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Side story (16)
외전 16화. 일리아 가본
*전생
“아문다의 사제 일리아 가본. 그대를 주교로 명하며, 그란디아 교구로의 파견을 명한다.”
중앙 신전의 대전을 울리는 목소리.
“그대는 신들게 받은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겠는가?”
근엄한 인상의 교황, 율리오 움베르토 1세의 말을 듣는 일리아의 고개가 가볍게 숙어졌다.
“아홉신들께 영광을. 아문다 님께 감사드립니다.”
그 말과 함께 일리아는 불과 24살의 나이로 아문다의 주교직에 봉해졌다.
– 저 나이에 어떻게 주교를?
– 모르지, 몸이라도…….
주변에서 들리는 더러운 소리들은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타락하지 않은 사제들이 그나마 많다는 중앙 신전이라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그나마.
신성력이 넘쳐흐르는 사제를 일반 사제로 둘 수 없다는 율법 정도는 알 만한 자들일 텐데도 저리 입방아를 찧는 것은 시기심 때문이리라.
무엇보다 현실은 신성력의 증폭 속도가 너무 빨라 추기경들의 견제 차원에서 동쪽의 소국으로 추방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일리아는 오히려 기꺼웠다.
‘그란디아에 가면 이런 꼴을 덜 보지 않을까.’
그건 착각이었다.
* * *
3년 뒤, 그랑 신전.
“일리아 주교, 또 빈민가에 다녀오는가. 쯧쯧, 쓸데없는 짓을.”
그란디아 교구장이자 대주교, 파미엘 게른하임이 신전에 들어서는 그녀를 타박했다.
어려운 이를 돕는 것이 왜 쓸데없는 짓이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이미 다른 사제들에 대한 기대를 접은 지 오래.
일리아는 그저 고개만 슬쩍 숙여 예를 표한 뒤 그대로 그를 지나쳤다.
“우리 사제는 귀한 신분이야. 천한 것들과 어울리지 말게, 일리아 주교. 나 참, 말을 해도 듣질 않으니…….”
쓰레기 같은 소리는 한 귀로 듣고 흘리면서 말이다.
내전이 한창인 시기, 끝도 없이 그랑에 흘러들어오는 유민들이 얼마나 힘들어하고 있는지를 왜 저치는 모를까.
‘지혜롭고 현명한 신 아문다시여. 제게 어찌, 어찌 이런 시련을 내리십니까.’
방으로 돌아온 일리아는 눈을 꼭 감고 기도를 이어 갔다.
아무리 기도를 한다 해도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 * *
그란디아의 재앙은 내전이 끝이 아니었다.
내전이 끝나고 이어지는 폭정.
끝없이 신음하는 백성들을 위해 일리아는 또 움직이고 움직였다. 품위 유지비를 비롯한 모든 돈을 빈민들에게 쏟아붓고, 아픈 이를 신성력으로 치유했다.
하루하루 고난이 이어지던 어느 날.
곪고 곪아서 더 이상 곪을 곳도 없을 것 같던 나라는 더 큰 재앙을 맞이했다.
제국의 침략이라는 엄청난 재앙을.
그리고 그란디아 교구에는 일순간에 수많은 귀족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내, 내가 누군지 알아!?”
“문 열어! 문 열라고!”
“내가 바로 더글라스 공작의 사돈의 사촌의 아들이다!”
신전의 이름에 붙어서 연명하고자 하는 버러지들.
진짜 실력 있는 이들은 전선으로 나갔거나, 이미 이 나라를 뜬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절대 열어 주지 마. 저놈들을 받아들였다가는 제국군이 우리 신전까지 침범할 테니.”
창백하게 질린 안색의 대주교, 파미엘은 원래 사제가 갖춰야 할 자비심 따위는 한 줌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애초에 신전에 몰려드는 떨거지 귀족들이 자비를 베풀 만한 사람인지는 둘째 치고 말이다.
하지만 일리아는 온전히 그 지시를 따르지 못했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 시국에 외부로 나가 봉사 활동을 하겠다고?”
파미엘의 볼품없는 얼굴이 더욱 일그러지는 것을 보면서도 일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시국이니까 더 해야죠. 그게 신의 뜻을 따르는 사제가 해야 할 일이니까요.”
그녀로서는 당연한 말을 했을 뿐인데, 파미엘의 표정은 더욱 험악해졌다.
“세상에 사제가 자네뿐인 줄 아나!? 혼자 잘난 줄 알아!? 도대체 정신이……!”
도대체 자신의 어떤 말이 대주교의 신경을 건드렸을까. 어쩌면 저 늙고 부패한 사제도 찔릴 양심이라는 게 남아 있었던 걸까.
파미엘이 연달아 고함을 지르며 헛소리를 늘어놓는데, 그나마 동의할 만한 소리도 나왔다.
“……사람을 가려 치료해도 신성력은 변하지 않아! 신분제도 신의 뜻이란 말이다! 너처럼 빈민을 위하는 척 신민들에게 선심을 쓰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증거야!”
일리아가 평생을 고민해 온 의문에 대한 부패한 사제 나름의 답.
독실하고 신실한 고행자는 한 줌의 신성력을 얻지 못하는데, 어찌하여 경전을 읽었을 뿐인 자신은 강대한 신성력을 가지는지.
그리고 왜 부패한 사제들에게서도 신성력이 발현되는지.
감히 신을 의심하는 것 같아 깊게 하지 못했던 생각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영혼에 상처를 남기고 있었다.
그러니 더욱 떠나고 싶었다.
“신전이, 신이 백성을 버리지 않았음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그리하면 신전의 명예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겠지요.”
“뭐……?”
그 말이 파미엘의 폭언을 멈추었다.
세상으로 나가 바닥을 친 신전의 명예를 조금이나마 끌어올리겠다.
험한 일을 자처해 그 공을 신전으로 돌리겠다는 말이라.
“……흥, 마음대로 하게.”
파미엘은 결국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 * *
전란의 세상에서 여자가, 특히나 아름다운 여자가 홀로 어렵고 힘든 곳을 찾아다닌다.
그것은 어찌 보면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아니, 최악의 경우에는 차라리 죽는 것보다 못한 꼴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일리아가 수년간 쌓아 온 덕이 그런 최악의 가능성을 미연에 차단했다.
“빈민가의 성녀시다!”
“감히 누가 저분을 건드려!”
“차라리 나를 죽여라, 이놈들아!”
일리아의 곁으로 인의 장벽을 치고 모여드는 사람들.
하나하나는 무력한 백성일지 모르지만, 그 수가 수백에 달하자 강력한 힘이 되었다.
더구나.
“오오, 기적이다! 기적이야!”
“진짜 아문다의 성녀님이시다!”
연일 신성력을 써 가며 지치고 다친 이들을 치유하는데, 이상할 정도로 신성력이 빨리 차오르는 걸 넘어 나날이 깊어져만 갔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녀의 곁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의 수는 더욱 많아졌다.
그란디아가 멸망을 향해 치달아 가는 와중에도 계속.
결국 큰 힘을 가진 자의 압박도 들어왔다.
“그대가 성녀가 맞는가. 나를 따라와라!”
어느 날 그녀 앞에 나타난 일단의 기사들.
“무슨 일이신지요?”
“귀한 분께서 그대를 필요로 하신다. 잔말 말고 따라오라니까!”
스르릉.
불꽃 속에 핀 장미, 독특한 문양을 새긴 기사가 검을 빼 들었다.
하지만 일리아는 주눅 들지 않았다.
그녀의 곁에 있는 수천의 난민이 기사단을 막아 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믿는 것은 그녀 스스로를 그토록 고뇌하게 만들었던 신분.
“저는 신전의 주교 신분을 가진 사람이기도 합니다. 지금 저를 겁박하시겠다는 겁니까?”
그 말에 기사가 주춤하자, 상황을 지켜보던 그들의 대장이 나섰다.
“……후환을 생각해야 할 정도로 사정이 여유롭지 않소이다. 성녀, 아니 주교님. 부디 우리로 하여금 괜한 피를 보게 하지 말아 주시오.”
은발, 은안의 중년 기사가 침중한 표정으로 은빛 채찍 같은 포스블레이드를 꺼내 드는 것을 본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그들을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를 만났다.
“놈이다!”
“각하를 지켜라!!”
“대(大)비프로스를 뭘로 보고!”
로저 비프로스 백작, 중상을 입을 그를 치료하고 있는 와중에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러다 이내.
“찾았다.”
히죽.
천막을 젖히며 들어온 푸른 장발의 사내.
온몸에 피가 덕지덕지 튄 남자가 살벌한 미소를 지으며 백작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적청의 오드아이, 그 살기에 찬 미소와 함께 칼날 위로 솟아오르는 회색의 오러.
그것을 보는 순간 일리아는 최근에 들었던 소문을 떠올렸다.
이 난리 통에 그란디아의 귀족들만을 골라 죽이고 다닌다는 오러유저.
“귀족 학살자…….”
“기어코 네놈이……!!”
신성력으로 치료를 받고 정신을 차린 로저 비프로스 백작이 고함을 질렀지만.
“죽을 시간이다, 로저 비프로스.”
싸늘한 목소리와 함께 날아든 번개 같은 검격에 속수무책으로 심장을 내어 줄 수밖에 없었다.
“끄, 끄륵.”
그리고.
“……사제인가?”
붉고 푸른 두 눈동자가 그녀를 향하는 동시에 자연스레 쏘아지는 기세.
일리아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침을 꿀꺽 삼켰다.
‘생각보다 어려 보이는데.’
이 상황에서 문득 든 생각에 스스로 황당해하면서도.
“아문다의 사제, 일리아입니다.”
“……사제답지 않게 올곧은 눈이로군. 뭐…… 봐주지.”
언제부터 올곧은 눈이 사제답지 않은 것이 되었을까.
일리아는 칭찬이 아니라 욕을 들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돌아서는 사내를 향해 외치고 말았다.
“왜 이런 일을 하시는 거죠? 왜 이 나라에 혼란을 부추기는 겁니까! 신이 두렵지도 않으세요!?”
순간 멈칫하며 다시 돌아보는 사내.
하지만 이내 사내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신이…….”
사내가 사라지면서 던진 말.
그 한마디는 오래도록 그녀의 마음속에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 신이 정말 인간을 위한다면, 세상이 이따위일 리가 없지.
그녀가 사제로서 살아온 평생 동안 고민해 온 화두.
그것은 신앙과 참혹한 현실의 틈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비수나 다름없었다.
*현생
“그 말이 가슴에 콱 박혔지요. 그래서 구휼행을 관두고 신전에 다시 처박혔었더랍니다. 충격이 컸거든요. 당시의 나는 너무 맹목적이었어요.”
“그래서 대체 그 남자가 누구라는 겁니까?”
바로 당신이요.
입을 삐죽이는 남편을 보며 일리아는 속으로 웃었다.
“그냥 말 한마디 나눈 인연인데 질투하는 거예요?”
“그런 게 아니라 당신이 그 남자를 잊지 못한다길래…….”
투덜거리는 남편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나왔다.
그리고, 그래서 더 슬펐다.
‘전생의 일 같은 것, 떠올리고 싶지 않았는데…….’
그건 지금 그녀의 생이 다해 간다는 증거이기도 했으니까.
거짓된 신, 9대신이 그녀의 영혼에 남긴 상처는 너무나 깊고 깊어, 신검 하먼 덕분에 치유된 뒤에도 큰 후유증을 남겼다.
더구나 신성력이 사라지면서 몸도 급격하게 쇠약해지기 시작했으니.
“제가 오십을 넘긴 것도 기적이에요.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
대답이 없는 남편.
마주 잡은 두 손에 담긴 체온이, 그 떨림이 그대로 전해져, 일리아는 입술을 꽉 깨물며 애써 슬픔을 삼켰다.
그래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억지로 미소를 지으려는데, 간신히 붙잡고 있는 정신이 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도 오늘에야 최후를 예감했으니 제국 수도에 있는 아들들을 불러올 시간은 없었다. 자연스레 거리와 상관없이 공간을 오갈 수 있는 한 사람이 떠올랐다.
“폐하께서는 안 오시겠죠?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내가 오시지 말라 부탁드렸습니다. 마지막 순간만큼은 당신과 나만 있었으면 해서요.”
흔들리는 붉고 푸른 두 눈동자가 더욱 안쓰러웠다.
떠나는 자신보다 남겨질 사람이 더욱 힘들 테니까.
그러니.
“절대 나 없다고 움츠러들거나 의욕을 잃거나 하면 안 돼요.”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티를 내지 않으며 남편이 있는 곳을 바라보는 시늉을 했다.
“왜 그런 말을…….”
“부디 열심히 살아요. 제국과 폐하는 아직 당신을 필요로 해요.”
목소리에도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힘주어 당부하려 했는데, 점점 기력이 다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두 손에서 전해지는 남편의 온기는 여전했다.
“……천국이 있다면, 우리 다시 만날 수 있겠지요?”
“그럼요.”
거짓된 신을 쫓아냈으니 진실로 천국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을 버린 사제가 천국을 이야기하는 것만큼 우스운 일이 있을까.
하지만.
“다시, 다시 만날 수 있어요.”
일리아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으로 생애 마지막 거짓말을 내뱉었다.
“꼭 다시 만나요, 우리.”
“그럽시다.”
신을 버렸지만, 인간을 얻었다.
마지막 가는 길에 느껴진 따스한 체온만으로도 일리아는 웃을 수 있었다.
* * *
[맥라인 제국 인물전>• 일리아 가본
성녀 출신.
9대신이 세상을 버린 후 개편된 교단의 초대 교황으로 추대되었으나, 맥라인 제국 공신인 빅토르 아이반과 혼인을 선언하며 교단의 공신력을 잃었다.
*오러마스터 ‘빅토르 아이반’ 편에 별도 기술
그 남편 역시 영지를 반납하고 제국의 구석구석을 살피는 감찰 업무를 자원했다. 그녀는 그 옆에서 빈민들을 어루어 만지는 구휼행을 통해 이름을 알렸다.
세간의 비난과 구설에 상관없이 두 부부는 말년까지 금실 좋은 모습을 보여 주었지만, 신성력을 잃은 후유증이 컸던 탓인지 남편과는 다르게 갓 오십을 넘긴 나이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녀의 사후 5년 뒤에 세상에 나온 그녀의 저술서 ‘신을 버린 인간’은 당대 신학계에서 금서로 지정되는 소동까지 벌어지며, 아이반 후작가에 큰 오점으로 남는다. 물론 제국 말기에 이르러서는 종교계의 필독 도서로 자리 잡았고, 후대에 다시 성녀의 위에 추대되는 명예의 질곡을 겪는다. 일부 역사학자는 그 금서가 타르 아이반을 통해 바론 아래스에게 전해지면서 그의 성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하지만, 명확한 증거는 없다.
*제국의 반역자 ‘바론 아레스’ 편에 별도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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