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94)
94화 ‘빌어먹을. 어디서 저런 괴물이…….’
제롬은 적 영주의 검에서 솟구친 포스블레이드를 목격하는 순간까지는 그래도 투지를 불태웠다.
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저 황금빛 일격 앞에서는 도저히 투지조차 나오지 않았다.
겉으로 느껴지는 기세는 자신과 비슷한 경지 같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투지가 사라진 자리로 절망감과 무력함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것이 가뜩이나 밀리던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결국.
푸우우욱!
“커, 커흑.”
붉은색 포스블레이드가 동료 테레스의 목을 침과 동시에 자신의 심장을 꿰뚫었다.
‘주, 주군. 임무를 다하지 못해…….’
마음속으로나마 주군께 용서를 빌어 보려 했지만, 그에게는 그럴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촤아악!
패드릭이 포스블레이드로 그의 목을 베어 하늘 높이 들어 올렸으니까.
“적장을 잡았다!”
성벽 위에서 전장 전체로 울려 퍼지는 패드릭의 목소리.
전쟁 도중 한 진영의 지휘부가 모두 전멸했다.
정상적인 전투라면 이쯤에서 열세인 병력이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야 했다.
하지만 비프로스의 기사들은 달랐다.
“지휘권은 내가 이어받는다! 끝까지 항전하라! 곧 원군이 온다!”
성벽 아래, 피투성이로 달려온 기사 한 놈이 엉뚱한 소리를 지껄였다.
‘저런 개 같은…….’
그 모습에 로건은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원군이 오긴 뭘 온단 말인가.
원군이 온다면 이미 성벽 위에 있는 그들의 눈에 보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소리친 놈이 원래 지위가 있는 놈이었는지, 광기에 찬 적 기사의 외침은 남은 병력에게 헛된 용기를 불어넣었다.
연신 뒷걸음질 치던 발걸음이 일순간 멈추고.
“원군이 온다!”
“싸우자!”
아군의 허풍에 속은 불쌍한 병사들이 다시 한번 의지를 불태웠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로건의 속도 같이 불탔다.
일이 생각보다 더 귀찮게 된 이 상황에서 남은 답은 하나뿐이었다.
“싹 다 죽여 주마!”
어느 기사의 한마디가 만들어 낸 불필요한 혈전의 중심으로 로건이 뛰어들었다.
월등한 적 병력이 성을 노리고 돌진한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기습조를 이끌던 제릭은 희생을 감수하고 억지로 포위망을 돌파해 성으로 돌진했다.
그 때문에 22명이었던 기습조 기사들이 15명만 남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수비 병력에 일조하기엔 충분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 일념 하나로 뒤통수로 쏟아지는 쿼렐의 비를 무시하며 성벽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적은 생각보다 더욱 강력했다.
– 적장을 잡았다!
성벽 아래에 도착하자마자 들려온 목소리.
“혀, 형!”
성벽 위 기사의 손에 들린 피투성이 머리는 그에게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솟구친 울화와 분노에 그의 이성이 흐려졌다.
“지휘권은 내가 이어받는다! 끝까지 항전하라! 곧 원군이 온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아군의 항전을 유도했다.
불필요한 희생이 되리라는 건 자신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형을 죽인 놈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피해를 만들고 싶었다.
“제릭! 늦었어! 우리라도 본대에 합류하는 게 나아!”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한 동료 게일의 항의는 무시했다.
“너나 가라. 나는 여기서 끝장을 보겠다!”
“제릭!”
지휘권을 가진 선두 기사들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나자, 그들을 뒤따라온 기사들 역시 당황하며 주춤거렸다.
“쏴라!”
파바바박!
결정을 내릴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후방에서부터 쫓아온 놈들이 다시금 그 지겨운 쿼렐의 세례를 퍼부었다.
“가! 여기는 나만 남는다!”
기사들이 위험에 처하자 그나마 붙잡고 있던 마지막 이성으로 제릭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가긴 어딜 가!”
성벽 위에서 들려오는 고함과 함께 성벽에서 웬 놈이 쏜살같이 뛰어 내려왔다.
검을 감싼 황금빛 포스는 좀처럼 보기 힘든 이색적인 빛깔이었으나, 그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제릭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놈의 붉은 눈과 붉은 머리.
좀 전에 형의 머리를 들어 올렸던 자와 똑같은, 맥라인 가문 핏줄의 상징이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던 제릭의 이성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저놈!’
그들을 쫓아온 병사들이 뒤에서 쏟아 내는 쿼렐의 세례.
저 붉은 머리를 쫓아 뛰어내리는 수십 명의 기사.
그 모든 것들이 시야에서 지워졌다.
“모조리 죽여 주마! 맥라인!”
이미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버렸다.
광기에 몸을 온전히 맡긴 채, 남은 힘을 모두 끌어 올려 검에 담았다.
생애 어느 순간보다 강렬하게 피어오른, 이글거리는 붉은빛 포스가 그의 야성에 힘을 더했다.
하지만.
“죽는 건 네놈이다.”
촤아악.
공간을 압축하듯, 눈앞에 다가온 귀신같은 움직임.
서늘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싶은 순간.
제릭의 의식은 사라졌다.
스각.
미친놈의 마지막 발악에 자극을 받은 것인지, 남은 토모도 병력의 악에 받친 반항은 끝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어느 틈에 내려간 헤인켈이 성문을 열어 석궁기마병을 비롯한 맥라인의 보병들을 성에 들인 순간.
압도적인 수의 열세가 시야에 확연하게 들어오며, 그들은 항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비프로스 기사 네 명과 50여 명의 병사밖에 남지 않은 뒤였다.
반면에 맥라인의 희생은 성벽 위에서 죽은 기사 열네 명과 눈먼 화살에 죽은 병사 30여 명이 전부.
그야말로 압승이었다.
* * *
“우리가 승리했다!”
“우와아아아아!”
“맥라인 만세!”
아침에 시작한 전투가 석양이 지기도 전에 끝났다.
심지어 점심때까지는 제대로 된 충돌도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순식간에 결판이 난 것이었다.
그것도 압도적인 승리로 끝이 났으니, 병사들이 저리 환호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몇 시간에 걸친 전장 정리 후, 성내의 임시로 마련한 지휘부에 모인 수뇌부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전투와 승리가 가져다준 흥분에 표정이 상기된 이는 있을지언정, 마냥 웃고 있는 이는 없는 묘한 풍경이었다.
해가 지고 달과 별이 떠오른 뒤 시작된 이 회의의 첫마디에 그 모든 이유가 담겨 있었다.
“한고비는 넘었다만, 이제 비프로스 본성의 군대가 올 것이다. 다음 대책은 뭐지, 로건?”
패드릭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로건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로건의 입에서 나온 짤막한 대답은 그 시선에 어려 있던 기대를 당황으로 바꾸기에 충분했다.
“버티면 됩니다.”
“……뭐?”
패드릭이 모두를 대신해 되물어 봤지만.
“짧으면 하루, 늦어도 며칠 이상은 걸리지 않을 겁니다. 버티기만 하면 비프로스는 스스로 물러갈 것입니다.”
이어진 로건의 말에도 당혹스러움은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배가되기만 했다.
그러나 로건의 시선은 밤하늘에 떠오르기 시작한 보름달에 고정되어 있었다.
“대공자님. 그게 무슨……?”
“이유라도 말씀해 주셔야죠.”
“무엇 때문에 비프로스가 물러간단 말입니까?”
“……나중에 자연히 알게 됩니다.”
가능한 한 태연하게 말하기는 했지만, 이 중에 가장 불안한 것은 로건 그 자신이었다.
‘변수가 없어야 한다. 제발!’
초조한 마음을 억지로 감추고, 그는 계속해서 태연함을 연기했다.
“자, 이제 수성을 준비합시다!”
* * *
– 수성을 준비하라!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던 병사들은 달밤에 갑작스레 내려진 명령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수성이면, 방어?”
“뭐, 뭐야. 전쟁 끝난 거 아냐?”
“우리가 이겼잖아?”
단순하게 눈앞의 사건만 보는 무식한 이들은 어리둥절했고.
“역시…… 백작가랑 전쟁을…….”
“불안하다 했어.”
조금이나마 식견이 있는 이들은 머지않은 미래를 생각하며 탄식했다.
물론 병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으니.
“이 달밤에 이게 뭔 짓이야!”
“아이 씨! 안 그래도 삭신이 쑤시는데.”
“이거 꼭 지금 해야 해?!”
그것은 바로 취침 시간까지 미뤄지면서 하게 된 중노동이었다.
고요했던 토모도 성의 밤은 수천 명이 쏟아 내는 욕설로 소란스러워졌다.
“시간이 없다. 빨리, 빨리!”
그릭은 스승의 말에 한숨을 쉬면서도 부산하게 움직였다.
그런 그와 사제들 손에 들린 것은 수십 장의 붕괴 스크롤.
하나하나가 천 골드에 달하는 이 귀물들이 지금 어처구니없이 그저 땅바닥에 설치되고 있었다.
‘시간만 많았어도 이건 따로 챙겨 놓고, 마법으로 어떻게든 해 볼 텐데.’
그러나 지금은 스승의 말대로 시간이 없었다.
그나마 댐 공사 이후 남은 스크롤이 있었기에 이나마 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대공자가 주문한 것은 스크롤의 파괴 범위까지 섬세하게 계산해야 하는 정교한 작업이었기에, 병사들에게 맡길 수도 없었다.
‘결국 우리가 하는 수밖에.’
그릭은 한숨을 쉬며 달밤의 체조, 아니 마법을 준비했다.
“그릭! 준비됐냐?!”
“예, 스승님!”
“에난! 투르스!”
“이쪽도 준비됐습니다!”
“좋아! 셋, 둘, 하나!”
번쩍.
그릭의 신호와 함께 성벽 바로 앞, 땅바닥에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된 스크롤이 일제히 빛을 발했다.
그 직후.
우르르르르릉.
마치 지진이 일어난 듯한 굉음과 함께 단단한 땅에 쩌저적 금이 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는 흙들.
단단하게 뭉쳐진 지반이 붕괴하며 스크롤을 중심으로 흙을 사방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밀려난 흙들은 미리 조율된 마법에 따라 움직여 성벽의 빈틈에 덧씌워지며 울퉁불퉁하던 성벽의 겉면을 매끈하고 밋밋하게 만들고 있었다.
우르르릉.
연신 계속된 진동 끝에 만들어진 것은 성벽 아래 5m 반경으로 깊숙이 파인 구덩이.
다시 말해 해자(垓子)였다.
사람 십수 명은 족히 묻을 법한 깊은 구덩이가 성벽을 따라 길게 파인 모습.
심지어 퍼낸 흙은 저절로 움직여 성벽을 보수하고 메꾸는 경이로운 광경.
지켜보던 이들도, 실행한 마법사들도 감탄한 얼굴로 이 역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우리 학파가 자꾸 공사 쪽으로 특화되는 느낌이란 말이지.’
자신이 만들어 낸 골렘에게 구덩이를 다지는 작업을 시키면서 클레이튼은 왠지 조금 찜찜한 기분을 느꼈다.
물론 그런 기분 하나하나에 신경 쓰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자자, 빨리 이동하자. 오늘 밤 중으로 완성해야 해!”
그가 소리치는 순간 제자들의 안색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클레이튼 역시 마음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어째 정착해서 제자들의 수련시간을 늘려 주려던 처음의 목표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어그러진 듯했다.
‘에이, 기분 탓이겠지.’
매년 천만 골드의 지원을 약속받았으니 이 정도 일은 하는 것이 당연했다.
어차피 맥라인이 망하면 골렘 마탑도 망하는 것.
이제는 한 몸이나 다름없는 사이였다.
‘설마 애초에 이러려고 우리를 붙잡은…… 아, 내가 마탑 하겠다고 했지. 피해망상이다, 클레이튼. 수양이 부족해.’
그는 씁쓸한 기분을 털어내며 애써 지어 낸 밝은 얼굴로 제자들을 재촉했다.
* * * 새벽부터 상부의 독촉에 성벽으로 올라온 병사들은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허어, 이 성벽이 이렇게 높았어?”
“성벽도 아예 매끈매끈한데?”
“역시 마법사들. 어떻게 하룻밤 만에…….”
맥라인 병사들이 보기에는 잠시 자고 일어났더니 성벽이 엄청나게 매끈해지고 높이도 늘어난 것이었다.
그들은 마법이 가진 힘에 새삼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성벽에 준비한 기름을 뿌려라! 빈틈없이 흘러내릴 수 있도록! 십인장이 꼼꼼하게 확인해!”
“예!”
그들 역시 그 위대한 작업에 부가적인 요소를 더해야 했기에 감탄은 곧 불평으로 변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의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한들, 밤샘 작업 끝에 로건을 마주한 골렘 마탑의 마법사들보다는 덜할 것이었다.
“해자를 만들었으니 물을 채우라고요?”
황당한 요구에 클레이튼의 험상궂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무리 평야와 강이 가깝다지만, 루터 강 지류까지 직선거리만 해도 5㎞는 될 겁니다!”
“이르면 오늘 적들이 온다면서요!”
“이건 절대 무리예요, 무리!”
“산도 뚫었잖아. 수로 지겹게 파 봤잖아. 강까진 고작 5㎞에, 물줄기만 연결하면 되는데 그게 힘들어?”
“…….”
결국, 그들의 정당하고 합리적인 반박은 권력자의 압제에 묵살당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