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98)
98화쩌어엉!
예상치도 못한 각도로 검이 튕겨 나왔다.
창백하지만 웃고 있는 얼굴.
분명 갑옷째로 배를 관통당했던 붉은 머리 귀신이 이상하게 멀쩡한 상태로 눈앞에 서 있었다.
“네, 네놈?!”
게다가, 무엇보다 아슬란을 놀라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까드득.
“자, 무기 바꿔서 2차전이다.”
적이 이를 갈며 내뱉는 말에 아슬란의 얼굴이 굳었다.
적의 손에는 놈의 배를 꿰뚫었던 자신의 애검이자 그에게 신속의 기사라는 이명을 만들어 준 아티팩트, 벨로치타스(Velocitas)가 들려 있었으니까.
놈의 전신에 일렁거리는 붉은 기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슬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방금의 반격 역시 벨로치타스의 능력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아슬란의 낯빛이 창백하게 질렸다.
‘아티팩트라. 그래도 왠지 좀 안 맞아.’
로건은 자신의 배에 꽂혀 있던 붉은 검을 한 손에 뽑아 들고는 적을 노려보았다.
자신의 몸에 딱 맞춘 룩스를 쓰다가 다른 검을 들고 있자니, 약간의 괴리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확실히 좋은 점도 있었다.
우웅.
검에 포스를 주입하자마자 온몸에 퍼지는 이질적인 힘, 마나.
그 마나가 신경을 자극하며 의식을 가속화하는 것이 느껴졌다.
“네에노오옴이 어어떠어엌케에…….”
아슬란의 말이 묘하게 늘어져서 들리는 것이, 마치 주변의 시간 자체가 조금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풍신의 부츠처럼 신체 능력을 올려 주는 것이 아닌 인지와 사고 능력을 급상승시키는 아티팩트.
‘이게 아슬란이 신속의 기사라 불리게 만든 힘인가.’
아슬란이 플란츠보다 훨씬 빠르고 강하게 느껴졌던 게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그리고 그 힘이 지금은 자신의 것이었다.
“끝내자!”
재생의 팔찌로 간신히 회복한 복부에서 아직 짜릿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적의 상태는 지금 자신보다 더욱 심각했으니까.
상급 사제의 신성 주문에 버금가는 치유 마법이 내장되어 있다는 왕실의 보물, 재생의 팔찌.
일전에 왕을 알현하고 얻은 그 보물이 바로 로건의 도박 수였고,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제대로 먹혀든 것이었다.
챙!
콰앙!
스각.
단 세 수만에 룩스를 꽂아 넣었던 옆구리를 다시 베어 내자, 일그러지는 적의 표정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가속된 의식에 익숙하지 않아 움직임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그 어색함 정도는 효용에 비하면 무시할 만했다.
“비이일어머어글…….”
푸우욱.
분명 심장을 노리고 들어갔는데 반대쪽 옆구리를 꿰뚫었다.
아직은 이 감각에 미숙한 탓에 저지른 실수였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일 뿐이다.
‘이번엔 반드시 잡아야 한다!’
붉은 검신 위로 황금빛 포스가 이글거리며 연신 비틀거리는 적의 허점을 노렸다.
아무리 재생의 팔찌 효과가 뛰어나더라도 배를 꿰뚫렸는데 순식간에 완치가 될 수는 없었다.
때문에 로건 역시 제대로 된 몸 상태는 아니었지만, 지금이 비프로스의 최대 전력 중 하나인 아슬란을 없앨 절호의 기회였기에 무리해서라도 공격을 이어 갔다.
채앵!
그리고 적의 손에 들렸던 룩스가 충돌을 못 이기고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을 때, 그 집념은 마침내 보상을 받는 듯 보였다.
그러나.
“아아스을라안 니이임!”
“어디이일!”
“마아악아!”
느려진 시간 속에서도 묘하게 소란스러워진 주변.
격돌 당시에는 차마 끼어들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던 주위의 비프로스 병력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만큼 그나 아슬란의 움직임이 처음보다 둔해졌다는 뜻일 터였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적 기사들과 그런 그들을 막는 피투성이가 된 에일렌의 모습이 느리게, 하지만 또렷이 인식되었다.
에일렌이 차마 막지 못한 반대편의 기사들까지도.
‘젠장!’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죽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느새 그의 뒤통수에 검이 날아들고 있었다.
‘젠장! 젠장!’
도박 수는 한 번으로 족했다.
아슬란을 죽이자고 진짜로 같이 저세상으로 갈 수는 없었다.
재생의 팔찌는 이제 며칠간은 기능하지 않을 테니.
아슬란의 심장을 노리던 로건의 검이 방향을 틀어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는 기사들을 향했다.
스각.
쩌어억.
“아아악!”
“크아악!”
지치고 다친 몸이지만 아티팩트의 힘을 빌려 기사 셋을 연달아 베어 냈다.
하지만 그 틈에 이미 다른 기사들이 쓰러진 아슬란을 빼돌리는 것이 보였다.
복부가 온통 피투성이에 입으로도 피를 쏟아 내고 있는 모습.
보통 사람이라면 진작 죽고도 남았을 상처였지만, 최상급기사가 저 정도로 죽을 리 없었다.
적 기사들이 연이어 나타나며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로건이 아쉬움에 이를 갈며 멈춰 서는데.
우웅.
“윽!”
순간적으로 아찔한 현기증이 찾아왔다.
지친 몸이 무의식적으로 검에 주입된 포스를 거둔 결과.
가속되었던 인지 능력이 정상으로 돌아오며 생긴 부작용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지만, 그 사이 이미 사방에서 검이 날아들고 있었다.
채채챙!
“크흡!”
다행히 찰나의 순간 누군가가 그의 앞으로 뛰어들며 떨어지는 검을 막아 주었다.
‘에일렌.’
로건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 보자, 창백한 안색의 에일렌이 자신 역시 비틀거리면서도 로건의 전면에 쏟아지는 공격을 받아 내고 있었다.
그녀는 적들의 공격을 막아 내는 것조차 힘에 겨워 보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꺼져라!”
다행히 로건의 현기증은 순간적인 것이었고, 상처를 입은 상태임에도 최강의 상급기사는 평기사 셋 정도는 쉽게 압도할 수 있었다.
쩌저정!
로건이 고함과 함께 앞으로 나서며 단 한 번의 검격으로 적들의 공격을 튕겨 냈다.
그러자 비틀거리던 에일렌이 또다시 앞으로 튀어나오며 그들 중 하나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었다.
푸우욱.
“커흑!”
그 뒤를 이어 어느새 다시 귀신처럼 다가간 로건이 눈을 부릅뜬 기사 둘의 목을 쳐 날렸다.
촤아악!
“잘했어!”
로건은 탈진한 듯 풀썩 주저앉은 에일렌의 앞을 가로막고, 검을 들어 올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신속의 기사를 쓰러트렸다!”
소리를 지르는 당사자의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견 무의미해 보이는 행위였지만 이것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
정신없이 눈앞의 전투에만 몰입해 있던 동쪽 성벽의 병사들 사이에서부터 목소리가 급속하게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각기 내용은 조금씩 달랐지만, 주된 내용은 같았다.
비프로스의 최강자가 쓰러졌다!
비프로스의 병력이 살짝 주춤하고, 맥라인의 병력이 조금 더 힘을 냈을 뿐인 작은 변화.
하지만 그 전체적인 흐름의 변화가 가져온 결과는 컸다.
지금까지는 잘 견뎌 왔지만 점차 비프로스 쪽으로 승기가 기울고 있던 동쪽 성벽을 비롯하여, 수비 병력 중 최강자가 사라진 뒤로 형편없이 밀리기만 하던 서쪽과 북쪽 성벽에서도 분위기가 반전되기 시작했다.
속절없이 물러나던 전선이 어느 정도 버텨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로건이 아버지를 도와 월광의 기사 플란츠를 몰아붙이기 시작하며, 맥라인 진영의 분위기는 더욱 기세를 탔다.
– 우리가 이기고 있다.
동쪽 성벽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밀리고 있던 맥라인의 병력이 이 착각 속에서 힘을 내기 시작했다.
반면에 비프로스 군은 연신 당황하기 시작했다.
비프로스에서 자랑하던 두 개의 검 중 하나가 쓰러지고, 나머지 하나마저 수세에 몰린 모습이 일순간이나마 전력의 우세를 잊어버리게 한 것이다.
– 설마 우리가 지고 있는 거야?
양 진영의 두 가지 착각이 교차하며 만들어 낸 전세의 반전은 멀리서 전장을 지켜보던 한 사람의 눈에는 더욱 확연하게 들어왔다.
“아슬란의 상태는?”
“기사들의 수신호에 따르면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아슬란 님이 최상급 포션을 낮에 써 버리셔서 이번 전투에서는 더 이상…….”
“하. 어처구니가 없군. 쥐새끼들이 단단히 독을 품었어. 쯧, 무리할 필요는 없다. 후퇴해!”
“예!”
“흥.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로저 비프로스의 자신만만하던 얼굴에 여유가 조금 사라지고, 딱 그만큼의 불쾌감이 자리 잡았다.
“놈들이 물러난다!”
“우와아아!!”
멀리서 들려오는 적들의 퇴각을 알리는 소리에 주변의 모두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어둠이 내려앉은 성벽 곳곳을 밝히는 횃불 아래마다 시체가 널려 있었지만, 그 위에 서 있는 이들은 억지로나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로건은 떠오르는 달을 보며 다시금 초조한 마음을 달랬다.
‘아직 하루. 고작 하루 차이야.’
어제까지 가득 차올랐던 달이 조금 줄어든 만큼 가슴속의 불안감이 커졌다.
하지만 로건은 차마 그 내색을 밖으로 내보일 수는 없었다.
“전원 휴식! 부상병을 치료하고 경계 태세를 유지하며 번갈아 휴식을 취하라!”
지금은 그저 버텨야 했다.
로건은 그 생각 하나만을 담아 아군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다음 날.
언제 또 적이 쳐들어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교대로 경계를 섰다고는 하지만 맥라인 군 대부분이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 모두가 피로에 절어 있을 때.
“적진에 추가 병력! 깃발이…… 불꽃 위에 독수리…… 페레타! 페레타 자작령의 군대입니다!”
적군의 지원 병력까지 도착했다는 암울한 소식이 들려왔다.
맥라인의 모든 전력이 빠진 틈을 타 역으로 맥라인 영지에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어차피 맥라인의 주요 인사들은 모조리 토모도 성에 모여 있는 상황이었다.
이 전투에서 패배하면 맥라인은 그대로 끝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비프로스에게 눈도장도 찍을 겸 이쪽으로 군대를 보내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전날과는 조금 다른, 파상 공세가 시작되었다.
* * *
“공자님! 또 동쪽입니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들이!”
로건은 이를 갈면서도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성벽을 가로질러 쏜살같이 달려가자, 막 성벽을 타고 오르려던 비프로스의 기사들이 다시 뛰어내리는 것이 보였다.
‘또!’
성벽에 오르려는 척만 하고 물러서는 놈들.
그중에는 심지어 월광의 기사 플란츠도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고 사라지는 놈.
이게 벌써 몇 번째일까, 로건은 사흘째 계속되는 이 장난 같은 공격에 신경이 곤두서고 있었다.
처음 두 번의 총공격 후 도착한 페레타 자작령의 군대는 멋모르고 덤벼들었다 연사 석궁의 쓴맛을 보고 물러갔다.
그 후로는 전면전 없이 아예 이렇게 간을 보는 용도로 사방에서 깔짝대는 것이 전부였다.
문제라면 로건을 위시한 맥라인 군으로서는 응대를 안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인명 피해는 더 생기지 않고 있었지만, 절대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정신적인 긴장으로 인해 쌓여 가는 피로도 피로였지만.
“공자님, 탄창이 다 떨어져 갑니다. 이대로라면 하루, 이틀 이내에…….”
식량 대신 들고 왔던 수많은 탄창을 비롯한 물자가 불과 닷새간의 전투에 이미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성안에 비축돼 있던 식량도 떨어져 갑니다. 이놈들, 수확기가 얼마나 지났다고 식량을 거의 남겨 놓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기사가 분통을 터트리는 식량 상황도 심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문제는.
‘이미 나흘이나 더 지났다. 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이미 왕의 서거 소식이 들리고도 남았어야 할 시기.
로건을 괴롭히는 가장 큰 고민은 적군이 아니라 바로 그 사실이었다.
타닥. 타닥.
“충! 성!”
“수고가 많다.”
“아닙니다, 공자님! 공자님이 주무시지도 않고 계신다는 거 다 알고…….”
“됐다. 괜히 말로 힘 빼지 말고 쉬어.”
가뜩이나 힘들 텐데 과하게 예의를 차리려는 병사를 만류한 로건은 타오르는 횃불 너머로 어둑해진 성 밖을 바라보았다.
야간 기습이 하루에 한 번씩은 있었으니, 오늘도 공격하는 척은 할 터였다.
그러니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이쪽에서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 즉시 전 병력이 진군해 올 것이다.
답답한 마음에 하늘을 올려다보니, 이제는 절대 보름달이라 할 수 없을 만큼 줄어든 달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무슨 변수가 생긴 걸까…….’
전생의 기억만 믿고 일을 벌인 것이 실수였을까.
불안한 마음이 자꾸만 그의 마음을 잠식해 들어왔다.
“붕대로 되겠어? 화살 맞았는데?”
“그럼 이 와중에 어떻게 해. 다리가 아닌 걸 감사해야지.”
“차라리 나도 크게 다쳤으면…….”
“큰일 날 소리 하지 마! 그러다 훅 가는 거야. 지금 어지간한 부상으로는 누워 있지도 못해. 기사들이 얼마나 쪼아 대는데.”
성벽 위에서 경계 근무를 서던 병사 하나가 다른 병사의 말에 목소리를 죽이며 그를 나무랐다.
“하지만 내 석궁 줄이 풀렸어. 탄창도 없고. 이대로는…….”
“버텨, 버티라고. 창이라도 들고 찍어. 누군 멀쩡한 줄 알아?”
“살 수 있을까, 우리……?”
“…….”
“그렇잖아. 지금 상황이…….”
“……대공자님이 벌인 일인데. 무슨 방법이 있으시겠지.”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병사의 표정 역시 깊게 가라앉아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게? 지금 이게 방법이 있는 거로 보여?”
“그럼 어쩌라고 새끼야! 이제 와서!”
“대공자는 애초에 왜 이런 전쟁을 벌여서는…….”
“큰일 날 소리! 가뜩이나 분위기 살벌한데 닥쳐 인마!”
멀찌감치 떨어져 야간근무를 서던 병사들의 대화는 로건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빌어먹을.’
이럴 땐 강화된 감각이 원망스러웠다.
차마 그들에게 다가갈 수 없어 성벽 위에 멍하니 서 있는데.
“로건. 이야기를 좀 하자꾸나.”
익숙하지만 피로에 찌든 목소리가 그의 귀를 사로잡았다.
“아버지…….”
“너도 알겠지만, 이 상태로는 이제 오래 버티지 못한다. 이 뒤의 계획을 알고 싶구나.”
아버지의 초췌한 얼굴과 푹 들어간 눈동자가 조용히 그를 응시했다.
양심이 쿡쿡 찔려 왔지만, 그렇다고 그의 근심을 그대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며칠, 며칠만 더 버티면 됩니다. 아직 말씀을 드리기는…….”
이미 몇 번이고 했던 말의 반복,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볼 면목이 없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그래. 그렇구나. 그럼 더 해 봐야지.”
아버지는 이 말도 안 되는 변명에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어떻게든 버틴다. 버텨 내기만 하면…….’
그저 자신을 세뇌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애쓸 뿐.
그렇게 이틀이 더 지나고, 성내의 식량과 연사 석궁의 탄창이 완전히 바닥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