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96)
96화콰아아앙!
“너 이…….”
뭐라는 걸까. 저 머저리는.
로건은 풍덩 소리와 함께 해자를 채운 물에 빠진 아슬란을 보며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이 아까웠던 것이다.
무모하게 혼자 올라온 최상급기사.
기회를 잡아 일격에 끝장낼 수 있을까 싶었지만, 놈은 허공에 체류하는 불안정한 상태에서도 자신의 공격을 받아 냈다.
그 때문에 성벽 아래로 떨어지기는 했지만, 굳이 물이 아니더라도 최상급기사라면 이 정도 높이에서의 추락은 별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예상대로, 놈이 잠겼던 해자의 물이 폭발하듯 솟구치더니 어느새 홀딱 젖은 모습으로 지상에 서 있는 놈의 모습이 보였다.
“쯧!”
게다가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쪽 성벽으로 돌아간 이들을 제외하더라도, 한군데 뭉쳐 이전보다 효율적으로 쿼렐의 비를 막아 내는 비프로스 기사단.
그리고 그 뒤에 도착한 기마병과 보병들이 성벽의 사방으로 흩어지며 장궁을 꺼내 드는 것을 보는 순간.
로건은 오롯이 꿀을 빨던 시간은 끝났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초전의 성과는 기대치를 넘어섰다.
‘저놈들만 어떻게 처리하면 되겠군.’
아슬란과 또 다른 최상급기사 플란츠, 그리고 북쪽과 남쪽으로 흩어진 일곱 명의 상급기사들.
연사 석궁의 유효사거리 내에서도 방어뿐만 아니라 반격까지 할 수 있는 강자들, 이놈들이 문제였다.
‘북쪽과 남쪽은 버텨 주길 바라야 해. 당장은 여기부터 처리한다.’
로건의 붉은 눈동자는 서쪽 성벽 아래에서 도약을 준비하는 두 명의 최상급기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초전, 아니 이 토모도 수성전의 승패가 여기에 달려 있다.
로건은 그것을 직감하는 순간 전력을 끌어올렸다.
우우웅.
심장의 포스코어가 급격하게 모은 힘을 토해 내고, 그 힘의 대부분이 그대로 애검 룩스로 몰려들었다.
목표는 최상급기사 둘 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절대 불가능할 일이었지만, 성벽 위에 있는 자신과 아래에서 불안정한 자세로 뛰어오르는 적들.
이 상황에서는 잘만 하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로건은 감각을 최대한 돋우며 놈들의 움직임을 계산, 예측하고 최적의 경로를 그리며 검을 휘둘렀다.
‘뒈져라!’
혼신의 힘을 담은 대지참(大地斬)의 일격.
휘둘러진 검 끝에서 솟구친 황금빛이 20m가 넘는 거인의 검이 되어 반쯤 공중에 자리한 적들을 단번에 휩쓸었다.
“흡!”
“뭐……?!”
경악하는 적들의 눈빛을 보며 성공을 예감하던 그때.
촤라라락.
플란츠의 검에서 솟구친 은빛 채찍이 성벽을 찍더니, 그 반발력으로 허공에서 방향을 바꾼 플란츠가 곡예를 하듯 로건의 공격을 피해 성벽 위로 올라섰다.
파아아아앙!
혼신의 힘을 담은 일격이 허공에 황금빛 잔영만 남긴 채 사라졌다.
피식 웃는 플란츠의 얼굴이 마치 또 당할 것 같냐는 표정이라 절로 이가 갈렸지만, 당장 그 분노를 표출할 수는 없었다.
“죽여 주마!”
플란츠보다 더 빨리, 아예 공간을 단축하듯 사라져 그의 공격을 피한 원숭이를 닮은 사내가 어느새 눈앞에서 붉은 검을 찔러 오고 있었으니까.
챙! 챙!
쾅!
“큭!”
성벽 위에 두 다리를 온전히 딛고 선 아슬란의 공격은 매서웠다.
귀신 그림자와 풍신의 부츠를 최대한 활용하고 있음에도 속도는 간신히 따라가는 정도에 불과했고.
붉은빛이 진한, 하지만 이상하게 짧은 포스블레이드의 위력은 저 플란츠보다 확실히 더 강력했다.
“어디 더 까불어 보거라!”
수세에 몰려 간신히 버티면서도 로건은 빠르게 주변을 훑어보았다.
쩌어엉!
“어림없다!”
어느새 북쪽 성벽으로 갔던 아버지가 돌아와 플란츠를 막아서고 있었다.
좋은 판단, 북쪽 성벽의 방비가 약해질지 몰라도 당장은 이게 최선이었다.
성벽을 지키던 병사들은 어느새 시체가 되었거나 주변으로 도망친 지 오래.
번뜩이는 포스블레이드와 번개 같은 움직임은 주변의 누구도 쉽게 끼어들 수 없게 만들었다.
게다가 북쪽과 남쪽 성벽의 사정은 모르겠지만 당장 눈앞에 있는 플란츠의 은빛 포스블레이드는 서쪽 성벽의 일각을 허물어 내고 있었다.
놈의 난입만으로도 성 밖의 적군을 노리고 쏘아 내던 석궁이 1/3은 줄었다.
그 탓에 성 밖 적군의 움직임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적군 궁병들이 성벽 밖에서 위로 쏘아 보낸 화살들이 소수나마 아군 병사들을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최대한 빨리!’
어떻게든 서둘러 놈들을 처리해야 했다.
좀 전에 실패한 일격의 후유증이 아직 남아 포스가 절반 이상으로 회복되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우웅.
포스를 쥐어짜듯 끌어올린 로건은 밀리던 와중에도 과감히 적을 향해 몸을 던졌다.
눈앞을 찔러 들어오는 붉은빛 검을 쳐 낼 생각도 없이 그대로 적을 마주 찔러 갔다.
그 순간, 아슬란의 입가에 불길한 미소가 걸렸다.
적의 검에서 일순간 쭈욱 늘어난 포스블레이드가 로건의 심장을 노렸다.
하지만.
“큭?!”
푸슉.
그 전에 로건의 검에서 쏘아진 황금빛 빛줄기가 아슬란의 어깨를 꿰뚫었다.
‘단숨에 끝낸다!’
우웅.
포스코어가 울리며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마지막 힘을 짜낸 로건이 폭풍처럼 아슬란을 몰아붙였다.
채채채챙!
콰아앙!
황금빛 검이 붉은 갑옷을 정신없이 몰아붙였지만, 그 검은 쉽게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큭!’
특별히 상처를 입지 않았음에도 입안에 피 내음이 느껴지고, 심장 부근이 따끔거렸다.
그럼에도 적은 여전히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관통당한 어깨를 최소한으로 움직이며 모든 공세를 최소한의 손해로 받아 내고 있었다.
이 공격이 멈추는 순간 로건의 여력이 사라진다는 것을 그 역시 알고 있는 것이다.
집요한 방어를 이어 가며 자신의 움직임을 쫓는 적의 눈동자.
그것을 마주한 로건은 암담함을 느꼈다.
경지는 오르지 않았지만, 수도에서 스승의 수련을 받고 귀신 그림자를 터득하며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다고 자부했다.
이전에 싸웠던 플란츠 정도라면 능히 이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같은 최상급기사로 알려진 아슬란의 수준은 또 달랐다.
채찍처럼 휘둘러지는 포스블레이드 같은 변칙적인 특기는 없지만, 플란츠보다 훨씬 빠르고 강했다.
‘이대로는 안 돼…….’
마지막 남은 포스가 바닥나는 순간, 반격에 쓰러지는 자신의 모습이 절로 상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 상상이 자연스레 빈틈을 불러왔다.
번쩍.
웅크려 있던 적의 긴 팔에서 붉은 벼락이 뻗어 나오는 순간 로건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고, 온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콰아앙!
황금빛 검은 놈의 어깨를 살짝 스치고, 붉은 벼락은 로건의 옆구리를 살짝 뜯어내며 그대로 성벽을 관통했다.
발밑에 뚫린 사람 머리통만 한 구멍을 보며 로건은 안도하는 한편 의문이 들었다.
‘왜?’
빈틈을 보인 것은 자신이건만, 놈의 공격이 너무 급했다.
로건은 그 덕분에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붉은 벼락, 단금참 이상의 위력을 가진 비기를 써서 목숨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빈틈을 통해 부상만 노렸어도 승기는 자연스레 놈에게로 기울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쥐새끼 같은 놈!”
거친 음성을 토해 낸 적이 공세로 나섰다.
어쨌거나 좀 전의 일격으로 인해 기세는 바뀌었다.
아슬란의 붉은 검이 로건을 정신없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로건 역시 악착같이 방어를 하며 놈의 공격을 버텨 냈다.
그리고 그 ‘급한’ 공세를 버티며 그제야 자신이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장 더 급한 건 내가 아니야.’
병력에서 확고한 열세이기에 단기적으로 점한 우세를 이어 가기 위해 무리를 한 것인데, 자신보다 더 급한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성벽에 올라온 적 병력의 최강자들인 눈앞의 아슬란과 플란츠, 그리고 상급기사들일 것이다.
놈들이 활약할수록 맥라인이 불리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지금 적군 한복판에 있었다.
시간이 지나 맥라인 기사와 병사들이 모여들게 되면, 눈먼 칼이나 화살에 맞아 위험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군대가 승리를 하건 말건, 그 승기를 잡기 전에 놈들은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단순한 상황을 잊고 있었다.
죽음의 공포. 그것은 일개 병사건 최상급기사건 마찬가지일 터.
그것도 적진에서 예상치 못한 장애물을 만나 발이 묶인 상황이라면?
로건은 그제야 아슬란의 갈색 눈에 떠오른 조급함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과는 조금 결이 다른 이 조급함을 이용할 방도를 궁리했다.
그렇게 로건의 붉은 눈이 다시금 번뜩이며 틈을 노리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번쩍.
일방적으로 밀리던 로건의 검 끝에서 일순간 황금빛 빛줄기가 쏘아졌다.
기습적인 공격이었지만, 미리 전조를 읽은 아슬란은 급격하게 몸을 틀어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크게 드러난 적의 빈틈을 노리려는데.
“아악!”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비명으로 인해 움찔한 탓에 검이 ‘아주 조금’ 느려졌고.
신속의 기사라는 이명을 가진 자신과 비등한 속도를 지닌 상대에게 회피할 시간을 만들어 주고 말았다.
스각.
팔뚝에 남은 예리한 검상,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은 포스, 후들거리는 다리.
하지만 로건은 충분히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다.
로건과 아슬란의 시선이 동시에 닿은 곳.
아슬란과 플란츠의 난입에 허술해진 화살 비를 뚫고 막 성벽을 넘어서던 비프로스의 기사 셋이 그대로 황금빛 빛줄기에 관통당한 채 신음을 토하고 있었으니까.
“이놈!!”
눈에서 불꽃이 튀며 사나운 노성을 내지른 아슬란이 분노로 이를 갈며 소름 끼치는 소음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로건은 그의 공격을 어떻게든 버텨내며 또 한 번 황금빛 빛줄기를 쏘아 냈다.
“으아악!”
이번에도 막 성벽에 올라서던 적 기사 셋이 그대로 빛줄기에 휘말리며 아래로 추락했다.
로건은 한계가 찾아왔음을 여실히 느끼고 있었지만, 더 사납게 아슬란에게 달려들었다.
“자, 좀 더 놀아 보자고!”
그리고 그때.
– 후퇴! 후퇴하라!
성 밖에서 들려오는 비프로스의 목소리.
아슬란은 이미 극한까지 치달았다고 생각했던 분노가 다시 한번 한계를 넘는, 새로운 경험 속에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너 이 새끼…….”
챙! 챙!
콰쾅!
떨어진 후퇴 명령과 로건이 정면 대결을 피하며 비프로스의 기사들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는 탓에 심중의 분노도 제대로 토해 내지 못하는 상황.
어지럽게 검을 놀리던 아슬란이 결국 훌쩍 몸을 빼냈다.
“두고 보자, 꼬마. 다음번엔…….”
“왜? 지금 보지?”
부릅뜬 눈에는 살기가 넘쳐흘렀지만, 아슬란은 상대에게 달려드는 대신 성벽 밖으로 뛰어내리는 것을 택했다.
그 모습에 패드릭과 맞서고 있던 플란츠 역시 이를 악물며 성을 빠져나갔다.
여유로운 표정을 연기하던 로건은 그 순간 무너지듯 주저앉았고.
– 우리가 승리했다!
창백한 안색으로 소리를 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와 함께.
토모도 성이 거센 함성에 휩싸였다.
* * *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함성을 질러 댄 맥라인 군이었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처음 비프로스 군이 등장했을 때 느꼈던 짙은 불안감과 공포심이 어느 정도는 자신감으로 치환되었다는 점.
그것만으로도 이번 전투에서의 승리는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수뇌부의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놈들은 더 이상 방심하지 않을 거다.”
아직도 안색이 돌아오지 않은 패드릭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낮의 격돌이 그리 쉽지 않았음을 방증하는 듯 피로에 찌든 모습.
그 눈에 짙은 우려가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네가 말한 시기는 아직이더냐?”
“……예.”
“이유는 여전히 말해 줄 수 없고?”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 주십시오.”
로건의 시선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한 달을 향했다.
한껏 차오른 뒤, 다시금 그 안을 덜어 내기 시작한 달.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새로운 새해의 시작을 기리며 기뻐하고 있을 새해의 첫날, 첫 달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로건에겐 절망감만을 심어주는 달이었다.
‘늦어도 지금쯤은 소식이 들려왔어야 했는데.’
전생의 역사에서 무언가 틀어졌을지도 모른다.
그 아득하고도 불길한 짐작을 로건은 차마 남에게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표정에서 티가 난 것일까.
“흐, 그래. 이제 와 어쩌겠느냐?”
굳은 얼굴의 아버지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듣고 있던 기사들 역시 로건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가슴을 두드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로건은 심장 부근이 아릿하게 쓰려오는 것을 느꼈다.
낮에 입은 부상 때문은 아니었다.
‘나 때문에…….’
이 사람들이 모조리 이곳에서 생을 끝낼지도 모른다.
자신의 말을 따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제 막 성장하기 시작한 영지 내에서 내실을 다지는 것이 옳았을까.
일찌감치 떨쳐냈던 후회가 다시금 그의 마음속 깊숙한 곳에 달라붙었다.
회귀한 후 승승장구하며 이뤄 왔던 모든 것이 일시에 무너질 수 있다는 공포.
그 부담감이 로건의 영혼을 좀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 적들! 적들이 몰려옵니다!
새해의 첫 달이 떠오른 밤.
비프로스의 2차 공격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