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Side story (9)
외전 9화. 빅토리아 윈스터
*전생
파란 머리에 붉고 푸른 짝눈.
마을의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고 울면서 들어올 때면 엄마는 항상 같은 말을 해 주었다.
– 꼭 기억해야 해, 리아. 너희들은 자랑스러운 핏줄을 이은 아이들이야. 너희들의 외모가 그 증거야.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말을 하던 엄마의 따뜻한 품과 목소리만은 언제나 또렷하게 기억났다.
그래서 더 슬프고 미안했다.
도적들이 마을을 덮치던 날, 마루 아래 비밀 방에 잘 숨어 있다가 기침 소리를 낸 것은 분명 자신이었으니까.
“하. 이것들 봐라?”
도적들이 연 문으로 빛이 비쳐 들 때.
그때 리아는 처음으로 부모님의 새로운 모습을 보았다.
“뛰어! 빅토르!”
“동생을 부탁한다!”
붉은 기운을 뿜어내는 아빠와, 푸른 기운으로 붉은 불덩이를 만들어 내는 엄마.
“엄마! 아빠!”
그 광경이 눈에 새겨지는 순간, 오빠가 그녀를 업고 뛰기 시작했다.
그것이 짧고 참혹한 인생의 서막이었다.
처음에는 오빠에게 울고불고 떼를 썼었다.
다시 돌아가자고, 엄마 아빠가 기다린다고.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굳어지던 오빠의 얼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산속의 버려진 움막에서 밤중에 깨어났을 때.
오빠가 있던 자리가 빈 것을 보고 목 놓아 울었던 그때.
“오, 오빠 여기 있어! 어디 안 가. 뚝. 울지 마. 뚝!”
황급히 뛰어 들어온 오빠를 끌어안으며 알게 되었다.
아니, 느끼게 되었다.
오빠의 떨리는 목소리와 뺨에 흐르는 눈물이 슬픈 것은 자신만이 아니라고, 무서운 것은 자신만이 아니라고 말해 주고 있었으니까.
그때부터 가능한 한 울지 않으려고 애썼다.
물론 너무 배가 고파서 무서운 아저씨들에게 자청해서 잡힐 때나, 자신을 오빠와 떼어 놓으려는 아저씨들이 오빠를 무섭게 때릴 때는 어쩔 수 없이 울긴 했다.
하지만 정말 그건 어쩔 수 없었다.
정말.
“오빠는? 오빠는 배 안 고파?”
“안 고파. 많이 먹어.”
거짓말.
좀 전에 꼬르륵 소리를 들었는데도 오빠는 자신에게만 고구마를 내밀었다.
거부하면 오빠가 또 버릴 시늉을 할 것을 알기에 먹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절반 이상을 남겼다.
자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안 날 정도만.
“이제 배불러.”
“그래……?”
그것이 어린 빅토리아가 보호자인 오빠에게 해 줄 수 있는 전부였기에 항상 미안했다.
그래서.
“대공자님이 네년을 데려오라신다. 가자.”
그 무서운 말을 들었을 때도, 오빠가 ‘기사’라는 사람들에게 쓰러지던 그때도.
용기 내 말을 꺼냈다.
“오, 오빠. 난 괜찮아. 갔다 올게. 별일 없을 거야.”
오빠를 안심시키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그뿐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로부터 고작 몇 시간 후.
“역시 어린 X이 최고라니까!”
사람보다 돼지를 닮은 괴물에게 끔찍한 일을 당하며 삶의 끝이 다가왔음을 느꼈을 때도.
괴물에 대한 분노보다도 오빠가 먼저 생각났다.
‘내가 없어지면, 오빠는 좀 더 편하지 않을까.’
그것이 어린 빅토리아가 현실의 끔찍한 고통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오, 오빠. 미, 미안해…….”
비참했던 인생, 피어 보지 못한 어린 꽃봉오리는 그렇게 무참히 꺾였다.
*현생
고오오오오.
거대한 탑의 최상층.
그 넓은 공간을 가득 메운 마나가 거세게 요동치며 작은 여인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번쩍.
감고 있던 붉고 푸른 눈이 떠지는 순간.
마탑 전체를 울리는 거대한 파동이 그 작은 몸에서 퍼져 나갔다.
우우우우우우웅.
마치 한 사람의 몸에서 시작된 빛이 온 세상을 물들이는 것 같은 광경.
그것은 단일 강화 속성의 마도사가 비로소 8서클 대마도사의 경지에 올랐음을 알려 주는 상징.
세상이 한 사람에게 보내는 찬사였다.
그런데.
“하…… 미쳐 버리겠네…….”
정작 그 기적을 만들어 낸 당사의 표정은 무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불과 마흔도 되지 않아 전설의 경지를 달성한 기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얼굴.
“어이가 없네…….”
각성의 순간 불현듯 찾아온 끔찍한 기억.
그녀가 겪었지만, 또 겪지 않은 그 기억이 영혼을 오염시키며 자칫하면 온몸의 마나를 폭주시킬 뻔했다.
그리고 그 위험에서 빠져나와 성취를 이뤘을 때도 그 더러운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축하한다, 리아.”
붉은 머리 붉은 눈의 군주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음에도 웃으며 대할 수가 없었다.
“이제 너도…….”
대마도사의 경지에 이르러 세상의 영지(靈知)에 살짝 닿은 그녀는 이미 인간을 반쯤 벗어난 군주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폐하, 잠시만요.”
“음?”
“찾아볼 것이 있습니다. 이 울화를 풀지 않고서는 도저히 어떤 일도 하지 못할 것 같아요. 시간을 주십시오.”
“……그러거라.”
군주는 살짝 당황하면서도 이내 무엇인가 이해한 것인지 그저 미소를 지었다.
그 길로 빅토리아는 곧장 마탑을 나섰다.
스승, 골렘마스터 클레이튼이 세상을 떠난 이후 이어받은 마탑.
사형들은 다 다른 곳으로 떠났으니, 이제 이곳에 남은 이들은 그녀의 직속 제자들뿐이었다.
“탑주님, 성취를 축하드립니다!”
“경하드립니다, 탑주님!”
그 제자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축하 인사를 건넸지만, 그녀는 굳은 얼굴로 한 마디를 뱉었다.
“비켜.”
대마도사가 뿜어내는 냉엄한 기세가 모든 마법사를 얼어붙게 만들었고.
“탑주님!”
“탑주님, 어딜 가시는……!”
뒤늦게 제자들이 따라붙었지만, 그 순간 이미 지면을 움직여 축지법을 발휘한 빅토리아의 몸은 까마득하게 먼 곳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 * *
“한 푼만 줍셔…….”
쨍그랑.
“감사, 감사합니다.”
옛 그란디아의 수도, 그랑의 거지 더프는 바구니에 떨어지는 금화를 보며 정신없이 절을 했다.
감히 올려다볼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귀한 사람 중에는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만으로 줬던 것을 뺏는 것을 넘어 폭력까지 휘두르는 이가 있다는 것을 수십 년간 몸으로 체득해 왔으니까.
그런데.
“너무 다른데…… 더프 ‘라이어’ 맞나?”
약간의 미심쩍음이 담긴 맑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순간, 그는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그도 거의 잊고 있던 성, 라이어가 낯선 이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실 이제는 그 자취마저도 거의 지워져 가고 있는 옛 그란디아 출신의 귀족이었다. 그란디아, 정확히는 그의 출신 지방이었던 비프로스가 무너지면서부터 이런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지만, 원래는 귀족이었다는 뜻이다.
유년 시절, 능력 있는 아비의 장원에서 호의호식하던 그는 가문이 무너지고 나자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무능력자가 되어 있었다.
고도 비만과 그로 인해 얻은 잦은 질병은 덤일 뿐 그 순간 이미 비참한 미래는 정해져 있었던 것이지만, 그는 그저 자신이 더럽게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호, 혹시 저를 아시는……?”
이제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과거.
그 화려한(?) 과거의 인연이 어쩌면 조금의 돈이라도 더 쥐여 줄까 싶어 그는 조심스레 얼굴을 들었다.
그러자 처음 보는 붉고 푸른 눈동자의 미인이 보였다.
어디선가 비슷한 사람에 대한 소문을 들어 본 것 같아 머리를 굴리는 찰나.
그 여인이 피식 웃었다.
“원숭이 같은 그 얼굴, 맞군. 살이 많이 빠졌지만.”
척 보기에도 귀해 보이는 로브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위 사람들을 물러서게 만드는 강렬한 기운.
한눈에 봐도 대단한 사람인 듯하니 떨어질 콩고물도 크지 않을까.
더프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제가 더프 라이어가 맞습니다.”
그런데.
“그래. 그런 것 같아.”
콰드득.
여인의 얼굴에 냉소가 맺히더니, 그 순간 그의 몸이 의지와 상관없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켁, 케엑. 왜, 왜 이러십…….”
목뼈가 부러질 것 같은 통증과 막혀 오는 숨통은 덤.
“꺄악!”
“고, 골렘?”
“뭐, 뭐야!”
주변의 소란에 신경을 쓴 것일까?
목을 움켜쥔 흙 거인의 손이 잠시 여유를 두었다.
하지만.
“컥억. 컥. 저, 저한테. 왜…….”
“아, 바로 죽이면 곤란하지. 이 더러운 기억을 씻어 낼 때까지는 살아 있어야 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그리고 불과 몇 시간 후부터 그는 태어난 것이 후회될 정도의 끔찍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쳤다.
자칭 제국 최고의 고문 기술자라는 사람이 극한의 고통을 가하고 신체를 망가트리면, 생전 본 적도 없는 최고급 포션과 마법의 힘이 상처를 강제로 치료하는 과정의 반복.
그 과정에서 그는 며칠 만에 자신이 젊은 시절에 지었던 죄,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만행들을 모조리 떠올리고, 또 철저하게 반성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흐, 흐으…… 죽여, 죽여 주세요. 제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이제 살려 달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이 끔찍한 고통의 시간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랄 뿐.
하지만.
“역시 넌 이번 생에도 더럽게 살았구나. 생사람을 잡은 건 아니라서 다행이군.”
그 모든 고문의 과정을 담담한 표정으로 지켜본 X년의 감상은 고작 그거였다.
거기다.
“계속해. 적어도 한 달간은 살려 둬.”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 끼치는 명령이 그에게 지옥을 선사했다.
그것이 너무 억울해서일까.
그는 목소리도 제대로 안 나올 줄 알았던 몸으로 고함을 지를 수 있었다.
“대체 왜! 나, 난 당신을 본 적도 없어!”
하지만.
“그래서 이 정도로 끝나는 거야.”
자신과는 달리 감정을 다 토해 낸 듯한 담담한 목소리가 너무나도 차갑게만 들렸다.
* * *
“……한은 다 풀었느냐?”
“기다리시게 만들어서 송구합니다, 폐하.”
“아니, 아니다. 네가 마음이 풀린 것 같다는 게 더 중요한 거지.”
“짐작하고 계셨습니까?”
“말하지 않았느냐. 내가 겪은 전생에 너는 없었다고. 그리고 네 오빠의 일도.”
“듣기야 했습니다만…….”
이십여 년 전, 제국 성립 직전에나 들었던 말.
그리고.
“……솔직히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쓴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에 그녀의 군주 역시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에게는 어땠냐고 물어볼 필요는 없겠구나.”
“……혹시, 오라버니도 자각을 했을까요?”
“아니, 아직이다. 녀석은 도통 기미도 안 보여. 오러마스터도 된 놈이……. 뭐, 네 얼굴을 보아하니 녀석은 좀 늦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구나. 음, 아니면 그래서 일리아가 무슨 수를 쓴 걸까?”
고개를 갸웃하는 군주, 로건을 보며 빅토리아는 눈을 빛냈다.
“올케언니는 벌써 전생의 기억을 찾았나 보군요.”
“그래. 아무래도 9대신들과의 일도 있었으니 좀 빠른 편이었지. 뭐 그녀의 전생도 끔찍했다고는 하더구나.”
쓴웃음을 짓는 주군을 보며 빅토리아 역시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는 최대한 늦게 알았으면 합니다. 알아서 좋을 게 없는 기억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니 내가 괜히 못 할 짓을 한 거 같구나.”
“의도하신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인과의 반동, 맞지요?”
“……확실히 칼잡이들처럼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좋아. 그래도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어서 미안하구나, 리아.”
“아닙니다, 폐하. 덕분에 폐하의 은혜에 더욱 감사하게 되었으니까요.”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다.”
“다만 인과의 반동이 폐하께 미칠 영향이 조금 걱정되옵니다만.”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군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미 대마도사의 경지에 오른 그녀는 결코 같이 마주 웃을 수 없었다.
그 무게감이 간접적으로나마 느껴졌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더 이상 예전의 어린아이나 미숙한 마법사가 아니었다.
“은혜를 갚는 의미에서라도 저 또한 가능한 조치를 취해 놓겠습니다. 제 주제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대마도사가 그리 겸손하게 말하면 어찌 응대해야 하느냐.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굳이 수고할 필요 없다. 마땅히 다 내가 받아야 할 것들이니.”
굳건하고 믿음직한 웃음.
하지만 로건의 그 웃음은 오히려 그녀의 결심을 굳힐 뿐이었지만, 빅토리아는 굳이 그 말을 다시 내뱉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마법사는 거짓을 내뱉을수록 약해지기 마련이니, 군주를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도 할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뜻은 로건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허허, 너도 참…….”
군주와 신하가 서로를 배려해서 생겨난 부드러운 침묵이 잠시간 대전을 휘어 감는데, 이내 그 침묵이 엉뚱한 소리로 깨어졌다.
“그런데 넌 시집갈 생각은 없느냐? 남자도 만나지 않을 거고?”
“눈에 차는 사람이 없어서요…….”
“소문에는 네가 정말로 빅토르 녀석을 좋아해서…….”
까득.
“그 소문 폐하가 낸 거잖아요!!!”
“어? 어떻게 알았어?”
“폐하!!!”
살벌한 마나의 파동이 퍼져 나가고, 황금빛 오러가 그 마나를 흐트러트렸다.
현인신이라 불리는 황제와 대마도사 신하의 가벼운 충돌은 곧 대전에 광풍을 불러왔고, 황궁의 경비들이 황급히 출동했을 때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황제와 이를 갈며 돌아서는 대마도사의 모습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 * *
[맥라인 제국 인물전>• 빅토리아 윈스터
맥라인 제국 초기 대륙 최연소 마도사이자 후에 대마도사의 경지에 오르는 이로, 오러마스터 빅토르 아이반의 친동생.
*오러마스터 ‘빅토르 아이반’ 편에 별도 기술.
맥라인 제국 성립 시 그 공을 인정받아 윈스터의 성과 후작위를 받았지만, 영지는 반납한 채 마탑에서 마법의 연구에만 매달렸다. 그녀의 나이 39세에 도달한 8서클 대마도사의 경지는 역사상 유례없는 성취로, 마나가 옅어진 현재에는 더욱 달성하기 어려운 마지막 마법사 초월자로 기억되고 있다.
생전에 자손을 남기지 않은 그녀의 골렘 마법은 후에 오빠의 가문으로 이어졌는데, 그 마법이 타르 아이반에 의해 바론 아레스에게 전해졌고, 그것이 지금까지 명성을 떨치는 초마검사의 초월 마법 ‘전마강갑(戰魔剛甲)’의 토대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제국의 반역자 ‘바론 아레스’ 편에 별도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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