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incarnated, Fallen Noble RAW novel - Chapter (174)
폭풍전야(1)
지브롤터, 스페인.
지브롤터 댐 완공 축하연은 호화롭게 벌어지고 있었다.
13년간 계속된 대공사가 드디어 끝을 보았다.
세계 2대 댐 건설안이라 불리는 지브롤터 댐과 베링 해협 댐.
베링 해협 댐은 여러 난점으로 인해 착공조차 되지 않았고, 19세기에 착공했던 지브롤터 댐은 중도 포기되어 흉물로 방치되고 있었다.
그런데 스페인 정부가 이를 재개한 것은 다름아닌 대공황 때문이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실직자들이 가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댐 공사를 통해 최소한의 호구지책은 마련해줘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시작된 공사는 백여 년 전에 있었던 그 난맥상과는 다르게 제법 잘 지어졌고, 10여 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된 댐으로 주요 열강 외교관들이 초청되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상당히 의외의 인물이었다.
이중제국 스코틀랜드 야드의 국장, 일명 C라 불리는 대영제국 기사 라브렌티 베리야 경.
공산주의 혁명 세력인 인민의 의지>가 궤멸당할 때 만 스무 살의 나이로 참가해 거물 공산주의자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의 동생 블라디미르 울리치 울리야노프를 체포해 즉결 처형하고,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를 지구 반대편까지 혼자 추적해서 결국 암살해버린 방첩계의 전설이지만, 동시에 이런 자리에는 굉장히, 굉장히 어울리지 않는 인물임은 분명했다.
“아, 베리야 경,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장관님, 저 역시 만나뵙게 되어 기쁩니다.”
베리야는 능글맞게 웃으면서 자리를 권했다.
샴페인을 한 모금씩 마신 아우렐리아 외무이사와 베리야는 금세 이야기꽃을 피웠다.
“핀란드에서 인민의 의지 잔당 소탕작전을 벌일 때, 바텐더로 위장하고 있던 바체슬라프 스크라빈이 화염병을 던져서 그때는 죽는 줄 알았습니다. 제 손등 보이십니까? 그때 화상 입은 겁니다.”
“허, 정말 큰일 나실 뻔했군요.”
“그때 제가 먼저 방아쇠를 당겨서 놈이 병을 던지기 전에 병째로 깨버렸기에 망정이지 그게 저희 요원들 가운데 정확히 떨어졌다면…. 어휴, 아직도 가끔 그때 꿈을 꿀 정도입니다. 놈은 불 붙은 기름을 뒤집어쓰고 비참하게 죽었죠.”
“반역자에 어울리는 최후로군요.”
“국왕 폐하의 은혜를 배반한 놈들은 죽어도 쌉니다. 아니, 단번에 죽는 건 너무 자비롭죠.”
“에도에서 울리야노프를 암살했을 때의 이야기 좀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렵지 않죠.”
베리야는 둥근 안경을 손수건으로 닦으면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하지만, 외무이사는 친근하고 따뜻한 겉모습 내에 독사가 쉿쉿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역시, 위험한 인간이다.’
그러나, 이 인간이 무슨 냄새를 맡았길래 이 자리에 기어나왔는지를 알아내긴 해야 했다.
하지만 뭔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베리야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담배 한 대 피우러 가실까요?”
***
담배를 입에 문 베리야는 나직이 말했다.
“조금 직설적으로 이야기해도 불편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상관없습니다.”
“제가 내각에서 받은 명령은 차후에 분명히 일어날 전쟁에 대비하는 것입니다.”
19세기 이후, 유럽에서는 대규모 전쟁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
대부분은 수 개월 이내로 끝나는 국지전이었거나, 저 먼 식민지에서나 치고받고 싸우는 일이었다.
하지만 식견 있는 이들은 언젠가, 지금 당장은 아닐지 몰라도 언젠가는 대규모 전쟁이 터질 거라는 데에 동의하고 있었다.
“확실히, 이 댐이 있으면 곤란하긴 하겠군요.”
지브롤터 해협이 막힌 이상 지중해와 대서양을 연결하는 통로는 프랑스 영토에 놓여 있는 운하뿐이다.
그런데 차후의 전쟁에서 이중제국과 프랑스가 적대하게 된다면 굉장히 곤란해질 터, 물론 영국과 프랑스의 관계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지만, 애초에 유럽의 정세라는 게 프랑스와 독일이 으르렁거리고 영국이 이쪽에 붙었다 저쪽에 붙었다를 반복하는 게 아닌가.
물론 이중제국과 독일의 관계가 갈수록 험악해지고 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번에 바뀐 프랑스의 정권은 대놓고 신성로마제국과의 전쟁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1848년 전쟁 당시 신성로마제국에 편입된 프랑스 남부 일부 지역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죠.”
“거의 100년 가까이 된 일 아닙니까.”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지금 프랑스의 정부가 문자 그대로 미친개라는 겁니다. 프랑스의 군사비는 작년 대비 3배로 늘었습니다. 그 돈이 어디로 갔겠습니까.”
이미 베리야는 자신의 재능을 양껏 발휘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이 난다면 이중제국은 반드시 참전하게 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말할 이아기는 아니지만, 신성로마제국에서 세운 작전게획, 일명 ‘슐리펜 계획’의 얼개까지 파악하고 있을 정도였고, 이에 따라 신성로마제국이 네덜란드를 침공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
네덜란드가 침공당하면 이중제국은 개입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애초에 신성로마제국이 프랑스를 단기결전으로 상대한다는 계획을 세운 가장 큰 원인을 짚어보면 뻔하다. 이중제국을 경계하는 거다.
어쩌면 이중제국에 대한 선제공격 계획안이 이미 마련되어 있는지도 모를 일.
즉, 한 번 전쟁이 나면 이중제국은 신성로마제국과 전쟁에 돌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베리야가 내린 결론이었다.
물론 그 결론을 내각이 수용하느냐는 다른 문제였다. 한심스럽게도 이 명료한 결론을 어떻게든 회피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이 의회에 너무 많았다.
하지만 머리 위에 얼간이들만 있든 말든 간에 그는 스코틀랜드 야드의 국장이자 대외정보국의 수장이었고, 뭐라도 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본국은 아우렐리아 연방 공화국의 지지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아우렐리아 연방 공화국은 동방의 소국에 불과합니다. 이런 소국에서 뭘 도울 수 있겠습니까?”
싫은데? 우리는 그냥 구석에 쳐박혀서 돈이나 벌면서 지금처럼 살고 싶은데?
“하하, 소국이라니요, 명실공히 극동의 맹주께서 말입니다.”
극동의 맹주라기에는 손색이 많긴 했다.
극동의 2대 강자, 베트남과 아우렐리아는 숙명적인 라이벌이었다.
다만 양측의 건함경쟁은 아우렐리아의 완승으로 결론지어져가고 있었다.
무적급 전함과 승전급 중순양함을 주축으로 한 한국 해군의 함대는 유럽에서도 개함의 성능만 따지면 비할 상대가 없다는 게 정설이었다.
반면 베트남 해군의 총기함이가 최신예 함선인 4만 톤급 고속전함 ‘쩐흥다오’는 거기에 한참 못 미쳤다.
4만톤급, 만재 배수량으로는 5만 톤급 전함인데도 주포는 11인치 3연장 4문에 불과하다. 원래는 15인치 2연장 4문을 갖춰 표준적인 고속전함 정도의 성능을 갖추려 했으나 베트남 제국의 15인치 주포 개발은 처참한 실패로 결론났다.
결국 함선이 취역은 해야겠는데 전략병기인 전함의 주포를 팔아주는 국가는 없었으니 피눈물을 머금으며 11인치 포를 3연장 4문을 장착해야 했던 것이다.
거기에 장갑 설계마저 구시대적이라서 장갑 배분이 잘못되어 두껍게 만들었다고 만들었는데도 대낙각탄 한 방 맞으면 골로 가버릴 설계였으니 속도 빼고는 모든 면에서 낙제점이었다.
그리고 그게 베트남 제국 해군의 ‘유일한’ 전함이라는 상황에서 이미 건함경쟁의 결판은 난 셈이었다.
물론 베트남인들에게 물어보면 공정한 대결이 아니라고 항변했을 것이다. 아우렐리아는 이중제국에게서 최신 기술들을 마음껏 이전받았을 뿐 아니라 아예 초도함은 이중제국의 조선소에서 뽑았을 정도니까.
그리고 아우렐리아인들은 이에 대해 ‘꼬우면 외교 잘 했어야지’라고 답하리라.
이야기가 조금 샜지만, 베리야가 암시하는 것도 그것이었다.
‘우리가 니들에게 얼마나 퍼줬는데, 여차하면 베트남에 다시 무게 실어주는 수가 있다?’
“본국은 중립국의 의무를 다할 생각입니다. 그러나 개개인의 자유로운 육해로를 통한 상행위를 막을 수는 없지요.”
‘물건은 니들한테만 팔게, 됐지? 니들이 원하는 거 그거 아니냐? 대신 너무 값 후려치지는 말고 좀.’
“얼마 전 신문기사를 봤습니다. 귀국의 항공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했다던데, 동양에는 청출어람이라는 말이 있죠? 이제 정말 유럽의 강국들에 비해도 뒤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니들 제법 컸더라? 니들 쓰는 항공기 제법 성능 좋다고 동네방네 소문 다 났던데 말이지.’
“아무리 개별 장비의 성능이 좋다고 해도 결국 승패를 결정짓는 것은 숙련도입니다. 그리고 이중제국은 그런 면에서 세계 어딜 가나 전쟁에서 질 일은 없으시겠군요.”
‘적당히 해라 이것들아.’
“뭐, 하지만 우리는 수십 년간의 우방이 아닙니까? 정말 필요한 순간이 오면 옳은 선택을 하시리라 믿고 있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주지.’
“이중제국과 아우렐리아 연방 공화국 간의 우호가 백 년을 더 이어가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망할 것들.’
***
아우렐리아 공군 제19비행전대, 천안.
천안에 위치한 19비행전대는 테스트 부대다.
같은 기지를 공유하는 18공중뇌격전대는 ‘수리부엉이’ 뇌격기를 대량으로 운용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정식으로 소속된 항공기는 단 한 대도 없고 전부 임시 배속이다. 전면전이 발생해서 적기를 노획한다면 이쪽으로 넘겨줄지도 모를 일이지만 지금까지 그런 일은 없었다.
복좌 복엽 뇌격기인 수리부엉이들은 낡아빠진 물건이다. 무장이라고는 어뢰 한 발, 그리고 2연장 30구경 기관총을 양 날개에 한 정씩 장착했으며, 후방 총좌에는 다연장 ‘리볼버 권총’이 달려 있다.
물론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개발될 당시 기술자들은 적 항공기의 배면 아래를 날면서 위쪽으로 총격을 가해 적기를 격추하는 것을 구상했고, 기관총을 무겁고 길어서 이런 용도로 사용하기에는 거치적거린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항공기에 캔버스와 목재를 사용하는 게 당연시되던 시기, 기관총탄을 근거리에서 쏴대면 되려 과관통이 나서 제대로 된 피해를 줄 수 없지 않겠느냐는 쓸데없는 걱정까지 겹친 결과가 다연장 권총이라는 결과로 돌아왔다.
당연하지만 금속 재질 항공기들이 상용화되기 시작하자 이 상면 후방기총은 단숨에 퇴물이 되었지만, 군부는 ‘어차피 이놈들이 요격에 나서야 할 때면 이미 전쟁 진 거다’라면서 후방기총에 어떠한 개량도 없이 운용하다 퇴역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런 항공대의 미운 오리 새끼들과는 대조되는 세련된 모습의 신형 항공기들이 하늘을 가른다. 세 개의 프로펠러가 두 겹으로 달려 총 여섯 개의 날개가 고속으로 서로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면서 이들을 날아오르게 한다.
10톤에 살짝 못 미치는 무게, 길이는 13미터, 전폭은 15.5m, 엔진은 두 개가 달리고 최고속도는 시속 700km, 최대 항속거리 1700km, 한계고도 11km에 달하는, 시대를 뛰어넘은 괴물딱지 전투기인 10식 제공전투기의 첫 시험 비행이었다.
전투기 다섯 대가 하늘을 갈라 창공을 비행했고, 시험조종사들이 급기동을 선보이자 구경꾼들의 찬탄이 이어졌다.
그들 사이에 끼어 있던 아우렐리아의 장성단 역시 찬탄을 보냈다.
“저희 사의 명예를 걸고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만. 지구 어디를 뒤져봐도 이들보다 고성능인 항공기 따위는 찾으실 수 없을 겁니다.”
“무장 수준은?”
“기관포 4문 정도는 어렵지 않게 적재할 수 있습니다. 필요에 따라 폭장이나….”
“계약하겠소.”
아우렐리아는 소국이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경제력이 아무리 좋으면 뭐하나.
북쪽으로는 이중제국이 꽉 틀어막았다.
바다로 나가려고 해도 발 닿는 곳은 전부 프랑스와 이중제국의 권역이다.
프랑스와 전면전을 해서 일본을 뺏거나, 종주국인 이중제국의 식민지인 류큐 왕국이나 타이완 등으로 진출할 능력이 없었던 아우렐리아는 본토만 죽어라 팔 수밖에 없었다.
다행인 점은 동아시아에서 거래되는 쌀값이 워낙 싼 데다 일단 같은 주인님을 모시는 처지니 식량 자급에 그다지 집착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 정도였다.
중화제국이나 일본에서 거의 거저나 다름없는 값으로 쌀을 사오면 되니 농지로 써야 할 땅에 공장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식생활도 이주민들로 인해 빠른 속도로 서구화되다 보니 식탁에서 쌀의 비중도 제법 줄어든 데다 장립종 쌀의 사용도 적극적이 된 상태라 딱히 밥투정이 일어날 가능성도 적었기에 모든 여력을 공업화로 쏟아부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식량 생산보다 우선해 제철소를 건설하고 광산을 건설하고 공장을 건설했다.
공업을 위해 다른 모든 걸 포기하고, 그간 초고가품만 만든다는 시장의 편견을 깨고 싼 물건들을 팔아치우기 시작했다.
안 팔리는 물건은 이중제국에 정치적으로 로비를 해서라도 어떻게든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갈 틈을 뚫어내 중국과 인도 등에 떠넘겨가면서라도 팔아치워 왔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했다.
결국 아우렐리아가 추구한 건 높은 부가가치를 가지는 고성능의 상품이었고, 이것은 일반적으로 높은 수준의 기술력을 요구한다.
그 결과, 아우렐리아는 세계적으로도 손꼽는 과학기술을 가진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도태되지 않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발악한 결과였다.
10식 전투기는 그 결정체나 다름없었다.
인력 자체의 부족으로 인해 수가 적더라도 최고의 질을 지향하는 아우렐리아군에 어울리는 비싸더라도 성능 좋은 항공기.
양산성이 떨어지더라도 아우렐리아 전역의 공장에서 이들을 찍어낸다면 항공대를 무장시킬 분량은 충분히 확보된다.
그리고 그 이상을 기대해볼 수도 있으리라.
“제공권은 중요합니다.”
아우렐리아 해군이 운용하는 공기 불필요 추진 체계를 장착한 잠수함이 아닌 이상 잠수함들은 자주 떠올라서 공기를 마셔줘야 한다.
아우렐리아 내부에서는 공기 불필요 추진 체계가 개발되기 전의 모든 잠수함을 ‘가잠함’이라는 별도의 분류로 바꿨을 정도다. 즉 이 신형 잠수함이야말로 진짜 잠수함이고 그 전까지의 모든 잠수함은 반푼이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 기술은 아우렐리아에게만 있다.
그리고 아우렐리아의 가상적국은 미국이다.
정확히는 미국과 진지하게 전쟁을 준비한다기보다는 상정할 만한 상대가 미국밖에 없다는 게 사실이었다.
이중제국은 동맹인 데다 국력이 너무 차이나서 동맹국을 끌어들이지 않는 한 의미가 별로 없고, 프랑스와 분쟁이 생기면 이중제국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으니 이중제국 해군이 전멸하지 않는 한 프랑스 해군이 아시아까지 올 수가 없다. 식민지 주둔군쯤이야 격이 너무 차이나고. 신성로마제국이 아시아까지 온다는 건 개가 웃을 이야기.
즉 유사시 이중제국과 함께 공동 방어한다는 계획을 짤 만한 상대는 미국뿐이었다.
하지만 아우렐리아군은 모두가 자신했다. 미 태평양 함대만 상대한다면 방어는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태평양 함대가 보유한 가장 강력한 전함이 16인치인데 비해 한 체급 큰 18인치짜리 전함을 4척이나 보유했으며, 제공권만 장악하면 가잠함에 불과한 미 해군 잠수함들이 어슬렁거리는 건 다 때려잡을 수 있다.
대량생산된 10식 전투기가 제공권을 잡으면 미 해군 전함들이 접근해올 때 전함 대 전함으로 싸우기 전까지 하늘에서 피터지게 두들겨줄 수 있었다.
날파리 같은 항공기들의 지원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심지어 바다 위에서 적이 어디 있는지도 색적이 가능하지 않는가.
항공기들은 눈이고, 적들에게 소소한 타격 정도는 줄 수 있다. 특히 소수의 고성능 함선으로 적의 대규모 공세를 저지한다는 교리가 핵심인 해군의 경우에는 그 날파리 한두 대에 작전에 심각한 지장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강력한 제공전투기가 필수였다.
“미국의 미첼 장군이 1921년에 전함을 항공기가 요격하는 시범을 보였지.”
항공 공격을 통해 수상함에 항공기가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이론을 아우렐리아가 진지하게 고려하게 된 원인이었다. 미국 해안에 접근했다가 폭격기에게 얻어터지고 작전이 실패하는 건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닐 터.
물론 타국과 미국에서 미첼이 끼친 영향은 한정적이었다.
작년에 사망한 빌리 미첼 장군 본인은 미 육군 내에서도 적을 무수하게 만든 다음 그들에게 신나게 두들겨맞은 끝에 불명예제대를 당했고, 미 해군은 자기들 밥그릇을 뺏긴다면서 거품을 물고 길길이 뛴 끝에 미 육군항공대는 해안선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규정을 신설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거기에 미첼의 건으로 미군 내에서 공공의 적으로 찍힌 항공대는 혹독한 정치적 보복을 당한 뒤 거의 모든 예산을 뺏겼다.
미첼이 불명예제대를 당한 1925년 이후 미 항공대가 예산을 따낸 유일한 사업이 본토방공을 위한 폭격기구축기 도입사업이었을 정도다.
폭격기만능론이 지배하는 서방 국가들에게 있어서 항공대의 존재의의는 정찰과 폭격뿐인데, 그 폭격을 못하게 되어버렸으니 남은 건 폭격기를 잡아내는 방공임무뿐.
“미군의 FM-1 따위는 10식 전투기의 상대가 결코 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조만간 신형 대공병기까지 배치되면 폭격기 따위는 날아오다가 불덩어리가 될 겁니다.”
37mm 기관포 2문을 장착한 둔중한 쌍발기, 방어기총을 장착하고 편대를 이룬 대형 폭격기들의 편대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니 당연히 전투기 대 전투기의 싸움에서는 젬병일 수밖에 없다.
애초에 폭격기 항속거리 내에 적국이 없다는 이유로 폭격기가 무용하다는 결론을 내린 뒤 전투기 운용에만 신경쓰는 중인 아우렐리아군에게 있어서는 코웃음만 나오는 수준의 상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우렐리아군이 미국을 경시하지 않는다.
미군은 분명 그들에게 있어서 비웃음의 대상이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국가를 상대로도 그렇게 오만한 생각을 하는 건 불가능했다.
미국의 산업능력에 대해서, 그리고 미국이라는 국가의 본토를 공략하는 것이 극도로 어렵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아우렐리아는 미군을 조롱할지언정 미국이라는 국가에 대해서는 극도로 경계했다.
‘워싱턴까지 진격해서 전쟁을 끝낼 능력 따위는 우리에게 없다.’
‘미국과의 전쟁은 전술적 승리를 수십 차례 거둔다고 해도 전략적으로는 지는 싸움이야. 우리가 모든 걸 쏟아부은 결전을 벌여도 거기에서 손실된 만큼은 바로 충원할 능력이 있다.’
워싱턴까지 대신 진격해줄 확실한 동맹이 있지 않다면 전쟁을 안 하는 게 이기는 길이다. 그게 수십 년간 미국을 상대할 전략을 짜온 아우렐리아 수뇌부의 동일한 의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