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88)
88화
“그런데 너희, 따로 만나기는 하는 거냐?”
병력 훈련에 관한 보고서를 분주하게 읽고 있던 어느 날.
갑작스레 날아든 패드릭의 질문에 로건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예?”
“며느, 흠. 흠. 공녀가 기사단 훈련에 진심이라는 것도 알겠고, 네가 바쁘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식은 안 올렸어도 명색이 약혼자들인데 서로 데면데면하게 할 일만 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아……. 하하. 그, 그렇긴 하네요. 일이 정리되는 대로 한 번 찾아가 봐야…….”
로건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말을 얼버무리며 다시 책상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너에게 업무를 떠넘겼다고 해도, 아들의 청춘사업까지 막아서고 싶지는 않구나. 오늘은 내가 할 테니 이만 가서 쉬어라.”
“예?”
“에일렌 공녀와 시간을 좀 보내도록 해. 공녀도 오늘은 비번이다.”
“……어, 아버지. 그게.”
“억지로 맺어 준 사이도 아니고, 너희들이 좋아서 약혼까지 해 놓고 빼기는. 빨리 다녀와!”
쾅!
억지로 자신을 쫓아내고는 문까지 닫아 버린 아버지.
로건은 얼떨떨한 눈으로 굳게 닫힌 집무실의 문을 바라보다가 이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전이 멀지 않은 시기, 한가롭게 데이트나 할 시간은 없었지만.
‘저리 고집을 피우시니.’
적어도 하루 정도는 뜻을 따라 드려야 할 것 같았다.
돌아서는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가벼워졌지만, 로건은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
* * *
“아가씨!”
“내가 절대로 깨우지 말라고 했지! 난 오늘 하루 침대랑 한 몸이야!”
에일렌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라일라에게 엄포를 놓은 뒤, 더욱 침대 속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라일라가 곱게 물러나지 않았다.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니에요! 로건 공자께서 찾아오셨어요!”
“뭐?!”
정신이 번쩍 드는 소리.
영혼에 눌러앉은 것 같던 수마(睡魔)는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에일렌은 자신도 모르게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로, 로건 공자가 왜?!”
“아이참, 아가씨는! 그거야 뻔하죠! 데이트잖아요! 데이트! 전 그동안 왜 안 찾아오나 걱정했다구요!”
라일라의 답답하다는 듯한 한마디가 그녀의 얼굴을 붉게 달아오르게 했다.
‘데, 데이트?’
구혼자라는 놈들을 몇 번 패 버린 이후로 자신과는 평생 인연이 없을 거로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랬기에 더욱 당황한 나머지, 에일렌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뭐 하세요! 일단 씻으세요! 물 받아 놨어요!”
“어, 어? 그, 그래.”
“입을 옷은 제가 준비해 놓을게요. 드레스를 드디어 꺼내 보겠네.”
“드, 드레스?”
“그럼 데이트에 갑옷 입고 나가시려고요? 얼른 씻기나 하세요!”
에일렌은 라일라의 기묘한 박력에 떠밀려 속절없이 욕실로 내몰리고 말았다.
로건이 에일렌을 만나게 된 것은 그로부터 무려 세 시간이 지난 후였다.
“느, 늦어서 죄송해요. 공자님. 많이 기다리셨죠?”
“괜찮습…….”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리던 로건은 눈에 들어온 에일렌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훤히 드러난 어깨 위로 살짝 걸쳐진 도톰한 숄, 그 아래 잘록한 허리선을 강조하면서 물결치듯 흘러내리는 꽃무늬 드레스.
투명한 자수정 목걸이와 색을 맞춘 귀걸이가 그녀의 붉은 머리칼과 어우러져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완성했다.
‘허……!’
처음 만났던 맞선 자리 이후로 작정하고 꾸민 에일렌의 모습을 처음 보는 로건은 순간적으로 얼어붙고 말았다.
그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자, 에일렌의 얼굴이 급격히 흐려졌다.
“이상……한가요? 역시 이런 복장은 좀 불편해서…….”
“아니요. 절대 아닙니다.”
“예?”
“의외의 모습이라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공녀. 아름답습니다. 아주.”
단호한 부인에 이어진 솔직한 칭찬.
에일렌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 모습에 로건 역시 살짝 미소를 머금었지만, 이어진 로건의 말은 그리 적합하지 못했다.
“그런데 좀 춥지 않겠습니까? 한겨울인데 숄 하나로는 조금 무리…….”
“아니! 추, 충분해요!”
직전과 다르게 미소가 조금 경직된 에일렌이 쌩하니 돌아섰다.
다그닥. 다그닥.
4마리의 말이 이끄는 화려한 사두마차.
맥라인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고급스러운 마차의 등장은 영지민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무슨 마차야?
“영주님 마차겠지.”
“그래도 문장이 없는데…….”
“나! 나 봤어. 전에 대공자님 약혼녀…….”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하고 멀리서 웅성거리는 사람들.
마차의 창문 너머로 그런 풍경을 훑어보는 에일렌의 어깨에는 로건의 붉은 망토가 둘려 있었다.
“생각해 보니 막 도착했을 때 이후로 영지에 대한 설명을 안 해드린 것 같아 타운 안내라도 해 드리려고 했는데……. 아무리 마차 안에 있더라도 좀 추울 것 같군요. 그냥 들어가서 차나 한잔할까요?”
새하얗게 내리고 있는 눈.
보기에는 좋았지만, 얇은 드레스와 숄 위에 망토 하나 더해졌다고 밖을 돌아다닐 만한 추위는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에일렌의 대답은 확고했다.
“아니. 전 괜찮아요. 정말로요.”
살짝 홍조 어린 안색이 정말로 나쁘지 않아 보이기도 했고, 당사자가 괜찮다는데 돌아가자 우기기도 좀 뭐했다.
뭐 포스유저니까 괜찮겠지.
로건은 그렇게 생각하며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가시죠. 하나하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저기 저쪽이 하수도 시설입니다. 아, 냄새도 나고 하니 가까이 가시지는 마시죠. 집 안에서 나온 오물을 자연스레 외부로 배출시키는 구조입니다.”
“확실히 그랑에 비해서는 냄새가 훨씬 덜 나요. 단순히 지은 지 얼마 안 된 곳이라서 그런 줄 알았는데.”
“대신 하수도 시설에서 그만큼 더 냄새가 날 겁니다. 물론 주민들 위생 상태는 훨씬 낫지요.”
“확실히 웃는 사람들이 많네요.”
에일렌은 여전히 멀찌감치 떨어져서 자신들을 힐끔대는 영지민들을 바라보았다.
전반적으로 초라한 옷차림인 것은 그랑의 평민들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로건의 설명을 들어서인지 좀 더 깨끗한 듯한 얼굴들 위로 옅은 미소가 떠올라 있는 것이 보였다.
다만 그것과는 별도로…….
‘이게 데이트……인가?’
에일렌은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여건만 된다면…….”
그가 무언가 열정적으로 설명을 해 주고 있긴 한데 딱히 가슴에 와 닿지는 않았다.
이럴 거면 그냥 자신에게 안내인만 붙여 줬어도 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
어깨에 둘러 준 망토는 따뜻했지만, 그뿐.
그 온기만큼 마음은 오히려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러자 점차 실망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 것에 스스로 화들짝 놀랐다.
‘바보 같아…….’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져 생긴 관계에서 도대체 뭘 기대한 건지.
괜히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어깨의 망토를 움켜쥐는데.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그녀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재미……없으시죠? 죄송합니다. 제가 아는 게 이런 것뿐이라…….”
“아니, 아니에요! 타운 모습도 신기하고. 어, 또…….”
황급히 손사래를 쳐 보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나오는 말이 어색했다.
살짝 굳은 로건의 표정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도무지 이 상황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얘진 에일렌은 자신이 한 말도 수습하지 못한 채 그저 시선을 떨굴 뿐이었다.
‘이런…….’
로건 역시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전생에서 오십이 되도록 그가 어울려 본 여자라고는 남자보다 험악한 제국의 여자 용병들, 아니면 자신의 옆구리에 칼침을 놓았던 제국의 여기사뿐이었다.
‘그걸 어울렸다고 볼 수 있다면 말이지만.’
스스로 쓴웃음이 나올 정도로 빈약한 경험뿐이었으니, 고개를 숙인 에일렌을 향해 나오는 말 또한 그럴듯할 리 없었다.
“그럼 그냥 말이나 타고 달리실까요? 답답한 마차보다는 재밌을 것 같은데.”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자에게 하는 말 하고는.
뱉어 놓고도 어이가 없어 스스로 한숨을 내쉬는데.
“예, 예! 좋아요!”
예상 외로 상대의 반응이 좋았다.
* * *
“저기 산 초입까지 경주해요! 지는 사람이 소원, 아니 부탁 들어주기!”
“예?”
“그럼 시작!”
히이이잉!
두두두두.
고운 드레스를 대신 무복으로 갈아입고 와서는 자기 멋대로 말을 내뱉은 뒤, 또 멋대로 질주하는 에일렌의 뒷모습.
확실히 드레스를 입었던 모습도 예뻤지만, 간편한 무복 차림으로 질주하는 에일렌의 모습이 아무래도 훨씬 활기차 보이고 더 어울리는 것 같았다.
‘진작 이랬어야 했나?’
피식 웃은 로건이 에일렌이 달려간 길을 따라 한 박자 늦게 말을 달렸다.
‘역시 드레스 입고 얌전 떠는 건 내 성격에 안 맞아.’
에일렌은 답답한 마음이 확 날아가는 것을 느끼며 시원하게 웃었다.
훈련이 아닌 휴식의 의미로 말을 타 보는 것도 얼마 만인지.
온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을 느끼며 환호하는데.
“그럼, 실례!”
쌔애애앵!
두두두두.
황금빛 포스가 은은하게 넘실거리는 말이 그녀의 옆을 쏜살같이 지나쳐 갔다.
‘뭐야? 포스?’
순간적으로 멍해진 그녀가 어처구니가 없어 웃다가.
“치사하게! 난 그거 아직 못 한다고요!”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황급히 그 뒤를 쫓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차를 타고 오랜 시간을 함께했을 때보다, 이 짧은 순간 스쳐 지나간 향기가 더욱 가슴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에일렌의 얼굴에는 줄곧 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히이이잉!
“워워. 자! 제가 이겼습니다. 확실하죠?”
“치사하게 포스 쓰는 게 어딨어요!”
“여기 있습니다.”
로건이 뻔뻔한 표정으로 가슴을 내밀자, 그를 쏘아붙이던 에일렌도 피식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본 로건 역시 간만에 속 시원하게 웃었다.
“그럼 부탁하실 건요?”
“예?”
“이긴 사람 부탁 들어주기로 했잖아요.”
“아……, 하하. 그게…….”
“뭐야. 아무 목적도 없이 그냥 절 이기겠다고 그렇게 죽어라 달린 거예요?”
“아! 생각해 보니 있습니다.”
“뭔데요?”
두근.
부탁을 받는 사람이 오히려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는데.
“슬슬 배고픈데 식사하시죠.”
“……뭐에요, 그게!!”
“승자의 부탁이요.”
“아. 진짜……!”
“어? 뭐 기대한 거라도 있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당황하는 모습에 로건이 다시 웃음을 터트리자, 머쓱함에 피식거리던 에일렌 역시 이내 따라 웃었다.
라일라가 고생해서 싸 준 도시락이 유난히 맛있게 느껴지던 오후.
한결 가까워진 두 사람의 질주는 오후 늦도록 계속되다가 타운에서 멀리 떨어진 맥라인 성을 코앞에 두고서야 잠시 멈춰졌다.
히이이잉!
“더 가면 병사들 훈련지입니다. 다른 곳으로 한 바퀴 돌죠.”
“그냥 보러 가면 안 돼요?”
“예? 뭐, 그래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제가 또 재미없는 설명이나 할까 봐서요.”
에일렌은 스스로 재미없다고 말하는 로건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저도 기사에요! 병사 훈련이라면 확실히 봐 둬야죠. 혼자 싸울 것도 아닌데.”
“정 그러시다면야.”
로건 역시 웃으며 답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천 명에 달하는 석궁기마대의 훈련 장면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쏴!”
파바바박.
두두두두.
구령과 함께 쏟아지는 쿼렐.
쉴 새 없이 교차하는 말과 기수들.
총교관 카이의 구령에 맞춰 톱니바퀴 움직이듯 정교하게 움직이는 병사들의 모습은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과연 놀랍군요. 방심하면 기사도 당하겠어요.”
에일렌은 말로만 들었던 석궁기마병의 위용에 진심으로 놀랐다.
그 표정을 읽은 로건은 미소와 함께 답해 주었다.
“그러라고 만든 거니까요.”
“저 석궁도 공자님이 개발한 거라고 하던데요?”
“저야 아이디어만 줬고 하마르가 만들었죠.”
“타운도 공자님 아이디어라고 들었어요.”
“하하. 예. 딱 아이디어만.”
“여기 황무지를 평야로 만들었다는 말도 있구요.”
“아, 예. 어쩌다 보니…….”
계속되는 칭찬에 로건이 뻘쭘한 표정으로 웃는데.
“대단하세요. 그런데 이렇게 또 병사도 훈련시키고, 기사 훈련도 하시는 건 역시나 또 전쟁을 생각하시는 건가요?”
“…….”
이어진 물음에는 줄곧 웃고 있던 로건의 표정도 살짝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역시…… 괜한 말인가요? 그냥 소문이 돌길래…….”
추진하는 일이 있다 보니 그런 소문이 안 돌 수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태껏 그 누구도 그에게 직접적으로 묻지 않았던 말이었기에, 로건은 솔직히 조금 당황했다.
“아니, 아닙니다. 음…… 뭐라고 해야 하나. 아, 전 가문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겁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전쟁을 할 수도 있고, 그러기 위해서 또 전쟁을 피할 때도 있을 겁니다.”
“글쎄요. 피할 성격은 아니신 것 같은데요.”
“글쎄요…….”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지만, 못 피하니 싸우는 거지요.
로건이 목구멍까지 솟아오른 소리를 애써 삼키며 쓴웃음을 짓자, 에일렌은 그런 로건을 가만히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맥라인에서 몇 달간 지내면서 그녀가 봐 온 이 영지는 정말 굉장했다.
수도에 왜 소문이 나지 않았는지 이상할 정도로 번성한 땅과 강력한 병력.
그리고 연사 석궁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무기까지.
수도 근처에서도 보지 못한 발전된 도시, 맥라인 타운과 그 영지민들의 웃는 얼굴.
그 모든 것을 만들어 낸 것이 이 눈앞의 로건 대공자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럼에도 그는 끝없이 일에 매진하고 틈이 나면 수련을 했다.
잠도 자지 않는다는 믿기지 않는 소문까지 있을 정도였다.
‘왠지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 같아. 가문을 이토록 발전시켰는데…… 왜?’
생각해 보면 좀 전에 둘이서 말을 달릴 때처럼 환하게 웃는 모습은 좀처럼 볼 수가 없었다.
저 사람은 대체 뭘 보고 있는 걸까.
조금은 더 저 사람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가능하면 저 곤란한 표정보다는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었…….
‘아냐! 그건 아니고!’
흠. 흠.
“제가 괜한 질문을 했네요. 돌아가요. 제가 근사한 저녁 대접할게요.”
“예?”
물론 그 근사한 저녁을 위해 고생해야 할 것은 라일라였고.
그 라일라가 기껏 입혀 놓은 예쁜 드레스 대신 무복을 입고 나타난 에일렌을 보고 눈을 까뒤집는 바람에 저녁 약속은 다음으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구실로, 기사단 훈련을 쉬는 날에는 로건과 에일렌이 말을 타고 영지를 질주하는 모습이 맥라인의 일상처럼 여겨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