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86)
86화동이 터 오기 직전.
가장 어둡고 싸늘한 새벽에 에일렌은 불현듯 눈을 떴다.
포스를 각성한 이래로, 원하는 기상 시각에 정확히 눈을 뜨는 것은 무척 쉬운 일이었다.
더구나 오늘은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
게으름을 피울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 내일 새벽 동이 틀 때, 연무장에서 뵙겠습니다.
로건의 말을 떠올리며 의지를 되새기자 바로 몸이 반응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뒤 컨디션을 점검하고, 곧바로 간단한 무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잠시 방 안 구석에 놓인 평범한 갑옷을 바라보았다.
– 공녀 체형에 맞는 갑옷은 이것뿐이로군요. 당분간 훈련은 이 갑옷으로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체격이 큰 기사들에 비해 유난히 작은 갑옷.
맥라인으로 오는 길에 잠시 들른 도시에서 로건이 사 준 장비였지만, 빈말로도 그리 좋은 물건은 아니었다.
그나마 중갑을 혼자 입을 수 있도록 개량된 점 하나만이 쓸 만하달까.
하지만 새로운 인생의 시작을 함께할 장비라고 생각하자, 이상하게 애착이 가기도 했다.
“앞으로 잘 부탁해.”
에일렌은 마치 친구를 대하듯 갑옷에 인사하고는 능숙하게 갑옷을 착용했다.
마지막으로 검까지 챙겨 방문을 나설 때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30분.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감이 그녀의 몸을 좀 더 경쾌하게 만든 것 같았다.
‘과연 로건 공자가 내게 어떤 길을 보여 줄까.’
자신은 어떤 수련을 하게 되며, 어떤 기사로 거듭나게 될까.
간단한 움직임만으로 자신을 압도하던 로건의 검술.
자신도 그 검술을 배울 수 있을까.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이 옅게 남아 있던 여행의 피로마저 지워 버렸다.
그렇게 도착한 연무장.
“여자?”
“소문이 정말이었어?”
“허, 공자님께서 또 뭘 하시려고…….”
자신을 보자마자 소란스러워지는 기사들 앞에서.
“맙소사. 정말이었구나.”
머리를 부여잡는 패드릭의 모습과 함께, 에일렌은 마침내 충분히 예상했던 장벽과 마주했다.
“그런 일로 농담할 생각 없습니다, 아버지.”
“그래. 알지만 제발 농담이길 바랬다.”
“절대 아닙니다.”
로건의 단호한 말에 패드릭은 한숨을 쉬며 다시 큰아들을 바라보았다.
“로건. 여자다. 우리 왕국의 역사상 여자가 기사가 된 적은 없어!”
“아버지. 그냥 여자가 아니라 포스를 각성한 자입니다. 지금 저희는 인재라면 어떻게든 한 명이라도 더 영입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기사 중 반 이상도 원래 다른 가문의 기사들 아닙니까? 여자라고 안 될 게 뭐가 있습니까?”
“이 미친놈아, 심지어 네 약혼녀야! 약혼녀한테 기사 훈련을 시키겠다고?!”
“예.”
“끄으응.”
아들의 눈빛에서 확고한 의지를 읽은 패드릭은 결국 다른 핑계를 댔다.
“현재 맥라인 기사단의 수련은 다른 기사단에 비해 월등히 가혹하다. 아무리 재능이 있다고 하더라도 여자가, 그것도 귀족 여자가 견딜 만한…….”
“하…….”
아버지도 제국 여기사한테 칼침 한번 맞아 보시면 그런 생각이 확 사라지실 텐데요.
로건이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는데.
갑자기 터져 나온 외침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저도 할 수 있습니다!”
높고 날카로운, 하지만 단단한 의지가 담긴 목소리.
연무장에 모인 모든 이의 시선이 목소리 주인에게 향했다.
“여자라고 못할 것이라는 생각, 완전히 버리시게 해 드리겠습니다!”
에일렌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불꽃이 튈 듯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로건은 아마도 그녀를 본 모두가 그 감정을 느꼈으리라 생각했다.
덕분에 그는 확신을 가지고 한마디를 더 보탤 수 있었다.
“공녀가 훈련에 낙오한다면 저도 더는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굳은 얼굴의 패드릭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완고한 기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좋다. 공녀의 합류를 ‘일시적으로’ 허용하겠다.”
그 일시적이라는 말, 쑥 들어가게 해 주겠어.
에일렌은 이를 갈며 다시 한번 결심을 굳게 다졌다.
하지만 그로부터 한나절 뒤.
패기만만하게 훈련을 시작했던 에일렌은 바닥에 엎어진 채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 이 새끼들은 죄다 미쳤어.’
못해도 30㎞는 될 듯한 맥라인 타운 외곽의 구보로 훈련이 시작될 때까지는 그저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말을 타는 것이 아니라 들고 하는 산악 구보를 할 때는 농담하는 줄 알았고, 자신의 몸무게 세 배에 달하는 돌덩이를 매달고 절벽 오르기를 할 때는 그냥 다 미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 무슨 기사단에서 이런 훈련을 해!’
그만큼 맥라인 기사단의 훈련은 그녀가 상상하던 기사단 훈련과는 아득한 거리가 있었다.
기사를 동경했던 만큼, 그녀에게도 기사단에 대한 상식이 어느 정도는 있었다.
하지만 맥라인 기사단의 훈련은 그녀의 상식을 초월한 영역에 속해 있었다.
단단히 준비했다고 생각한 그녀가 포스를 바닥까지 긁어내고서야 간신히 낙오하지 않았을 만큼.
이런 훈련을 하는 인간들이 미친 게 아니라면…….
‘내가 세상을 너무 쉽게 본 거겠지.’
참담한 마음에 억지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주변에 비슷한 몰골로 퍼져 있는 기사들. 지쳐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자신처럼 진짜 탈진 상태에 이른 이는 없었다.
진짜 화가 나는 것은 그런 이들 중에는 자신보다 약한 포스를 가진 이들도 많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이 그녀의 오래된 트라우마를 건드렸다.
‘저들은 남자라서…….’
그리고 난 여자라서 체력이 더 약하다?
‘아니야! 그냥 내가 훈련이 부족한 것뿐이야!’
여자라서가 아니다. 자신이 그것을 증명해 보이겠다.
참담한 마음을 억누르고 일어난 오기가 가슴을 채웠다.
그러자 한계라고 생각했던 몸이 억지로나마 움직여졌다.
“끄으응.”
에일렌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나마 다시 자세를 잡고, 천천히 몸을 풀었다.
그대로 기절했다면, 깨어나서 회복하는 데만 수 시간은 걸릴 후유증이 남았을 것이다.
내일을 위해서라도 뭉친 근육을 풀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생각보다 할 만한가 보군요.”
“당연…… 로건 공자!”
에일렌은 반사적으로 대답한 뒤에야 목소리의 주인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다행히 약속은 지킬 수 있겠군요.”
“당연하죠.”
“후회가 되는 건 아니고요?”
“……돼요.”
“예?”
“그동안 제대로 된 훈련을 안 한 것 같아서, 그게 후회돼요.”
그 말에 순간 놀랐던 붉은 눈의 남자가 다시 웃었다.
“그럼 앞으로 더 기대해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이번엔 단순히 오기 때문이 아니었다.
왜 그렇게 자신을 보는지는 몰라도, 로건의 저 붉은 눈에서는 무언가 큰 기대가 느껴졌다.
– 여자가 무슨 기사를!
항상 무시와 방해만 받아 왔던 자신의 꿈.
지금은 그것을 응원하고 기대해 주는 사람이 있다.
그것만으로도 힘을 낼 이유는 충분했으니까.
일주일 뒤.
로건은 체력 훈련이 끝난 뒤 철혈검 수련에 들어간 기사단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중에 유난히 체격이 작아 보이는 한 기사가 낑낑거리며 철혈검의 기본형을 배우는 모습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간 것이었다.
‘잘 적응하겠군.’
확연하게 부족한 체력임에도 일주일간 악착같이 훈련에 따라붙고, 결국 단 한 번도 낙오하지 않았다.
은근히 기사들을 떠보니, 실력은 몰라도 근성만큼은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적어도 자신의 약혼자라고 마지못해 칭찬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당장은 몰라도 저런 모습을 꾸준히 보여 준다면 에일렌은 결국 기사단에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만들어 갈 맥라인에 새로운 가능성을 더해 주는 지표가 될 것이다.
‘물론 이번 고비, 아니 기회를 잘 살려야 그 가능성도 피어날 수 있겠지.’
이제부터는 그 기회를 잡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할 때였다.
* * *
[병사 훈련 진행 보고서 – 카이솔론] [식량 및 무기 관리 보고서(특. 석궁) – 루겔 하이스] [회계 보고(필립 상단 관련) – 드웨인 필스너]밤의 명상에서 깨어난 로건은 어젯밤까지 검토하던 보고서를 손에 들었다.
‘서류상으로는 문제없어. 이제 실제로 확인만 하면 되겠군.’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아버지와 가신들은 충분히 제 역할을 잘해 준 것 같았다.
이제는 직접 확인하면서 부족한 점을 채우고 정리하며 때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로건은 머릿속으로 확인해야 할 일들을 되새기며 자신의 방을 나섰다.
여명이 서서히 밝아 오기 시작하는 시간.
상쾌한 공기가 기분을 차분하게 환기해 주는데.
빠르게 옮겨지던 발걸음이 어느 순간 느려지며 방향을 바꾸었다.
익숙하게 느껴지는 기세, 친근한 느낌이 그의 감각을 잡아끈 것이었다.
그리고 도착한 관저 뒤편의 연무장.
파아아앙!
뭉툭한 수련용 철검이 허공을 찢어 내며 만들어 낸 파공음이 가장 먼저 들렸다.
서서히 비추기 시작한 아침 햇살을 느끼지도 못하는 듯 굳은 표정으로 연신 검을 휘두르는 자.
성인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있고, 소년이라고 보기에는 마냥 앳되지만은 않은 얼굴.
자신과 같은 붉은 머리의 붉은 눈을 한 익숙한 얼굴의 청년이 비지땀을 흘리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로니안?’
땀에 푹 젖은 무복을 보니, 이제 막 시작한 것 같지도 않았다.
‘해가 뜨기도 전부터 검술 수련이라.’
분명 자신이 정해 준 훈련 스케줄은 아니었다.
‘그것만 해도 꽤 빡빡할 텐데.’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만 못하다.
특히나 그것이 육체를 사용하는 무술 수련이라면 이보다 확고한 진리는 없다.
한계 이상으로 몸을 혹사하면 결국 몸만 상하게 될 뿐이다.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로건은 다소 굳은 표정으로 동생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이를 악문 동생의 모습에서 알 수 없는 데자뷔가 느껴졌다.
언젠가 이 비슷한 광경을 보았던 것 같은 느낌.
하지만 자신 앞에서는 언제나 웃고 있던 동생이 저런 표정을 보여 준 적은 없었다.
적어도 현생에서는…….
‘아!’
그 순간, 머릿속에서 맴돌던 기억 하나가 불현듯 떠올랐다.
전생에 동생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의 기억.
수도 그랑의 서문을 가로막고, 미친 듯이 적을 베어 넘기던 오러유저 로니안 맥라인의 모습.
비참하게 쓰러지기 직전, 너무나도 고고하게 빛나던 전사의 절실한 얼굴.
그 모습이 지금 로니안의 모습과 겹쳐 보이고 있었다.
‘지금 저 녀석이 왜?’
미래의 위기는커녕, 당장 벌어질 전쟁에 관한 것도 말한 적 없었다.
녀석은 열심히 성장해 전생처럼 오러유저가 되면 그뿐.
그 이상의 부담을 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랬기에 로니안의 비장함이 더욱 이상하게 느껴졌다.
탁.
“어, 형님!”
무심결에 낸 발걸음 소리에 수련에 심취해 있던 녀석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밝아지는 표정.
바로 직전까지의 굳은 얼굴은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환하게 웃는 표정의 동생이 그에게 다가왔다.
“도대체 언제부터 수련을 한 거냐. 너무 이른 시간인데.”
“하하. 잠이 안 와서요.”
“무리한 수련은 독이다. 알고 있지?”
“예. 알고 있어요, 형님.”
“그런 녀석이…….”
로건의 시선이 동생의 손을 향했다.
철검을 움켜쥔 오른손에서 흐른 피가 검병을 타고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손아귀가 터질 때까지 검을 휘둘러?”
“어?!”
그 말에 깜짝 놀란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바라본 동생이 바로 오른손을 등 뒤로 돌렸다.
마치 눈에만 보이지 않으면 없는 일로 생각하는 조류와도 같은 멍청한 행동이었다.
손아귀가 터져 피가 흐르는데 통증도 못 느낄 정도라니.
‘심각하다.’
로건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죄, 죄송해요. 형님.”
“나한테 죄송할 게 아니라…… 하아. 아니, 아니다. 그렇게까지 수련에 집중할 만한 이유가 있어? 답답한 일이라도 있는 거야?”
“……아뇨. 특별히 그런 건 없습니다.”
대놓고 시선을 피하는 것이, 거짓말이라는 게 확 티가 났다.
이제 곧 열일곱 살이 되는 녀석이라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순진하기 그지없는 녀석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그저 바라만 보고 있자.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인 녀석의 입에서 다른 말이 나왔다.
“제가 가문에서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음?”
“형님만큼은 아니더라도 저 역시 가문에 필요한 사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 것 같다?”
“네. 빅토르 녀석은 기사로서 기본 임무라도 하는데, 저는 영주 아들이랍시고 임무 같은 것도 없구요.”
“그건…….”
“그래서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열심히 하는 것뿐입니다.”
“…….”
이 상황에서 로건이 특별히 해 줄 말은 없었다.
그저 여느 때와 같은 당부를 반복할 뿐.
“그래. 그래도 몸은 챙겨 가면서 수련해야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나친 것은 모자라니만 못하다. 특히나 수련은.”
“예. 명심할게요, 형님.”
왜인지 안심이 되지 않았지만, 로건은 더 부언하지 않았다.
“그래. 믿는다.”
그저 동생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돌아서서 연무장을 나왔다.
굳이 자신이 크게 파고들 이유는 없었다.
전생에서 망가진 가문을 홀로 이끌어 나가면서도 제국의 공세에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버텼던 녀석이다.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원래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자질을 가진 녀석.
말하지 않은 힘든 일이 있다고 한들 잘 이겨 낼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녀석의 시야에서 멀어지자마자 흘러나온 동생의 혼잣말이 귓속을 파고드는 순간.
로건은 절로 발걸음을 다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형님은 어느새 너무 멀리 가셨고, 빅토르 녀석은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바짝 쫓아와요. 부족한 저는 그저 미친 듯이 뛰는 방법밖에 모르겠네요.”
들리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을 말과 이어지는 파공성.
찢어진 손아귀로 다시 검을 휘두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런…….’
녀석과 빅토르를 수련 파트너로 붙여 놓은 것은 서로 자극을 받으라는 뜻에서였다.
그런데 그것이 과도하게 맞아떨어져 동생이 저토록 무리하고 있으니, 로건으로선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순하게만 생각했던 동생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강한 투쟁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 돌아가 말리려는 순간, 또 다른 생각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 녀석 얼굴…….’
전생에 오러유저의 경지에 올랐던 얼굴이 지금과 흡사했었다.
초인, 인간의 한계를 넘어 초능을 얻었다 평해지는 이들.
그들의 노력을 단순히 효율의 논리로 말할 수 있을까.
가문이 사실상 망했던 전생.
그 안에서 스승도 없이 오러유저가 되었던 동생이 누구나 아는 효율적인 노력만 했을까?
왠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한 번쯤 실수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어. 그때 도와줘도 늦지 않아.’
지금은 동생의 노력과 의지를 지켜보자.
로건은 자꾸만 돌아가는 시선을 거두며 애써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