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Side story (10)
외전 10화. 펠릭스 에스페란자 (1)
*전생
‘왜 예상하지 못했던가…….’
그란디아 최강의 오러유저, 검공 펠릭스 에스페란자는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성 밖에 까마득히 몰려든 대군.
황금용의 깃발을 든 병사들과 같은 문양을 새긴 기사들은 겁에 질린 아군들과는 다르게 기세등등하기만 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나라, 그 옆에 있는 가장 강성한 나라.
당연히 침략을 대비했어야 했다.
아니…….
‘내전으로 망가지기 전의 그란디아라도 막을 수 없다. 하물며 지금은…….’
그가 아무리 애국심이 강해도 눈에 보이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당장 보이는 기사의 숫자만 해도 일 개 군단급.
도대체 어떻게 저리 많은 기사를 양성했는지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설령 저것이 허세라 할지라도, 중장갑옷을 5만 벌은 맞춰서 허세를 부릴 수 있는 저력이라면 어차피 가능성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 제국의 깃발 아래 무릎을 꿇고 항복하라. 그것만이 너희가 할 수 있는…….
그 대군의 앞에서 선전 포고랍시고 일장 연설을 하고 있는 제국 동부 1군단장, 마창 그리트 아이츠하인의 말도 이제 서서히 끝나 가고 있었지만, 도무지 대책이 생각나지 않았다.
“각하, 병사들이 위축되고 있습니다.”
“코앞까지 대군을 몰고 와서야 하는 선전 포고라니. 미친놈들…….”
부관 루이스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각하?”
“흠. 우리 준비는?”
“급한 대로 병력을 죄다 끌어모았습니다. 일단 숫자는 군단급입니다만…….”
루이스의 멀끔한 얼굴에도 그늘이 졌다.
기껏 끌어모은 징집병의 숫자가 적군의 기사 수와 비슷한 상황.
어찌 희망적인 기대를 할 수 있을까.
‘그란디아도 이제 끝인가.’
지켜보는 눈들 때문에 대놓고 할 수는 없는 말.
하지만 펠릭스 역시 최후를 직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제야 선왕과의 약속이 후회되었다.
3왕자의 목숨만 지킨다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라가 이 모양이 됐는데.
‘내전에 개입해야 했을까.’
하지만 무의미한 질문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작금의 왕이 된 1왕자 뒤에 후안이 있듯이, 2왕자의 뒤에는 죽은 요르단이 있었다.
젊어서는 훌륭한 기사의 표본이 될 것 같았던 후배였지만, 결국 타락하여 나라를 좀먹는 이가 되어 버린 녀석.
어느 쪽을 밀어 줬다 한들 희생이 좀 더 적어졌을 뿐 작금의 형상은 달라지지 않았으리라.
“루이스.”
“예, 각하!”
“전세가 기울면 너는 후퇴하여 뒷일을 도모해라. 굳이 너까지 여기서 죽을 필요는 없다.”
그 말에 충실한 부관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각하!!!”
“어허, 병사들이 듣는다. 조용히.”
“각하, 어찌 그리 약한 말씀을 하십니까? 저는 절대 후퇴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저희도 지지 않을 것입니다!”
조용히 하라 했거늘, 결국 마지막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렸다.
다행스럽게도 그 고함은 주변의 병사들에게 좋은 영향을 준 것 같았다.
“정말 이길 수 있을까?”
“기사님이 저리 확신하면 뭔가 있겠지.”
“그래도…….”
“믿어. 믿자고.”
성벽에서부터 번져 나가기 시작하는 웅성거림.
아마도 막막한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겠지만, 조금이라도 분위기를 전환하는 데는 도움이 된 것 같았다.
“……네가 나보다 낫구나.”
“어,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각하.”
“흠.”
아직은 한창나이, 어쩌면 미래에 오러유저가 될지도 모른다 생각했던 제자에 가까운 부관.
하지만 루이스 하이온의 그 빛나는 재능도 그 성품 앞에선 빛이 바랬다.
지금처럼 모두가 절망하는 상황에도 진심으로 투지를 보일 수 있는 저 자세 역시.
한때는 3왕자 로저스 폰 그란디아와 이 루이스 녀석이 미래의 그란디아 왕국을 이끌어 가는 상상도 했었더랬다.
‘이제 다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녀석의 투지 덕분에 식어 버린 자신의 가슴에도 조금씩 불이 옮겨붙는 것 같았다.
“그래, 해보자꾸나. 목숨을 걸고서 나라를 지켜 보자.”
비록 다 썩어 문드러진 나라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을 삼키며 검공 펠릭스 에스페란자는 투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와중에 다행이라면, 제국 측의 선공이 조금 엉뚱했다는 것이었다.
– 제국의 위대함을 보여 주겠다. 그란디아의 오러유저 펠릭스 에스페란자는 나와 내 검을 받으라!
서른이나 되었을까 싶은 젊은 기사가 대군의 앞에 홀로 나와 그를 도발했다.
투구도 쓰지 않은 얼굴, 옅은 금발이 멀리서도 보이는 기사는 그야말로 자신만만해 보였다.
그란디아의 최강의 기사가 저렇게 젊은 기사의 도전을 거절하면, 가뜩이나 부족한 사기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리라.
하지만 어처구니가 없긴 했다.
“하?”
“각하, 함정입니다.”
루이스가 그리 말했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제국이 뭐 하러?”
“하지만…….”
“자신이 있으니까 나선 거겠지. 제국이니까.”
그래. 제국이다.
신분이 존재하긴 하지만, 능력만으로도 귀족이 될 수 있는 제국.
거대한 국토에서 절대권력자가 제도로서 신민의 권리를 보장하니, 그만큼 인재가 많아 저런 괴물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저 나이에 오러유저라니…….”
“예!?”
루이스가 놀라 당황했지만, 그는 오히려 웃었다.
선전 포고도 눈앞에서 할 정도로 서두른 침략 전쟁에서 저리 나오며 흐름을 끊는 것을 보니 뒷배도 든든한 모양.
‘아니면 실력에 자신이 있거나.’
그도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펠릭스는 제국의 오러유저다운 그 거만함에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제국은 주변의 왕국들을 소국이라며 항상 무시하곤 하니까.
나라가 작다고 사람이 작은 것은 아닌데도 착각하는 것이다.
“다행히 그 자신감이 우리에게 기회가 될 것이다.”
“각하!”
“다녀오마.”
펠릭스는 그 말 한마디와 함께 바로 성벽에서 뛰어내렸다.
* * *
제국의 젊은 오러유저는 생각보다 강적이었다.
푸른 두 눈이 은빛으로 변하면서부터 수준에 어울리지 않게 자신보다 한 수 앞을 읽는 듯한 움직임을 보여 준 것이다.
‘전투 예지’ 같은 종류의 이능 같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강적이라는 것이지, 결코 자신의 상대는 아니었다.
‘나를 너무 무시했어.’
압도적인 속도와 공간을 지배하는 압력은 한 수 앞을 읽는다고 애송이가 견딜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 제롬 디카이드요. 어디 소국의 오러유저 실력을 봅시다.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어린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끝이다, 애송이.”
덕분에 아군의 사기를 끌어올릴 수 있게 되었다 싶던 순간.
콰콰콰콰콰콰.
어느새 다가온 7개의 붉은 오러스피어가 그의 옆에 쏟아졌다.
‘흡!?’
대경한 검공이 그대로 꺼질 듯 사라지고, 오러스피어는 극에 다다른 보법 귀신 그림자가 만들어 낸 잔영을 꿰뚫었다.
꽈아아아앙!
일순간 초토화되는 전장.
10여 미터 뒤에서 진신을 드러낸 검공의 시선이 일대일 대결에 끼어든 적을 향했다.
동부 1군단장, ‘마창(魔槍)’ 그리트 아인츠하인.
그가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창을 겨눈 것이 보였다.
“허세에 비겁이라, 제국 오러유저들의 민낯이 참으로 추하구나.”
적 오러유저의 목숨을 끊을 기회를 놓친 안타까움이 평소 하지 않던 도발로 이어졌다.
‘여기가 내 무덤인가.’
솔직히 개싸움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마창이 쉽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오, 검공. 제롬은 폐하께서 아끼시는 인재라 이대로 죽게 둘 수가 없었소.”
제국의 군단장답지 않은 저자세. 평상시라면 너그러이 넘어갔을 만한 사과지만, 지금 그의 마음에는 여유는 없었다.
나라의 운명이 걸려 있는 이상.
“비겁한 자의 변명은 잘 들었고, 허세뿐인 애송이는 뭐 하고 있느냐? 명예를 걸었다면 자결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
날카로운 혓바닥이 창백한 인상의 애송이를 향했다.
그러자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 애송이가 그 즉시 바로 고개를 숙였다.
“사람을 몰라보고 모욕한 죄, 애송이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소이다.”
……의외였다.
“패자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만 이미 내 목숨은 나만의 것이 아닌바, 목숨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전투에서는 죽은 것처럼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제롬 경!”
“이 전투뿐입니다, 군단장님. 양해해 주십시오.”
마창의 만류에도 돌아서서 훌쩍 떠나는 애송이.
놈을 보는 검공의 눈이 더욱 무거워졌다.
‘열패감이라도 새겨 놓을 생각이었는데…….’
저 나이에 저만한 실력이라면 마음을 한 번 꺾어 놓는 것만으로도 망가질 수 있다는 독한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배경도 배경이거니와, 정신도 나이에 비해 단단한 것 같았다.
‘절대 살려 두면 안 될 녀석이다. 그 트리스 혼스비보다 더한 놈이 될지도…….’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녀석을 쫓을 수는 없었다.
그는 차분히 숨을 내쉰 뒤 비겁한 자를 향해 검을 겨눴다.
“그럼 차륜전인가? 다음은 당신, 그다음은 저기 3군단장 블레이크 경이고? 얼마든지 오시오.”
생전 해 보지 않은 도발이 어색했지만, 이상하게 잘도 먹혔다.
“……빌어먹을.”
탕.
투구를 내던진 그리트가 그 상징과도 같은 붉은 창을 땅에 푹 꽂았다.
“나의 잘못을 사과하는 의미에서, 그리고 제롬 경의 목숨을 살려 준 것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전투의 시작을 3일 미루겠소. 그대라면 알겠지. 침략 전쟁에서 이 3일의 의미를…….”
그깟 3일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검공은 비웃을 수 없었다.
제국의 침공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온 자신과 에스페란자 기사단.
병사들은 징집병뿐인 방어 병력.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든 시간을 끌 수 있다면, 후방의 조국이 여력을 끌어모아 반격의 여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왕과 후안은 믿을 수 없었지만, 그 휘하의 위켄 칼리아 정도는 믿을 만했다.
그리고 또.
‘그 로니안 맥라인이라고 했던가. 최연소 오러유저.’
그 신성이 힘을 보태 준다면, 어쩌면 그란디아도 이 위난을 버텨 낼 수 있지 않을까.
검공은 그렇게 희망적인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3일 뒤에 보지.”
“좋소.”
그렇게 얻은 3일의 유예 시간 뒤 시작된 제국의 총공세.
그 엄청난 공세를 검공과 그의 병력은 생각보다 잘 막아 냈다.
“버텨라! 물러서지 마라! 우리가 쓰러지면 우리 가족들이 죽거나 노예가 된다!!!”
“검공 각하를 따르라!!!”
“우와아아아아!”
성벽 위에서 목숨을 도외시하고 날 듯이 뛰어 올라오는 기사들을 공격하는 병력.
검공도, 에스페란자 기사단도 그 병사들의 투지 이상으로 악을 쓰며 적들에게 칼을 휘둘렀다.
다행이라면 적들이 이상하게 활을 쏘지 않는다는 것인데, 적 병사들이 장비한 화살 대부분이 석궁이라는 사실은 싸우면서 알게 된 것이었다.
– 왜?
곡사가 되지 않아 공성전에는 어울리지 않는 병기.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이었지만, 그것을 깊게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격전은 나흘 밤낮으로 이어졌으니까.
그리고 해가 저물며 처절한 접전이 또 한 번 끝나고 찾아온 짧은 휴식 시간.
“흐으으.”
“사, 살려 줘.”
“엄마…….”
주변에서 멀쩡히 서 있는 병력은 찾기 힘들 지경이었다.
‘다음이 마지막이다.’
장렬한 예감이 드는 순간, 펠릭스는 자신의 부관을 불렀다.
“루이스!”
“예, 각하!”
초췌한 안색의 루이스. 그도 이미 한계까지 몰린 것은 확실했지만, 그 투지만큼은 식지 않았다.
얼굴에 십자로 새겨진 흉터에선 여전히 피가 흘렀으나 무려 3군단장 맹격의 블레이크를 잠시나마 막아선 대가로 보면 아주 싸기만 했다.
그래서 더 이 결정에 확신이 들었다.
“고생 많았다. 잘 살아남아 주었어. 넌 할 만큼 했다.”
“예……?”
뻐억.
털썩.
목덜미를 강타당해 쓰러지는 부관.
그리고 그런 그를 서글프게 내려다보던 검공은 놀라 쳐다보는 주변의 기사들을 향해 명령했다.
에스페란자 기사단 중에서도 가장 젊고 가능성이 넘치는 인재들에게.
“게릭, 본드, 라이언. 너희 셋이 루이스를 데리고 후퇴하라.”
“각하!”
“제국군의 위험함을 제대로 알리고 훗날을 대비하라. 내가 그리하라 일렀다고 하고!”
“각하, 하지만…….”
“어서!!”
“……보중하십시오.”
거듭된 독촉에 기사들이 이를 악물며 루이스를 짊어지고 떠났다.
그걸로 됐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할 일은 다 했다.
다만 한 가지 미련이 남는다면.
‘부인, 미안하오.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소.’
수도에 남아 있을 반려에 대한 미안함뿐.
사내로서 제구실도 못 한 남편 때문에 얼마나 속앓이를 했을까.
창가 너머로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며 남몰래 울고 있던 부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아른거리고, 마음에 밟혔다.
그만큼 더 많이 아껴 주고, 더 많이 사랑해 주고 싶었는데.
– 전사하셨다는 소식이 들리면 저 역시 따라 죽겠습니다. 그러니 반드시, 반드시 살아 돌아오세요.
마지막 인사도, 그 눈물도 채 닦아 주지 못했는데.
‘정말 미안하오, 부인.’
최후를 짐작한 탓인지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억지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너무도 맑고 푸르른 하늘이 오히려 더 서글프기만 했지만,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병사들, 생존자들의 눈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란디아 왕국, 아니…….”
썩어 버린 왕국을 지키자는 게 무슨 도움이 될까.
그러니.
“……우리의 가족을 지키자! 끝까지 싸워라!!!”
“으아아아아!”
함성인지 비명인지 모를 아군의 고함을 배경으로.
‘내 영혼까지 불태우겠다. 내 유일한 가족을 위해서.’
검공은 다가오는 적들을 향해 칼을 겨눴다.
그날.
그란디아 최강의 오러유저, 검공 펠릭스 에스페란자는 전사했다.
하지만 그는 제국 동부 1군단장 마창 그리트와 3군단장 맹격의 블레이크에 더해 황실 친위대의 초인 둘까지 참살하는 믿기지 않는 전과를 거둔다.
그것은 제국 역사에 개전 이래 최초의, 그리고 단일 전투 최대의 피해라고 기록되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