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83)
83화
“아닙니다, 왕자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자꾸 영광은 무슨. 내가 영광이지. 이런 젊은 영웅을 만나게 됐는데.”
“과찬이십니다. 좋은 스승님을 만나 운 좋게 작은 성취를 이룬 것뿐입니다.”
“하하. 그게 작은 성취라면 나 같은 사람은 뭐가 되나.”
“그런 뜻이 아니오라…….”
“거기다 단순히 개인적인 무력뿐만 아니라 가문을 위기에서 구하고 세까지 확장하지 않았나. 그대야말로 영웅이란 표현이 어울릴 만한 인재야.”
“……감사합니다.”
로건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일반적인 수도의 귀족들은 관심도 없는 변방 남작가의 사정까지 아는 왕자라.
로건이 힐끗 고개를 돌려 스승을 바라보자, 검공이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가 알려 준 것이 아니라는 뜻.
“공작께서 하도 극찬을 하시기에 개인적으로 호기심이 들어 알아봤네. 혹시 내가 실례를 한 것인가?”
“아닙니다. 과분한 관심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그래? 다행이군. 아, 계속 그리 있지 말고 자리에 편히 앉게. 공작님도 이리 앉으십시오. 우리끼리 있는데 과분한 예의는 버겁습니다.”
소탈한 웃음과 함께 자신의 바로 앞자리를 가리키는 왕자.
로건은 살짝 당황했지만, 스승이 별다른 거부 없이 왕자의 옆자리에 앉자 로건 역시 작은 한숨과 함께 그 앞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고.
어디에서 누가 준비한 것인지, 왕자는 직접 스승과 제 앞에 찻잔까지 직접 내어놓으며 은은한 향이 감도는 차를 따라 주었다.
또르륵.
“아, 아니. 전하!”
“괜찮네. 그냥 있게.”
“허…….”
“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네. 특히나 로건 경 같은 젊고 뛰어난 인재들을. 하지만 두 분 형님의 눈치를 보느라 이렇게밖에 할 수 없으니, 이 차 한 잔으로 무례를 대신할 수는 없겠지만 성의로 받아 주게나.”
세 번째 왕자로 태어나 눈치를 보며 살아온 어려움을 느낄 수 있는 말이었지만, 그의 태도에는 거리낌이 없었고 어조 또한 자신감에 차 있었다.
스승이 영명하다 칭찬하고, 왕재라 소문이 도는 것은 단순히 무력적 재능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문보다는 못하더라도 분명 1, 2왕자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 정도 기대였는데.’
그 기대치는 이미 충족시키고도 남는 것 같았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자연스레 미소가 나오는데.
“내 성격상 돌려 말하거나 이야기를 질질 끄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아. 바로 본론을 이야기하겠네.”
왕자는 젊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훨씬 단도직입적이었다.
“로건 경은 잘 모르겠지만, 지금 이 나라의 운명이 크게 위태로운 상황이네. 귀족들이 나라를 둘로 갈라 서로 나머지 반쪽을 먹겠다고 싸우는 형세지. 아직까진 직접적인 무력행사는 없지만, 언제고 터질 폭탄이야.”
언제 터질지도 알고 있습니다만.
로건은 속내를 감춘 채 묵묵히 이야기를 들었다.
“백성의 삶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놈들. 그놈들은 이 나라를 망하게 할 독이네. 그래서 나는 인재가, 세력이 필요해. 나라를 갉아먹는 그 독들을 몰아낼 힘이!”
이를 악문 왕자의 표정에는 절실함이 보였다.
“왕자님!”
다만 그 말을 듣는 스승의 표정은 빠르게 굳어지고 있었다.
“전하. 분명히 강요는 않는다고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물론입니다, 공작. 힘없는 왕자인 내가 어찌 검공의 제자에게 강요를 하겠소이까.”
“그런 뜻이 아니오라…… 허…….”
말 한마디로 스승의 입을 막아 버린 왕자가 다시 로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 내게 경의 소식이 들려왔네. 스물한 살의 나이에 이미 상급기사의 경지. 벌써 두 번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쟁 영웅. 여기 있는 검공도 그 나이 때는 경만 못했다 단언했지.”
물끄러미 스승을 바라보자, 검공은 당혹스러워하는 중에도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로건 맥라인. 세기의 천재이자 왕국의 보물. 나는 그대와 같은 인재가 나를 지지해 주기를, 때가 되면 나를 위해 일어서 주기를 바라네. 그래 줄 수 있겠는가?”
평생 들어 본 적도 없는 극찬과 함께 선택지가 하나뿐인, 피할 수 없는 질문이 들어왔다.
‘바라던 바.’
하지만 설령 바라던 것이 아니었더라도 여기서 어떻게 싫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리 힘이 없는 3왕자라 하나, 왕자라는 신분만으로도 지방의 소영지쯤은 손쉽게 무너트릴 수 있을 것이다.
로건은 속으로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하의 의견은 저 역시 깊이 공감합니다. 직접 뵙고 나니 ‘유일한’ 왕재라는 전하의 소문에 전혀 거짓이 없음 또한 잘 알겠습니다.”
왕자의 얼굴에 점차 미소가 번지고, 검공이 복잡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는데.
“하지만 지금 당장 전하의 뜻에 따르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로건이 찬물을 한 바가지 끼얹었다.
“……그러한가. 역시 내게는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것인가.”
왕자가 침통한 표정을 짓는데, 로건이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음?”
“적어도 위의 두 왕자님이 그리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미 파다하게 알려진 사실이니까요.”
“로건! 그건 네가 언급할 문제가…….”
“괜찮습니다, 공작. 로건 경. 계속해 보게.”
“……기본적인 자질만 보여 주시면, 적어도 전하의 뜻은 왕자님께서 얻으실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 뜻은 곧 의미가 없어지겠지만.
“다만 저는 영지의 후계자로 가문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 영지는 지금 비프로스 백작과의 갈등 중에 있습니다. 저희 사정에 감당하기 어려운 강적이지요. 그런 상황에서 무작정 왕자님의 부름에 응하기에는 제 상황상 어려움이 있습니다.”
“비프로스라면 2왕자파의 사람이던가? 서남부의 변경백?”
인상을 찌푸리는 왕자 앞에서, 로건은 자신감 있는 미소를 지었다.
“제게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그 비프로스를 거꾸러트린 다음에, 온전한 가문의 힘을 이끌고 왕자님의 힘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너 역시 내 칼이 되어 주면 된다.
속마음을 감춘 채 고개를 숙이자.
그제야 비로소 3왕자의 얼굴에 온전히 웃음꽃이 피었다.
“푸하하하. 그 자신감, 역시 검공의 제자다워. 좋아 기대하지. 어디 보자. 이 좋은 날 뭔가 선물이라도 줘야겠는데…….”
“마음만으로 충분합니다. 선물은 제가 공을 세운 다음에나 받겠습니다.”
“허허. 이 사람 이거 점점 마음에 드는군. 좋아. 그렇다면 나도 그때를 대비해 깜짝 선물을 준비해 두지. 기대해도 좋아.”
후끈 달아오른 분위기. 로건은 웃으며 왕자가 내민 손을 잡았다.
* * *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이냐?”
3왕자가 있던 안가에서 나오는 길.
한참을 말없이 걷던 스승이 툭 물었다.
“예?”
“3왕자님을 따르겠다는 말 말이다.”
“어…… 제가 그리 확정적으로 말씀을 드렸던가요? 저는 그냥 미래에 비프로스를 극복하고 나서…….”
“요망한 녀석. 그게 그 말 아니더냐. 아니면 왕자님께 사기를 쳤다고 할 참이냐?”
“하하. 다 스승님을 믿고 한 말 아니겠습니까.”
“허……. 나를? 나는 아무것도 보장해 줄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검공의 눈빛이 복잡해졌지만, 로건은 그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삶은 모험이지요. 위험이 크면 얻는 것도 많을 테니까요.”
“고작 그 이유가 전부더냐?”
“에이. 스승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희 가문은 비프로스와 척을 졌고, 1왕자파인 카이로스와도 사실상 원수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달리 길이 없지요.”
“중립을 선택하는 것도 방법이지 않겠느냐?”
“아직 젊지 않습니까. 그래도 크게 한 번 노려 봐야지요.”
로건의 능청스러운 말에도, 검공은 여전히 진중한 태도로 되물었다.
“그러니까 정말 그게 전부더냐? 아닐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네가 전혀 승산도 없는 일에 뛰어들 것 같지는 않아서 말이다. 뭐 생각이 있다면 속 시원히 터놓아 보거라. 혹시 아느냐, 내가 도와줄지?”
자신을 응시하는 푸른 눈동자. 그 안에 어린 짙은 호기심에 로건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스승님은 세 왕자 중 어떤 분이 왕이 되면 좋을 것 같습니까?”
“그것은 내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전하께서 판단하실 문제지.”
“그리고 귀족들의 이권도 얽혀 들 테고요. 많은 귀족이 차기 권력의 행방을 쫓아 움직일 겁니다. 지금 1, 2왕자 파벌처럼요.”
“그 역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검공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로건은 태연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전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1왕자는 폭군이 되어 왕실을 망칠 자요, 2왕자는 암군이 되어 나라를 망칠 자다.”
“……누가 감히 그런 소리를! 왕실이나 두 공작가 모두를 건드리는 말이다. 함부로 내뱉을 말이 아니야!”
‘그 말, 전생에 당신이 하셨습니다.’
비록 전생에서 내전 중에 나온 한탄의 말이라고는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시기다.
자연히 지금 스승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라 자신하기에 로건은 쉽게 다음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어쨌건 저는 그 말을 믿습니다. 3왕자님이 어디까지 성장하실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리 못해도 1, 2왕자보다는 나으리라 생각합니다. 스승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말했듯이 내가 판단할…….”
“스승님의 충성심은 존경합니다만, 그 원리 원칙을 지키는 충성심이 언제나 나라를 이롭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제가 듣고 싶은 것은 그저 스승님의 의견뿐입니다. 그 정도는 과하지 않지 않습니까.”
로건의 붉은 눈이 가만히 스승을 응시했다.
그 시선을 받은 당사자는 잠시 망설였으나, 이내 솔직한 본심을 토해 냈다.
“……나도 네 생각과 그리 다르지 않다.”
‘됐어!’
이로써 검공의 암묵적인 동의를 받아 내었다.
물론 아직은 충직한 검공의 마음속에 뿌리는 씨앗 정도일 뿐이다.
하지만 말의 씨앗이 만들어 낸 생각의 나무는 사람의 사상을 바꾸기도 했다.
그 씨앗이 발아하기는 할지, 혹은 발아하더라도 원하는 나무로 자라날지는 알 수 없지만.
생각지도 못한 큰일이 터졌을 때, 적어도 어떠한 흐름은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로건은 뿌린 씨앗 위에 제 바람을 담아 물을 주었다.
“전하 역시 3왕자가 두 형보다 나은 인재로 크길 바라고 계실 겁니다. 그래서 스승님을 후견인으로 붙이신 거겠죠.”
“……그렇다고 내가 공식적으로 3왕자님을 지지할 수는 없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그저?”
“지금처럼 3왕자님이 성년이 될 때까지 지켜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 전에 난리가 날 테니까.
“……원래 의뭉스러운 놈이라 생각은 했다만, 지금은 대체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검공의 헛웃음 속에서 밤이 저물어 갔다.
* * * 고작 두 달의 기간.
그 짧은 시간 동안 로건은 많은 것을 이루어 내었다.
왕의 상태를 확인하고 3왕자와 연을 맺었다.
필립은 내전을 위한 물자 준비를 위해 상행을 보내 놓았고, 그것을 원활히 하기 위해 카이로스를 통해 상행 루트와 인맥 지도를 뜯어내고, 협조 약속까지 받아 놓았다.
거기에 더해 에일렌이라는 인재를 얻고, 스승으로부터 또 하나의 비기까지 배웠으니 이미 수도에 온 목적은 넘치도록 달성한 이후였다.
따라서 로건은 더 이상 수도에 머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자꾸만 치근덕거리는 1, 2왕자 파벌의 초대도 문제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계산과는 별도로 이 순간만큼은 아쉽기 그지없었다.
“으아아앙!”
“곧 다시 만나러 오마, 스텔라.”
헤어지는 것을 아는 듯 서럽게 우는 아기의 볼을 조심스레 쓰다듬어 준 로건은 아쉬움을 가득 담아 강보를 유모에게 건넸다.
히끅. 히끅.
“흐에엥.”
“허허. 스텔라가 너를 정말 좋아하는 것 같구나.”
“제가 좀 아기들한테 인기가 많습니다.”
로건이 평생 안아 본 아기라고는 로니안과 스텔라 둘 뿐이라는 걸 잘 아는 릭이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로건은 뻔뻔했다.
일단 둘 다 자기를 좋아한 것은 사실이니 거짓은 아니었다.
“그러게나 말이다. 아비 서운하게 시리, 이 녀석.”
“히잉.”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이를 쓰다듬는 스승의 얼굴엔 그저 웃음뿐, 서운함은 한 조각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만날 때까지 강녕하시기 바랍니다.”
“그래. 좋은 날에 다시 만났으면 좋겠구나.”
검공이 아쉬움을 뒤로 하며 기원했지만,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 평화가 깨어지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기에 로건은 어색한 웃음만을 지어 보였다.
“공자님, 가시죠.”
릭의 재촉에 로건은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수도에서 들러야 할 곳이 하나 남아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