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97)
97화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갔던 놈들이다! 이번에도 엉덩이를 차 주자!”
“예!”
기사의 호기로운 외침과 더불어 성벽 위의 병사들이 다시금 분주하게 움직였다.
낮의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병사들은 그 기억으로 억지로나마 죽음의 공포를 잊을 수 있었다.
게다가 비교적 밝은 달빛과 별빛이 횃불 너머 돌진해 오는 적들의 윤곽 정도는 확실히 보이도록 해 주었다.
여전히 최선두에서 돌진해 오는 비프로스의 기사단.
하지만 낮과는 달리, 어디서 구했는지 각기 다른 모양의 쇠 방패나 나무 방패를 손에 들고 있었다.
거기다 서쪽 성벽을 향해 돌진해 오는 것은 일부뿐.
비프로스 군은 이미 북쪽이나 남쪽, 하다못해 동쪽까지 병력이 돌아 들어가고 있었다.
첫 전투와 달리 제대로 방비한 모습이었다.
그것만 보아도 이전처럼 쉽게 넘어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병사들이 더 흩어질 수밖에 없어.’
그로 인해 사격의 위력이 줄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로건은 기나긴 밤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두두두.
“와아아아!”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함성을 지르며 돌진해 온 적군이 사정거리에 들어왔다.
손에 땀을 쥔 채 구령을 기다리던 병사들이 신호와 함께 석궁을 쏘기 시작했다.
파바바박!
“아아악!”
“크헉!”
밤하늘에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비명들.
하지만 석궁을 쏘는 병사들도, 그들을 지휘하던 기사도, 그리고 로건도 안색이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석궁의 위력은 밤에도 여전한 것을 넘어 훨씬 뛰어난 것이 정상이었다.
특정한 개인을 노리는 것이 아닌 군대 전체를 노리기에 표적은 너무나도 컸고, 반대로 그 표적이 된 대상은 어둠 속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상대해야 했으니까.
그런데 낙오하는 이들은 처음의 극소수뿐이었다.
아무리 방패로 대비를 했다고는 해도, 50여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던 낮과는 너무 달랐다.
심지어.
타다다당!
“마, 막았다!”
기사단의 바로 뒤에서 따라온 기마병들 일부까지 방패로 석궁을 막아 내는 기염을 토했다.
그들 대다수가 들고 있는 것이 고작 조잡한 나무 방패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저럴 수가?’
아무리 병력이 낮보다 더 많이 흩어져 일제사의 위력이 줄었다고는 해도, 생각보다 너무 많은 적군이 별다른 피해 없이 성벽 근처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가까이 다가와서야 로건은 이질적인 무언가를 감지할 수 있었다.
“마법!”
“예?!”
“마법이다! 놈들이 마법을 쓰고 있어!”
병력의 후방에서 따라오는 로저 비프로스와 20여 명의 마법사.
그들에게서 시작된 무형의 기운이 적 병력 전체를 감싸고 있는 것을 로건은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바람 계열의 마법이다.’
구체적으로 무슨 마법인지는 몰라도, 효과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안다고 해도 당장 어찌할 방법이 없는 수법이었다.
게다가 공격이 아예 통하지 않는 것도 아니니 포기할 수도 없었다.
“젠장! 계속 쏴! 병사들 위주로 노려!”
“병사들 위주로!”
로건의 명에 기사들이 복창하고, 병사들이 노리는 대상이 바뀌었다.
낮과는 완전히 다른 전술.
마법에 의해 위력이 약화된 석궁으로 기사를 노리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차라리 후속 병력을 차단하는 쪽으로 돌리는 수밖에.
로건은 이어서 기사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기사들은 수성을 준비하라! 적들이 올라오기 전에 대가리를 다 깨 버려!”
“예!”
소리를 지르는 로건도, 대답하는 기사들도 목소리에 긴장감이 가득했다.
낮의 격전에서 비프로스의 기사들이 많이 죽기는 했지만, 그래도 맥라인 기사보다 5할은 더 많은 숫자였다.
거기다 비프로스 기사 중 강자로 분류되는 중급 이상의 기사들은 낮에도 그리 많이 죽지 않았다.
모두가 그것을 알고 있다 보니 긴장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낮과는 질적으로 다른 흉험한 격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쾅!
“아악!”
성벽을 울리는 굉음과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해자를 만들며 성벽에 바른 진흙과 기름이 기대 이상의 역할을 해 주고 있었다.
중급 이하의 기사들은 억지로 성벽을 깨며 기어올라야 했고, 그런 그들의 머리 위로 끓는 기름과 돌덩이 등이 사정없이 쏟아져 내렸다.
그것들을 모조리 피해 내면서 기어코 성벽 위까지 도달한 이는 맥라인의 기사가 머리를 내리찍었다.
주 무기인 연사 석궁이 반쯤 봉인된 데다가 수에서 확연히 밀리는 상황에서도 맥라인의 병력은 용케도 성벽을 사수했다.
결국 그 치열한 대치의 균형을 허문 것은 이번에도 비프로스의 최강자들이었다.
“젠장! 비프로스의 쌍검이 전부 여기에!”
로건의 반대편, 동쪽 성벽에서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울렸다.
북쪽 성벽에 간 아버지나 이곳에 있는 자신, 남쪽에 있는 헤인켈 대신, 중급기사들 다수를 배치한 곳이었다.
‘빌어먹을 놈들!’
눈을 부릅뜨고 찾고 있었던 놈들이 하필이면 자신과 반대쪽에 나타났다.
“버텨라!”
로건은 그 한마디를 남겨 놓고는 거짓말처럼 서쪽 성벽에서 사라졌다.
귀신 그림자의 운신법과 풍신의 부츠의 효능이 극한으로 발휘된, 질풍 같은 움직임이었다.
‘젠장!’
적이 진격해 온 루트와 정반대 방향 성벽의 수비를 명받았을 때 에일렌의 기분은 딱 그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었다.
자신이 또 여자라고 무시당하는가 싶어서 나온 한탄이었는데, 지금은 또 다른 의미로 연신 같은 욕설이 터져 나왔다.
“젠장!!”
스각.
우당탕탕.
가볍게 스친 붉은 검이 흉갑의 옆구리를 통째로 날려 버리고 옆구리에 깊숙한 상처를 새겼다.
“허허. 계집년이 참 제법이야.”
동쪽 성벽으로 돌아 들어온 적들 틈에서 벼락처럼 나타난 붉은 갑옷의 최상급기사를 처음 발견한 게 그녀였던 것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놈을 보자마자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아 ‘원숭이!’라고 소리쳤던 것이 문제였을까.
성벽에 다른 중급기사도 많은데 이 원숭이 놈은 에일렌만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가지고 놀고 있었다.
‘빌어먹을 놈!’
존경받아 마땅한 경지를 이루고도 이 치열한 전장에서 하는 짓이 이런 비열한 장난이라니.
그나마 최상급기사가 자신 하나를 가지고 노느라 전장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스스로 위안을…….
‘할 수가 있겠냐! 미친!’
뻐어억.
“쿨럭!”
“왜? 고작 원숭이한테 당하니 열 받아? 그래도 참아야지. 앞으로 네년은 원숭이의 장난감이 될 거야. 두고두고 가지고 놀아 주마.”
그거 때문이었구나, 이 재수 없는 새끼.
당당하게 소리쳐 주고 싶었지만, 명치를 강타당한 통증에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정말 최악인 것은 눈앞에서 흉악한 얼굴로 살기를 뿜어 대고 있는 이놈이 정작 살수는 쓰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정말 자신을 사로잡을 생각인 것 같다는 점이었다.
그 후에 처할 상황 따위는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차라리 죽고 만다.’
에일렌은 이를 악물며 후들거리는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하지만.
턱.
“커흑!”
“각오 단단히 하라고. 아주 예뻐해 줄 테니.”
체격에 비해 유난히 큰 손으로 에일렌의 목을 잡아챈 아슬란의 눈에서는 말과는 달리 당장이라도 그녀를 찢어 죽일 것 같은 살기가 넘실거렸다.
“퉤!”
“…….”
“지랄…….”
“허. 허허. 이 미친년이…….”
아슬란은 얼굴에 묻은 가래침을 닦아 내며 당장이라도 죽여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아 냈다.
‘천천히. 천천히 지옥을 보여 주마.’
건방지게 기사 갑옷을 입고 있는 계집년의 얼굴 위로, 수십 년 전 과거에 외모만으로 자신을 무시하고 모멸했던 무수한 여자들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비프로스의 쌍검, 신속의 기사라 불리게 된 이래 무던히도 참아 왔던 옛 취미 생활을 오랜만에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았다.
아슬란이 눈앞의 에일렌을 하나하나 해체하는 잔혹한 상상에 심취해 있던 그때였다.
“원숭아! 나랑 놀자!”
그의 속을 뒤집는 고함과 함께 황금빛 광채가 날아들었다.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전해지는 충격.
분명히 기습을 가한 것은 자신임에도 손이 얼얼하게 아려 왔다.
‘괴물 같은 새끼.’
가볍게 들어 올린 붉은 검 너머로 보이는 갈색 눈동자는 낮과는 달리 조급함이 보이지 않았다.
뚫린 어깨 역시 어떻게 치료했는지 상처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고, 로건의 일격을 막아 낸 검 또한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에일렌을 구해 냈다는 것과.
“여기도 있다!”
콰아아앙!
멀지 않은 곳에서 병사들을 학살하던 플란츠를 아버지가 막아섰다는 것.
이것으로 동쪽 병력이 단번에 무너지는 것은 막았다.
‘이젠 북쪽과 서쪽 성벽이 문제겠군.’
자신과 아버지가 빠진 쪽의 상태는 애써 상상하지 않았다.
걱정해 봐야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니 그저 눈앞의 적을 최대한 빨리 처리할 방법만 궁리할 뿐이었다.
‘나보다 높은 경지의 적을 상대로, 최대한 빨리?’
헛웃음이 나오는 상황, 결국 도박을 걸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빨리.’
싸늘한 갈색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슬란이 예측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예측하지 못할 타이밍에.
‘바로 지금!’
로건이 순식간에 아슬란의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그러자 냉철하게 로건을 주시하던 아슬란이 즉시 반응했다.
그의 붉은 검이 빠르게 다가오는 로건의 심장을 찔러 갔다.
낮에 다친 어깨가 반응을 조금, 아주 조금 느리게 만들었지만 그에게로 달려드는 로건의 속도가 더해지자 마치 로건이 검에 뛰어드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로건의 검 역시 아슬란의 심장을 노리고 있었다.
피할 생각도 없는 듯, 흡사 같이 죽자는 듯한 모습.
아주 짧은 순간, 투명한 갈색 눈동자와 이글거리는 붉은 눈동자가 마주치고.
붉은 검의 주인이 미약하게 몸을 틀었다.
카가각.
“이 미친놈이!”
로건의 검은 일반 강철보다 두 배는 단단한 적철강으로 만들어진 아슬란의 갑옷 옆구리를 너덜너덜하게 만들며 그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같이 죽자는 거냐!”
언뜻 막무가내로 보이는 로건의 모습에 냉정이 깨어진 아슬란이 소리쳤다.
하지만 로건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곧바로 다시 검을 휘둘렀다.
아슬란 역시 그 빈틈을 노려 마주 찔러 들어갔지만, 로건은 이번에도 그의 공격을 무시하고 그대로 자신의 검세를 유지했다.
쩌어억!
다시 한번 갑옷의 옆구리가 쪼개지며 맨살이 드러나는 순간.
아슬란의 갈색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크윽! 이, 이 미친…….”
귀족가의 도련님이 방어도 없이 공격 일변도로 밀어붙일 줄은, 그것도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달려들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전쟁터에서 구를 대로 구른 거친 용병들도 어지간한 막장이 아닌 바에야 좀처럼 실행으로 옮기지 못하는 수법.
자신의 생명을 도외시한 공격이라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귀한 집안에서 자란 사람일수록 더더욱.
‘허세다, 허세야! 내가 말린 것뿐이야!’
광기 어린 붉은 눈을 보면서 아슬란은 그렇게 이를 악물었다.
원숭이 같은 외모의 평민으로 태어나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아슬란은 오로지 오기 하나로 버텨 왔다.
그런 그가 귀족 도련님과의 배짱 싸움에서 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고작 상급기사가 자신을 이렇게 개싸움에 몰아넣었다는 사실도.
이를 악문 아슬란이 로건의 눈동자를 마주 노려보았다.
그렇게 붉은 검과 황금빛 검이 교차하는 순간.
푸우욱.
빠아악!
“지, 진짜 돌았구나…….”
쿨럭.
주저앉은 아슬란이 자신의 옆구리를 관통한 검을 뽑아내며 피를 토했다.
“흐흐. 하지만 내 승리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그는 승리를 확신했다.
서로 일격을 교환하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날린 발길질에 놈은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똑같이 나가떨어지기는 했지만, 자신은 고작 옆구리를 내어 준 반면, 놈은 배를 꿰뚫렸다.
이번 배짱 싸움에선 자신이 이긴 것이다.
그의 뇌리에는 마지막 순간에 흔들려 심장이 아닌 배를 찌른 기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반대로 적의 검은 똑바로 그의 심장을 노렸고, 적철갑 안에 받쳐 놓은 미스릴 심장 보호대가 검을 미끄러트리지 않았다면 그대로 심장을 꿰뚫릴 뻔했다는 사실도.
“자, 이제 뒈져…… 어?!”
번쩍.
쓰러진 적의 오른팔에서 갑자기 새하얀 빛이 번뜩이는 순간.
‘안 돼!’
아슬란은 그 정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통증을 참고 그대로 적을 끝장내기 위해 달려들었다.
지금은 자신의 손에 들린, 옆구리에 꽂혔던 적의 검이 조금 어색하기는 했지만 쓰러진 적을 끝장내기에는 충분했다.
그는 그렇게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