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9)
9화아무리 그란디아 왕국이 큰 나라가 아니라지만, 서남부 끄트머리인 맥라인 영지에서 로건의 1차 목적지인 서부 끝의 카일 영지까지는 준마를 타고 쉬지 않고 달려도 삼사일은 걸리는 거리였다.
그러니 길바닥에서 며칠 묵는 것은 필수라고 할 수 있었다.
틱.
로건의 손짓에 따라 움직인 포스가 순간적으로 열기를 뿜어내며 모닥불에 불을 붙였다.
마법사처럼 여러 속성으로 변환하지는 못하더라도 순간적인 열기 정도는 운용할 수 있었다.
물론 이 또한 포스 코어가 생긴 이후에 가능해진 재주였다.
‘그래. 이처럼 미래는 이미 변했어. 그러니 할 수 있다.’
타닥타닥.
로건은 모닥불이 타들어 가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밤하늘을 뒤덮은 별빛을 이불 삼아 풀잎을 끌어모아 만든 임시 침대에 누웠다.
노숙은 현생에서는 처음이었지만 전생에는 수도 없이 반복했던 익숙한 일이었다.
거기다 지금은 전생에 비하면 아주 쾌적한 상황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 시기 왕국도 좋은 점은 있어. 적어도 치안 측면에서는…….’
옆 나라인 제국만 해도 포스 유저가 포함된 강도단이 흔한데, 이 나라는 그런 일은 거의 없었다.
그것은 기사에 대한 과한 환상을 가진 전통문화와 그들에 대한 강력한 통제를 원하는 귀족들의 권위 의식이 합쳐져 만들어 낸 결과였다.
이미 평범한 하급 기사 수준을 벗어난 로건이라면, 적어도 관도를 따라 움직일 때 신변을 걱정할 일은 없었다.
어설픈 강도들이라면 로건의 갑옷에 새겨진 귀족의 문양만 봐도 접근조차 안 할 테니까.
하지만 몸이 편안할지라도 마음마저 그래서는 안 된다.
‘쓸데없는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야. 정신 차리자. 우선 영지 문제부터…….’
맥라인 가문은 가주의 처가인 카이로스 가문에 대한 재정적 의존도가 7할이 넘었다.
파혼을 통해 얻어 낸 300만 골드를 모조리 빚을 갚는데 투자해도 카이로스의 지원이 없다면 영지를 유지할 수 없었다.
문제는 지금 맥라인 영지의 사정상 근본적인 해결책이 나오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재정 자립을 이루고 영지 병력을 늘려야 한다는 거지? 망할.’
이백여 년 전만 해도 맥라인 가문은 이웃의 테스론 자작령을 비롯하여 테스론 서북쪽의 실반 자작령, 그 이남의 페레타 자작령, 그 너머의 비프로스 평야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포함하는 백작 가문이었다.
그란디아 왕국 서남부 지역 일대의 패자이자, 로드(Lord)로 추앙받았다.
하지만 4대 전 종조부 때부터 현 가주 패드릭 맥라인 이전까지 3대 동안 이어진 조상들의 크고 아름다운 삽질과 패악질로 작위는 강등되고, 영지의 규모는 말도 못 할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가신이었던 이들은 영지를 갈라 독립하여 동격, 혹은 더 높은 지위로 올라갔다.
결국, 작위 몰수에 관한 이야기까지 오가게 되었고 당시에 현 가주인 패드릭 맥라인이 상급 기사가 되지 않았으면 그대로 작위가 몰수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미 상당히 늦어 버린 일이었다.
맥라인 평야라 불리던 왕국에서 손꼽히던 곡물 창고는 가장 강대한 가신의 손에 넘어갔다.
그 외의 쓸 만한 땅 역시 다른 가신들이 나눠 가지고, 쫓겨나듯 몰려온 곳이 바로 이곳, 남부 산맥 일대에 근접한 거칠고 메마른 땅이었다.
원래 선산이 있는 가문의 시발점이라지만, 맥라인 백작 가문이 된 후로는 남부 산맥을 내려오는 몬스터들을 막기 위한 요새에 불과한 곳이었다.
마땅한 특산물조차 없으며 일반적으로 높은 산맥에 인접한 영지에 흔하다는 구리 광산조차 없었다.
그렇기에 자체적으로 생산되는 농산물도 적고, 가끔 산맥을 내려오는 몬스터들을 막기 위해 병력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재정이 벅찬 상황이었다.
정확히는 카이로스 가문의 지원 없이는 유지조차 힘든 것이 현 맥라인 가문의 상태였다.
‘이대로라면 영지전을 이기더라도 다시 카이로스에 손을 내밀어야 해.’
그 근본적인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무엇을 하던 우선 큰돈이 필요했다.
로건이 지금 가지고 있는 돈 정도는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큰돈이.
그래서 로건은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을 훨씬 불릴 생각이었다.
물론 그에게 특별한 상재 따위는 없었으나 자신이 잘하지 못한다면 잘하는 사람에게 맡기면 그만이었다.
로건은 미래에 그 능력과 신용이 검증될 사람을 알고 있었다.
‘가문의 지속적인 수입이 되도록 해야 한다.’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을 훨씬 불릴 방안과 그 돈을 지속적으로 관리해서 더욱 이득을 부풀릴 수 있는 인재.
그 둘 모두가 지금 가고자 하는 왕국 최대의 교역 도시 카일에 있었다.
‘그리고 영지전을 위해 준비해야 할 물건들도.’
여러모로 지금 시점에 카일로 가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었고, 그곳에서 그가 가진 자금의 절반 이상을 투자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필립을 스카우트할 때 필요한 돈과 그것들의 구매 비용. 150만 이상도 투자할 가치가 있어.’
드웨인이 알았다면 거품을 물 만한 생각이었다.
* * *
“최대의 교역 도시 카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손바닥만 한 은빛 신분패에서 불꽃 문양을 확인한 경비병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서 경례를 올렸다.
그런 경비병을 지나쳐 성문을 들어서니 초입부터 도시의 시끄러운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여기가 바로…….’
“여기 제국산 비단으로 만든 속옷이 단돈 10골드~!”
“북부에서 유명한 가죽입니다. 현재 그랑에서 대 유행 중인…….”
“남부산 신선한 과일…….”
맥라인 영지가 서남부의 촌구석이라는 것을 체감하게 해 주는 번화한 거리의 모습에 로건은 살짝 감탄을 흘렸다.
맥라인에서 성은 기술자들이나 특별한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고, 대부분의 영지민은 성 밖의 개척 마을에서 살았다.
이렇게 복잡한 성내의 풍경은 로건에게도 오랜만이었다. 아니, 처음이라고 해야 할까.
불야성이라 불리는 제국의 교역 도시에도 가 본 적이 있는 로건이었지만 그거야 전생의 이야기니까.
‘뭐 어쨌거나 지금은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야.’
이번 생에선 처음 보는 대도시의 풍경을 감상할 새도 없이, 로건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관청에서 세 번째 골목. 카일의 밤.’
전생의 기억과 다르지 않아 다행이었다.
선술집과 여관을 겸하는 ‘카일의 밤’은 시끌벅적한 중앙 거리에서 벗어나 조금은 구석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규모만큼은 중앙 거리의 어떤 여관보다 거대한, 5층짜리 저택이었다.
귀족의 살롱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대한 건물에는 ‘카일의 밤 – 여관’이라는 명패가 딱 붙어 있었다.
로건은 망설이지 않고 안으로 들어섰다.
덜컹.
“주인장! 여기 맥주 하나 더!”
“여기 멧돼지 반 마리 하나요!”
문을 열자마자 왁자지껄한 소리가 울렸다.
여관의 1층이자 선술집은 대낮부터 술에 취한 다양한 인간 군상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여긴 여전하군.’
이곳은 주로 거친 용병들이 단체로 묶는 여관으로, 일반적인 여관보다 훨씬 요란하고 시끄러운 숙소였다.
“저기 언니, 오늘 시간 어떻게 돼? 많이 비싸?”
짝!
“이 쌍놈이 죽고 싶나!”
“아니, 이년이……!”
와장창창.
“우하하하! 그래. 싸워라, 싸워!”
“진 사람이 비품 물어내기입니다! 싫으면 싸우지 마세요!”
“우와아아! 난 털보한테 건다!”
정신없이 소란스러운 여관의 1층.
구수한 고기 내음과 시원한 술 냄새, 그리고 그 좋은 냄새들에 가려진 쿰쿰함 암내 사이를 뚫고 로건은 곧장 카운터로 향했다.
바를 겸하고 있는 카운터에서 사람 좋아 보이는 배불뚝이 중년 사내가 웃으며 새 손님을 반겼다.
“어서 옵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숙박? 술? 아니면 음식으로 드릴까?”
“일단 삼일 치 숙박. 아침 겸해서.”
“1박에 5골드. 식사 비용은 따로. 괜찮으십니까?”
“좋소. 그리고…….”
로건이 굳이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이 여관을 찾아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용병들이 이용하는 여관 주인답게 영지 소식에 빠삭하니까.’
주인은 카일에 존재하는 모든 길드나 집단과 조금씩은 연결점이 있었다.
“작은 부탁이 있는데.”
“예? 아 뭐,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야.”
주인의 대답은 불퉁했지만.
탁.
5골드짜리 금화 하나가 올려지는 순간, 태도가 확 바뀌었다.
“뭐든지 말씀하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도와드리겠습니다.”
“내가 이곳이 초행길인데, 찾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말이오.”
“아. 예, 그것이라면 제가 전문이죠.”
카일 영지에 온 주요 목적은 한 사람을 찾는 것과 한 가지 의뢰를 하는 것이었다.
의뢰는 언제든 할 수 있으니 사람부터 찾는 것이 나을 듯싶었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 누군가를 찾아내는 데에는 이곳을 찾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었다.
* * * 대륙 최강의 국가, 아레스 제국.
강력한 중앙집권제 국가이자 실력 지상주의의 나라.
실력만 있다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관리가 될 수 있었으며, 권력과 부를 누릴 수 있는 나라였다.
심지어 그 자격은 제국 출신이 아닌 외국인에게도 주어졌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제국 10대 거상으로 꼽히며 ‘황금충’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던 그란디아 왕국 출신의 필립 클로드였다.
그는 제국을 움직이는 거상 중의 한 명이자 그란디아 왕국의 유민들에게는 매국노라 불리던 대륙 최고, 최대의 전쟁 상인이었다.
면전에서는 황금 상인이라 불리고 그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황금충이라고 불리던 자이기도 했다.
그렇게 욕을 먹으면서도 고향의 유민들을 지원했고, 끝내는 황금과 권력을 동원하여 그란디아 자치령까지 만들어 낸 기적의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우리 독립군에도 몰래 자금 지원을 했었지.’
그의 고향이자 젊은 시절을 보낸 곳이 그란디아 왕국의 카일 영지라는 것을 로건은 알고 있었다.
더불어 그의 정치적 행보와 상관없이 그 실력과 신용은 전 대륙에 통할 정도로 완벽한 상인이었다는 점 또한 똑똑히 기억했다.
‘그게…… 정말 저 녀석인가?’
로건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그 청년을 향해 다가갔다.
“더러운 놈들…… 앞으로 어떻게…… 젠장.”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는 또 눈물만 나올 것 같아 필립은 고개를 들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맑기만 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우울함을 더했다.
세상에 하루아침에 사기를 당해 폭삭 망한 상단의 이야기는 흔했지만, 자신이 그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상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마치 혼자만 다른 세상에 있는 느낌이었다.
‘그냥 죽어 버릴까…….’
지난 한 달간 수도 없이 했던 고민을 떠올린 필립이 피식 웃으며 다시 고개를 떨궜다.
죽을 생각이면 벌써 죽고도 남았을 것이다.
자신은 죽을 용기마저도 없는 겁쟁이였다.
답답한 마음에 무작정 배회라도 할까 했지만, 막막한 절망감에 도통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흠, 흠. 실례합니다. 혹시 필립 클로드 씨 맞으십니까?”
필립의 귓가에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상대를 살펴보니 붉은 머리에 붉은 눈을 가진 상당히 특이한 생김새의 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을 주시하는 붉은 눈동자가 무언가 간절한 열망을 담아 이글거리고 있었다.
낡은 하프 플레이트 갑옷과 각반, 그 위에 묻은 흙먼지들이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시선이었다.
“네, 그렇습니다만…… 누구신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그 강렬한 시선이 한층 더 강해졌다.
“아, 맞으시구나. 듣던 대로 멋진 눈동자를 가지고 계시네요.”
전혀 멋지다고는 할 수 없는 특이한 회색 눈동자를 칭찬하며 환하게 웃은 청년이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필립은 본능적으로 주춤 물러섰다.
그 얼굴에 담긴 진득한 감정은 상인인 필립이 수도 없이 봐 왔던 감정이었다.
그것은 바로 탐욕이었다.
초면인 사람에게선 좀처럼 보기 힘든 그 감정이 불길한 상상을 부추겼다.
필립에게 유일하게 남은 작은 상가 건물을 매각해도 빚을 갚을 수 없다는 것은 확실했다.
결국 노예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기는 했지만…….
– 회색 눈동자는 특이하잖아. 가격이 더 나가겠지. 거, 왜 있잖아…….
우연히 들었던 사채꾼들의 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등장한 타이밍도 딱 그렇고, 이제 보니 놈의 낡은 장비도 딱 용병 깡패 같았다.
‘설마……?’
필립은 속으로 부디 그것만을 아니기를 기도했다.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존엄이 손상될 것 같은 불길한 기분이었다.
필립이 무의식적으로 찢어진 옷깃을 추스르며 한껏 몸을 움츠렸다.
새빨간 눈동자가 전신을 더듬는 것 같이 느껴져 소름이 끼쳤다.
“무, 무슨 일이시죠? 아직 상환일은 안됐는데요? 사, 상가 매각 대금은 3일 후에나 들어오니 그때나 다시 오시죠.”
“아 저는 빚을 받으러 온 게 아니라…….”
“혹시나 노예가 되더라도 절대, 절대로 그런 일은 안 할 겁니다.”
“예?”
“저는 글을 읽고 쓸 줄 압니다. 상계의 지식도 있지요. 노예가 되더라도 충분히 ‘다른 쪽’으로 쓸모가 있을 겁니다. 절대 ‘그쪽’ 일은 안 할 겁니다.”
“지금 무슨 말을…….”
“아, 아무튼 아직 매각 대금도 안 들어왔다니까요! 돌아가 주세요!”
필립이 마구 손을 내저으며 버럭 소리를 지르자 눈앞의 청년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돈을 받으러 온 사람이 아니라 돈을 투자하러 온 사람입니다.”
“예?”
필립은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당황스러웠다.
“……저에게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망한 상단에요?”
“예. 그러니까 더 투자하기 쉽겠죠.”
당당한 태도. 자신감 어린 미소.
붉은 눈동자에 어린 열기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와닿았다.
필립은 그제야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냥 미친 새끼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