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incarnated, Fallen Noble RAW novel - Chapter (120)
중원(1)
국제연합.
그 본질은 변수를 없애는 것이다.
변수를 없애고 순수히 국제사회가 힘 대 힘의 구도로 돌아가게 된다.
전쟁이란 긁지 않은 복권과 같아서, 반드시 패배할 거라 생각했던 전쟁에서 승리하기도 하고, 반대로 당연히 이길 줄 알았던 전쟁에서 참패해서 정권이 날아가기도 한다.
국제연합의 존재가 전쟁을 실질적으로 제지할 수 있다면 이는 후발주자들에 대한 사다리 걷어차기로 기능한다.
사실 국제연합뿐 아니라 핵확산방지조약도,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로 강대국들이 약소국들을 상대로 사다리를 걷어차는 행위다.
국제사회라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약소국들이 강대국의 등쌀을 이겨낼 능력이 없으니 당연시되는 것일 뿐.
또 전쟁을 악마화하면 좋은 점이 하나 더 있다.
피해자화.
21세기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을 안네의 일기>를 예시로 들어 보면, 안네 본인이 알게 되면 기겁할 일이지만 네덜란드 정부는 그녀의 저작을 추악한 방식으로 이용했다.
안네의 일기를 정부 단위에서 조직적으로 브랜드화하고 광고해 네덜란드가 저지른 수많은 악행들을 위대하지는 않고 차라리 쪽팔린 일이지만 아무튼 위대한 잊기라는 명목 하에 장막 너머로 치워버리고 ‘흑흑 저희는 피해자입니다. 안네 너무 불쌍하지 않나요.’ 같은 되도 않는 개소리를 지껄여왔다.
당연히 그 피해자인 인도네시아 등에서는 안네 본인마저도 싸잡혀서 욕을 먹는 실정이다.
그리고 안네의 일기를 정부 단위에서 조직적으로 이용한 또 다른 사례가 있다.
내가 얼마 전까지 있다가 도망쳐온 일본은 안네의 일기를 이용해 ‘전쟁은 절대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며 인류 모두에 대한 죄악이다’ 라는 프레임을 씌웠다.
당연한 거 아니냐고? 그 인류 모두에 ‘2차대전기에 전쟁범죄를 저지른 일본인들 자신’을 최우선적으로 끼워넣었으니까 문제다.
그러니까 그 새끼들 논리대로라면 절멸수용소에서 가스 밸브 돌리던 나치 친위대원이나 난징에서 민간인들 목 자르면서 경쟁하고 강간하고 식인하던 일본군도 싹 피해자라고.
왜 피해자가 똑같은 피해자에게 사죄랑 보상을 해야 하는 거지? 그건 당연한 게 아니잖아. 그러니까 우린 어떤 사죄도 할 필요 없음. 전범? 그게 무슨 소리지? 우린 피해자라니까, 결국 이딴 소리를 하고 싶은 거다.
물론 피해자들 입장에서는 분통터질 일이지만 그 프레임은 실제로 국제적으로 썩 잘 먹혀들어갔다. 당장 미국에서는 요코 이야기라는 일본 소설이 교과서에 실린 뒤로 아예 가해자가 한국이고 피해자가 일본인 줄 아는 경우도 있다고 안다. 지랄도 정도껏 해야지. 제국주의에 대한 반성이 실렸네 뭐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엉엉 우리도 전쟁의 피해자에요, 다 그 제국주의가 나쁜 거고 우리는 잘못 없어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개소리 모음집 아닌가 그거?
그리고 프로이센의 돌연변이….라고 하면 좀 무례한가. 아무튼 프로이센에서 프리드리히 대왕 이래 나치 독일 시기까지 유일하게 외교란 걸 할 줄 알았던 인물인 비스마르크가 그걸 모를 리가 있나?
물론 비스마르크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안네 프랑크가 쓴 안네의 일기를 읽어봤을 리는 없지만 그런 걸 약간의 단서만으로도 직관해낸 거다. 그러니까 나랑 바로 만나자고 했겠지.
‘천재는 역시 다르단 건가.’
역시 모든 걸 다 보여줄 수는 없겠지.
같은 편이 된다고 해도 그건 임시동맹 이상으로 할 수 없다. 내 밑천이 다 드러나는 순간 잡아먹힐 판이니까.
비스마르크는 그릇이 너무 크다. 그릇이 너무 커서 내가 품을 수 없다.
게다가 비스마르크도 내 밑으로 들어올 생각은 애초에 없을 터. 애초에 카이저가 자기에게 ‘명령’을 했다고 지랄했단 일화가 있는 인간에게 뭘 바래.
“국제연합을 실현시키고 싶으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좋은 일이군요.”
나는 살짝 입술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허나 거절하겠습니다.”
“…….. 예?”
거절할 걸 예상 못한 건 아니다. 말이랑 행동이 너무 차이났기에 순간 바보같은 소리를 내버린 비스마르크는 다급하게 표정을 수습했다.
“제가 과거에 말했듯이 국제연합의 형성은 대규모 전쟁으로 인해 유럽, 더 나아가 전 세계의 국민들이 전쟁에 대한 회의감을 느껴야만 가능합니다. 최소한 열강 중 한둘은 몰락할 정도의 대규모 전쟁을 통해 승리한 국가라도 전 국토가 쑥대밭이 될 정도의 막대한 피해를 입고, 나머지도 정신적 충격을 안길 정도가 되지 않으면 여론을 수렴하기 극히 어려울 것입니다.”
나는 태평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 시대의 청년들은 전쟁을 청년기에 해볼만한 모험쯤으로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죠. 그런 이들에게 전쟁을 하지 말라고 해 봐야 들을까요? 그리고 대중에게 그 정도의 충격을 줄 만한 사건을 인위적으로 일으킨다고 해 봅시다. 그건 로마의 공화정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공화정 질서를 무너트린 술라와 다를 것이 뭐가 있습니까? 전 술라가 아닙니다.”
“………”
명분론이다.
물론 비스마르크는 그런 쪽으로 행동하는 인물은 아니다. 명분은 어찌되었든 그의 최우선은 국익이니까.
하지만 명분은, 도덕은 그 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해도 그 누구도 대놓고 부정할 수는 없다. 권위를, 국가를, 법률을 이기는 힘은 결국 도덕이니까.
원 역사에서 저 양반이 일으켰을 엠스 전보 사건을 생각해 보면, 누군가는 독일 제국의 성립을 위해서 현명한 행동을 한 영웅이라고 할 거고, 누군가는 가짜 뉴스를 조작해서 전쟁 여론을 형성해 전쟁을 일으키다니 전범재판에 피고인 신분으로 출석해야 할 인간이라고 하겠지.
그런데 보통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자가 맞다고 한다. 왜냐면 외교란 게 원래 얼마나 우아하게 상대방 뒤통수를 후려까느냐에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도덕률에 입각해 후자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고리타분한 원칙주의자들이라고 생각할지언정 대놓고 비판할 수는 없다. 왜냐? 틀린 말은 아니거든.
그렇게 생각을 하더라도 ‘그래서 가짜 뉴스를 조작해서 여론을 호도하고 전쟁을 일으킨 게 잘했다는 거냐 지금?’이라고 물으면 어지간히 얼굴에 철판을 깔지 않는 한 바로 그렇다고 말하지 못하고 혓바닥이 길어지는 게 인간이다.
그게 도덕적으로 옳은 건 아니라는 건 비스마르크 본인도 아주 잘 알고 있었을 거다. 다만 국익을 위해 도덕쯤은 걷어찰 준비가 되어 있었을 뿐이지. 오히려 정치인이자 외교관으로써는 바람직한 행동이다. 이길 수도 없으면서 도덕률을 걷어차면 일제랑 나치 되는 거지만 이겼으면 위대한 결단이 될 수 있는 거다.
하지만 그 자신이라도 누군가가 ‘그게 옳은 게 아니라는 건 알고는 있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부정하지는 못할 거다. 이쪽 비스마르크에게 그걸 못 물어보는 게 아쉽구만.
그리고 내가 하려는 게 그 짓거리다.
도덕 따지기.
‘명분이 없다 아입니꺼 명분이.’
계기가 없으면 탁상공론인데 계기를 만들려면 수많은 이들의 죽음이 필요하고, 그 사태를 단순히 예측했으면 모를까 있지도 않은 전쟁을 만들어내는 건 당연히 도덕적으로는 절대 용납받지 못할 일이다.
세계 대부분의 외교가 국익을 최우선으로 두고 다른 모든 명분을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소모해버리는 방식으로 돌아갈 뿐이라서 흔히 무시될 뿐이지.
그러니까 반대로 말해서 협조가 필요한 상대가 명분론에 집착하면서 ‘옳지 못하니까 안 됨’이라는 태도를 견지해버리면 듣는 상대 입장에서는 혈압이 좍좍 오르는 거다.
‘좀 더 밑천을 내놓으셔야지.’
아무렴. 어딜 감히 맨입으로 날 사려고 해? 날 모욕하는 것인가?
내가 아무리 국제연합의 최초 주창자라고는 해도 내 영향력을 이용하려면 거절하기는 좀 많은 대가를 제시하셔야지. 떡고물…은 너무 적고 그 광주리에 들어 있으실 떡 몇 개 정도는 내놓으셔야지?
아, 받아낼 떡이 있긴 있냐고? 당연한 거 아냐? 없으면 쥐어짜서라도 만들어와야 할 거 아냐! 일해라 핫산…..이 아니라 비스마르크!
그리고, 비스마르크는 결국 그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뭘 원하십니까.”
나는 빙긋 웃었다.
“중국에서 뭘 하고 계십니까? 이번에 조차지를 뜯어내신다던데.”
“조차지라고 할 것까지는 아닙니다. 그저 관세 없이 우선적으로 장사를 할 권한을 받아낸 것 뿐이죠.”
“그 외에도 하시는 게 있지 않습니까? 중화제국의 사실상 차기 황제 자리를 두고 벌어지는 암투에 대해서 제법 아시는 게 많을 것 같은데요, 유대 상인인 오페르트라던가 하는 사람은 또 어떻습니까? 그 사람이 최근에 이홍장과 만났다고 들었는데 말이죠.”
순간, 비스마르크의 눈이 크게 떠졌지만…. 이내 축 늘어졌다.
“이중제국의 정보망을 딱히 얕봤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오페르트에 주목하셨을 줄이야.”
“뭐, 별거 아닙니다.”
저 새끼가 사업 망해서 조선에 왔었다는 건 대강 알고는 있었는데 잘 나가는 사업가로 변신해서는 이홍장과 접촉했다? 바로 뒤부터 캐 봤지. 그 줄을 쭉 타고올라가 보니 비스마르크가 나왔고.
물론 이홍장과 접촉하려 하는 서양 상인들이 한둘이 아니고, 마찬가지로 비스마르크와 엮여 있는 인물들도 한둘이 아니니만큼 이 두 가지만 가지고 수상한 놈을 짚어낼 수는 없다.
애초에 단순히 이 둘의 교집합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수상하다고 판단하고 뒤를 캐볼 만큼 영국 공사관이 한가한 곳도 아니었지만, 저 교집합에 있는데 원래 사업 대차게 말아먹었어야 했던 놈이, 그리고 지금도 능력이 딱히 나아진 것 같지는 않은 놈이 어디서 대주는지 모를 돈 받아먹으면서 승승장구하면 뭔가 이상한 거지.
비스마르크도 바보가 아니니 본인에게서 타고 내려가서 한 명만 잡아내는 건 어렵지만 수상한 놈을 짚어놓은 뒤 줄을 거슬러올라가는 건 상대적으로 쉬웠다. 애초에 오페르트가 비스마르크만큼이나 용의주도했으면 사업 실패도 안 했겠지. 그 원래 문제도 푸는 건 어려워도 답을 찍은 뒤에 그게 맞나 틀리나 검산해보는 건 훨씬 쉽다니까?
아무튼 존나게 복잡한 문제의 답은 높은 확률로 1 아니면 –1 아니면 1/2이거나 그런 꼬라지일 확률이 높았기에, 문제가 좀 어렵다 싶으면 10여 초 정도 투자해서 역산을 해보고는 했었다. 되면 좋고 안 되면 정면돌파였고,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 예전 이야기지만 은근히 도움이 되고는 했었는데 말이지.
“그래서 뭘 더 원하십니까? 이미 중원에서 가장 큰 이권 중 하나를 깃털도 안 뽑고 냉큼 집어삼키신 분께서 말이죠. 철도부설권이 벌써 넘어갔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참 허탈하더군요.”
“단 한 번도 삿된 일을 하지 않은 제 도덕을 더럽히시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음식이 입에 안 맞는지 비스마르크의 눈썹이 이상하게 꿈틀거린다. 흠, 양념이 저 양반 입맛에는 너무 과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