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95)
95화
“허, 이게 되네.”
따듯한 햇살이 머리 위를 비추는 시간.
클레이튼은 자신과 제자들이 만들어놓은 성과에 본인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성벽 위에서 내려다본 아래의 풍경.
밤새 만들어 낸 깊이와 폭이 5m가 넘는 해자에는 찰랑거리는 물이 가득 차 있었다.
무거운 갑옷을 입고 저 안에 빠지기라도 하면 아무리 기사라고 해도 쉽게 걸어 나오지는 못할 것이다.
단발성 공사라 굳이 많은 것을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고는 해도, 고작 대여섯 시간 만에 지대의 높이와 지질까지 고려해서 루터 강 지류에서 해자에 이르는 수로를 파낸 것이었다.
아무리 경험이 쌓여있다고는 하지만.
아낌없이 마정석을 쓰며 마법과 골렘을 활용했지만.
그 역시 이렇게까지 쉽게 작업을 마치게 될 줄은 몰랐다.
“역시. 하면 되지 않습니까.”
“…….”
물론 그 대가로 제자들은 전부 탈진해 쓰러졌고, 자신도 당장 드러눕고 싶은 심정이었으니 쉽다는 말은 어폐가 있었다.
그러나 분명 예상한 것보다는 쉬웠다.
“로건 공자. 그래도 이번에는 좀 무리한 제안이었습니다. 사람이 억지를 써서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는 법인데…….”
“되었잖습니까.”
“…….”
갈구면, 쥐어짜면 어떻게든 다 할 수 있다.
고용주에게 이런 인식을 심어 주면 앞으로가 피곤해질 것이 뻔했다.
모름지기 공사는 정해진 공사 기간에 딱 맞춰 끝내는 것이 최선. 더 빨라도 늦어도 좋지 않다.
재차 무어라 변명하려던 클레이튼은 순간 스스로 떠올린 생각이 어이가 없어 실소를 지었다.
‘고용주? 공사?’
뭔가 생각의 방향이 자연스레 인부처럼 흘렀음을 자각한 것이다.
“아, 아무튼. 그래서 지금 저희 마탑 전력이 전부 이탈해 버리지 않았습니까. 이제 곧 전투가 예상되는 상황에 이건 전력 낭비 아니었을까요?”
“어차피 전투적으로는 별 도움 안 되지 않습니까. 클레이튼 님 빼고는.”
“어…….”
뭐라고 변명할 수 없는, 뼈아픈 한 방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에 로건이 피식 웃으며 그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클레이튼 님도 이제 쉬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이르면 오늘, 아니면 내일 전투가 벌어지겠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피곤하면 쉬어야지.”
“…….”
대체 어쩌란 말인가.
밤샘 공사에 지친 클레이튼이 참다못해 울컥한 감정을 토해 내려는데.
“다만, 마지막으로 하나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붕괴 스크롤 남은 것 있지 않습니까. 그것과 클레이튼 님의 마법이면…….”
점점 작아진 목소리는 예상치 못한, 그리고 심각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분명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그래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 말에 클레이튼은 로건의 얼굴이 다시 보였다.
사실 밤새 이어진 해자 공사와 수로 공사 현장을 계속 지켜보고 필요한 인력이나 재료 수급을 지시한 로건이었다.
피로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밤새 잠 한숨 못 잔 것은 이 젊은 대공자 역시 마찬가지라는 뜻.
클레이튼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한참 로건을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하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아까 한 말은 농담이었습니다. 정말 푹 쉬어 주세요.”
언제 필요하게 될지 모르니.
씁쓸한 한마디를 속으로 삼킨 로건은 돌아서는 클레이튼을 잠시 바라보다가 무거운 시선을 성 밖으로 옮겼다.
‘타이밍 한 번 죽이는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지평선 너머에 등장하는 군대를 보며 로건은 이를 갈았다.
“적이다! 전군 전투 준비!”
긴장감에 쪽잠을 청하던 병사들도,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전투에 대비해 칼을 갈던 기사들도 일제히 막사 밖으로 뛰쳐나왔다.
맥라인의 군대가 빠르게 전열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 * *
“허? 토모도 성에 해자가 있었던가?”
바람처럼 달려오느라 진영을 채 정비하기도 전.
변화한 토모도의 모습을 보며 로저 비프로스가 어이없다는 듯이 수하에게 물었다.
“……없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저런 걸 만들었다는 건가…… 뭐, 나름대로 재주는 있나 보군. 그래 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 아슬란!”
“예. 주군.”
비프로스의 기사단장, 신속의 기사 아슬란이 즉각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적의 전력은?”
“도망친 아군을 통해 확인한바, 기사 150명 미만, 병력 2,500명 미만입니다.”
“변수는?”
“영주라는 놈이 최상급기사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대지의 마법사로 보이는 놈들이 열 놈가량 있다고 합니다.”
“하…… 주제에 비밀 병기들을 준비했다 이거지? 흐흐. 그래서 예상되는 결과는?”
“저희의 압승입니다.”
아슬란의 대답은 지체가 없었다.
그리고 로저 비프로스 역시 그 의견에 동의했다.
“그래. 제까짓 게 발버둥을 쳐 봤자지. 렌토르, 전력 외 변수는?”
“수확 철이 지나고 식량 대부분도 본성으로 보낸 이후라, 성안에 3천에 가까운 군대가 먹을 만큼 식량이 충분치는 않습니다. 기다리기만 해도 놈들은 튀어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굶어 죽기 싫다면요.”
부관의 답변에 로저 비프로스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좋군. 시간만 지나도 이기는 전쟁이라. 하지만 내 영토를 침범한 건방진 놈들의 명을 며칠 더 늘려 줄 필요가 있을까?”
“……뜻대로 하십시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용을 정비한 비프로스 군은 즉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기사 수만 300명이 좀 넘고, 병사도 5천 명은 훌쩍 넘겠어. 그리고 저기 간간이 보이는 놈들은 마법사 같은데?”
“……하늘색 로브에 폭풍의 문양으로 보아 바람의 마탑 마법사들 같습니다. 로저 비프로스와 그 아들이 그쪽 출신이라더니.”
로건이 아버지의 분석에 부언하자, 주변 사람들의 안색이 일제히 어두워졌다.
단순 계산으로도 두 배에 가까운 병력 차.
그리고 비프로스군의 강점은 단순히 병력의 수가 아니었다.
“저 은발의 사내가 네가 말한 월광의 기사일 테고, 저기 원숭이처럼 생긴 붉은 갑옷이…….”
“아슬란 라이어, 신속의 기사가 맞을 겁니다. 그리고 로저 비프로스 역시 5서클의 마법사입니다. 대외적으로는 4서클로 알려졌지만요. 주의하셔야 합니다.”
“흐음…….”
최상급기사 둘과 5서클의 마법사 하나.
물론 맥라인도 따지고 보면 비등한 전력이긴 했다.
명백한 최상급기사인 패드릭 맥라인과, 상급이지만 최상급기사와 맞먹는 무력과 위용을 보여 주는 로건.
그리고 골렘 마탑의 클레이튼까지.
‘하지만 솔직히 좀 불안하지.’
로건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짧게는 십수 년 전부터 이름을 날려 온 비프로스의 최상급기사들과, 경지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버지.
실질적 무력이야 어쨌건 상급의 경지에 머무른 자신.
그리고 가장 뛰어난 특기를 전투에 활용 못 하는 5서클 마법사 클레이튼.
전부 비프로스 진영과 비교하면 조금씩 부족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여기까지는 최선의 선택지를 따라온 거야.’
병력의 차이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슬슬 ‘그 소식’이 와도 이상하지 않은 시기인데 아무런 조짐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생각한 최고의 상황은 아예 이 수성전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낌새를 보아하니, 그 기대는 접어야 할 것 같았다.
– 마땅히 충성을 바쳐야 할 로드(Lord)의 땅에 주제도 모르고 침범한 쓰레기들에게 고한다. 너희는…….
마법을 통해 전장 전체에 울리는 로저 비프로스의 목소리에는 처음부터 살기가 가득했다.
“제 놈들이 언제부터 로드였다고…….”
아버지의 분기 어린 음성을 흘려들으며 로건은 침착하게 주변을 향해 외쳤다.
“사격 준비!”
“준비!”
복창과 함께 성벽 위의 난간 사이사이에 배치된 병사들이 일제히 연사 석궁을 들어 올렸다.
정작 공성전 당시에는 큰 재미를 보지 못한 연사 석궁이지만, 지금은 반대로 성벽 위에서 아래를 노리는 쪽이니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2천이 넘는 연사 석궁이 비프로스 군을 향해 겨눠졌다.
– ……이제 그 죄를 묻겠다.
“우리는 대꾸 안 해 줍니까?”
“뭐 하러 힘을 빼. 혼자 떠들게 내버려 둬.”
헤인켈의 물음에 로건이 차가운 대답을 해 주기가 무섭게.
– 맥라인의 뿌리를 뽑아 주마! 전군, 돌격!
로저 비프로스의 음성과 함께 비프로스군이 진격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돌진해 오는 것은 역시 기사들이었다.
태양 빛을 찬란하게 반사하는 고급스러운 갑옷에 하나같이 불타는 장미 문양을 새긴 300여 명의 기마병이 일제히 돌진해 오는 광경은 심리적인 압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그것을 응시하던 로건은 조금 이상한 것을 느꼈다.
‘그냥 달려와? 방패도 없이?’
연사 석궁에 대해 들었다면 마땅히 그에 대해 대비를 해야 할 텐데, 저들은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듯 보였다.
“……실력에 자신이 있는 걸까요?”
비슷한 생각을 한 건지 헤인켈이 어이없다는 듯 말을 내뱉었다.
“자신이 있어도 준비하는 게 더 편했겠지. 저건 그냥…….”
말을 하면서 로건은 확신이 들었다.
“그냥 우리를 얕보는 거야. 조사를 안 했다는 거지. 혹은 듣고도 무시했거나.”
달려오는 기사들의 자세에서 느껴지는 여유로움.
그리고 전투를 시작했음에도 투구의 바이저를 내리지 않고 얼굴을 드러낸 기사들.
돌진해 오는 비프로스 기사단의 모습에서 그 감정이 고스란히 읽혔다.
실제로 그들은 도망친 병사에게서 연사 석궁에 관해 들었지만, 병사가 본 것은 별 위력 없이 성벽에 튕겨 나가던 모습뿐이었기에 별다른 대비를 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 사실이 로건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게 했다.
“잘됐어…….”
미래에 대한 걱정이 이 순간만큼은 사라졌다.
“정말 잘됐어.”
비프로스 기사단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기회였다.
생각지도 못한, 적이 만들어 준 행운이었다.
그 뒤를 바짝 쫓아오는 1,500기의 기마병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기사만 노려라! 확실하게 뜨거운 맛을 보여 줘라!”
“예!”
로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적 기사단이 석궁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쏴라!”
파바바박.
구령과 함께 쏘아진 쿼렐이 죽음의 비가 되어 은빛 기사들을 새까맣게 뒤덮었다.
적들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커지는 게 멀리서도 또렷이 보였다.
타다다다당!
“윽!”
“뭐, 뭐야!”
“막아!”
안타깝게도 가장 선두에 달리던 놈들에게선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다수가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황급히 끌어올린 포스와 휘두른 검으로 대다수의 공격을 쳐 내며 치명상을 피한 것 같았다.
하지만 뒤쪽에서 따라오던 평기사들은 달랐다.
“아악!”
“컥!”
“이, 이건 무슨!”
퍼버버벅.
첫 사격에 무려 서른에 가까운 기사들이 일제히 낙마하며 땅을 나뒹굴었다.
비명이라도 지른 자들은 양호한 편이었다.
머리나 눈, 심장을 단번에 꿰뚫는 치명적인 공격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명이 끊긴 이들도 다수였다.
‘좋아!’
사신과도 같은 살벌한 미소를 지은 로건이 다시 한번 크게 소리쳤다.
“기사단의 뒤쪽을 집중해서 노려라!”
그 말과 함께 쿼렐이 다시 한번 하늘을 메우며 연달아 쏟아졌다.
파바바박.
“아아악!”
“으헉!”
비프로스 기사들의 비명이 연달아 울려 퍼질 때.
가장 앞쪽에서 허공으로 은빛 장막이 솟아올랐다.
“기사단은 좌우로 산개! 다른 쪽 성벽을 노려라!”
그 중심에서 소리치는 얼굴은 로건에게 아주 익숙했다.
‘플란츠.’
월광의 기사 플란츠, 그가 들어 올린 검에서 채찍과 같은 은빛 포스블레이드가 뿜어지며 전방에 방어막을 형성한 것이었다.
그러자 한순간에 상당수의 쿼렐이 그 장막에 막혀 튕겨 나갔지만, 그조차 완전하지는 못했다.
‘어림없지.’
범위의 한계도 있을뿐더러, 저 채찍 같은 포스블레이드는 포스의 낭비도 클 것이었다.
‘자, 힘을 팍팍 써 주라고. 최상급기사님.’
전장은 생각보다 훨씬 잘 풀려 가고 있었다.
땅바닥에 나뒹구는 비프로스의 기사가 벌써 50명이 넘었다.
“북쪽과 남쪽 성벽! 기사들이 움직인다! 따라붙어! 계속 쏴라!”
로건이 분산되는 적 병력을 보며 지시하자, 맥라인 병력이 사전에 계획한 대로 움직였다.
아버지가 일부 병력을 이끌고 북쪽 성벽으로 향하고, 헤인켈이 이끄는 핸더슨, 나달 등의 수위기사들 역시 일부 병력과 함께 남쪽 성벽을 향해 질주했다.
하지만 그 틈에 서쪽 성벽의 화살 비가 다소 약해지는 순간.
놈들의 진형 앞에서 붉은 갑옷을 입은 한 인영이 성벽을 향해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
작은 체구에 비해 유난히 긴 팔, 사람보다는 원숭이 같은 얼굴.
초면이지만 너무나 특이한 외모 덕에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슬란 라이어. 비프로스가 가진 또 한 명의 최상급기사였다.
“어딜!”
로건이 놈이 올라오는 방향을 향해 내달렸다.
“전부 토막을 쳐 주마!”
아슬란은 가슴속에서 들끓는 분노를 토해 냈다.
기세등등하게 돌진해 온 기사단이 어처구니없는 피해를 보았다.
맥라인의 신무기니, 뭐니 하는 말을 듣고 코웃음을 친 것이 바로 자신이었다.
– 화살? 석궁? 장난해? 그런 거에 다칠 거면 기사 하지 말아야지.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로 지독하게 노력하여 지금의 경지에 오른 아슬란.
그에게는 기사를 위협하는 병사용 무기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헛소리에 불과했다.
거기다 주군 역시 그의 자신감을 이해해 줬고, 부단장인 플란츠 역시 그의 결정을 존중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하지만 아슬란은 스스로 책임을 인정하는 자가 아니었다.
자신의 의지와 생각만을 믿고 지금의 자리에 오른 최상급기사.
그 고집은 안 좋은 쪽에도 그대로 영향을 주었다.
자신의 판단은 옳았고, 비겁한 무기를 쓴 적이 잘못한 것이다.
그러니 그 책임을 적에게 묻겠다.
그는 그 분노를 고스란히 실어 몸을 날렸다.
진흙을 발라놓은 듯 매끈한 성벽 따위는 그에게 걸림돌이 되지 못하…….
미끌.
콰앙!
“흐. 흐흐. 이런 개 같은…….”
분노와 수치가 뒤엉켜 얼굴이 화끈거렸다.
진흙과 기름이 섞인 성벽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미끄러웠고, 그는 성벽에 간신히 손을 박아 넣어 중간에 매달렸다.
그런 그의 눈앞으로 수십 발의 쿼렐이 쏟아졌다.
“이런 젠장!”
타다다당.
그런다고 고작 석궁 따위에 당할쏘냐.
신속의 기사라는 이명에 걸맞게 아슬란은 한 손만으로 순식간에 화살을 쳐 내며, 성벽을 파고든 팔에 힘을 줬다.
그리고 다시 위를 향해 솟구쳐 올랐다.
“모조리 죽여…….”
겁먹은 적 병사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 순간.
솟구치는 그의 머리 위쪽으로 황금빛 검이 떨어져 내렸다.
꽈아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