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incarnated, Fallen Noble RAW novel - Chapter (190)
태평양 전쟁(1)
부산 인근, 이중제국 해군 H급 잠수함 H-19
“함장님, 확실한 겁니까?”
아무래도 함장의 행동이 영 미심쩍었던 부장은 재차 확인을 요구했다.
“프랑스 국기를 게양한 상선이 사실 동남아시아를 뒤집어놓은 경순양함 SMS 엠덴의 위장보급선이라고요? 하지만 아우렐리아 놈들이 아무리 눈이 단춧구멍만하다고 해도 그걸 눈치 못 챘을 리가….”
“본국에서 내려온 명령이야, 의심 품지 말게.”
“해군성에 재확인을 요청하는 게…..”
“부장! 자네가 함장이라도 되는 건가?”
대영제국의 해군은 전통적으로 함장의 권위를 존중한다. 결국 부장은 미심쩍어하는 마음을 감추고 찌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어뢰 장전, 1번 발사관, 상선이니 한 발만 할당한다. 빗나가는 건 허용하지 않는다. 쏘고 해군 함대가 나타나기 전에 튀어야 해. 알겠나? 우리가 여기 있다는 게 알려지면 외교적 문제가 발생한다.”
“알겠습니다.”
“명령하면 발사한다.”
잠시 뒤, 한 발의 어뢰가 발사관을 떠났다.
그리고 영겁같이 느껴지는 시간이 흐른 뒤,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었다.
못해도 수천 명이 타고 있는 거대한 상선이 기울어지며 두 쪽이 나서 침몰하는 모습을 확인한 H-19는 잠항 상태로 유유히 빠져나갔다.
SOS를 받은 아우렐리아 정화대가 다급하게 소형 선박을 몰고 나타났을 때는 8천여 명의 일본 노동자를 탑승시킨 부도선, 우키시마마루는 그대로 물 속으로 빨려들어간 뒤였다.
구조자는 3천여 명에 불과했으며, 공식 사망자는 549명이었다.
***
“전부 끝났군.”
베리야는 담뱃재를 탁 털면서 빗방울에 젖은 유리창을 바라보았다.
다 끝났다.
악몽처럼 그를 쫓아오던 이 사건은 이제 저 유리창에 서린 희뿌연 김이 비가 그치고 태양이 떠오르면 사라지듯이, 영원히 지워질 것이다.
생존자 명단에는 그 계집이 없다. 백인 남성이 구조되었다는 보고도 없다.
배신자 요원도, 있는지도 몰랐던 걸림돌도, 영원히 해저에 잠들 것이다.
‘윈스턴 처칠.’
베리야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감히 탱크 같은 장난감을 만들어서 유명세를 타더니 자기를 몰아낸다는 되도 않는 모험을 시도한 멍청이.
‘실각하는 건 네놈이 될 거다.’
그의 영향력이면 당장 내일 석간신문 1면을 자기 며느리와 간통한 해군장관 소식으로 메워줄 수도 있었다.
‘그래, 그게 제일 좋겠군.’
근거 따위 없다고? 상관없다. 그의 특기는 없는 사람 만들어내기, 취미는 없는 사건 만들어내기다.
몸을 일으켜 김이 서린 유리창을 거울처럼 바라보았을 때, 천둥이 번뜩이며 방 안을 희게 밝혔다.
그리고 바로 그 소리 때문에 베리야는 위험을 알리는 소음을 듣지 못했다.
“라브렌티 베리야.”
노리쇠 전진음이 들렸다.
“당신을 체포하겠습니다.”
뭐지?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부하들은?
몇 초쯤 지난 뒤에야 베리야는 이들이 부하들에게 들키지 않게 잠입했단 걸 깨달았다. 하지만 어떻게?
그것이 베리야가 일생에서 한 마지막 생각이었다.
-퍽!
몇 겹의 고무 패킹을 통과해 초음속으로 발사된 9mm 탄은 극히 적은 소음만을 내면서 권총을 들려던 베리야의 관자놀이를 적중시켰다.
베리야를 제거한 SAS 요원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다소 당황하긴 했지만, 임무를 수행했다.
“베리야는 살렸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장관님은 죽이든 살리든 상관없다 하셨다. 베리야의 측근들도 전부 체포하고, 여기 있는 서류 전부 쓸어담는다.”
이미 베리야를 체포할 근거는 충분했다.
평소에 약점을 잡아두었던 잠수함의 함장을 협박해 선박을 격침시켜버린 후 독일의 소행으로 위장하려 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 꼬리가 부장의 제보로 말보로 공작에게 붙들린 것이다.
그리고 그 꼬리를 붙잡았고 베리야가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된 이상 이용하기 나름이었다. 프랑스 선박이 아우렐리아의 영해에서 격침된 걸 꼬투리 잡으면 협상국의 연대를 약화시키고 독일을 이롭게 하며 중립국의 여론을 악화시키려 한 반역자로 충분히 포장할 수 있었다.
그런 반역자가 체포 과정에서 저항하다 사살당한 것은 어떻게든 덮고 넘어갈 수 있을 터. 특히 그 주체가 전차를 통해 처음으로 독일군을 압도해 승리한 말보로 공작이라면 더더욱 쉽다.
물론 그 반동으로 한동안 독일 간첩을 색출하려는 광기의 폭풍이 몰아치겠지만, 그건 나중의 일, SAS 요원들은 곧장 베리야의 측근들을 체포하기 위해 빠르게, 그러면서도 은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이중제국 내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방첩 총책임자였던 라브렌티 베리야가 독일 간첩이라는 명목으로 숙청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이번에 그만한 승리를 동서 양쪽에서 거두었으니, 해군장관 윈스턴 처칠의 영향력이 그만큼 커졌다는 이야기일 겁니다. 베리야는 그저 윈스턴 처칠과 충돌했기에 숙청된 것 뿐이죠.”
그 가설은 설득력이 높았다. 베리야가 숙청된 뒤 그 자리를 채운 이가 다름아닌 처칠이니까.
“각하, 유럽 문제도 문제지만 베트남의 행위가 심각합니다.”
국무장관은 담담하게 말했다.
“베트남 제국은 명백히 확장주의적, 패권주의적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네덜란드의 식민지를 관리를 명목으로 군을 진주시켜 무력점령했고, 작년에는 국경지대에서의 충돌을 명분으로 중화제국을 침략했으며 어떠한 평화 제안에도 응하지 않고 있습니다. 명백히 비상식적인 수준의 호전성을 보이는 베트남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봅니다.”
베트남의 확장행보는 확실히 비정상적일 정도로 공격적이었다.
그러나 다른 이유도 있었다.
미국 정계의 개입주의 세력 내부에서 퍼지기 시작한 위기감이었다.
‘어느 한쪽이 이겨버리면, 그쪽은 필시 유럽을 정복할 텐데.’
‘프랑스는 아니야, 독일도 아니다. 프랑스는 파리가 무너지면서 온갖 망신은 다 당했고 독일은 이미 한계에 부닥친 게 뻔하다.’
‘그러면 결국 승자는 이중제국, 그런데 그럼 그자들의 다음 행보는?’
동부전선에서의 참패는 치명적이었다. 동프로이센을 모조리 상실하고 베를린이 이중제국군의 사거리에 들어온 것이었다.
“지난 2월에 헝가리에서 대대적인 시위가 발생했습니다. 현재 신성로마제국은 흔들리고 있어요. 해상봉쇄가 풀리지 않으면 결국 스스로 자멸할 겁니다.”
현재 베를린이 최전선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어버린 탓에 프랑크푸르트로 수도를 옮길 정도로 신성로마제국은 핀치에 몰려 있었다.
막말로 이중제국군이 오데르 강을 돌파하고 젤로브 고지까지 왔는데 절체절명의 위기가 아니면 뭐인가. 물론 그 상황에서 전선이 고착되어 족히 10만을 넘어 20만에 가까운 이중제국군의 시체가 젤로브 고지 인근에 깔려서 지층을 이루다시피 했지만, 수도에 이렇게 가깝게 적의 접근을 허용했다는 점에서 신성로마제국군은 똥줄이 타고 있으리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북이탈리아 등에서 대대적인 공산주의자의 반란 시도가 있었으나, 베네치아 공작 프리드리히 폰 옌티안 제국원수에 의해 유혈 진압되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명백하게 제국은 이미 한계입니다.”
카이저 빌헬름 2세는 도대체 폭주하는 것인지 자포자기한 것인지 모를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동부전선을 유지할 자원이 모자라자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약탈한 것만으로는 모자라서 스페인에게 자원을 거저 내놓을 것을 요구하고, 이중제국의 압박을 받은 스페인이 거부하자 침공해버렸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반역을 꾀했다는 명분으로 숙청되었고, 이는 숙청을 수행한 옌티안 공작이 융커 내에서 평판이 영 좋지 않았던 탓에 융커들까지 흔들리는 원인을 제공했다.
“베트남 내 미국 자산을 동결하고 공개적으로 규탄합시다.”
“석유 판매를 중단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건 너무 강경한 수준의 메시지입니다. 이중제국을 과하게 자극할 우려가 있어요.”
베트남의 상국은 이중제국, 그 이중제국도 비공식적으로 더 이상의 확장주의적 행보를 자제하라고 은근히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그것까지 미국 정부가 알 길은 없었고, 이중제국과 전쟁이 터지는 것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다만, 이중제국이 신성로마제국을 통째로 씹어먹을 경우 유럽의 균형은 완전히 박살나고 이중제국이 천년만년 해먹는 구도가 나올 것은 우려되었다.
영국이 유럽이 단일 패권 아래 통합되는 걸 기를 쓰고 막았듯, 개입주의에 뜻이 있는 미국의 정치인이라면 이중제국의 승리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데에 동의하리라.
문제는 국민들을 설득할 명분이 있느냐는 것일 뿐이었다.
***
베트남, 사이공. 해군성.
“미국과의 더 이상의 외교적 노력은 무의미하다. 저들은 우리가 우리의 정당한 생활권을 포기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셈이다.”
“이제 우리는 저 양키 놈들에게 정당한 대의와 끝없는 분노 앞에 정의로운 응징을 내린다! 황제 폐하 만세!”
“황제 폐하 만세! 베트남 제국 만세!”
베트남군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태평양은 거의 비었다. 전함 애리조나와 미 해군의 항공모함 3자매, 요크타운, 엔터프라이즈, 그리고 호넷을 제외하고는 모든 주력함이 대서양으로 긴급 재배치된 것이었다.
이중제국의 유럽 장악이 끝나면 그 다음은 십중팔구 신대륙일 터, 이를 막고 독일의 명줄을 붙여놓기 위한 전쟁이 진지하게 논의되는 상황에서 로열 네이비에 맞서 대서양을 보호하기 위한 사전준비였다. 어차피 조만간에 신형 전함들이 추가로 취역하면 그 신형함들이 태평양 함대의 빈자리를 메울 터.
그러나 그 사이의, 고작 1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적 틈은 이미 민족주의에 젖어 전쟁을 결심하고 있던 베트남 제국에게는 너무나도 먹음직스러운 틈이었다.
게다가 마침 미 해군의 4척의 주력함 중 하나인 엔터프라이즈가 고작 구식 순양함전대 하나와 같이 코앞의 팔라완에 비행기 셔틀 노릇을 하러 나와 있다는 정찰정보와 호넷이 정찰순양함을 들이받는 사고를 치는 바람에 수리 중이라는 정보까지.
모든 것이 그들의 승리를 위해 손짓하는 듯 했다.
“자정이 되는 즉시 선전포고를 발송한다. 쩐흥다오 장군께서 우리를 가호하시기를!”
***
팔라완 근해.
베트남 해군의 유일한 전함 쩐흥다오는 무선 침묵 상태로 빠르게 항해하고 있었다.
“미 해군의 무선을 방수했습니다. 놈들은 이 근처에 있습니다.”
미 해군의 주력함들을 사방에서 동시에 기습적으로 타격하고, 이를 기반으로 제해권을 장악한다는 게 기초 계획.
그리고 동남아시아 지역의 미국 식민지들을 빠르게 점유한다. 어차피 다 망해버린 네덜란드 식민지는 아예 이참에 영토에 편입해버리고, 협상에서 태평양을 하와이를 기준으로 반분하는 것을 공인받는다.
진주만에 정박해 있는 요크타운과 애리조나는 순양잠수함들이 타격할 것이지만 엔터프라이즈는 그들이 잡아야만 한다.
“견시 보고입니다! 우현에 항공모함 확인! 함형 요크타운급 항공모함과 일치합니다!”
“좋아. 준비되는 즉시 발포한다!”
“제독님?”
“고작 몇 분 차이다. 미국놈들은 선전포고문을 받자마자 저놈들에게 내빼라고 할 거다.”
베트남 해군은 이미 공식 선전포고 시간보다 5~10분씩 빨리 공격한 다음 시계가 잘못되어서 이미 선전포고한 줄 알았다고 둘러댈 작정이었던 것이다.
잠수함이라면 접근한 줄도 모를 수도 있지만 전함이라면 눈에 안 띌 수가 없는 법, 함대의 눈인 항공모함이 그들의 접근을 모를 리가 없었다.
“1번부터 4번 포탑까지 전 포대 포탄을 장전했습니다.”
“포술장! 사실상 훈련 상황이다. 초탄 협차를 기대한다! 근탄 아래로 나오면 돌아가서 죽는다!”
“예! 함장님!”
그리니치 표준시 1934년 12월 31일 2352시, 공식 선전포고 8분 전에 USS 엔터프라이즈를 향해 베트남 해군 총기함 쩐흥다오에서 12발의 11인치 포탄이 발사됨으로써 태평양 전쟁의 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