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Side story (6)
외전 6화. 필립 클로드
*전생
“피곤하군. 참 피곤한 일이야.”
오십 줄에 접어들면서 생긴 편두통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제국 10대 거상 황금상인 필립 클로드라는 이름으로 얻을 수 있는 영약은 다 먹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사제들은 일종의 정신적인 문제라고 했다.
하지만.
‘어찌 멈출 수가 있을까.’
황실을 설득해 그란디아 자치령을 만든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란디아 해방 전선에서 연달아 테러를 저지르고 있으니, 막대한 돈을 먹였던 귀족들조차 딴소리를 하는 마당이다.
‘해방 전선에 군자금을 너무 많이 준 걸까.’
왜 그 빌어먹을 놈들은 적당히라는 것을 모르는가.
‘루이스 자네. 정말 포기 못 하는 건가?’
정말 테러 좀 저지른다고 그란디아가 다시 독립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 것일까?
“……더 이상 어쩌자고, 이 친구야.”
위에서부터 썩어 버린 그란디아는 망하는 것이 당연한 나라였다.
다만 죄 없는 유민들이 안타까워 그란디아 해방 전선에 몰래 군자금을 전달하고, 그들의 테러를 이유 삼아 황실을 흔들어 자치령까지 만들어 냈다.
이제 유민들을 정착시키기만 하면 되는데 이 시점에 자꾸 테러라니?
아무리 봐도 이것은 너무 과했다.
“……지원을 끊어야겠어.”
사실 지금도 많이 무리한 것이었다.
혹시라도 황실에서 알게 된다면, 사방왕과 맞먹는다는 황금상인의 허명 따위는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테니까.
지금은 그란디아 자치령에 투자를 하고, 그곳에 유민들을 정착시키는 것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그란디아 출신으로서, 내가 내 조국에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다.’
그리 결심하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계획한 모든 것을 끝내고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면 이 편두통도 없어질까?
그런 기대를 해 보았지만, 그 얼마 후부터 모든 것이 다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뭐라고!?”
쾅!
팔걸이를 후려친 필립이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지금 들은 말이 그만큼 충격적이었던 탓이다.
“황제 폐하께서 그란디아 유민들을 그곳으로 모으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는 황명으로서…….”
그란디아 자치령이 아니다.
황제는 오히려 자치령으로 향하는 유민들까지 통제하여 황무지나 다름없는 곳으로 몰아넣으라고 하고 있었다.
“대체 왜!?”
“저, 저야 모르지요. 제가 어떻게 지엄하신 황제 폐하의 뜻을 알겠습니까. 그저 황금추, 크흠, 황금상인 그대라면 할 수 있는 일이니 지시하신 거겠지요.”
황실의 관리가 쩔쩔매며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필립의 직감은, 아니 지식은 황제의 속셈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대번에 유추할 수 있었다.
파악된 그란디아 유민의 수가 얼추 수백만, 최대는 천만에 달할 것이라 예상되는 상황.
‘그들을 좁은 지역에 몰아넣으라고 하면서 물자나 자금의 흐름은 크게 변한 것이 없다. 빌어먹을…….’
이유는 모르겠지만, 황실에서 그란디아 유민의 말살을 계획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직접 학살하지 않더라도 이 겨울에 수백만의 인구를 한 지역에 몰아넣고 식량을 주지 않으면 생지옥이 펼쳐질 것이다.
그리고 그제야 황실이 그란디아 자치령을 왜 허가해 줬는지 알 것 같았다.
‘로비가 통한 게 아니었어. 그란디아 유민을 모을 구실이 필요했던 거야. 대체 왜?!’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그날부터 필립은 모든 인맥과 자금을 동원해 황제의 의도를 파악하고자 애썼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사실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 황제가 무언가 거대한 마법적 의식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제물로 수많은 생명이 필요하며, 가장 먼저 끝없이 투쟁하고 반항하는 그란디아인들이 본보기 삼아 선택되었다는 것.
“이런 미친 새끼가……!”
정보가 적힌 종이가 구겨지고, 자연스레 욕이 튀어나왔다.
더 이상은 애향심이나 동족에 대한 연민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악마지.’
필립은 치를 떨며 다시금 거액의 군자금을 준비해 몰래 그란디아 해방 전선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황금충이 직접 우리를 만나러 오다니. 제정신이 아니로군. 황실에 발각되면 어찌 될지 모르는가?”
루스펠하임의 어두운 골목길 안에서 저벅저벅 걸어 나온 남자.
얼굴에 십자 흉터가 뚜렷한 반백의 장년인이 시비를 걸듯 말했다.
루이스 하이온.
아레스 제국 특급 수배 대상이며, 그란디아 해방 전선의 지도자.
그리고 자신의 악우.
평상시라면 능글거리며 맞받아쳤겠지만, 오늘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루이스. 큰일이 났어!”
다급한 음성에 그란디아 해방 전선 대장 루이스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대외적으로는 매국노와 독립군으로 표방되는, 그란디아 유민 출신 중 양극단으로 보이는 인생들.
하지만 실제로는 서로를 도와 가며 필립을 제국 10대 상인으로 만들고, 해방 전선의 안가와 자금의 공급을 책임진 동지였다.
그란디아 자치령도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 낸 아이디어였는데…….
“황제가 그란디아 유민을 모두 죽이려 한다고! 최소 수백만을 깡그리!”
“……뭐?”
너무 황당한 말인지라 루이스는 멍하니 눈만 껌벅였다.
그러다 이내 진지한 필립의 눈동자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자세히 얘기해 봐라.”
필립이 빠르게 상황을 설명하자, 점점 굳어지던 루이스의 표정은 아예 무섭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마법 의식?”
“아마도.”
“그럼 설마 그 유물이라는 게……?”
무언가 떠오른 듯한 악우의 모습에 필립의 눈도 덩달아 커졌다.
“뭐 아는 게 있나?”
“황실에서 최근 극비리에 유적을 발굴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 좌표가 네가 말한 유민들을 모으라는 곳과 비슷해. 아니 같을 거야.”
“뭐?”
“그곳에 대체 뭐가 있는지 궁금했는데, 경계가 너무 삼엄해서 아직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럼……?”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루이스가 무거운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독립군의 모든 힘을 동원해서라도 그곳을 털어야겠어.”
“털겠다고?”
“정면 승부로는 안 되니까 말이야. 마법적 유물이나 아티팩트, 뭐 그런 것들을 빼돌리면 네가 말한 그 의식이라는 걸 뒤틀어 볼 수 있겠지. 잘하면 그게 뭔지도 알 수 있을 테고.”
루이스는 이미 결정을 내린 모양이었지만, 필립은 회의적이었다.
“지금 해방 전선에 마도사라도 있나?”
“뭐?”
“말도 안 되는 인원을 동원해서 진행하려는 마법적 의식이라면, 적어도 마도사 정도는 되어야 그 윤곽이라도 알아볼 수 있겠지. 그만한 인물이 있냐는 말이다.”
“……마도사는 없지만, 고대어에 능통한 간부는 있지.”
“뭐라고?”
“있어. 로건이라고, 자네는 모르겠지만…….”
“아니! 지금 고대어 좀 안다고 그 마법적 의식을 어쩔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최소한의 기대는 있다는 거지. 나도 크게 보지 않아. 일단 발굴된 유물의 강탈에 집중한다. 그중 그 의식이라는 것의 주요 물품이 있다면, 그게 최고겠지. 어찌 되었건 황실의 비밀 사업을 터는 일이니 자네가 나서서 도와줘야 해. 알고 있지?”
“빌어먹을! 이 기약 없는 삽질에서 손을 털려고 했는데 결국…….”
“푸흐흐. 재미없는 농담이군.”
“……농담으로 들리나?”
“너 지금……?”
루이스의 눈이 커졌지만, 필립은 쓴웃음을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일단 이 미친 짓을 막는 데에나 집중하자고. 자네들도, 나도 이번에는 목숨을 걸어야 해. 살아남는다면 그때 다시 얘기하자고.”
“……그러지.”
예고된 파국.
그리고 다가온 파멸.
필립은 모든 인맥과 자금을 동원해 해방 전선의 거사를 도왔고, 그들이 끝내 황실이 비밀리에 발굴 중이던 유적의 가장 중요한 보물을 털어 버렸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다만.
그 소식을 전한 자가 황실 기사단이었다.
“죄인 필립 클로드. 감히 황실의 은혜를 저버리고 테러범을 도운 죄로 즉결 처형한다!”
“젠장! 내가 결국……!”
산을 쌓을 만한 금력도, 제국 고위층에 연결된 인맥도.
그 순간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필립은 적법한 절차도 거치지 않고 그대로 황실기사단에 의해 끌려갔다.
제국 10대 상인 중 수좌나 다름없는 이가 소리 소문도 없이 몰락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황실의 지하감옥에 갇히게 된 필립은 끝없이 땅을 치며 후회했다.
‘그냥 손에 쥔 걸 누리고 살걸. 대체 왜 빌어먹을 고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하지만.
“……제도에도 동원령이 내려왔어.”
“진짜?”
“붉은 머리 테러리스트가 이상하게 강하대. 정확히는 놈이 훔친 검이…….”
감옥 안에서 간수들의 대화를 듣는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제야 수도 없이 고민하고 외면했던 자신의 본심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고향에서 성공하고 싶었던 거구나. 고향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거였어.’
모든 것을 잃고 노예로 팔려 갔던 교역 도시 카일의 정경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게 그려졌다.
삶의 끝자락에 다다라서야 마주한 진심.
그에 쓴웃음을 짓는 순간.
“죄인 필립 클로드. 나와라. 시간이 되었다.”
덜커덩.
떠들고 있던 간수가 불길한 말과 함께 감옥의 문을 열어젖혔다.
‘조금만 빨리 알았으면…….’
삶이 조금 달라졌을까.
자조 어린 웃음을 짓는 그때.
갑자기 세상이 거대한 황금빛에 휩싸이며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아니, 시간이 거꾸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무슨……?’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적이 일어났음을 인지하는 순간.
필립은 속으로나마 간절히, 아주 간절히 기도했다.
‘다시 돌아간다면 고향에서, 고향에서 성공하련다. 어떻게든……!’
그리고 이내, 그의 기억조차 사라지며 황금빛 세상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현생
“……죽음을 앞두고 나니 그때의 일이 기억났습니다. 이것도 폐하께서 의도하신 겁니까?”
필립은 억지로 목소리를 짜내 눈앞의 붉은 머리 사내에게 물었다.
삶의 끝이 다가오고 있는 자신과는 달리 40년 전과 변함없는 모습의 사내, 로건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필립은 쓴웃음을 지었다.
“짓궂으시군요. 무슨 의미가 있다고…….”
콜록콜록!
기침을 좀 했을 뿐인데 온몸에 힘이 쫙 빠졌다.
기력이 다해 간다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지는 가운데, 주군이 엉뚱한 말을 꺼냈다.
“……묻고 싶었네.”
“예?”
“전생과 현생에서 모두 성공한 자네가 아닌가. 그런 자네에게, 이렇게 바뀐 세상이 어찌 보이는지 물어보고 싶었어.”
“흐흐. 그냥 물으시면 될 것을요.”
“그래도 대답이 다르지 않겠나.”
“……보통의 사람은 뿌리를 찾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뿌리 위에서 꽃을 피우기를 바라지요. 저 또한 그런 평범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현생이 더 낫다는 말이군.”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폐하. 저는 심지어 이제 10대 상인도 아니고 황금왕 아닙니까. 왕. 크크크.”
“……다행일세.”
그 표정이, 그 미소가 묘하게 안도하는 것 같아 필립은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을 걱정하시는지요, 폐하.”
“음?”
“모든 것을 이루신 폐하이십니다. 그런데 왜 고작 저 하나의 마음을 걱정하시는 겁니까?”
“……그래 보이는가?”
“예. 그래 보입니다. 폐하와 함께한 일을 후회하는 이가 있을까 봐 걱정하시는 겁니까?”
“……그런 면도 없지 않아 있지.”
어찌 그런 이가 있을까.
현인신 로건 맥라인의 곁에서 함께 영광을 이룬 이들.
그들 중 단 한 명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 필립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저 신인이 저런 표정을 짓는 이유는 뭘까.
세상이 몸이라면 그 몸에 흐르는 피, 돈의 흐름을 두 생에 걸쳐서 쫓아온 필립은 왜인지 세상의 이치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군주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도.
그리고 자신의 생명이 다해 감에 따라 주군의 손끝이 살짝 투명하게 변한 듯 보이는 게 결코 착각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아니면 스스로가 바꾼 세상의 변화를 걱정하시는 겁니까?”
주군의 눈이 살짝 커지는 것을 보며, 필립은 흘흘 웃었다.
“제가 본 전생의 아레스보다 지금의 맥라인이 훨씬 낫다 말씀드리면 안심하시겠습니까?”
“……기분 좋은 말일세.”
“폐하께서는 업(業)보다 덕(德)을 훨씬 많이 쌓으셨습니다. 이치의 역류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필립은 그렇게 말했다.
“자네가 떠나고 난 후의 일은 내가 직접 신경 써 주지 못할 것 같아. 자네가 일을 잘해도 너무 잘하는 바람에, 그 쌓인 인과가 지금 건드리기엔 너무 커.”
그 말도 무슨 뜻인지 말로 설명은 못 해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필립은 힘주어 웃었다.
“처음 뵌 날부터 40여 년, 제국의 성립 후만 따져도 30년이 흘렀습니다. 저는 그 모든 날에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폐하.”
“……고맙네.”
“이제 저마저 떠나면 ‘그때’의 사람들은 몇 남지 않겠군요. 로니안 대공을 비롯한 오러마스터분들만 남으실까요.”
“……릭도 있네. 하마르도 있고.”
“흘흘. 그 친구들처럼 더 오래 곁에 있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폐하. 먼저 떠나는 신하를 용서해 주십시오.”
“…….”
“부디 긴 세월의 업을 무사히 견뎌 내시길, 죽어서도 바라겠습니다.”
그 말에 자신을 내려다보는 군주의 얼굴에 슬픈 미소가 걸렸다.
“그간 고마웠네, 필립.”
“별말씀을.”
만족스러운 삶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서 남긴 말이 은인에게도 도움이 되기를.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도 필립은 진심으로 바라고 또 바랐다.
* * *
[맥라인 제국 인물전>• 필립 클로드
이십 대의 나이에 신황제를 만나 제국의 건국에 지대한 공을 세운 상인. 후에 황금왕이라 불리며, 황실보다 더한 부를 쌓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의 죽음 후에 남은 유산 상속 싸움은 제국 상계에 대지진을 일으켰고, 그 누적된 후유증이 결국 긴 세월을 거쳐 초마검사 바론 아레스의 삶을 강타하게 된바. 그가 제국에 남긴 공의 상당수가 그로 인해 깎였다고 평가하는 학자들이 많다.
*제국의 반역자 ‘바론 아레스’ 편에 별도 기술.
아직도 당시에 신황제가 왜 그 유산 싸움을 방관했었는지는 학계의 미스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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