저택의 지붕.
그 지붕을 달리는 그림자 둘의 움직임은 은밀했으며, 또한 빨랐다.
두 그림자는 내성의 중앙에서부터 질주해 순식간에 외성 외곽 구석진 곳에 자리한 어느 집에 도착했다.
저택이라 부르기조차 민망한 폐가.
그 안으로 소리도 없이 들어선 두 그림자 중 하나가 폐가 한쪽의 무언가를 눌렀다.
그러자.
스르릉.
가벼운 소음과 함께 숨겨져 있던 지하로 이어진 계단이 나왔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겁니까?”
“그분을 주시하는 눈이 제법 많다.”
“그래도 ‘고작’ 저를 만나는데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그래. ‘무려’ 검공의 제자를 만나는 거니까.”
서로 마주 본 사제가 피식 웃었다.
“더 묻고 싶은 건 없느냐?”
“……스승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신다는 건, 3왕자님을 지지하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검공의 신분으로 왕자를 만나는데 어찌 이런 괴행이 필요할까.
그것은 그가 3왕자와 만남을 비밀스럽게 여긴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스승의 대답은 로건의 짐작과는 달랐다.
“아니. 나는 왕위 다툼에 끼어들지 않는다.”
“예?”
예상외의 대답에 머릿속이 복잡해진 로건이 멈칫했다.
“그럼 왜 굳이 이렇게…….”
“내 제자인 네가 공공연히 3왕자님을 만나는 모습을 보이면 오해가 쌓일 테니까. 나는 아직 어린 3왕자님의 후견인일 뿐이지, 정치적 지지자는 아니다. 전하의 부탁은 왕자님이 장성하실 때까지 안전을 지켜 달라는 것뿐이었으니까.”
로건이 생각해 온 3왕자파에 대한 가정을 단번에 깨 버리는 말이었다.
“3왕자님을 칭찬할 때 좋아하신 것은…….”
“물론 우리 3왕자님이 총명하시긴 하니까.”
흐뭇한 미소는 분명 호의를 담고 있었지만, 스승은 공과 사가 분명한 사람.
본인 입으로 아니라고 한다면 분명히 아닐 것이다.
‘내가 착각했다고?’
예상은 틀어졌고, 그에 따라 계획이 조금 더 힘들어졌다.
관심 없는 스승을 설득해서 내전에, 왕위 다툼에 끼어들게 만들어야 했다.
순간적으로 막막한 생각이 들었지만.
‘어차피 다른 길은 없어.’
전생에서 나라를 완전히 말아먹었던 폭군이나 그보다 더한 놈이라 평가받는 놈을 왕으로 만들 수는 없다.
아직은 어리지만, 믿을 것은 3왕자뿐이었다.
‘어떻게든 해낸다. 반드시!’
갑자기 투지를 뿜어내는 로건을 검공이 이상한 듯 쳐다보았지만.
이로써 로건은 3왕자와의 만남이 조금 더 절실해졌다.
미묘하게 적극적으로 변한 걸음이 어두운 통로로 이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건은 어둠의 끝에서 환한 불빛을 발견했다.
큼지막한 석실.
은은한 등불이 흐릿하게나마 어둠을 밝혀 주고, 어디서 나는지 모를 상큼한 향이 지하의 음습한 기운을 씻어 주는 방 가운데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남자라고 하기엔 너무 어려 보이고, 소년이라고 하기에는 또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
빛나는 백금발에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지닌 미청년.
굳이 왕족의 상징인 백금발이 아니더라도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왕국의 3왕자. 로저스 폰 그란디아.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왕자님.”
“오랜만이에요, 공작님. 아. 그 뒤가…….”
로건은 호기심 어린 눈빛을 받으며 앞으로 나서 정중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쿵.
“로건 맥라인이 3왕자님을 뵙습니다.”
“……그래. 경이 바로 공작님의 제자인가?”
검공의 제자.
아직은 그 타이틀이 이름보다 더 유명하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물론 기분 나쁠 일은 아니었기에 로건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래. 그렇게 어린 나이에 벌써 상급기사라지? 정말 대단하군. 만나서 반갑네.”
“과찬이십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광이라니. 야밤에 이런 곳으로 부른 내가 미안하지. 하하.”
그는 왕자답지 않게 꽤나 소탈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