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Side story (19)
외전 19화. 또다시, 만남
“에일렌! 엄마가 일 그만하고 밥 먹으러 오래!!”
“예, 메리안 아주머니!”
‘클레이튼’ 여관 앞에서 물을 긷던 붉은 머리 처자가 환한 미소로 검은 머리 이웃의 말에 대답했다.
아주 오랜 옛날 ‘대이주’ 시대에는 제국도 혼란스러웠던 적이 있었다지만, 이주해 온 모든 종족이 제국과 적극적으로 협력해 준 덕분에 이제 전란은 변방에서나 가끔 일어나는 사건일 뿐이었다.
그야말로 평화의 시대.
자연히 제도에 가까운 이 마을도 별다른 탈 없이 평온한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일렌은 이 평화로운 나날들이 지겹기만 했다.
특히나 ‘그 꿈’을 꾸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분명히 내가 기사였단 말이지. 거기다…….’
꿈은 시간이 지날수록 구체적으로 변했다.
무언지 알 수 없는 전투, 짙은 슬픔, 성취감.
그 끝에서 얻게 된 든든한 남편과 귀여운 반려동물, 그리고 딸까지.
‘내가 애를 낳다니 뭔가 부끄럽네. 근데 아기 정말 귀여웠어!’
조금 예스럽긴 하지만 평범한 시골 처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화려한 도시의 전경과 멋진 물건들.
그 모든 것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꿈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다.
낮잠을 잘 땐 꾸지 않는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그러니까 낮에 더 열심히 일하고, 밤에 푹 자야지.”
그리고 열심히 일해서 모은 돈으로 도시에 가는 거야.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니 괜히 즐거워서 힘차게 마지막 물동이를 채우는 순간.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어, 에일렌! 여전히 활기차구나.”
“하마르 아저씨!!”
대이주 직후에 태어났다는 드워프, 하마르.
그때부터 이 마을에서 쭉 살아온 이 마을의 터줏대감이었다.
“그런데 뭐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게야? 혼자만 웃지 말고 나한테도 알려 줘.”
“아,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냐. 지금도 헤실거리고 있는데.”
“아니라니까요!”
“아, 알았다. 거참, 애가 성질머리 하곤…….”
민망한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르자, 움찔한 하마르가 슬쩍 뒤로 물러섰다.
간신히 강적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고 생각한 에일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는데, 눈앞에 붉은 머리 붉은 눈의 사내가 서 있었다.
“힉! 패, 패드릭 아저씨!? 어, 언제부터 거기 계셨어요?”
“아, 조금 전부터. 내가 뭐 실수했나?”
“아, 아니에요.”
얼마 전 옆집으로 이주해 온 부부 중 남편.
살갑게 대해 주는 메리안 아주머니나 ‘또 다른 부인’ 레이나 아주머니와는 달리 인상부터 사납고 성격도 딱딱한 터라 은근히 부담스러운 인물이었다.
더구나 최근에 꾼 꿈에 나온 남편도 딱 저런 붉은 머리에 붉은 눈이었으니, 괜히 더 대하기가 어색했다.
다만.
– 대체 그 성격에 어떻게 저런 미인들을 부인으로 뒀을까? 부럽…….
최근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다 어머니한테 등짝을 얻어맞는 광경이 떠오르자, 자신도 모르게 살짝 웃음이 나왔다.
그러자 웬일로 목석 같은 아저씨가 마주 웃어 주었다.
“거 다행이구나.”
“그런데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그 낯선 미소에 살짝 당황하여 자신도 모르게 그리 묻고 말았다.
아차 싶은데, 정말로 기분 좋은 일이 있는지 패드릭이 진한 웃음을 보였다.
“그럼. 오늘 제도로 유학을 떠난 큰아들이 돌아오거든.”
“아…… 그 로니안과 닮았다는 형이요?”
“우리 로건이 더 잘생기긴 했지.”
헐.
목석 같은 아저씨인데 자식 자랑을 할 때만큼은 팔불출이 따로 없었다.
그보다 문제라면.
“로건? 큰아들 이름을 로건으로 지으셨어요? 로건교 사제들이 가만히 있던가요?”
“뭐 어떻냐. 전설에 따르면 그 신인도 우리처럼 붉은 눈에 붉은 머리라던데, 먼 친척일지도 모르지.”
“아저씨, 그런 말 함부로 하시면 큰일 나요.”
“허허. 괜찮다. 시대가 얼마나 지났는데. 게다가 요샌 황실도 붉은 머리가 아니잖느냐.”
“그거야 그렇지만…….”
그래서 더 로건교에서 환장하잖아요.
아, 그러고 보니 저 집 사람들을 사제들이 참 공손하게 대하긴 했다.
“아, 늦었군.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길도 어색한데…… 먼저 가 보마. 전차 시간 다 됐거든.”
“옙. 다녀오세요, 아저씨.”
“아, 시간 나면 빅토르네에 가 보거라. 동생이 태어났다는데, 아기가 아주 예쁘더구나.”
“아! 정말요!?”
“그래. 여자앤데 오빠랑 똑같이 짝누…… 큼, 눈동자 색깔이 다른데 참 예쁘더라. 빅토리아라고 이름 지었다던데.”
“오! 레이첼 아주머니가! 예, 바로 가 봐야겠네요! 감사해요!”
“그래. 나중에 보자꾸나!”
빅토르의 집으로 가는 와중에 만난 ‘펠릭스’ 아저씨네 꼬마 아가씨 스텔라와 수다를 떨다가 해가 질 녘에나 빅토르의 집에 들렀다는 것은 작은 실수.
놀러 온 소꿉친구 ‘릭’을 좀 패 주다가 애기까지 울려서 진땀을 뺀 것은 조금 큰 실수.
그러느라 집에 밥 먹으러 갈 시간이 늦어졌다는 것은 아주 큰 실수였다.
“이놈의 기집애가 약속을 하면 제때 들어온 적이 없어!”
“악! 엄마! 그냥 수다 떨다가! 아파!”
그러다 결국 엄마한테 등짝을 맞은 것은 조금 많이 아팠다.
‘씨, 내가 꼭 이 시골 뜨고 만다.’
그렇게 되뇌면서도 익숙해진 일상.
여느 때와 같은 평화롭고 평온한 날이 또 하루 저물어 갔다.
* * *
다음 날.
패드릭 아저씨네 가족이 그녀의 집을 찾아왔다.
대다수는 이미 익숙한 얼굴들이었지만, 그 사이에 낯설면서도 어디서 본 것 같은 청년이 있었다.
제국 기사 사관 학교의 제복이 아주 잘 어울린다 싶은데.
“이사 온 지 한 달 만에야 온 가족이 제대로 인사드리네요. 자 로건 인사드리거라.”
패드릭 아저씨가 그리 말하는 순간.
자신과 눈이 마주친 청년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형!”
작게 속삭이는 꼬마 로니안이 옆구리를 치자, 처음 보지만 어쩐지 친숙한 ‘은빛’ 강아지가 청년의 바짓자락을 물어 끌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어정쩡한 걸음으로 앞으로 나서는 청년.
그 청년이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뻣뻣하게 고개를 숙였다.
“로, 로건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 어색한 인사에 모두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일그러지는데.
“호호호호. 우리 아들이 에일렌한테 반했나 보네.”
그 어머니 레이나가 아들의 등짝을 치며 먼저 웃음을 터트렸고, 이내 집 앞마당에 한바탕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딱 한 사람, 에일렌만은 멍한 표정으로 웃지 못했다.
‘꿈에 그……?’
예전부터 꿈에 나타나던 ‘남편’과 똑 닮은 얼굴이란 걸 그제야 깨달았으니까.
이후 화기애애한 식사 자리가 이어지던 중, 메리안 아주머니가 불쑥 물었다.
“에일렌. 네가 우리 로건한테 마을 안내 좀 해 줄래?”
“예?!”
남몰래 로건을 곁눈질하던 에일렌은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흐음? 왜 그렇게 놀랄까?”
“에일렌도 아까부터 우리 로건을…….”
“아니에요!!”
“음? 뭐가?”
“아, 아무튼 아니에요!”
황급히 부인해 보았지만 이미 달아오른 얼굴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덕분에 자신과 저 청년, 로건을 번갈아 보는 어른들의 눈빛은 한층 의미심장하게 변했다.
“그럼, 마을 안내 해 주기 싫다는 말? 그럼 저기 저쪽 집 라일라한테 부탁한다?”
“걔, 걔는 왜요! 걔는 남자친구 릭이……!”
헉.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뱉어 낸 에일렌이 황급히 자신의 입을 막았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았다.
“라일라가 릭이랑 만나니? 난 처음 알았네.”
“그건 그렇고 왜 굳이 지금 그 말을…….”
능글맞은 웃음이 이어질수록 에일렌의 얼굴은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그때.
등짝 스매싱 전문가가 끼어들었다.
“로건. 우리 에일렌 좀 데리고 나가렴. 저러다 얼굴 터지겠다.”
“엄마!?”
“하도 싸돌아다니는 말괄량이라 마을 안내는 잘 해줄 거야. 부탁한다.”
“엄마! 아. 진짜……!!”
누구한테 누굴 부탁하는 거야!
확 달아오른 얼굴에 안절부절못하는데.
“음.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에일렌 양.”
제도에서 유학 중이라는 말이 거짓이 아닌 듯 익숙지 않은 단어가 들려왔다.
‘양(Lady)이라니…….’
생전 처음 듣는 호칭과 함께 정중히 에스코트를 청해 오는 로건을, 에일렌은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 * *
웃음기 어린 두 가족의 배웅을 뒤로한 채 마을로 나온 두 사람.
자연히 분위기는 어색하기만 했는데.
“저긴 빵 가게구요, 라일라네 집에서 운영하고 있어요. 그 옆은 우체국인데, 거기 헤인켈 아저씨가…….”
에일렌은 차마 옆을 바라보지 못하고 속사포처럼 설명을 이어 가기 바빴다.
그러다 한참 뒤에서나 스스로의 꼴을 자각했다.
흡사 말하는 기계처럼 와다다 쏟아 내는 꼴이라니.
‘이, 이거 내가 실수했나?’
와중에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 슬쩍 눈치를 살피는데, 마침 마주친 붉은 눈동자가 젖어 있는 것이 보였다.
‘우, 울어?’
당혹스러웠다.
“왜, 왜 그러시는…….”
“아, 아닙니다. 눈에 먼지가…… 흠, 흠. 안내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예.”
울보라니?
꿈속의 남자라는 호기심과 호감이 살짝 식기는 했지만, 왜인지 그 생각지 못한 허점이 조금은 편안하게 다가왔다.
물론, 장애물은 있었다.
“오우, 이쪽은 누구? 남친이야? 너 같은 왈가닥이 웬일이야?”
지나치면서 만난 소꿉친구 릭이 던진 폭탄.
손이 부르르 떨렸지만, 차마 평소처럼 발작할 수는 없었다.
‘넌 오늘 목숨 하나 건진 줄 알아라.’
이상한 애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속으로 이를 갈면서 조심스레 옆을 보는데.
‘또 울어!?’
자전거를 타고 멀어지는 릭의 뒷모습을 보는 붉은 눈에 또 물기가 서린 것이 보였다.
‘이 정도면 좀 심각한 거 아닌가?’
에일렌이 자신도 모르게 남편(?)에 대한 점수를 조금 깎은 것을 알 리는 없지만, 다행히 청년은 그 이후부터는 그렇게 갑작스레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빅로트네 가족과 하마르 아저씨, 펠릭스 씨 부부와 그 딸 스텔라, 그리고 여관을 운영하는 클레이튼 아저씨와 의사 ‘일리아’ 언니를 만났을 때 다소 과한 기쁨을 표출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몇 시간에 걸친 마을 안내가 끝났을 때.
에일렌은 합리적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마을에 와 본 적 있으세요?”
“아니요.”
즉각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당연한 말이었다.
패드릭 아저씨네가 이사 온 것은 고작 한 달 전.
그전에는 쭉 제도에 머물렀다던 큰아들 아닌가.
그런데 왜 이렇게 그리운 고향에 돌아온 사람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일까.
마치 오랜 인연과 재회한 듯한 벅찬 환희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자신도 모르게 그 눈을 멍하니 보는데.
– 다시 만날 수 있어요, 우리. 꼭 다시.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아니, 정확히는 옆에 있던 청년의, 그리고 꿈속 남편의 목소리였다.
‘다시…… 우리……?’
알 수 없는 찌릿한 감정이 차올라 억지로 숨을 길게 내쉬는데.
“에일렌.”
“네, 넷!?”
“고마워요. 다시 와 줘서.”
청년이 가슴속에 울리고 있는 것과 비슷한 말을 전했다.
‘여, 여기 우리 마을인데요? 당신이 온 거고?’
분명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벅차올라 섣불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오래 기다렸어요?”
입술이 멋대로 움직이며 생각지도 못한 말을 뱉어 냈다.
스스로 화들짝 놀라는데.
“예. 정말 오래…… 기다렸거든요. 모두가 다시 모이기를.”
그리 말하는 청년, 로건의 눈가에 영문을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자신의 눈가에도 똑같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없이 반갑고, 기쁜 마음을 담은 눈물이.
– 끝 –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