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Side story (15)
외전 15화. 에일렌 플로이드 (2)
*현생
“하……?”
검을 휘두르던 자세 그대로 멈춰 서자 그 반동으로 스르륵 흘러내린 붉은 머리.
이내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오러’가 연무장 전체를 휘감으며 견고한 철옹성을 만들어 냈다.
익숙한 오러의 흐름, 하지만 그 붉은 오러는 이제 개인을 지키는 수준이 아니라 일개 대대를 지킬 수 있는 수준으로 확대된 것이었다.
더하여 자신의 몸 근처로만 압축한다면 다른 ‘오러마스터’도 뚫을 수 없는 견고한 방패가 되리라는 걸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전장 지배 권능에 더해서 병사들의 방어력 전체를 일정 수준 상승시키는 식으로도…….’
막 오러를 각성했을 당시에도 강력하기만 했던 그녀의 특성, 불굴의 성채가 오러마스터가 되며 그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그것도 여태 그 누구에게도 들은바 없는 특이한 형태로.
하지만.
에일렌은 그런 성취감보다도, 그 순간에 떠오른 원래는 몰랐어야 했을 ‘기억’에 더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승격의 와중에 헛것을 본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오러마스터의 견고한 정신력은 그것이 착시나 환시가 아닌 진실의 일부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전생이라…….”
온갖 상념이 뒤죽박죽 떠오르는 순간,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이때가 오는구려.”
흠칫 놀라 돌아보니,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폐하!?”
“거 아무리 폐관을 오래 했어도 그렇지, 둘만 있는 자리에서 폐하는 좀 섭섭합니다, 황후?”
자기도 황후라고 하면서.
“알고 온 거예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은 에일렌은 오랜만에 보는 남편을 끌어안으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콧속으로 밀려드는 익숙한 체향.
승격과 전생, 급격한 기억의 변화로 찾아온 혼란이 빠르게 안정되는 것 같았다.
“……궁금한 것도 있고 해서.”
“궁금한 거요?”
이미 신인의 경지에 도달해 현세에 모르는 것이 없다는 현인신.
그래서 때로는 자신도 낯설게만 느껴지는 남편이 뭐가 궁금한 것일까 싶었는데, 그 시선을 받은 남편이 쓴웃음을 지었다.
“전생의 일은 나도 모르니까요.”
“그게 궁금했어요? 내 전생이?”
“오러마스터의 한계를 넘어서서 인과도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당신과 나 사이에 내가 모르는 연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궁금할 수밖에요.”
“……그러니까, 내가 전생을 기억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제야 찾아왔다?”
“승격할 때까지 수련만 하겠다고 한 사람이 누군데?”
짓궂은 반문에 짓궂은 타박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보다 더 보고 싶은 한 사람을 떠올리며 화제를 돌렸다.
“아루엘은요?”
“열심히 훈련하고 있습니다. 꼭 엄마한테 한 방 먹이고 말겠다면서 이를 갈고 있지요.”
사랑스러운 내 딸이?
당혹스러운 대답에 눈동자가 흔들리는데, 남편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폐관하기 전에 훈련을 좀 심하게 했다면서요. 거기다 폐관 수련 기간이 반년이 넘었으니 엄마를 원망할 만도 하지요. 안 그래도 제왕학 배우느라 부쩍 짜증이 많아지기도 했고.”
“……아루엘부터 봐야겠네요.”
“당연히 그래야죠. 그런데, 그럼 내 질문엔 답 안 해 줄 거예요?”
“나중에, 당신 하는 거 봐서요.”
“하……?”
그다지 대단치도 않은 인연이었지만, 쉽게 말해 주기가 싫었다.
‘당신도 말 안 해 줬잖아요.’
오러마스터에 이른 영혼이,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남편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 주었으니까.
‘상태가 이런데도 왜 말을…….’
형용할 수 없는 남편의 거대한 영혼을 밀어 내려는 듯한 이 세상에, 남편이 혼신의 힘을 다해 매달려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으니까.
남편의 상태가 이 지경인 줄 알았다면, 감을 잡았다고 수련이니 뭐니 서두를 것이 아니라 남편 곁에 오래 있는 길을 택했을 것이다.
에일렌은 그런 서글픈 마음을 숨기며 애써 웃음 지었다.
“그러니까 나한테 잘해요. 하는 거 봐서 마음에 들면 말해 줄 테니.”
헛웃음을 짓는 남편의 모습이 조금은 원망스러웠다.
그그그긍.
“왈!”
“그래, 티르. 너도 오랜만이야.”
“왈왈!”
연무장 문을 나서자마자 반기는 은빛 강아지, 아니 늑대.
자신을 보며 반갑게 짖던 녀석이 이내 옆에 있는 남편을 보며 뚱한 표정을 지었다.
“킁!”
마치 ‘나 몰래 언제 들어갔어?’라고 묻는 듯한 얼굴.
고대 신수의 후예이자 현재는 마수의 왕인 녀석이니만큼 표정에 드러나는 생각을 실제로 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남편 역시 그렇게 생각했는지 어이없는 눈으로 티르를 바라보았다.
“내가 내 마누라 만나는데 네 허락을 받아야 하냐?”
“크르르.”
“헐…….”
“그러지 마요. 1년 내내 밥도 갖다주고 경비까지 서 준 애한테.”
“애라니, 저 녀석 나이가 우리 조상뻘…….”
“컹!”
“알았다, 알았어. 너 이 녀석 진짜…….”
티격태격하는 남편과 티르를 바라보는 에일렌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단순히 오랜만에 보는 정겨운 광경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진해지고 있어.’
좀 전에 자신을 만난 직후에는 흐릿했던 남편의 존재감이, 자신과의 대화가 이어질수록, 티르와의 귀여운 다툼이 이어질수록 조금씩 짙어지고 있었다.
절박해 보이던 남편의 영혼이 조금씩 여유를 되찾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저게 인연의 힘이라는 걸까.’
스승 검공에 이어 시아버님과 어머님이 짧은 시간을 두고 연달아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부터 유독 힘들어 보이던 남편.
그것이 단순히 심리적인 이유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내 경지가 올라 조금이나마 수명이 늘어난 게 다행이네.’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마음에, 이번에는 진심으로 미소가 지어졌다.
동시에, 속으로는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티르라면…….’
아무리 오러마스터가 되었어도, 아니 오러마스터가 되었으니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지금부터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수련만 하더라도 남편이 도달한 신인의 경지에 닿을 수 없음을.
그렇다면 수명 역시 인간의 한계를 크게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저 인연의 힘이 남편을 세상에 머물게 하는 거라면, 자신을 비롯한 초인들이 전부 세상을 떠나는 순간 저 힘도 다할 것이다.
그 순간 남편이 어떻게 될지 상상하기도 어려웠지만, 남편이 저리 발버둥을 치는 것을 보니 그리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니.
‘긴 수명을 가진 티르라면 저 인연의 힘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자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게도 남편이 소중하지만, 이제 막 성립된 맥라인 제국에는 오직 남편만 믿고 사는 수많은 신민이 존재했다.
남편도 이 세상에 붙어 있기 위해 저렇게 힘을 쓰고 있는 거라면, 결국에는 티르가 가장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티르, 로건이랑 좀 친하게 지내. 원래 네 옛친구의 후손이라며.”
하여 유독 자신을 따르는 강아지, 아니 신수를 쓰다듬으며 그리 당부해 보았다.
물론.
“낑…….”
녀석은 탐탁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긴 세월을 두고 계속 부탁하면 관계가 좋아지지 않을까.
에일렌은 그렇게 생각하며 녀석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로부터 오십 년 후.
여느 날처럼 가볍게 눈을 뜬 아침.
“당신…….”
에일렌은 서글픈 눈으로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남편의 모습이 아니더라도 오늘이 자신의 마지막 날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오러마스터의 힘으로 간신히 유지했던 신체 능력이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자연스레 늙어 가도 괜찮다니까요.”
“그런 소리 말아요.”
슬픔이 가득한 남편의 눈동자를 보니 미안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애써 젊음을 유지하려 하지 않았다면 몇십 년은 더 살 수 있었겠지만, 멀끔한 남편 옆에서 혼자만 주름이 늘어 가는 것은 싫었으니까.
조금은 서글펐지만, 여한은 없었다.
언제고 이날이 올 것임을 알았기에 더욱 열심히 살았다.
더욱 열심히 남편과 함께, 그리고 딸과 함께 추억을 만들어 갔다.
‘그러니 충분해.’
거기다 남편과 함께 만든 제국은 이제 튼튼한 반석 위에 올라 있었고, 이미 딸이 아닌 손자가 3대 황제로서 나라를 평화롭게 다스리고 있었다.
“나는, 나는 행복했어요. 당신은요?”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역시나 좀 더 곁에 있고 싶다. 자신마저 떠나면 남편이 더욱 힘들어질 것을 알기에 더더욱.
“물론 나도 행복했어요.”
그 대답이 그녀를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음을 알기에, 더 이상 삶을 이어 가면 남편이 잘못될 것임을 알기에 억지를 부릴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 마음을 알았는지, 남편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다시, 다시 만날 수 있어요, 우리. 꼭 다시.”
무슨 뜻일까?
묻고 싶었지만, 고개를 젓는 남편의 모습을 보니 물어선 안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눈물이 가득 고인 남편의 눈에 비친 희망의 빛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금세 마지막 미련을 털어 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좀 돌아다니고 싶네요. 아루엘도, 빅터도 만나 보고요.”
“……그럽시다.”
세월이 준 침착함으로 서글픈 마음을 억지로 가라앉힌 에일렌은 남편과 함께 방문을 나섰다.
마주친 시종과 신하들 모두가 극공경의 예를 취하는 것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맑은 하늘에 따스한 봄 날씨, 황궁의 창문 밖으로 보이는 화려한 제도의 풍경 또한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분명 아름답지만…….
제국 성립 전, 치열하게 살았던 그때가 더욱 그리운 것은 왜일까.
‘젊음이 그리운 것인가.’
오러의 힘으로 억지로 유지하는 이 젊은 겉모습이 아닌 영혼의 젊음.
미숙하고 어리석기도 했던 그 시절이 이상하게 그리웠다.
하지만 또한, 그 시기를 발판 삼아 열정적으로 살아온 긴 인생 자체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다.
행복했고, 자랑스러웠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이 단순한 억지 대련이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고마웠어요.”
“나도 마찬가지요.”
깍지를 낀 손에서 느껴지는 체온은 마지막까지 따뜻하기만 했다.
* * *
[맥라인 제국 인물전>• 에일렌 플로이드
현인신 로건 맥라인 황제의 아내이자 맥라인 제국 초기 여러 오러마스터 중 한 명.
2대 황제 아루엘 맥라인의 생모이자 3대 황제 빅터 맥라인의 조모이기도 하다.
*제국의 역대 황제 편에 별도 기술.
맥라인 제국 성립 전부터 남편의 곁에서 온갖 전장을 함께 겪으며 제국을 세울 반석을 만들었다.
어린 나이에 초인의 경지에 오른 재능과 실력도 실력이지만, 후일 제국의 황후로 자리한 후에는 그 미모가 더욱 주목을 받았다. 신황제의 부인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 스스로의 권능이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90세의 나이로 생을 마칠 때까지 마치 20대 같은 젊은 미모를 유지했다고 전해진다. 그 아름다움에 더해 아랫사람들에게도 예의를 잃지 않으니, 이후 황위에 오른 아루엘 황녀가 그런 어머니의 성품을 배웠다는 설이 유력하다.
다만 후세의 일부 역사가가 아쉬워하는 점은 그렇게 젊고 강인했던 황후가 자식을 하나만 낳았다는 것이다. 맥라인 황실 직계 계보가 그 이후 쭉 위태위태하게 이어진 것이, 결국 중세 이후 제국의 흔들림이란 결과를 낳았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다수의 역사가는 막 성립된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제국에 후손이 많았다면 분란만 일어났을 것이라 말하고 있다.
저자의 의견을 보태자면 실제로 신황제의 동생, 로니안 대공의 자식인 아서 맥라인의 존재만으로도 황실에서 말이 많았다고 한다.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아루엘 황녀 대신 후계로 꼽히지 않을까 생각했던 신하들도 많았던바. 그가 황궁을 나가 아레스 가문을 연 것이 자의인지 타의인지는 몰라도 신의 한 수였음은 틀림없다.(절대 신황제의 강요였다는 은유가 아니다.)
그녀가 작고할 당시, 당일에도 여느 때와 같은 젊고 건강한 모습으로 황궁을 둘러보고 모든 이들에게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 그날의 일은 제국 사서마다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날이 에일렌 황후와 더불어 신황제 로건 맥라인이 대중 앞에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냈던 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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