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84)
84화
“로건 맥라인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백작 각하.”
“하하. 듣던 대로 헌앙한 젊은이로군. 그래, 앉게.”
금발 머리에 각진 얼굴의 로버츠 플로이드 백작은 환한 웃음으로 로건을 맞이했다.
로건의 전신을 훑어보며 탐색하는 듯한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그 눈빛에 담긴 호의가 부담감을 줄여 주었다.
로건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그가 권해 준 대로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래, 바로 수도를 떠난다고?”
“예. 이제 돌아가야지요. 할 일도 다 끝났고, 영지를 너무 오래 비워 두었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영지는 중요한 법이지…….”
플로이드 백작이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살짝 말끝을 흐렸다.
“그런데…….”
“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우리 애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던가?”
전조도 없이 갑자기 훅 들어온 질문.
다행히 예상했던 질문 중 하나였기에 로건은 당황하지 않고 빠르게 준비해 둔 답을 말할 수 있었다.
“아름답고 배려가 깊으시더군요. 거기에 상상하지도 못한 뛰어난 검술 실력까지. 정확하게 제 이상형이셨습니다.”
있지도 않은 이상형을 급조해 내긴 했지만, 표정과 말투까지 연습한 그대로 완벽했다고 자부했다.
“검술……? 어, 음. 뭐, 우리 애가 예쁘긴 하지. 허허.”
뭔가 잘못 들은 거겠지.
그런 생각이 여실히 드러나는 표정의 백작 앞에서 로건은 다시 한번 강조했다.
“에일렌 공녀는 너무나 매력적인 여성입니다. 특히나 여자의 몸으로 검술을 그렇게까지 수련했다는 것에 진심으로 감탄했습니다.”
모든 것이 지금부터 하고자 하는 일을 위한 밑밥이었지만, 백작의 반응은 떨떠름했다.
“……진심인가, 자네?”
“예. 뭐 잘못된 것이라도?”
“아, 아니. 아닐세. 흐흠. 그게 그렇게……. 허허.”
백작이 연신 헛웃음을 지을 때.
“그저 공녀로만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재능이기도 하고요.”
로건의 이어진 말이 백작의 표정을 살짝 굳어지게 만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제가 여기에 온 것은 에일렌 공녀와의 약혼을 논의드리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녀의 미래를 위해 각하께 의논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입니다.”
“에일렌의 미래라니? 그야 결혼을 하고 나면…….”
“제 부인으로서가 아닌, 에일렌 플로이드라는 한 사람의 미래를 말함입니다, 각하.”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군. 대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에 백작이 혼란스러워하는데.
똑똑.
“아버지. 에일렌입니다.”
응접실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작이 로건을 흘깃 한번 바라보고는 대답했다.
“아, 그래. 들어오너라.”
끼이익.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진 문이 열리고, 그 뒤에서 밋밋한 회색 ‘무복(武服)’을 입은 에일렌이 모습을 드러냈다.
“에일렌! 이런 자리에서 지금…….”
“에일렌 공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여전히 아름다우시군요.”
“……뭐 하는, 어…… 흠, 크흠?”
딸을 탓하려던 백작은 어색하게 말끝을 흐리고.
“과찬이세요, 로건 공자. 다시 뵙게 되어 기뻐요.”
서로를 보며 환하게 웃는 두 청춘 남녀를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자리에 앉아 버렸다.
“음. 우리 애가 이렇게 입어도 예쁘긴 예쁘지. 그런데 격식을 갖춰 차려입으면 더…….”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아, 이미 로건 공자에게 듣고 있었다. 가문의 중대사이긴 하지만 서로 좋아서 약혼하겠다는데 나야 환영이지. 이제야 우리 딸의 매력을 알아보는 귀공자가 나타났는데…….”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잔뜩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여는 딸의 모습을 보며 불길한 느낌을 받은 백작이 황급히 말을 늘어놓았지만.
“저는 로건 공자의 약혼녀, 그 이전에 기사로서 맥라인 영지에 가려고 해요. 허락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굳은 표정의 딸은 기어코 그의 억장을 무너트리는 소리를 내뱉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냐! 로건 공자. 얘, 얘가 그냥 헛소리하는 거니 이상하게 듣지 말게. 가, 가끔 이래. 그냥 꿈을…….”
“저도 동의한 일입니다.”
“……뭐?”
애써 딸을 변호(?)해 주려던 백작은 의외의 적군 등장에 멍한 표정이 되었다.
“말씀드렸듯이 에일렌 공녀의 재능은 그저 여자라는 이유로 썩혀 두기에는 아까울 정도입니다. 제가 공녀의 약혼자로서, 또 같은 기사로서 공녀의 꿈을 돕고 싶습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상황……?”
백작이 딸과 사윗감을 번갈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리는데.
“아버지, 허락해 주세요. 로건 공자와 함께라면 아버지가 바라시는 제 미래도, 제가 원하는 미래도 모두 이룰 수 있어요.”
거듭되는 딸의 청원이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를 바로잡았다.
다만 제빛을 찾은 눈동자에 떠오른 것은 안타깝게도 그리 긍정적인 감정은 아니었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기사? 기사라니?! 그딴 헛소리를 할 줄 알았다면 저, 저놈을 저택에 들이지도 않았어!”
벌컥 고함을 지르며 로건을 향해 삿대질하는 백작.
터질 듯 붉게 달아오른 얼굴에는 직전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충분히 예상한 상황이었기에 그 앞에 있는 두 남녀를 당황하게 할 수 없었다.
“백작님. 에일렌 공녀는 재능이 있습니다. 그것도 그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이. 더구나 본인도 그 재능을 살리고 싶어 합니다. 따님의 행복을 바라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허락해 주십시오. 제가 소중히 아끼며 함께하겠습니다.”
“행복? 행보오옥!? 꿈도 꾸지 말아!! 더군다나 내 딸은 절대 안 돼! 어딜 감히 내 딸한테 그런 흉악한 일을 시키려고!”
“……예?”
“아버……지?”
흉악한 일?
부들부들 떨면서 소리를 지르는 백작의 입에서 나온 엉뚱한 말에 둘은 순간 할 말을 잊었다.
“어린 나이에 어미를 잃고, 그 슬픔을 잊으려고 검을 휘두른 아이야!”
어……?
“검술은 이 아이의 감정 해소 방법일 뿐이야! 그런 여리고 순한 아이한테 재능 좀 있다고 사람 죽이는 기사를 시키라고?! 난 절대 허락 못 한다!”
기사가 사람 죽이는 직업은 아니…….
아니, 그 전에 여려? 순해? 누가?
‘사연이야 안타깝지만, 스트레스를 칼질로 푸는 것에서 이미…….’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말은 많았지만, 로건은 바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고함을 지르는 목소리에서 진하게 느껴지는 부성애가 그를 머뭇거리게 만든 것이다.
반면에 에일렌은 아버지의 고함을 들으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아버지 또한 휘하에 기사단을 거느리고 있는 힘 있는 귀족.
그런 그가 불과 열두 살에 포스를 각성했던 딸의 재능이 가진 가치를 몰라볼 리 없었다.
– 네가 아들이었다면…….
그랬기에 안타까워했고, 그랬기에 에일렌이 검을 잡는 것을 더욱 반대했다.
– 자기보다 강한 여자를 원하는 남자는 없다. 딸아, 나는 네가 여자로서 행복을 찾길 바란다. 네 엄마처럼.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 우리 딸. 넌 이 엄마처럼 답답하게 살지 말고 자유롭게 살아. 꼭 하고 싶은 거 다 해 보는 거다? 약속!!
아버지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이제는 볼 수 없는 그리운 이의 유언을 생각해서라도.
그래서 에일렌은 한발 앞으로 나섰다.
“아버지. 그럼 저 시집가지 말까요?”
“뭐?”
“더 들어오지도 않는 혼담, 이참에 포기하고 집에서 칼만 휘두르고 있을까요?”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네가 기사가 된다고 하니까…….”
싸늘하게만 느껴지는 딸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 백작이 살짝 움츠러들었다.
“아버지가 시집가라고 억지로 만든 자리에서, 운 좋게도 저를 진정으로 이해해 주는 남자를 만났어요. 그래서 시집가겠다는 건데, 이제 와 반대하시는 거예요?”
“아, 아니. 내 말은 시집이 문제가 아니라 네가 기사를 하겠다고 하니까 그러는 거 아니냐. 여자는 여자의 행복을 찾아야…….”
“그러니까!! 그 망할! 여자의 행복이라는 게 대체 뭐냐구요!!”
터져 나온 에일렌의 고함과 함께 순간적으로 적막에 잠기는 공간.
로건은 소름이 돋은 팔을 슬그머니 뒤로 숨기며 백작의 눈치를 봤다.
참 여리고 순한 딸입니다, 각하. 예. 하하.
“……그거야 좋은 곳에 시집가서 남편 뜻에 따라…….”
딸의 기세에 짓눌린 백작이 소심하게 반항했지만, 그것은 악수(惡手)나 다름없었다.
“그럼 시집가서! 남편 뜻에 따라! 기사가 되는 건 상관없겠네요! 그쵸?”
“……어?”
“로건 공자. 우리 그냥 약혼은 생략하고 결혼부터 할까요?”
“얘, 얘야!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아니면 시집가지 말고 이 집에서 평생 칼이나 휘두르면서 살까요?! 이 집에서 칼 든 처녀 귀신으로 늙어 죽어 봐요?!”
시집가라고 생떼를 부릴 때는 언제고, 시집가서 남편 뜻대로 살겠다는데 왜 말을 바꾸냐.
그 말은 무적의 논리가 되어 백작을 압박했고.
결국 그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로건 맥라인. 검공의 제자이자, 맥라인 영지의 후계자. 다 좋은데 내 딸을 기사로…… 끄으응.”
“…….”
처음과는 달리 살벌하게 로건을 노려보는 눈동자에, 로건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 저 여기서 평생 살아요?”
금이야 옥이야 길러 온 사랑스러운 딸이 함께 살겠다는 말이 왜 이렇게 무섭게 들리는지.
딸의 차디찬 목소리에 그는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더는 없겠지. 더는…….”
“에일렌 공녀가 행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약속 절대로 지켜야 할 거다. 만약 내 딸이 잘못…….”
“아버지!”
“……될 리는 없겠지. 끄으으응. 꼭 지키게, 약속.”
“물론입니다.”
허망한 표정으로 로건과 에일렌을 번갈아 쳐다보던 백작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그의 얼굴은 한순간에 10년은 늙은 듯 보였다.
하지만 그의 시련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바로 데려가겠다고? 그것도 내일?!”
“예. 이런 일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딸. 왜, 왜 그렇게 서둘러?!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잖느냐?”
“결심이 서는 순간 움직이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요. 망설이면 아버지가 또 잡으시려 할 거 아니에요.”
정곡을 찔린 듯 움찔한 백작은 이내 자신의 딸을 말없이 한참을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던 그 얼굴은 바로 옆의 로건을 보는 순간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로건이 그 사나운 기세에 순간적으로 주춤 물러나는데.
뭐라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이던 백작은 이내 탄식 섞인 긴 한숨을 뱉어 낼 뿐이었다.
“후우. 그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어. 네 뜻이 그렇다면…….”
“아버지…….”
“그럼 우리끼리라도 조촐한 파티 정도는 해야겠구나.”
“……예?”
“사윗……감이 찾아왔고, 딸이 그 집으로 가겠다는데 아비가 돼서 그냥 빈손으로 보낼 수는 없지.”
“백작님. 굳이 그러실 필요는…….”
만류하려던 로건은 거의 불길을 쏟아 낼 듯한 백작의 눈길에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 좋은, 크흠, 좋은 날이니 즐겁게 즐기자꾸나. 식사를 차려라! 요리사에게 가장 자신 있는 요리로 가득 채우라고 해! 내 딸이 좋아하는 것으로! 다시 먹고 싶어서라도 종종 찾아올 수 있게끔! 아니,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내가 직접 감독해야지.”
벌떡 일어선 백작이 왜인지 고개를 들어 시선을 천장으로 향한 채 황급히 응접실을 나섰다.
“좋은 날, 좋은 날이야! 그럼!”
그 호탕한 척하는 목소리에 물기가 느껴지는 것은 로건의 착각일까.
‘뭔가…….’
로건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내가 엄청 나쁜 놈이 된 것 같은데.’
정말 도둑놈이라도 된 듯한 기분에 억울함을 느끼는 로건이었다.
다음날.
“그럼 그만 가 볼게요. 아버지.”
“에일렌, 건강해야 한다.”
“다시 안 올 사람 보내는 것처럼 그러시네요. 또 올 거예요.”
“안다. 안다만…….”
에일렌의 손을 꼭 잡은 백작이 걱정이라는 이름의 잔소리를 연신 늘어놓았다.
“……네, 네. 알겠어요. 저희 이만 갈게요.”
“그리고 또…….”
“적당히 좀 하세요.”
“…….”
에일렌과 한참 동안 송별 인사를 나눈 백작이 이번에는 로건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잘 보살피…….”
“정식 혼인 전에 건드리면 목을 베어 버리겠다.”
“…….”
“진짜로.”
“……예.”
백작이 독기 서린 눈으로 로건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기사 시킨다고 내 딸 다치게 만들면 내가 직접…….”
“아버지!”
“끄응. 아무튼 내 딸 잘 부탁한다.”
간신히 울음을 참고 있는 듯 잔뜩 일그러진 표정의 백작이 로건의 어깨를 두드려 주곤 축 늘어진 모습으로 돌아섰다.
‘이럴 거면 왜 시집가라고 독촉을 한 걸까.’
현생은 물론 전생에서도 부모가 되어 본 적 없는 로건은 복잡 미묘한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공녀님, 축하드립니다!”
“행복하세요!”
백작을 대신하여 플로이드 백작가의 하인들이 두 사람을 배웅했다.
단호하게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이며 아버지를 설득(?)한 에일렌이었지만, 정작 떠날 때가 오니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한참을 저택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던 에일렌은 하인들이 로건의 눈치를 보며 식은땀을 흘릴 때가 되어서야, 간단한 인사를 남긴 채 돌아섰다.
그리고 저택의 정원을 돌아 마구간이 나올 때까지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가씨! 천천히! 같이 좀 가요! 쫌!”
마구간에 들어서 자신이 타고 갈 마차를 확인한 후에야 에일렌은 슬쩍 눈가를 훔치며 잠시 고개를 숙였다.
‘평생 살아온 집을 떠나는 마음이라…….’
무언가 위로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에 곁으로 다가서자.
짧은 한숨과 함께 붉게 달아오른 에일렌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나타났다.
“로건 공자님.”
그 물기 어린 목소리에 로건이 흠칫했다.
‘이거…… 진짜 곤란한데.’
어쩌다 약혼까지 했지만 나는 이런 관계가 될 생각은…….
“반드시 약속을 지켜 주세요.”
“예?”
눈물을 닦고 이를 꽉 다문 에일렌이 붉어진 눈을 억지로 부릅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나왔는데 성과도 없이 다시 돌아갈 수는 없어요. 그러니 반드시 약속을 지켜 주셔야 해요.”
떨리는 목소리는 숨길 수 없었지만, 그 안에 담긴 각오만큼은 확실하게 전해졌다.
로건이 그 말에 담긴 알 수 없는 울림을 느끼며 멍하니 서 있는데.
“못 들으셨어요?”
금세 차가워진 목소리가 그의 귓전을 두드리며 감상을 깨웠다.
“아, 아뇨. 물론입니다.”
아무래도 생각보다 더 대단한 여자일지도 모르겠는걸.
엉겁결에 대답한 로건의 입가에 자연스레 미소가 떠올랐다.
“가죠. 맥라인 영지가 어떤 곳인지 빨리 보고 싶네요.”
“……실망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암, 그렇고말고.
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