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incarnated, Fallen Noble RAW novel - Chapter (201)
명분(2)
좋아, 처음부터 생각해 보자.
“중대장님.”
“중대장 지금 본토에 중대한 보고사항 있어 잠시 자리 비우겠다. 선임 소대장이 어지간한 건 대신 해.”
“얼마나 걸리십니까?”
“통신병에게 물어봐.”
소대장이라고 해도 여기서는 죄다 대위다. 실험기계화중대 소속은 죄다 계급을 한 등급씩은 높게 봐야 한다.
통신병이 열심히 기계를 뚝딱거리는 동안 나는 암호를 만드는 데 쓰는 제퍼슨 디스크를 노려보았다.
원래는 연대급 이상에서나 쓰는 장비지만, 우리 부대의 특수성 때문에 나도 중대장이면서 이걸 쓰게 되었다.
해군에서는 신성로마제국에서 상업용으로 판매되던 암호장비 ‘에니그마’를 우리가 자체적으로 개량한 걸 쓴다는데, 육군은 그냥 제퍼슨 디스크를 쓴다. 애초에 암호체계라는 게 한 번 뚫리면 줄줄 새니 육군과 해군의 암호체계가 다른 건 오히려 보안에 만전을 기하는 셈이다.
근데 에니그마가 원래 상업용으로 나온 거였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저거 나중 가면 뚫리지나 않으려나.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저거 나중 가면 뚫린다는 건 안다.
보통 상황이면 빨리 보내기 위해서 열심히 암호문을 끼적이고 있겠지만 지금은 암호를 정리하기 전에 내 머릿속부터 복호화해야 할 판이다.
19세기에 천황가는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몰살당했다고 하는 자도 있고, 혁명군을 피해 산속으로 도망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천황이 목격되었다는 위치는 시나노국. 나가노의 옛 이름이다.
혁명군을 진압하고 식민통치를 시작한 프랑스는 굳이 천황을 찾아 죽이든 꼭두각시로 쓰든 어느 쪽에도 관심이 없었지만, 그래도 일본인들 가운데 천황 숭배 사상이 없어지지는 않았다.
‘가톨릭 선교에는 프랑스가 좀 관심이 있었지만 별로 교세를 못 폈고, 오히려 신토와 불교는 프랑스에 대한 반감만큼 교세를 넓혔으니.’
물론 일본식 불교와 신토의 경계선이 뚜렷한 상황은 아니지만, 아무튼….. 내가 잡은 명분은 일본 내에서 일개 중대장이 책임질 선을 한참 넘은 후폭풍을 일으킬 수 있을 터였다.
당장 일본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게릴라들의 반란만 해도 그 근본을 따지고 들어가면 히미코 여왕이 되돌아와서 그들을 구원해주리라는 민간신앙이 그 발단.
무녀 본인은 아직 실신상태지만 그 무녀의 친구라는 여자와 대화를 했었다.
‘마유즈미 양의 친구라고 했던가요.’
‘호숫가에 살고 있습니다. 나스탸라고 불러주십시오.’
‘나스탸라.’
애칭 종류인 것 같은데 모르겠다.
‘영어 하실 줄 압니까? 제가 일본어를 잘 못해서.’
‘영어보다는 러시아어가 편하긴 한데 못하는 건 아닙니다.’
‘못한다는 것치고는 유창한데…. 아무튼 좋습니다.’
은여우 비슷한 인상의 소녀는 말을 계속했다.
‘이 무녀 아가씨, 가족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어머니가 무녀셨는데 몇 년 전에 돌아가셨고, 이제는 그녀 혼자입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이 아가씨가 실종된 덴노 가문 최후의 후손일 가능성보다는 같이 도망친 수행원들 중 하나의 자녀일 가능성이 크다. 애초에 본인도 뭘 아는 건 없었지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게 바로 그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털끝만큼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는 게 알려지는 순간 그녀는 폭풍의 눈이 될 터.
쥐도새도 모르게 암살자가 다가와도 이상하지 않다.
‘공산주의자들은 죽이고 싶어할 거고, 총독부도 썩 달가워하진 않을 테고. 반군은 추대하려 할 거고.’
일단 그 털끝만한 명분에 힘이 더해진다면 이 무녀 아가씨를 덴노의 마지막 후예로 선언해버리고 즉위식을 치르는 건 어렵지 않다.
‘천황가의 족보라도 찾을 수 있었으면 명분에 쐐기를 박을 수 있어서 좋았을 텐데, 다 타버려서 찾을 수가 없었지.’
물론 내가 결정할 사안은 절대로, 절대로 아니다.
하지만 전략이사회가 조금 더 손패가 늘어난다면 그들의 선택의 폭도 넓어지긴 했을 거다. 없는 걸 어떻게 할 수야 없겠지만.
가만히 보고 내용의 초안을 마음속으로 가다듬은 나는 제퍼슨 디스크를 잡았다.
***
전략이사회. 아우렐리아.
전략이사회의 최근 현안 대부분은 정부 체제의 개편과 총선거, 그리고 미국과의 거래와 기타 여러 가지 사항이었다.
미군이 만주로 진격하겠다고 하니 일단 철로를 비워줘야 했고, 요청받은 무기를 챙겨주고. 대금으로 받은 금괴를 다시 풀어서 여기저기 필요한 데에 소모하고, 남은 건 은행 지하 금고에 잘 박아놓고.
그러나 그런 모든 현안이 싹 치워질 만큼의 폭탄이 일본 열도에서 회의실로 신속배송되었다.
“이건 신이 우리에게 주신 기회입니다!”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포효했다.
“천황가의 마지막 후손을 내세워 일본을 식민화합시다! 어차피 이제 전쟁해야 할 상대인 프랑스 놈들 신경을 뭐하러 더 써줍니까! 일본은 우리의 정당한 전리품입니다! 아니 생득권입니다! 우리도 식민지 하나쯤 있어야죠!”
“육군이사, 진정하시오.”
“어떻게 진정합니까! 한민족 5천 년의 기나긴 인고와 모멸의 시간, 이제 한민족은 강대국으로 다시 우뚝 설……”
“야 이범석이! 좀 진정하라고! 다른 사람들이 말을 못하잖나! 내가 니 말만 하는 버릇 좀 고치라고 말을 했나 안 했나!”
헌법수호국장 김창암이 소리를 지른 뒤에야 이범석은 입을 다물었다.
“후우, 감사합니다. 김 국장님.”
하필 이런 타이밍에 순번이 돌아온 덕에 집정관 노릇을 하고 있던 안창호는 진땀을 흘리면서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아냈다.
“말 나온 김에 헌법수호국장님께 여쭙겠습니다. 저희가 일본을 천황을 내세워 지배한다고 가정하면, 우리의 국력으로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거는 재무이사나 육군이사한테 물어봐야 하지 않겠어?”
“일본이나 기타 외국의 반응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뻔하지, 믿고 싶은 놈은 믿을 거고 안 믿을 놈은 절대 안 믿을 거고. 공산주의자들은 싫다고 난리칠 거고 우익은 좋아라 할 거고. 물론 우리가 개입되지 않았다는 전제 하에.”
“우리가 공개적으로 움직이면 어떻겠습니까?”
“기회주의자 한 줌 빼고는 싹 반대쪽으로 붙겠지.”
안창호 집정관은 만족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직접 움직이면 악수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프랑스만큼은 아니어도 이 나라에 대한 일본의 여론도 좋지만은 않으니까요.”
“하지만 천황가의 마지막 생존자입니다! 이런 카드를 안 쓰고 그냥 넘긴다고요?”
“일본 내에서 요시다 쇼인에 대한 평가는 제법 갈립니다. 요시다 쇼인은 공산주의자였고, 좌익 인사들은 계파에 따라 다르지만 천황에게 실권을 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아예 인정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쪽도 있고요.”
“우익 인사들과 중도 인사들은 어떻습니까?”
“일본 민중들 중에는 천황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적지만은 않습니다. 어쨌든 간에 일본 민중 가운데 깊게 퍼진 신토의 수장이었으니 말입니다. 일본의 불교에서는 아예 천황을 부처의 화신이라고 하기도 하니 말입니다.”
신불습합.
원래 애미니즘 사상에서 출발했고 제대로 된 교단 조직이나 교리가 없었던 신토는 불교와 유교의 사상을 대량으로 흡수했었고, 일본 내에서 불교와 신토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현상을 초래했다.
원 역사대로라면 메이지 유신 당시 출범한 신정부에서 불교를 적대시하면서 신토와 불교 사이를 신불 판연령을 내려 강제로 갈라놓고 국가신토를 제창함으로써 둘이 완전히 다른 길을 가게 되었겠지만, 요시다 쇼인이 유럽에서 빨간 물이 들어가면서 신토와 불교 모두를 배격하고 공산 혁명을 일으킨 결과 천황가까지 사라져버린 뒤에는 신토와 불교의 불편한 동거는 신토가 반쯤 굴복하는 형태로 이어졌었다.
물론 얼마 가지 않아 프랑스가 강압적인 가톨릭 선교를 개시하면서 둘 다 사이좋게 탄압받았고, 이런 상황에서 높으신 분들의 종교인 불교보다는 풀뿌리 종교인 신토가 더 잘 버텼기에 신토도 명맥이 끊긴 상황은 아니었다.
“대충 이런 상황인데, 아무튼 천황은 일본 내에서 혈연으로 세습되는 교황이란 말이오. 당연히 빨갱이들과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입장이고, 근대화를 생각하는 이들도 천황이 자기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좋아하지 않겠지, 하층민들에서 강력한 지지를 모을 수 있고 지식인층 중에서는 복고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겠지만 그뿐이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너무 티 나게 움직이면 그마저도 다 떨어져나가고 일개 기회주의자들만 남겠지.”
“민중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면 그걸로 끝난 거 아닙니까?”
“일본은 우리처럼 민주국가가 아니오, 우리처럼 경제를 말아먹은 이사가 광장 한가운데에서 분노한 군중에게 맞아죽는 일은 일어날 수조차 없지.”
대공황 당시 일이었다.
집정관은 이사들이 돌아가면서 맡는 직책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사는 이 나라에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라고 봐도 무방한데 그런 이사들도 국민들의 공분을 사는 순간 물리치료를 당하는 게 이 나라다. 게다가 국민들은 정치에 관심이 매우 많고, 투표율도 높다.
외무이사가 이해가 안 가는 조약을 맺어 국민들의 심기를 건드린다거나 내무이사가 망언을 지껄인다거나 하는 순간 다음날 출근길에 군중들이 몽둥이 하나씩 들고 대기하고 있다가 멍석말이를 해버리는 나라인 거다.
그러다 죽으면 자연사다. 이 나라가 뭐하는 나라인데 국민들 심기 거스르고 사지 멀쩡하게 돌아오길 바라?
“외무이사시라면 그런 상황에서도 군중들을 선동해서 빠져나갈 수 있지 않습니까?”
“날 작정하고 담가버리려는 군중이 내 말을 들어주겠나? 내가 입을 떼려는 순간 이미 몽둥이가 날아오고 있을 텐데.”
어찌 보면 가장 확실한 직접민주주의다. 덕분에 정화 대원들의 경호 실력과 시위진압능력이 함양되고 있기는 하지만… 정치인들도 지 입 밖으로 나가는 말이 일으킬 파급력 정도는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누가 그러던가? 문명인이 야만인들이 무례한 것은 무례하게 굴어도 대가리가 몽둥이에 부서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석전의 민족답게 한민족의 민초들은 짱돌 하나만 들어도 정치인 하나쯤은 골로 보내버릴 수 있으니 자연스럽게 정치인들도 민중을 개돼지로 봤다가는 그 개돼지에게 두개골이 박살날 걸 잘 알기에 제 혓바닥 간수를 잘 하게 된다.
잘 안 하는 놈이야 눈먼 짱돌에 맞고 살아남으면 그 뒤부터는 잘 할 수밖에 없게 되는 거고.
“그리고 우리 국민들도 양식이 있어서 누가 봐도 선 넘은 놈들만 패지 않습니까?”
“양식이 있으면 아무리 열이 받았다고 해도 소송이든 뭐든 해야지 백주대낮에 끌어내서 때려죽이나, 투표를 해야지 투표를.”
“죽는 경우는 별로 없지 않나. 난 나쁘지 않다고 보네만. 뇌물 주고받거나 하는 놈들도 멍석에 한 번 말려 보면 정신이 퍼뜩 들지 않겠나?”
모든 이사들은 헌법수호국장의 옷 아래에서도 느껴지는 두터운 이두박근과 삼두박근이 꿈틀거리는 모습을 잠시 감상했다.
사람들이 다들 쉬쉬하기는 하지만 하회탈 하나 쓰고 흰 한복을 입은 채 쇠퉁소로 건축사에게 부실시공을 눈감아주는 대가로 억대 뇌물을 받았다가 걸린 의원 하나를 두들겨패는 키 190cm의 거한이 있었다는 소문은 정계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거 양반 성깔 참…..’
“근데 이야기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원래 이야기로 좀 돌아가세, 어디까지 했던가?”
“일본은 우리같은 민주국가가 아니라 구세대적인 봉건국가란 이야기까지 했었소.”
“아아, 그랬지.”
“일본의 여론을 이끄는 건 엘리트층 한 줌이네, 그건 반군이든 친프랑스파든 다를 게 없어. 뭐 친프랑스파야 우리가 제놈들의 새 주인님이 되겠다고만 해 주면 당장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 줏대없는 놈들이니 상관없지만, 반군에게 있어서는 천황가는 이용할 가치는 있을지언정 바로 납작 엎드려야 할 현인신일 리는 전혀 없단 말이지.”
“하지만 그래도 그 천황인데 거래 재료 정도는…..”
“아니 그러니까 일본을 가져가도 경영하는 데 돈이 너무 많이 든다니까요! 식민지가 얻기만 하면 돈이 줄줄 나오는 화수분인 줄 아십니까! 되려 치안유지비 줄줄이 잡아먹는 무저갱이지! 안 그러면 해군 예산이라도 삭감하든가 말입니다!”
재무이사 김규식이 포효했지만, 아주 피를 토하듯이 절규하는 외침에 해군이 펄펄 뛰었다.
“이번 전쟁에서 이 나라 지킨 게 누굽니까! 해군입니다! 그런데 해군의 예산을 삭감한다니, 토사구팽입니까?”
“거 누가 들으면 해군만 전쟁 다 한 줄 아시겠구만.”
“말 다했나! 우리 승전급과 무적급 이쁜이들이 외국에 팔려나간 것만으로도 혈압이 올라 죽겠구만!”
“그 외람된 말이지만 해군이사 자네 야밤에 아무도 없을 때 몰래 배에 박는다는 말이 사실이었나? 무슨 반응이 애인 뺏긴 남자같…. 우억!”
그 직후 회의장 내에서의 폭력사태가 발생하자,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 거 국민들이 폭력적이라고 뭐라 할 게 아니라 이사들이랑 의원들부터 폭력성을 좀 가라앉혀야겠구만.”
그 와중에도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린 이범석이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모두에게 외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