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Side story (11)
외전 11화. 펠릭스 에스페란자 (2)
*현생
“대공 각하께 경례!!”
“충!”
“쉬게.”
저벅저벅.
황궁으로 걸어 들어가는 백발의 노인.
주름진 노안에 어울리지 않는 당당한 체격과 거침없는 걸음걸이에, 황궁을 지나던 모든 이가 정중히 예를 표했다.
하지만 그 발걸음의 주인은 무엇이 그리 급한지 제대로 인사를 받아 주지 않고 바삐 걸음을 옮겼다.
“폐하께서는?”
“서부 정복지에서 돌아오고 계신답니다. 병사들과 함께 움직이시니 아직 한 달은 더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데미안 나달, 이제 삼십 대 중후반이나 되었을까 싶은 재상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노인의 물음에 답했다.
제국 성립 후 이제 3년, 한창 바쁜 때 발바닥에 불이 나게 달려온 그의 표정은 불안하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렇게나 오래 걸리나?”
검공이 황제의 거취를 캐묻고 있는 상황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각하? 혹시 급한 일이시라면…….”
“아니, 그런 건 아닐 세. 스텔라 일로 상의드릴 게 있어서.”
“하하하. 전 또 뭐라고. 괜히 긴장했잖습니까.”
“음, 자네가?”
“검공께서 급한 표정으로 황궁에 달려오고 계신다는데 안 놀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가. 허허, 이거 실례했네그려.”
“정말 딸바보라는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만, 새삼 놀라게 되는군요. 설마 각하께서 그러실 줄은…….”
미소를 지으며 꺼낸 그 말에, 검공의 얼굴이 굳어지며 싸늘한 기세가 풍겨 나왔다.
“허, 자네. 지금 나더러 바보라고 했나?”
“헉!? 그, 그 뜻이 아닙니다! 제 말은…….”
데미안이 식겁한 얼굴로 해명을 늘어놓고 나서야 검공은 뻘쭘한 얼굴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흠, 흠. 이래서 늙으면 죽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건가. 요즘 젊은이들 말은 도통 못 알아듣겠어.”
“여전히 정정하시지 않습니까. 폐하께서 그러시는데 앞으로도 10년은 더 사실…… 헉!”
말하다 말고 화들짝 놀란 데미안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현인신 로건 맥라인의 능력은 진실로 신인의 경지에 닿아 있는바.
그중에서도 사람의 건강 상태와 수명, 전투에 관해서는 신도 능가하지 않을까, 라는 것이 측근들의 중론이었으니, 자연히 그 신인이 한 말은 덕담이나 저주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사실일 뿐.
“죄,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아니 그냥 헛소리였습니다.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황급히 수습하려 해 보지만, 이미 그 말을 듣는 검공의 표정은 묘하게 바뀌어 있는 상태였다.
“……10년?”
“각하, 제가 헛소리를 한 것이라니까요? 아하하하.”
황급히 폐하의 최측근인 누군가의 행동을 흉내 내 보았지만.
“자네는 시종장을 따라 해 봤자 안 어울리네, 재상.”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네. 이미 이 나이만 해도 오래 살았는데 뭘. 다행히 말년은 더 확실하게 준비할 수 있겠어.”
검공의 표정은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오히려 무언가 각오를 굳힌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다 이내 좌불안석인 데미안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은 검공이 ‘두 번째’ 용건을 꺼냈다.
“사실 딸아이 일만으로 폐하를 찾은 것은 아니네.”
“예?”
“그게 묘한 꿈을 꾸었는데…… 아니, 아니야. 자꾸 늙은이가 헛소리를 하게 되는군.”
검공의 너스레에 데미안이 결사적인 표정으로 그의 손을 맞잡았다.
“아닙니다, 각하. 제가 이래 봬도 해몽은 기가 막히게 합니다. 분명히 도움이 될 테니 꼭 말씀해 주십시오!”
“허허. 뭐 별거는 아닐세. 내가 이상하게 죽는 꿈을 꿔서…….”
“헉!?”
그 말에 데미안이 다시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가뜩이나 좀 전의 말실수 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하필…….
“허허,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닐세. 좀 이상한 상황이었어. 내가 아레스 제국군에게 죽는 꿈이었거든. 분명 생생한 꿈이었는데, 끝부분만 어렴풋이 생각이 나더라고. 일어나니 눈물도 좀 남아 있고…… 주책맞게도 말이야.”
“그건…….”
“아마 자네 생각대로일 거야. 전에 폐하께서 말씀하신 그 전생의 일이 아닐까 싶어.”
“그렇습니까…….”
그 말에는 데미안의 표정도 진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 일을 기억할 이유가 없지 않나? 그래서 어찌 된 영문인지 폐하께 여쭈어볼까 했지.”
“……두 번째 용건이 진짜셨군요.”
“아니지. 내 딸 얘기가 진짜고, 이건 곁다리지.”
“크흠, 네. 아무튼 그건 정말 폐하께서 오셔야 알 것 같군요.”
“아니, 이젠 아니야.”
“예?”
“남은 시간을 알았으니 그런 사소한 일들이야 아무렴 어떻겠나. 다행히 자네 말 덕분에 결심이 섰어.”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불안하게…….”
“허허. 그런 게 있다네. 그럼 ‘황실 기사’ 스텔라 에스페란자는 지금 어디에 있나?”
“그거야…….”
데미안에게 딸의 위치를 전해 들은 검공은 그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딸을 찾아 나섰다.
* * *
금발에 푸른 눈, 호리호리한 체형의 여기사가 연무장의 가운데에 앉아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동료들은 물론, 그 상관이라고 할 수 있는 기사도 감히 그녀를 방해하지 못했다.
그때.
“스텔라!”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그녀가 황급히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ㅃ……!”
반가운 얼굴을 보며 환한 표정을 짓는 것도 잠시, 이내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그녀는 반갑게 포옹하려는 아버지를 밀어 내며 정중히 예를 표했다.
“……대공 각하. 황궁에는 또 어쩐 일이십니까?”
그에 서운한 표정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선 검공이 이내 다시 웃으며 딸을 바라보았다.
“왜긴, 널 보러 왔지.”
“예? 이렇게 갑자기요?”
“저번에 했던 말, 생각해 보니 가능성이 있어. 나도 도와줄 테니 일단 해 보자꾸나.”
“예? 아니, 저번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타박해 놓으시고는…….”
“어쩌면 내 딸이 역사를 만들어 낼 수도 있지 않겠느냐. 그럼 이 아비가 확실히 도와줘야지.”
“……저번에는 사도라고, 당장 때려치우라고 하셨잖아요.”
“크흠, 그거야 그때고. 생각이 바뀌었단다.”
“흐음…….”
스텔라는 묘한 표정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다가 이내 씩 웃으며 그의 팔짱을 꼈다.
“뭐, 그렇다면 저야 감사하죠!!”
당연히 싫지는 않았지만.
“좀 전에는 그리 밀어 내더니?”
“이제 황실 기사 관둘 건데 뭐 어때요.”
“……굳이 관둘 필요까지는 없지 않느냐.”
“에헤이, 또 그러신다. 좀 전에 도와준다고 하셔 놓고.”
“그거야 고대 마법의 잔재 정도는 찾아내 줄 수 있으니까…….”
“제가 ‘직접’ 찾는 게 더 보람차거든요? 가능성도 발견했고.”
그리 말하는 스텔라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생기 넘치게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십여 년 전, 그녀가 태어날 당시 붉은 눈의 청년이 반짝이는 그 눈을 보고 별(Stella)이라고 이름을 지었을 때처럼.
“그래. 그렇게 원하면 해야지.”
“그런데 아빠,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셨어요?”
“흠…… 그냥? 우리 딸이 하고 싶은 걸 하게 해 줘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거 같아서?”
“으음.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죽…… 아니, 안 좋은 거라던데?”
그 말에 검공은 뜨끔할 뻔했지만,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미소를 보였다.
“내 가족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한 거니까.”
머리를 쓰다듬으며 하는 그 말이 쑥스러워서였을까.
스텔라가 살짝 얼굴을 빼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에이,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어색하게…….”
“이젠 솔직해지기로 했다.”
“예?”
거짓 없이 올곧은 기사의 표상으로 불리는 자신의 아버지를 아는 딸이 어색한 미소를 짓는데.
“난 이 나라가 아니라, 너와 네 엄마를 지키려고 싸운 거니까.”
돌아온 대답은 그녀를 뿌듯하게도, 또 불안하게도 만들었다.
“왜 그러세요, 아빠? 불안하게……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전혀. 그러니까 일단 우리 딸 목표를 위해 같이 노력해 볼까?”
“……정말, 정말 괜찮은 거죠?”
“그럼!”
– 가족을 지키기 위해!
꿈의 끝자락에 어렴풋이 기억나는 그 말은 말년에 이른 검공의 마음을 크게 변화시켰다.
그 자신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그렇게 10년 후.
“……그랬었나.”
어느 날 눈을 떴더니, 그날의 꿈이 다시 한번 선명히 떠올랐다.
“일어나셨습니까, 스승님.”
그리고 눈앞에는 전생에서는 인연이 없었던 지금의 제자가 서 있었다.
그 비참했던 역사를 없애고, 대륙을 아우르는 제국을 세워 그 안에 그와 가족들을 살게 한 제자.
“……어떠셨습니까?”
제자의 물음에는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었지만, 대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짓궂은 마음이 들어 바로 대답해 주기는 싫었다.
“오늘이 내가 가는 날이로군요, 폐하.”
“말씀 편히 하십시오, 스승님. 사석입니다.”
“그래도…… 아니, 아니지.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면 그래도 되겠지요. 아니, 되겠지. 그렇지, 로건?”
“……물론입니다.”
“그래. 그렇구나…….”
창가에서 들어오는 햇살이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몸에 감각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 또한.
이런 게 죽음이라면 듣던 것과는 꽤 다르구나 싶은데, 굳은 표정의 제자가 고개를 숙이는 것이 보였다.
“영혼의 상처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실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었다면 더 건강하게 오래 사실 수…….”
“아니다. 충분히,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이었다.”
다행스럽게 자연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맥라인 제국이 세워지고 이제 10년.
아직도 할 것이 많은 황제가 자신 하나만을 위해 이리 몰래 행차한 것만 해도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어땠냐고 물었더냐?”
“……예.”
“비참했지. 안타까웠고. 그래서 더 네게 고맙구나.”
왕국은 무너졌지만,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행복해졌다.
그래.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렇……군요.”
그 대답에 안심이 되었을까.
안도하며 웃는 제자의 몸이 순간적으로 투명하게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기분 탓이겠지.’
죽을 날이 오니 감각에도 이상이 생긴 것일 터였다.
“하나 아쉬움이 있다면…….”
“예?”
“……스텔라가 시집가는 것은 보고 가고 싶었는데, 그게 아쉬워. 그 말괄량이는 지금쯤 뭐 하고 있으려나.”
딸아이가 마음에 걸려 농담조로 한 얘기였는데, 제자는 다 준비를 해 놓은 듯했다.
“지금 방 밖에 있습니다. 사모님과 껴안고 울고 있는데, 불러 드릴까요?”
언젠가부터 제 품을 벗어난 제자.
신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어디까지인지 이제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갑자기 그 대단한 제자가 인상을 찡그렸다.
동시에 그 몸의 일부분이 투명해지는 것이 보였다.
“로건!?”
아까 본 것이 결코 착각이 아니라는 사실에 눈이 부릅떠지는데, 제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는 그를 막았다.
“괜찮습니다. 인과율의 반동에 아직은 익숙하지 않아 조금 흔들린 것뿐입니다. 아마 곧 컨트롤이 가능해지겠지요.”
“뭐!? 대체 그게 무슨…….”
할 말이 많았지만 제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아니더라도 괜찮게 만들 겁니다. 저 아시잖아요.”
“……그래. 그렇지.”
한동안 못 본 사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더 묻고 싶었지만, 이제는 정말 시간이 없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믿어야지.’
제자를 믿는다.
이미 신인이 되어 자신의 손을 떠난 아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마지막으로 해야 할 것은 제자를 신경 쓰는 것이 아니다.
“……부인, 아니 내 아내 아네스와 내 딸 스텔라를 불러 주겠느냐. 가능한 한 웃으면서 가고 싶구나.”
“뜻대로 하십시오.”
“그리고 뭔지 몰라도 절대 지지 말거라. 난 네 녀석을 그리 가르치지 않았으니.”
“……명심하겠습니다, 스승님. 그간 감사했습니다.”
“나도 고마웠다. 정말로…….”
그 웃음을 본 로건이 유령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동시에, 방문이 벌컥 열리며 딸아이가 뛰어 들어왔다.
“아빠!!!”
눈물범벅이 된 얼굴의 딸이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폐, 폐하가 그러시는데 아빠가 오늘…… 아, 아니지? 지, 진짜 아니지?”
울상이 된 딸의 얼굴을 보며, 그는 조용히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네 소망은 다 이루었느냐? ‘그것’은, 완성했느냐?”
그걸 위해 집을 떠나 있던 딸이었으니 그냥 물어본 것뿐인데, 바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지금 그게 문제야!?”
“……허허. 그래도 기세가 많이 바뀌었구나. 정말 성공한 모양이야.”
“아빠!!!”
오랜만에 만난 딸에게 해 줄 말이 이런 것뿐이라니.
그것이 미안해서 그는 조금 더 용기를 냈다.
“내 딸, 장하다. 그리고 사랑한다. 아빠 마음 알지?”
“아빠…….”
“여보…….”
스텔라도, 그리고 오랜 세월 그에게 힘이 되어 준 부인 아네스도 흐르는 눈물을 억지로 참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해 줄 수 있는 말은 얼마 없었다.
“덕분에 행복했어, 아네스.”
“저도…… 저도 감사했어요, 여보. 처음부터 지금까지 다…….”
“널 만나서 행복했다, 딸아. 태어나 줘서 고맙다.”
“나도!! 아빠 딸이라서, 흐윽, 흑, 에이씨…… 아빠, 가지 마! 가지 마, 응!?”
양손을 하나씩 나눠 잡은 아내와 딸이 구구절절한 속내를 늘어놓는데, 안타깝게도 그 손에서부터 감각이 슬슬 사라지고 있었다.
다행히 그 행복했던 시절이 고스란히 떠오르며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따뜻한 날, 맑은 하늘이 빛나는 날이었다.
* * *
[맥라인 제국 인물전>• 펠릭스 에스페란자
현시대에는 신황제, 현인신 등으로 불리며 지금도 추앙받는 로건 맥라인의 스승으로 유명한 이.
하지만 사실은 맥라인 제국의 전신, 그란디아 왕국 시절부터 가장 유명한 초인이자 검호로 유명했던 사람이다. 그가 있었기에 로건 맥라인이 있었고, 그가 있었기에 맥라인 왕국이, 제국이 성립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는 제국 초기, 검술의 형식에 마법의 발현식을 더한, 이른바 ‘검으로 그려 내는 전투 마법’ 마검술을 최초로 창안한 천재, 스텔라 에스페란자의 아비이기도 했다.
*마검술의 창시자 ‘스텔라 에스페란자’ 편에 별도 기술
그녀가 창안한 마검술은 제국 초기에는 빛을 보지 못했기에 그럴듯한 이명도 얻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녀가 누구인지 생소한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다 그 마검술이 후세에 바론 아레스의 손에 들어가 초마검사의 재능을 깨우게 되니, 제국의 씨앗을 심었던 이의 후손이 훗날 제국에 재앙의 씨앗을 뿌린 격이라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제국의 반역자 ‘바론 아레스’ 편에 별도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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