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Side story (5)
외전 5화. 리이나 울브스
*전생
“당신이 정말 나와 어울린다고 생각하시나요? 주제를 알고 좀 꺼져 주세요. 어린애한테도 지면서 칼은 왜 차고 다니는지…… 덕분에 일이 편하게 되었네요. 고마워요”
가벼운 속삭임에 끌려 나가던 붉은 머리 양아치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저놈이 무슨 벌을 받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자신이 알 바 아니었다.
‘이것으로 오점은 털어 냈다.’
리이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다시 억지로 눈물을 짜냈다.
마무리는 제대로 해야 했으니까.
“어, 어떻게 로건 공자가 저한테…… 흐흑.”
일부러 찢어 버린 옷을 끌어 올리며 웅크리는 것까지.
자신을 보는 모든 시선이 안쓰러움으로 물드는 것을 보며 리이나는 속으로 웃었다.
철없던 유년 시절의 추억 따위는 이제 그녀에게 한 줌의 가치도 없었으니까.
그 후로는 모든 것이 잘 풀렸다.
파혼 따위, 왕국 전역에 유명한 그녀의 미모와 3대 부호로 손꼽히는 울브스의 배경에 비하면 조금의 흠도 되지 못했으니까.
그녀는 그로부터 딱 1년이 지나는 날, 더글라스 가문의 대공자 덤프 더글라스와 약혼을 했다.
파혼을 의식하여 1년의 텀을 두었지만, 애초부터 오가던 약속이 이루어진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약혼은 세간의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최고의 공작가와 최고 부호 가문의 결합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하하. 이리도 아름다운 공녀를 신부로 맞게 되는 내가 행운아요. 하하하하.”
눈부신 금발에 푸른 눈, 잘생긴 얼굴. 나이가 조금 많긴 했지만, 그 정도야 감수할 만했다.
부인과 사별했으니 첩도 아니고, 자식도 없다.
그 전 부인의 죽음에 대한 소문이 조금 찜찜하긴 했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나는 보다 높은 자리에서 칭송받아 마땅해.’
남작가의 망나니를 버리고 공작가의 대공자를 얻었으니 고작 열 몇 살 나이 차이와 그깟 소문이 뭐가 대수랴.
“저 역시 이리도 헌앙하신 부군을 얻게 되어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공자님.”
“아하하하. 역시 나는 우리가 잘 맞을 것이라 첫눈에 알아봤소이다!”
“호호호.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덤프 더글라스는 붉은 머리 망나니와는 다르게 지적이었고 예의도 발랐다.
‘그래. 이제 됐어.’
화려한 대도시에서 모두의 우러름을 받으면서 인생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금광 덕에 졸부가 된 테스론 놈들이 각하께 줄을 대려 하고 있다. 확고하게 관계를 굳혀야 해.”
아버지가 이상하게 결혼식을 서두를 때도 오히려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심각한 오산이었다.
소문을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조신하게 있으시오, 부인. 밖으로 괜히 나다니지 말고.”
“어허! 아녀자가 감히 어딜 나서!”
“파티? 알겠지만, 파티장에서는 미소만 짓고 있고 품위 없게 떠들지 마시오. 먹는 것도 신경 쓰고…… 아니다. 가능하면 아무것도 입에 안 대는 게 좋겠소.”
남편, 덤프 더글라스는 자신을 장식용 인형이라 생각하는지 일거수일투족을 지시하며 숨통을 조여 왔다.
보수적인 그란디아 남자 중에서도 극단적인 축에 속하는 남편.
설득해 보고 싶었다.
“내, 내가 원한 삶은 이런 게 아니에요.”
“뭐? 부인, 지금 뭐라고 했소?”
“아니! 대체 그럼 전 뭘 하라는 거예요!”
억울함에 조금 커진 목소리.
“하?”
“……하?”
하지만 그 대답은 폭력으로 돌아왔다.
짜악.
“여자가 감히 어디서 큰 소리야!”
결혼 전 그렇게 잘생기게 보이던 남편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차고 있던 검에까지 손을 뻗는 모습을 보니 무서워서 더는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문득 전 부인이 자살했다는 소문이 떠올랐다.
‘아니, 어쩌면 자살이 아닐지도…….’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그때는 이미 모든 것이 늦은 후였다.
하지만 순순히 단념할 것 같았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다.
‘내가 이대로 인형이 될 것 같아!?’
그녀는 참고 살 자신이 없었기에 몰래 남편을 죽일 계획을 짰다.
신혼 초 임신한 직후, 설령 암살 계획이 발각되더라도 후계자를 밴 자신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있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계획이 실행되는 일은 없었다.
그해에 왕이 갑작스레 죽고 내전이 터진 것이다.
“이거 아쉽구려, 부인. 여인을 전쟁터에 데려갈 수는 없으니 기다려 주시오. 내 금세 전쟁을 끝내고 오겠오.”
자신이 무슨 오러유저라도 되는 양 남편은 한껏 멋을 부리며 전장으로 떠났다.
그녀의 눈에도 세상 철없는 얼간이로 보였다.
‘……해방이다!’
가문에 있을 때는 상상도 못 했던 지옥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그녀를 가까스로 웃게 만들었다.
게다가 전쟁은 생각보다 훨씬 길어졌고, 심지어 남편이 전장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그녀는 남들 앞에서 울면서도, 돌아서서는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모든 것이 그녀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와하하하! 건배! 우리의 세상을 위하여!”
“위하여!”
승전 파티.
후안 더글라스 공작은 좀처럼 보기 힘든 환한 미소와 함께 휘하의 귀족들을 내려다보며 선언하듯 말했다.
“이제 내 외손자 로히터가 그란디아의 왕위를 이어받을 것이다. 이제 우리의 세상이 열렸다!”
긴 내전 속에서 자식들이 모두 죽은 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후안 더글라스는 그렇게 웃었다.
아니 오히려.
“더글라스 가문은 대공가로 승격될 것이며, 나는 아직은 부족한 내 손자 대신 이 나라를 통치할 것이다!”
모두가 환호하는 자리.
하지만 리이나는 그 자리에 낄 수가 없었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여자가 어딜 밖에 고개를 내밀어! 죽은 듯 살아라. 아무도 네 존재에 신경 쓰지 않도록.”
시아버지 후안 더글라스, 이제는 그란디아의 절대권력자가 된 마도사는 남편보다 더하게 그녀를 꽁꽁 옭아맸다.
심지어 마법까지 동원해 가며.
그녀가 자신의 방을 떠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때는 오직 아들을 만날 때뿐이었다.
“내가 가주가 되면 엄마 자유롭게 해 줄게.”
그 어린 아들만이 그녀의 유일한 위안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난리가 일어났다.
– 죽여라!
– 전부 죽여!!
– 크하하하.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저택의 분위기.
이상하다고 느낄 만했지만, 이성적인 분석이 잘 되지 않았다.
방 안에 갇혀 산 몇 년이 이미 그녀의 정신을 극한까지 피폐하게 만들었으니까.
그러나.
쾅!
문짝이 거칠게 열리는 순간에는 반사적으로 움찔하며 그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얼라!? 뭐야, 이 년은?”
“오호, 예쁜데?”
“내가 먼저 발견했으니 나 먼저다.”
“뭐 인마?!”
문을 부술 듯이 밀고 들어온 일단의 병사들이 그녀를 보며 다투기 시작했다.
독특한 억양의 공용어는 그들이 이 나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지만, 그녀는 그런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따라와, 이년아!”
“악!”
머리채를 움켜쥐는 거친 손길에도 비명만 지를 뿐 반항할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질질 끌려가는 동안 보이는 시체들, 피, 불길.
그녀가 아는 모든 세상이 무너져 내린 광경을 보는 순간, 역으로 무너졌던 그녀의 정신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 이게 대체……?’
하지만 그조차 오래가지 못했다.
“거기 병사들. 그 여자 뭐냐!? 옷이 좀 다른데?”
“자, 장군님! 충!”
“됐고, 그 여자 뭐냐니까?”
“저, 저 방에 있던 여자인데 저희가 좀…….”
“재미 좀 보겠다?”
“하, 하하. 허락해 주신다면…….”
“이 미친 새끼들이 웃어!? 군율을 개X으로 아나?!”
“아아악!”
처음에는 구원자가 생긴 줄 알았다.
하지만.
“험한 꼴 보느니 그냥 죽는 것이 네게도 나을 것이다. 썩은 그란디아의 씨는 하나도 남겨 두지 말라는 상층부의 방침이다.”
그는 그녀에게 찾아온 사신이었다.
이제야 평안이 찾아오는가.
약간이나마 돌아온 이성으로 멍하니 그 장군이라는 자를 바라보는데.
푸른 호수에 은빛 달을 띄운 듯한 기묘한 눈동자를 가진 젊은 기사는 씁쓸한 얼굴로 그녀를 향해 칼을 겨눴다.
“그란디아의 마검을 원망하라. 녀석이 반항하면 할수록, 우리 제국은 그란디아를 철저하게 멸망시킬 테니까. 너도 그 효시가 될 것이다.”
그란디아의 마검.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맥라인의 천재라던가.
‘맥라인…….’
시골 남작가.
자신이 버린 혼처.
‘어차피 죽는 것 같더라도…….’
그곳에 있었다면 이런 더러운 꼴을 당하지는 않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이것은 천벌일까, 인재일까.
리이나의 얼굴에 씁쓸한 웃음이 번지는 순간.
“고통은 없을 것이다.”
젊은 기사의 ‘은빛’ 오러가 그녀의 목을 스쳐 지나갔다.
데구르르.
떨어진 목에는 기괴하게도 편안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현생“독튼 상가도 거절했다고…….”
리이나는 허망한 표정으로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몰락한 울브스. 하나 남은 내성엔 이제 그 흔한 장신구 하나 남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금력과 인맥을 동원해 어떻게든 재기해 보려 했다.
심지어 한때 그란디아 사교계의 꽃이라 불리던 그녀 자신의 혼담까지 걸면서.
그런데도 무리였다.
“……그만하시지요, 아가씨. 왕, 아니 황제에게 찍힌 우리 가문은 이제 그 누구도 돕지 않습니다.”
가문에 하나 남은 기사, 록페른의 말은 틀린 점이 하나도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허망하게 속으로 되뇌어 보지만, 그 대답은 그 누구보다 그녀가 잘 알고 있었다.
“로건 맥라인…….”
쥐어짜듯 뱉어 낸 이름에 통한이 서렸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그때 당했던 수모가 다시금 스멀스멀 올라오는데.
“……참으셔야 합니다, 아가씨. 저희에게는 힘이 없습니다. 아니, 세상 누구도 지금의 황제와 대적할 수 없습니다.”
록페른의 말이 잔혹한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그랬다.
로건 맥라인은 이제 남작가의 망나니도 아니요, 하다못해 단순한 권세가도 아니었다.
세상의 지배자.
그리고 신인.
어째서 그런 괴물이 어릴 적에 망나니로 소문이 났을까.
그 감춰진 재능의 반의반만 내보였어도.
“그 소문만 아니었어도 파혼은 안 했다고!”
쾅.
책상을 후려친 손에 짜릿한 통증이 일었다.
자연스레 내려다본 손은 십 년 전만 해도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거칠어져 있었다.
거울을 보지 않은 지 오래되었지만, 얼굴도 크게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나도 이제 서른이 넘었으니.’
어쩌면 혼담을 조건으로 건 것이 오히려 마이너스였을까?
그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억지로 붙들고 있던 마지막 자존심이 무너져 내렸다.
“흐윽. 흑, 흐…….”
끼이익.
록페른이 조용히 문을 닫고 나서는 순간에도 리이나는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고작 한 번이야. 한 번. 그런데…….’
그 단 한 번의 잘못된 선택.
그것으로 인해 꿈꾸던 화려한 삶은 신기루처럼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물론 아직 희망은 있었다.
성을 내다 팔면 평민 갑부 정도의 삶은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황제에게 찍힌 대가로 상거래야 하지 못하더라도, 남은 삶을 편안히 지내는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그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사실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한 시도였다.
독튼 상가는 울브스의 가장 오래된 거래처 중 하나이자 제국의 거상 중 하나였다.
마찬가지로 맥라인 상단에 수작을 걸다가 황제에게 짓밟힌 뒤, 다시금 재기에 성공한 상가.
황제의 심복, 황금왕 필립의 휘하로 들어갔다던가.
그들이라면 자신의 손을 잡아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거절했지.’
이제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
– 패드릭. 그 친구에게 사과해야 했어. 욕심을 덜 부려야 했다. 내 욕심이 너무 컸어. 미안하구나, 리이나.
어쩌면 아버지는 이리될 것을 예상했기에 삶의 의욕을 잃고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도 더는 무언가를 해 볼 의욕을 잃었다.
평민 갑부의 삶?
그따위는 그녀에게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결국 그녀에게 남은 길은 하나뿐이었다.
“……비참하게 사느니 차라리 귀족으로서 죽겠다.”
마지막 남은 독기의 칼날은 결국 자신에게 향했다.
리이나는 덜덜 떨리는 손길로 품 안에 간직했던 날카로운 단검을 꺼내 들었다.
막상 칼날을 보자 너무나도 무서워 마음이 흔들렸지만, 그녀에게는 이대로 살아갈 미래가 더 무서웠다.
‘나, 난, 그렇게 살 수 없어!’
그 오기로.
리이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자신의 심장을 향해 단검을 깊게 찔러 넣었다.
푸우욱.
“컥.”
쿨럭.
서늘한 죽음이 가슴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져 나가자 천천히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쿵 하고 바닥에 떨어진 몸은 이미 말을 듣지 않았다.
삶의 끝이 다가왔다는 생각이 드는 그때.
어째서인지 먼 옛날, 아주 순수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귀족과 평민의 차이도 모르고, 보석과 드레스에도 관심이 없던 어린 시절.
번잡한 도시를 벗어나 처음 보게 되었던 따뜻한 시골의 풍경.
– 네가 리이나? 난 로건.
– 히히. 너 예쁘다.
약혼자라며 소개받았던 장난기 많아 보이던 남자아이.
왜인지 부끄러워 아버지 뒤에 숨었던 자신의 모습.
그 모든 것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래. 그때는……,’단 몇 주의 시간.
그 장난기 많은 아이와 시골에서 흙을 묻히며 놀던 그 시간은 참으로 즐거웠었다.
– 나중에 우리 결혼하면 더 재밌게 놀자!
– 그래!
그래. 그랬었다.
참 즐거웠었다.
아무것도 없었는데도.
그때의 자신이 바랐던 것은 고작 그 정도뿐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이렇게 변했을까.
왜…….
죽음이 다가온 순간에야 찾아온 깨달음에 서글픈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너무 늦은 깨달음일 뿐.
흘러내린 눈물은 바닥의 핏물과 섞여 들며 사라졌다.
마치 어린 시절의 동심이 결국 세월 속에 닳고 닳아 사라지는 것처럼.
맑은 눈물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붉은 핏물뿐이었다.
* * *
[맥라인 제국 인물전>• 주석 132번.
현인신 로건 맥라인에게 전(前) 약혼녀가 있었고, 파혼을 당했다는 설이 존재하나 믿는 이는 드물다. 신황제의 역량을 생각하면 어려서부터 두각을 나타냈을 텐데, 그런 인재를 몰라보기도 어렵지 않냐는 주장이 우세한 것이다.
하지만 역사학적 증거로는 당시 그란디아의 귀족이었던 울브스 가문에…….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