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Side story (18)
외전 18화. 남부산맥을 넘어
드디어 세상에 남겨진 모든 인과가 끊겼다.
그 말은 그가 다른 차원으로 떠나도 그로 인한 반동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토록 기다렸던 순간.
스스로를 봉인했던 석실을 나와 세상의 정보를 접하자 그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손자가 만든 대규모 폭발 마법이 마지막 인과를 끊었다는 것을.
빅토리아가 자신의 봉인지에 남겨 놓은 보호 마법이 아니었다면 조금 낭패를 볼 뻔했다.
“이건 좀 씁쓸하군.”
나를 분노하게 해서 뭘 할 생각이었던 것이냐, 가엾은 손자야.
허망함에 잠시 생각에 잠기는데.
“누구……십니까?”
묘한 마법으로 골렘을 뒤집어쓴 듯한 녀석이 말을 걸었다.
전투 마법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정교한 골렘의 투구 안에서 들려오는 동굴 같은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강력한 골렘에 포스와 마나를 덧씌운 듯한 창의적이고 재밌는 수법.
거기에 담긴 무궁한 잠재력도 인상 깊었지만, 그보다는 그 근간에 더 눈길이 갔다.
“골렘학파의 마법을 포스에 결합해서 변형시킨 것이냐? 더구나 그 발동은 검으로 뿌린 마법이라…… 마검술? 하, 그건 스텔라가 연구하던 거였는데? 참 묘한 인연이 얽힌 수법이구나.”
“그, 그걸 어떻게, 서, 설마…….”
“그래. 바론이라는 아이가 그런 기술을 쓴다 들었는데, 그게 너로구나.”
가볍게 손을 휘젓자 일어난 황금빛 오러가 녀석이 덮어쓴 골렘 비슷한 장갑을 그대로 지워 버렸다.
“커흑!?”
“엄살 부리지 마라. 반작용도 지웠으니.”
골렘 속에서 강제로 끄집어낸 녀석은 붉은 머리 붉은 눈, 맥라인의 핏줄을 확실히 이은 티가 나는 놈이었다.
“……어쩌면 저 차원의 지성체들은 나를 마왕이라 부를지도 모르겠구나.”
어차피 그대로 둔다면 닻에 깔려 추락하는 이 세상과 함께 저 차원 역시 박살이 날 것이다.
다만 그것을 증명할 방법은 없는바.
‘말로 설득하긴 어려울 테니 무력을 써야겠지.’
씁쓸한 결론에 절로 한숨이 나오는데.
“컹!”
“네가 있으니까 더 어렵지, 인마. 너, 웬만하면 변신하지 마라. 굳이 안 해도 전투력 꽤 발휘할 수 있잖아.”
“크르르르.”
“성질은…… 씁.”
로건은 티르를 보며 앞으로의 일에 대한 부담감을 떨쳐 내려 애썼다.
그리고 그 초월자의 한숨은, 수천 년간 나름의 발전을 겪어 왔던 ‘타란’ 차원에 재앙의 폭풍이 되어 현신했다.
* * *
타란, 그 평화롭던 세상에 재앙의 화신이 나타났다.
붉은 머리 마왕이 현신하여 모든 종족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반항하는 모든 이를 참살하고, 도망치는 모든 이를 마왕의 사냥개가 쫓아 죽인다.
대항하다 죽거나, 복종하여 음식이 되거나.
그 무시무시한 소문을 처음 접한 이들은 무슨 헛소리냐고 웃어넘겼다.
하지만 실제로 드워프 중 가장 큰 성세를 자랑하던 땅바위 부족과 엘프 중 가장 높은 성세를 자랑하던 높바람 부족이 통째로 실종된 사실을 접한 뒤에는 공포에 떨 수밖에 없었다.
핏자국 하나 없이 대도시의 모든 사람이 증발해 버리는 사건이 연달아 일어난 상황.
그것을 조사하러 나선 드래곤 로드와 용인족 장로들마저 그대로 실종되어 버렸을 때는 그야말로 온 세상이 패닉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마왕이 드래곤마저 잡아먹었다!
그것은 고대부터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마룡의 난’이나 ‘마나가 사라지는 세계’에 대한 전설도 한 수 접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무시무시한 공포, 현실에 벌어진 완벽한 재앙이었다.
심지어 그 재앙은 실시간으로 진행되며, 불과 50년 만에 타란 내 드워프, 오크, 엘프와 드래곤, 용인족 대다수를 집어삼켰다.
붉은 공허의 마왕.
대하는 모든 것을 사라지게 만드는 자.
그 재앙을 일으키는 자를 칭하는 말이었다.
그랬기에 지하 도시, ‘붉은 망치’ 한가운데 붉은 머리 ‘인간’이 나타났을 때.
붉은 수염 부족의 드워프, 나타샤는 기겁을 하며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이미 드워프들의 모든 도시가 유령 도시가 되어 버린 상황에 마지막 남은 그들의 희망, 붉은 망치 한가운데 나타난 인간.
그것도 붉은 머리.
“마, 마왕이다!!!!”
그녀의 비명이 도화선이 되어 대도시 붉은 망치를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그들과 조상들이 긴 세월을 기울여 개발한 무기들이 한순간에 방향을 바꿔 도시의 중심을 겨누기 시작하는데.
“후, 이번에도…….”
그 대상이 된 인간은 그저 가볍게 한숨을 내뱉는 것이 고작이었다.
“마지막까지 이러네. 진짜 지겹다, 이놈의 드워프들.”
리베라티오를 몇백 배 강화한 듯한 강렬한 파괴력을 가진 화포.
이 세계에 와서 본 것 중 가장 놀라운 물건이지만, 마나는커녕 가장 기본적인 의지조차 담기지 않은 사출형 무기에 불과했다.
그런 것으로는 그에게 티끌만 한 상처도 낼 수 없었으니, 지금 나오는 한숨은 그저 귀찮음의 표현일 뿐이었다.
“또 도망 다니는 애들 하나하나 잡아다가 차원 격리 시켜야겠네. 이번엔 얼마나 걸리려나.”
쏟아지는 화포 속에서, 로건은 한가하게 지나온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50년, 생각보다 짧게 걸렸어.’
초창기에 드래곤 로드와 용인족 장로들을 제압한 것이 신의 한 수였다.
그리고 그중 드래곤 로드가 차원의 파멸에 관해 인지하고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행운이었다.
처음 영언으로 나누던 대화는 이내 곧 2천 년 동안 변질된 고대어를 배우는 것으로 이어졌고, 그 언어와 타란 대륙의 상태를 완벽히 이해하는 데 반년의 시간이 걸렸다.
다행히 그사이 용인족 장로들에게서 꽤 괜찮은 발상이 나왔다. 그들의 놀라운 마법으로 차원 도약선(跳躍船)을 만들고, 그 안에 원 차원에서 이주해 온 모든 종족을 태워서 한 번에 차원을 넘는다는 대마법을 구상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 트러블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단 그 모든 마력을 감당하기 위해서 드래곤과 용인족을 비롯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마법사들의 힘을 거의 다 끌어와야 했으니까.
자연히 그 발상은 다시 무력행사로 이어졌다.
시작은 다른 종족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드래곤과 용인족들이었다.
– 차원 붕괴라니, 말도 안 되는…….
– 닥쳐라!
– 꾸에엑!
그러나 반발은 금세 제압되었고, 비록 강압에 의해서라지만 어쨌건 자신의 종족을 위해서라도 그들은 최선을 다해 마법을 만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가장 까다로운 드래곤과 용인족의 협조(?)를 받아 냈으니 모든 것이 쉽게 풀릴 줄 알았다.
오크들은 오크 로드들을 두들겨 패서 반강제로 합류시켰고, 엘프들은 세계수를 불태워 버리겠다는 가벼운(?) 협박으로 합류시켰다.
리자드맨들은 애초에 차원 붕괴의 영향으로 점차 추워지는 이 대륙 환경에서 멸종의 길을 걷고 있었으니, 얼씨구나 하고 은인처럼 그를 받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드워프들이었다.
산맥에 구멍을 뚫어 지하 도시를 짓고 사는 두더지 같은 것들.
땅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녀석들을 찾아내서 차원 격리선에 던져 넣는 것은 그의 힘으로도 꽤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었다.
거기다 무슨 공허의 마왕이니 뭐니 하는 이상한 소문을 퍼트린 탓에, 개인적으로 땅굴을 파고 숨어 버리는 놈들까지 등장한 상황.
그런 놈들을 하나하나 찾아내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티르에게 영혼의 냄새를 맡아서 추적하는 재주가 없었다면, 숨은 놈들을 찾는 데만 또다시 한세월이 걸렸을 것이다.
지금도 타란 차원 전체를 뒤지며 숨어 버린 드워프들을 추적하고 있을 티르에게는 마왕의 사냥개라는 별명까지 붙인 지긋지긋한 놈들.
“하아, 이 하마르 같은 새끼들.”
문득 그리운 친구의 되먹지 않은 성질머리가 떠올랐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가 피식 웃은 로건은 포화가 멈춘 지저 도시에서 또 숨어 버린 두더지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 고난의 시간이 이제 곧 끝난다는 것이었다.
* * *
우우우우웅.
무형의 힘, 마나로 이루어진 거대한 배.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이 커다란 땅덩어리는, 배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사실상 또 다른 대륙이나 다름없었다.
차원을 건너기 위해 임시로 만든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튼튼한 또 하나의 대륙.
그것은 타란의 모든 드래곤, 모든 용인족, 모든 엘프와 드워프의 마법사들이 모여 만들어 낸 쾌거였다.
“……덕분에 이런 마법도 써 보게 되는구려. 감사하오, 신인.”
“별말씀을.”
로건은 눈부신 금발 금안과 같은 색의 의복을 걸친 청년의 인사를 가볍게 받았다.
이 세계에 와서 만난 최고의 강자.
초월경에서 다시금 실로 오랜만에 특성 ‘업’까지 써서 제압해야 했던 상대였다.
지금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그 안에 도사린 것은 체고만 300m에 달하는 용.
드래곤 로드였다.
“그런데 이 모든 종족이 다시 그란디아로 돌아가면, 이미 자리를 잡은 당신의 세상에 큰 혼란이 일어나지 않겠소?”
“로드. 당신을 제외하면, 당신들 모두가 연합해야 제국의 상대가 될 겁니다. 쓸데없는 걱정은 하실 필요 없소. 당신도 괜히 현세의 일에 끼어들 생각 마시고.”
“허허. 신인께서 당부하신 일을 어찌 거역하겠소. 나 아르테미우스는 그란디아 대륙에서 벌어질 일에 ‘드래곤’으로서 일절 간섭하지 않을 것이오.”
“……믿겠습니다.”
우우우우웅.
“모두가 떠난 뒤에는 이제 차원을 도려낼 것입니다. 원래 남부 산맥 너머에 있었다는 바다, 그 바다를 한번 보고 싶군요.”
“……아름다울 겁니다.”
로건은 드래곤 로드의 말을 통해 그 광경을 상상하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품 안에서 검을 뽑았다.
우우우우우웅.
그것을 신호로, 차원 도약선이 투명한 벽을 넘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을 때.
드래곤 로드가 다시 물었다.
“이제는 말해 주실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예?”
“다시 모든 종족이 어우러져 사는 세상은 분명 더욱 시끄러워지겠지요. 그런 세상에서, 신인은 대체 무엇을 하려는 겁니까? 무너지는 세상 따위엔 관여하지 않고 상위 차원으로 가셔도 됐을 텐데?”
그 말에 로건은 환한 미소로 답했다.
“……그리운 이들을 다시 만날 겁니다.”
“예?”
드래곤 로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로건은 빙긋 웃기만 할 뿐 자세한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그의 검 끝에서 하늘 끝까지 황금빛이 솟구쳐 올랐고, 그것이 억지로 이어진 두 세상을 깨끗하게 잘라 냈다.
* * *
[맥라인 제국 인물전>• 아르테미스 드래건
제국의 변란 이후 50년 뒤, 세상을 격동시킨 ‘대이주’의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 제국에 나타난 기린아. ‘4대 황제’ 바론 아레스를 도와 혼란스러운 세상의 제도를 개편했으며, 제국이 이종족을 무탈하게 수용하도록 하는 데 힘썼다.
그 어렵다는 변형된 고대어에 통달하고 수많은 종족의 특성과 문화를 모조리 외우고 있던 최고의 외교가이자, 드래곤 랜드, 엘븐 하임, 테르티우스, 스웜프 랜드, 오크락 등의 이종족 국가와 제국이 공존할 수 있는 혁명적인 종족별 법률을 제정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제국 중기의 법률가 겸 행정가이다.
다만 그의 정체에 관한 낭설이 존재하는데, 일부 역사학자는 그가 폴리모프한 드래곤이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그 근거는 아르테미스가 대이주로 넘어온 이종족들과의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었다는 것과 자식도 남기지 않고 말년에 홀연히 사라졌다는 것, 그리고 결정적으로 드래건이라는 성을 썼다는 것이다.
하지만 등장부터 은퇴까지, ‘인간 순수주의자’들의 협박과 테러를 몇 번이나 겪으면서도 오직 뛰어난 행정가이자 법률가로서의 능력만 보였던 것을 생각하면 그저 루머인 것으로 추측된다. (저자의 생각을 더하자면 드래곤이 폴리모프했다고 드래건이라는 성을 쓰겠는가. 우습지도 않은 소리일 뿐이다.)
거기다 로건 교의 신실한 신자로 알려졌을 정도로 신인 로건 맥라인에 관한 연구에 푹 빠져 있었으니, 그가 진짜 드래곤이었을 확률은 거의 0%에 수렴한다는 것이 정론이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