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incarnated, Fallen Noble RAW novel - Chapter (159)
사천(4)
제대로 ‘접대’받은 사절단을 회담에 앞서 일주일 가까이 ‘대접’을 받아야 했다.
일단 잔치가 이어지고, 여흥으로 공연 같은 것도 벌어지고…..
물론 외교 회담을 할 때는 무도회나 그런 걸 하는 건 유럽도 딱히 다를 건 없지만 그에게는 어느 쪽도 연이 없었다.
애초에 따지고 보면 유럽에 있기 싫어서 아시아 구석에 있었다가 이놈의 전쟁 때문에 끌려나온 것 아니었나. 유럽이건 아시아건 사교계와는 워낙 인연이 없었다.
대령도 술을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독한 화주를 하도 들이키다 보니 사절단의 대표고 나발이고 줄행랑을 칠 수밖에 없었다.
“하아…….”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인간의 사회생활 3대 영양소는 술, 담배, 커피/홍차라고.
정작 본인은 술에 절대 취할 만큼 마시지 않고 담배는 피우지도 않으며 커피와 홍차만 물 들이키듯 마셔대는 것에 대해 질문하자, 아버지는 간단히 답하셨었다.
‘꼬우면 너도 장관하렴.’
권력자는 사회생활에 아랫사람보다는 덜 신경써도 된다는 진리를 깨우처주신 아버지를 잠시 회상한 대령은 한숨을 쉬었다.
하늘은 빨려들어갈 것만 같이 검고, 별들은 밝게 빛나며 달은 누구의 비밀스러운 소원을 듣고 누구의 눈물을 마셨는지 참으로 푸르렀다.
사천은 햇빛이 안 드는 날이 제법 많았고, 낮에도 해를 못 보았는데 정작 깊은 밤중에는 달과 별이 이토록 빛나다니, 부조리할 정도였다.
뇌에 끈적하게 눌러붙은 알코올에 노래가 절로 흥얼거렸다. 평범한 취객이라면 이러다가 그냥 길바닥에 자빠져 자겠지만, 그의 간은 알코올 분해 능력이 애매하게 뛰어나서 50도가 넘는 오량액의 취기에도 버티고 있었다. 물론 조금 더 마셨으면 영락없이 개가 되긴 했겠지만.
‘노래를 부를 때 눈물이 나오는 이유를, 이야기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잊혀지는 이유를.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아도 모든 이가 사랑을 스스로 배우는 이유를.’
머릿속에 이별의 자장가가 울려퍼지는데 그 자장가의 곡조가 너무 좋아서 부르고 싶은데 입 밖으로 제대로 나가지가 않는다.
“나를 하늘로 초대한 빛을 따라 세상을 향해 나아가 내일을 위한 희망을 찾네~ 꿈은 혼자서 오가고 피로를 모르게 하니…. 바람이 두려워서 구름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급류에 떠밀려…”
머리를 들고 발걸음과 호흡으로 박자를 맞추니 어둠 너머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누구…..십니까?”
“그쪽은요?”
녹슬어버린 머리를 강제로 다시 구르게 하면서 대령은 끙 소리를 냈다.
‘잠깐, 영어?’
눈을 끔뻑거려 봤지만 눈앞에 있는 건…….
“춘…..”
“안녕하세요, 대령님. 어우, 많이 마시셨나 보네요.”
“권해주는 것 다 마시다 보니, 그런데 영어를 퍽 잘하시는구려.”
“시대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배운 셈이죠. 중화는 더 이상 천하제일이 아니니까 말이에요.”
한자 하나면 어디서든 통하던 시대는 저물어도 진작 저물었다.
“아버지가 손이 좀 크세요.”
“두 번 컸으면 아예 골로 갈 뻔했소. 으음. 그런데…..”
“예?”
“아니, 혼인 안 한 처녀가 남자랑 둘이 대화하는 걸 동방에서 뭐라 안 하던가 싶어서 말이오.”
“후훗, 아직 걱정해주실 정신이 남아 있으시다는 게 대단하네요.”
“바닥에 엎어지기 직전이다.”
한숨을 쉰 대령은 벽에 기대어 앉았다. 바지가 흙에 더럽혀지는 건 별로 관심이 없었다.
시야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앞이 가물거렸다.
“하얗고 고요한 밤, 그림자는 춤추는데 얼굴에는 수심이 지워지지 않는군요, 어째서일까요?”
“당 소저.”
“소조라 불러주세요. 제 호입니다.”
“좋소, 당소조, 우리 군이 지금까지 중국에서 만들어낸 죽음이 얼마나 될 것 같소?”
“적지는 않겠죠. 장강이 피로 물들었으니.”
거기에 아버지.
그는 중국을 짓밟는 데 이상하리만큼 몰두했다.
마치 중국이라는 국가를 역사에서 영원히 지워버리지 않으면 안 되기라도 한다는 듯이.
그가 러시아군에게 막대한 지원을 하는 것도 명목상으로는 동군연합을 온전한 이중제국으로써 거듭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부친의 평소 언행과 성격을 아는 그로써는 중국에 대한 이유모를 증오가 그 원인이 되지 않았나 할 정도였다.
그렇기에 아버지가 총리직에 있는 한, 이들, 당가 역시 결국 쓰고 버리는 패이리라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홀로 그 죄의 무게를 한탄하며 고통에 묶여있어도 바뀌는 건 없다는 건 안다. 그러나 알더라도 앎이라는 것은 가슴을 묵직하게 짓누르며 상처를 남긴다. 넘쳐나는 감정이 손끝으로 흘러나간 뒤에 양심의 가책이라는 고통을 안긴다.
차라리 미몽에 빠져 있는 평범한 이들이라면 양심의 가책 따위를 느끼지 않으리라. 애초에 그들을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으니까.
인종의 문제만이 아니다. 애초에 다른 외국인들에 대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아버지가 자주 한 말 가운데 ‘애국심이라는 것은 자신이 그곳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그 지역이 다른 모든 곳보다 우월하다고 확신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은 국수주의를 정치적 무기로 채찍처럼 휘둘러대고는 했다.
그 이유도 알 만 했다. 결국 아버지는 뼛속까지 정치인이었으니까.
“‘너 자신의 삶을 끝까지 소중하게 여겨라.’라고 하셨었죠. 그러면서도 피를 흘리는 데에 앞장서셨죠.”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그 언행의 불일치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그래서…….”
가물거리던 눈앞은 완전히 어둠으로 덮였다.
내가 말하고 있던가.
아니면 그냥 생각하는 중인 걸까.
내 입술이 움직이고 있는 걸까?
내가 말하는 것은 진실인가 아니면 거짓인가.
그걸 사고할 정신마저도 깊은 어둠 속으로 떨어져갔다.
***
“흔한 이야기네요.”
권력이란 것은 본디 그러하다.
권력자의 속성이란 건 그렇다.
“장남은 아니라고 알고는 있었습니다만, 이래서야 아버지의 것을 물려받으실 수는 없을 거에요.”
어쩌면 그걸 노리고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오래전 옥좌에 앉지 못하게 될 둘째 이하의 황자들이 기생집에 일부러 드나들었던 것처럼.
그러나 이 순수해보이는 청년은 그런 것조차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다.
모든 사람은 겉에 아무도 모를 가면을 쓴다. 그 가면은 화사하기 그지없지만, 그 안의 사람의 얼굴은 가면을 쓰고 있기에 역으로 더욱 일그러지는 법.
그렇기에 가면을 벗고 대할 수 있는 존재를 간절히 원하기도 하는 게 사람이다. 그리고 가면을 벗기 쉬운 것은 도리어 진정으로 가면을 쓰고 있을 때다. 자신의 신원을 밝히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아무 관련도 없는 이들과 얼굴을 맞댈 때야말로 그 가면이 진정 벗겨지는 때다.
소중한 이들,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있을 때 가면을 벗는다는 것이야말로 기만. 도리어 가면을 더더욱 깊게 눌러쓰고, 더더욱 화려한 가면으로 치장하고 나오는 게 인간이다.
사랑하는 이를 얻고 싶다면, 소중한 이를 곁에 두고 싶다면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에 맞추어 자신을 바꾸어나간다면 다행인데 그조차 하지 않고 연극을 이어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청년은…….
‘겉도, 속도 같군요.’
내심 평가한 그녀는 그를 부축했다.
‘경험이 부족하기에 가능한 것이겠지만……’
당가는 폐쇄적이라는 말을 자주 듣지만, 그만큼 피를 이은 이들 간에, 꽌시를 통해 엮인 이들 간에 단단하게 뭉쳤다. 그리고 그 단단함이 그들을 사천의 패자로 만들어주었다.
그녀 역시 당가의 일원으로써 아버지의 명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본래 정신이 혼미한 이들은 세상에 대해 정직해지는 법이니까.
독한 오량액을 퍼먹은 이들 가운데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을 게 뻔한 군인들을 집중해서 공략해 보기로 했었지만, 그 모습을 보며 한 가지를 느낄 뿐이었다.
‘못할 짓을 한 기분이야.’
입 안에 아무것도 든 것은 없지만, 어디서 온 것인지 모를 씁쓸한 맛이 입안에 퍼져나갔다.
***
“연대장이면 결코 낮은 지위가 아닐 텐데도 순백의 도화지, 부친의 후광도, 그리고 본인의 무용도 출중하기에 가능했겠지만 크게 될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물려받은 것만 어느 정도 굴리며 현상유지 정도나 할 만한 존재였다. 물론 그것도 못하는 이가 세상에 수두룩하다는 걸 감안하면 저평가하는 것만은 아니었지만, 비교 대상이 대상이다 보니 저평가되었다.
“천하를 훔칠 정도의 야망과 심계는 없다. 부친도 그와 같지는 않겠지, 그랬다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까지 애초에 올라가지도 못했을 테니, 역시 후계자 자리에서는 처음부터 탈락인 거였나.”
“적장자가 따로 있으니 그쪽으로 후계를 생각해왔던 모양입니다. 차자 이하, 그것도 서자라면 더더욱 후계교육을 시킬 이유가 없었겠죠.”
후계교육을 받은 건 후계자 한 명이면 충분하다. 여러 명이면 괜히 분란만 일으키기 일쑤라는 건 동서고금의 진리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시간 낭비였던 모양이군요, 아무리 그래도 사절단의 대표이니 뭔가 숨기고 있을 거라 여겼는데……..”
“네 잘못이 아니다. 아무래도 처음 예상대로 지위 높은 이를 보낸 건 그냥 체면을 세우기 위함이고 진짜는 그 보좌들이 맡은 모양이었군.”
“그럼……”
“처음 계획대로, 도련님은 적당히 마음 편하게 쉬게 해드리고 진짜 협상은 다른 이들과 하게 되겠지, 자신 있느냐?”
“자신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해야 하지요.”
당가는 적이 많았다. 굉장히 많았다.
당가가 이만큼 큰 군벌로 부상하면서 적이 생기지 않았을 리도 없거니와, 그 전부터 당가는 은원이 많았다. 그 폐쇄성 때문에 은원이 생긴 것인지, 아니면 그 은원 때문에 당가가 폐쇄적으로 된 것인지 따지는 게 무의미할 만큼.
“천하삼분.”
계한의 유비가 그러했듯이 호랑이와 용이 서로를 물어뜯는 가운데 쓰촨을 차지하여 세 발로 솥을 지탱하며, 그 다음 중원을 도모한다는 것이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이었지만, 쓰촨 내에도 오래 전부터 내려온 은원이 많았고, 그들이 패자가 되는 것을 목숨을 걸고 막아설 이들은 쓰촨 내에도 수두록했다.
“유비도 한 번 고립되자 결국 이릉에서 패배한 뒤, 와룡이 몇 번이고 북벌을 시도했음에도 결국 번번이 실패만 하다가 끝내 와룡이 세상을 뜨자 암군 유선의 대에 패망하고야 말았다. 인덕을 갖춘 성군과 명신이자 충신이 한 시대를 살았음에도 고립되면 쉬이 나갈 수 없고, 시간이 끌리다가 혼군이 즉위하게 되면 끝끝내 패망하는 곳이 이곳, 파촉이야.”
저들에게 신의를 바라서는 안 된다. 애초에 바랄 생각도 없었다. 군벌들 간에도 그런 건 바라면 안 된다.
대신 서로에게 그것이 이득을 가져다주기에 연대하는 관계가 훨씬 안전할 터, 그렇다면 저들은 어떤 이득을 원하고, 어떤 이득을 그들에게 가져다줄 것인가.
단지 그게 중요할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