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incarnated, Fallen Noble RAW novel - Chapter (262)
로타르(3)
총알 아홉 발을 전부 비워낸 권총에서는 연기가 뿜어졌다.
바닥에 엎어진 건 세 명의 군인. 서있는 건 나 하나였다.
“걸을 수 있겠니?”
“……….”
순간 아차 싶었다. 이도는 국제어지만, 모든 이가 배우는 게 아니니까.
정치인이나 군 장교, 외교관에게는 필수어지만…
“감사합니다.”
“……..?”
조금 당황했다.
“프랑스어…..? 프랑스인이니?”
“네.”
“……….”
어린 소녀를 잠시 바라본 나는 손을 내어주지는 못했다.
“어디 숨어 있을 생각이면 그렇게 해라.”
물론 그렇게 하지는 않겠지, 난 순간적으로 내 멍청함을 자책했다. 방금 수풀에서 끌려나와서 저들에게 큰일을 당할 뻔한 애한테 뭔 개소리를 지껄인 거야.
“따라오고 싶다면 따라오거라, 대신 조용히.”
몇 블록만 더 가면 외교공관이 있다. 거기 가서 문 열라고 하면 열겠지, 외교관 가족들도 모여있을 테니 맡겨놓기는 좋을 거다.
“이놈들, 비무장이었군.”
공수부대는 무기와 몸이 따로 투하된다는 건 알고 있지만, 무기를 찾는 게 아니라 어린애 붙들고….. 말을 말자.
“엿이나 쳐먹으라지.”
수류탄 핀을 뽑아 시체 밑에 밀어넣은 나는
나는 탄창을 갈고 골목길로 걸었다. 다행히도 아이는 시끄럽게 둘지 않았다.
아니, 이런 상황을 당할 뻔한 애가 시끄럽게 안 구는게 괜찮은 게 맞나? 잠시 고민이 있었지만 일단 도착해서 하기로 했다.
그 뒤로는 특별한 말썽 없이 외교공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장군님. 무사하셨군요. 그런데 그 애는…..”
“오다가 데려왔네, 프랑스 애던데, 프랑스 군인들에게 당할 뻔했어, 미친 것들.”
“외인부대가 다소 그런 면이 있긴 합니다.”
죄 짓고 도피처로 군대를 택한 이들이 적지 않으니.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거죠. 오죽하면 개구리 놈들이 외인부대의 비행에 대한 처벌 횟수를 발표하지도 않겠습니까.”
내 등 뒤에 숨어 있는 소녀를 바라본 무관은 한숨을 쉬었다.
“마침 잘 됐습니다. 지금 여기 다른 애 하나 더 있는데.”
“또 있다고?”
“스칸다나비아인인데, 부모가 아까 있던 공습에 죽고 본인은 기적적으로 살았습니다. 일단 저희 쪽에서 보호하고 있었는데, 이름은 올리비아고 나이는 14살, 서기관님께서 제가 돌보라고 하셨지만 장군님이 맡아 주십시오, 저는 지금 경계선에 투입되어야 해서 말입니다. 안쪽 방에 있습니다. 그럼…..”
“내 권총 가져가게, 도움이 될 거야.”
가슴팍에 권총을 꽃은 대위는 급히 인파에 휩쓸려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네 이름도 모르는구나. 이름이 뭐니.”
“이자벨……”
“이자벨, 나이는?”
양손을 쫙 편 소녀를 본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기랄,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나도 차라리 총 들고 경계선에 가고 싶지만, 아까 그 대위와는 다르다. 내가 총이라도 맞으면 보통 난리가 나는 게 아닐 테니까.
“14살, 10살이라, 딱 그놈들 나잇대인데.”
갑작스러운 전쟁터 한복판에 떨어지니 애들 생각이 간절해졌다. 자식뻘 애들이 눈앞에 있으니 더더욱.
그때 아는 얼굴이 보였다.
“임 비서?”
총영사 개인비서를 알아본 나는 그녀를 잡아세웠다.
“아, 장군님, 무사하셨군요!”
“출국하려다가 공습을 받고 일단 되돌아왔소, 아무튼 지금 총영사는 어디 있고, 본국과는 연락이 되오? 그리고 애 봐줄 만한 사람이……”
“총영사께서는 최초 공습에 돌아가셨습니다. 가족분들도……”
“김 영사가? 이런 젠장, 잠깐, 그럼 지금 책임자는 누군가?”
“강 참사관님이십니다.”
“강 참사관? 이 서기관은?”
“그분도 부상당하신 상태셔서……”
“젠장, 참사관 좀 봐야겠네, 그리고 통신장비 있나?”
“전화선은 끊겼습니다. 그 외의 장비는 참사관님께서는 아실 거고…..”
“강 참사관 지금 어디 있나.”
“4층에 계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 애 봐줄…. 젠장, 없겠지, 알았어.”
나는 곧장 계단으로 뛰어올라갔다.
“강 참사관!”
“장군님?”
“지금 상황 어떻게 되고 있어?”
“총영사관들과는 연락이 끊겼습니다. 전화국이 파괴된 모양입니다.”
참사관이라지만 까놓고 말해 헌법수호국 요원이다. 총영사관 참사관 정도면 로타르 내 화이트 요원 2위급.
근데 어쩌라고, 나보다 짬 높아? 내가 니네 국장 겸임해도 이상할 거 없는 위치다.
“지금 상황 어떻게 되고 있냐고! 대답 빨리빨리 안 나오지! 본국과 통신 돼? 아니, 퀼른의 대사관과는?”
위성전화 같은 건 있을 리가 없는 시대고, 유선은 끊겼을 테니 무선통신장비다.
“그….. 대사관과는 연결을 실패했습니다. 본국이랑은 원래 통신 거리가 안 닿고, 그래서 어떻게 런던 총영사관과 무선 통신을 시도해보려고 하는 중입니다. 그쪽 경유해서 본국과 통신을…..”
“로타르 정부랑은 연락 돼?”
“아까 전에 로타르 외무부 차관보와 잠깐 통화가 됐습니다. 현재 암스테르담 내부에 강하한 공수부대에 대한 포위망을 형성했고 저들도 외교공관을 침번하진 않을 테니 밖에 나오지 말라는 말만 들었습니다.”
“공수부대 섬멸이 먼저일지 프랑스군이 저지대에 기갑부대를 앞세워서 진입하는 게 먼저일지, 전황은? 브뤼셀은 뚫렸대?”
“일단 국경 지역에서 전투가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그 이상의 정보는 얻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아, 젠장.”
그래, 위성도 없는 시대에 그만큼 했으면 선방했지.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그놈들, 여기 외교공관이 있는 건 알고 있겠지?”
“일단 영사관 내 전 인원을 무장시키는 중입니다. 잠깐, 장군님, 기밀취급인가 있으시지 않습니까?”
“있지.”
“저 좀 도와주십시오, 원래 셋은 있어야 할 일인데 저 혼자 하고 있습니다. 기밀 서류 파쇄를 해야겠는데 서기관급은 취급인가가 없어서……. 잠깐, 저 꼬맹이들은 뭡니까?”
“뭔 꼬맹…..어라? 니들 왜 따라올라왔어!”
돌겠네 진짜. 대충 꼬맹이들을 문 밖에 세워서 누가 오면 알려달라고 한 뒤 죽어라고 파쇄기를 돌렸다.
당연하지만 서류 파쇄는 전기파쇄기가 아니라 손으로 일일이 돌리거나 제본용 큰 작두를 쓰든가 아니면 불에 쳐넣는 작업이었다. 중노동인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후, 후, 올리비아랑 이자벨이랬나, 아무튼 저 애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몰라, 젠장, 일단 이 상황에 밖으로 내쫓을 수도 없잖아. 책임자는 귀관 아닌가?”
“저는 원론적으로는 우리 국민 아니면 들이지 않는 쪽을 지지합니다만. 원칙적으로는 우리 국민의 그 배우자나 자식이 아니고서는 외국 국적자를 이런 상황에 공관 내에 들이면 안 됩니다.”
“………..”
“하지만 그게 사람으로써 할 짓은 아닌 것 같군요.”
“말은 잘 했는데, 원래 공작요원이 사람으로써 할 일과 원칙 사이에서는 원칙을 택하라고 있는 직업 아닌가.”
내 말에 참사관이 피식 웃었다.
“일단 가서 거울이나 한번 보고 오십쇼.”
대강 이마의 땀을 닦은 나는 무시하고 서류를 불에 쑤셔넣었다.
“어? 그러지 마십쇼! 그렇게 넣으니까 불이 죽잖습니까!”
“죽으면 휘발유 좀 부어서 다시 붙여, 재만 부숴버리면 되잖아.”
종이가 부서지면 복원도 못 한다. 태워버린 종이에 있는 내용을 복원한다는 것도 종이가 부스러지지 않은 다음에야 가능한 거지, 파쇄된 종이도 근성만 있으면 복원한다는 이야기는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파쇄지를 태워버린 다음 한 번 더 부수면 귀신이 와도 못 하지 않겠나.
“대사관도 아니고 총영사관에 뭔 기밀자료가 이렇게 많아?”
“주로 이번 회담에 대한 자료들이죠. 원본은 본국에 보냈지만 여기도 유사시에 대비해 복제본을 만들어뒀습니다.”
약간 허탈한 듯한 목소리라 슬쩍 보자, 강 참사관은 힘빠지는 소리를 더했다.
“다 저 혼자 만들었었습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 시간에 잠이라도 잘 걸 그랬군요.”
“사람이 너무 성실한 것도 문제군.”
나는 구시렁거리면서도 자료를 불태웠다.
***
노이슈반슈타인 성. 독일 제국.
법적으로 독일의 수도는 프랑크푸르트다.
그러나 제국 황실이 거주하는 곳은 바이에른에 위치한 5개의 성이다.
황실에서는 이 중 넷은 적절한 대가를 받고 제국 정부에 넘겨서 관청으로 쓰게 할 의지를 보였고, 마침 왕정복고 직전 프랑크푸르트에서 일어난 대규모 폭동으로 제국의회와 총리관저 등이 죄다 잿더미가 되어서 당장 쓸 만한 건물이 없었던 관계로 독일 제국 정부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적잖은 비용을 지출해 다른 4개의 성을 사들인 제국 정부는 4개의 성을 각각 하원 의사당, 상원 의사당, 총리관저, 그리고 최고법원으로 개조했고, 황실이 거주하는 노이슈반슈타인 성까지 총 5개의 거성은 이내 독일 제국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물론 프랑크푸르트에는 나머지 기관들이 전부 있었다. 전쟁성, 외무성, 내무성, 재무성 등등의 행정 각부의 기관은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수도라는 지위가 부끄러워지는 신세는 면한 셈이었다.
대신 그 덕분에 쿠데타의 성공 가능성 등은 수직으로 추락하긴 했다. 퓌센과 프랑크푸르트를 전부 장악하지 않으면 성공이 불가능해졌으니까.
그리고 이 5개의 성 중 가장 중요한 성은 상징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노이슈반슈타인 성이었다. 귀족들의 특권은 철폐되었지만 황권은 더욱 강화된 독일에서 여제가 원한다고 하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대표적인 예시는 직계 황족들은 어떤 죄를 저질러도, 그게 반역죄라고 해도 일반 법원에서 재판받지 않는다. 군사법원도 마찬가지였다. 황족을 심판할 수 있는 건 오직 황제뿐이니, 황족이 얽힌 민사, 형사 재판은 황제가 다른 황족들의 조언을 받아 직접 판결한다.
단심제로 항소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는 되려 불리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직계 황족은 황제의 자식이나 손자, 정말 황제가 오래 살면 증손자에 한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황제도 커버해주지 못할 정도로 사건이 크거나, 아니면 황제와 자식 내지는 손자와의 관계가 어지간히 최악이 아니고서야 팔은 안으로 굽을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형제도 직계가 아니라 방계로 빠지니까.
이야기가 길었지만, 독일의 황권은 혁명 이전보다도 더욱 강해진, 독일 역사상 카롤루스 대제 이래 유래가 없을 정도로 강해진 상황이었다.
그러니 절박한 외교관이라면 누구부터 찾아가겠는가? 황제가 일일이 처리하기 귀찮은 사무를 대행하는 총리? 아니면 신성불가침의 황제?
너무나도 뻔하지 않은가.
그렇기에, 로타르의 외무장관은 이곳을 방문하고 있었다.
사실 오기는 전쟁이 터지기 전부터 와 있었지만. 이제 그는 오체투지를 해서라도 제국에게 군사지원을 받아내야 할 판이었다.
“카이저, 그리고 카이저린 폐하.”
상대가 말하기 전, 카이저가 입을 열었다.
“암스테르담이 공격받는다는 소식을 들었노라. 암스테르담이 함락되면 로타르의 미래도 어두울 터, 저지대가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는가?”
“감히 그에 영원을 답하겠나이다. 카이저시여.”
장관은 나직이 말했다.
“저희에게 필요한 건 도망치는 데 필요한 헬기가 아닙니다. 저희가 적에게 쏘아낼 한 발의 탄환과 집어던질 한 발의 수류탄이 필요합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카이저는 답을 돌려주었다.
“그것이 그대들의 뜻이라면, 제3제국은 기꺼운 마음으로 그대들의 청에 답하리라.”
문민통제
서구 세계는 피로 물들고 있다.
그러나 비서구 세계가 평안하느냐면, 결코 그렇다 말하지 못하리라.
“혁명 만세!”
인도, 페르시아, 아라비아 반도에서의 총성은 당장은 멈췄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행복한 결말에 도달해서가 아닌, 완벽한 폭정이 이들을 찍어눌렀기 때문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이 아편쟁이들을 다 죽여버려!”
이 지역들의 상태를 간략하게 구분해 보자면 북아프리카 지역에 있는 자유 프랑스에게서 떨어져나온 프랑스 인민 공화국이 아라비아 반도 전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중공화국의 마지막 남은 영토, 페르시아와 인도 아대륙 역시 그러했다.
“우리가 분열하고 패배한 까닭이 무엇인가? 당성이다! 우리는 이념에 충실하지 못했다! 마르크스 동지가 제창한 그 순수한 이념으로 돌아가자!”
“국내의 반동들을 때려잡아라!”
“이슬람을 지지하는 자들은 왕정을 그리워하는 자들이다!”
그런 이야기가 있다. 영국 왕실에 선지자 무함마드의 피가 흐른다고.
중세 이베리아 반도에서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통혼으로 이어진 혈통이 유럽 왕족들 가운데 이어진 정략결혼을 통해 영국 왕실에까지 전해졌다는 주장.
그게 사실인지 여부가 불확실하다고는 하지만, 명분으로써는 부족함이 없었다.
이슬람을 탄압하는 명분으로는.
“반동이다! 죽여! 전부 죽여!”
“감히 노동 시간에 기도를? 기도를 하는 것 자체가 반동이고 조국에 대한 사보타주까지 벌이는 반동의다! 당장 끌고 가!”
물론 이중공화국은 이슬람만 탄압하지 않았다. 힌두교든 자이나교든 이슬람이든 시크교든 모두가 평등하게 탄압당했다.
그들은 또 다른 유물론의 광신도였으니까. 그들 스스로는 결코 인정하지 않겠지만.
심지어 미국과의 싸움에 바쁘던 소련마저도 이들의 광기에 질겁해서 진지하게 자제하라고 이야기해야 할지를 고민했을 정도였다.
당연히 무자헤딘이 한가득 일어나 아프가니스탄, 페르시아,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인도의 험지마다 한가득 농성을 벌여야 할 것 같지만, 아니었다.
이들은 광신도였기에 무자비하게 이슬람을 짓밟았지만, 또 다른 비전을 명확하게 제시해주기도 했으니.
“너희의 적은 모든 기득권이다! 형제들이여!”
과거에 인간 취급도 받지 못했던 유색인종들을 껴안은 혁명가들은 외쳤다.
“대지에 저주받은 자들아, 너희들이 왜 굷주려 왔는지 아는가. 너희들이 왜 질병과 기근에 고통받아왔는지 아는가? 모두 저들 때문이다!”
“이상향으로 나아가자, 사회주의 낙원에서는 피부색이든, 언어든 중요치 않다. 거짓된 요설을 속삭이는 이맘들을 매달아라, 오로지 이성과 합리를 통해 우리는 구원받으리라. 왕도 거지도 없다. 하나의 인민들만이 있을 뿐!”
그리고 이들은 자기들 가운데 있던 기독교 성직자들, 그리고 신앙을 포기하지 못했던 이들까지 이맘들과 함께 공평하게 공개처형하며 일관성을 보였다.
그렇게 되자 도시화된 인도 아대륙은 물론이거니와 각 부족들에게서도 조금씩이나마 이탈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심각해진 세대 갈등은 패륜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빈번했고, 인민재판을 명목으로 사람들을 때려죽이고, 사제들이 살해당하고 종교시설들이 파괴되는 경우도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리고 프랑스 인민 공화국은 이보다 다소 덜했지만, 종교 탄압이 덜하지는 않았다. 지하로 숨어든 이맘들이 질질 끌려나와 처형당하고 사보타지 혐의로 시간에 맞춰 예배하던 이들이 노동교화소로 끌려갔으며 쿠란이 불탔지만, 최소한 이중공화국이 주요 성지에 저질렀듯 카바 신전을 폭탄으로 날려버리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면서도 열렬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였다.
그들은 해답을 제시해 주었으니까.
왜 그들이 굶주려 죽어야 했는가, 왜 그들이 고통받았는가, 왜 전쟁과 역병과 기근이 그들을 이토록 괴롭히는가. 누군가는 부유한데 왜?
‘너희들이 속고 있었으니까.’
‘너희들은 지금까지 이용당하고 있던 거다, 너희들의 핏값으로 저들이 배불리고 있다.’
‘되찾아라, 본래 너희의 것이 아니더냐.’
인도부터 수에즈까지 모든 곳에서 피가 흘렀다.
묵시록에서 말했듯, 말 굴레에 닿을 만한 피가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져나갔다.
이 대학살에 경악하기에는 외국으로의 정보가 많이 은폐되었을 뿐 아니라, 각국 모두가 제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도 바빴으니, 마침내 사형수의 수가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하자 두 국가의 공산당은 자축했다.
물론 자축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저 미친 놈들.”
샤를 드골 대통령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는 국가의 시작부터 동화정책을 펼쳤다.
후일 프랑스 본토를 탈환한다고 해도 프랑스와 북아프리카를 하나로 만들어 결코 분열되지도 나누어지지도 않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인종 융화 정책이나 강제적인 개종 등도 포함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에 반발한 현지인들은 사상적 평등함으로 다양성을 수용했다는 착각의 대상이 된 프랑스 인민 공화국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공산주의로 전향하거나, 처형당하거나. 이도저도 아니면 노동 수용소에 끌려갔다.
완전한 폭압, 완전한 탄압, 강제적인 세속화. 절대적인 권력인 군사력으로 이들을 찍어누르면, 그 체제는 생각보다 오래 갈 수 있다.
그들에게는 드론과 안면인식 기술은 없지만, 적어도 아직은 수많은 이들을 기꺼이 자신의 심장을 뽑아 바치게 하기에 충분한 광기에 빠트릴 수 있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사상은 자신의 심장도, 자신의 오라비나 누이, 아버지나 딸의 심장도 뽑아 바치게 할 정도의 강렬한 힘을 발휘하니, 하나의 종교와 같다.
아니, 종교도 퍼져나간 지역의 문화와 융합하지 않고는 존속하기 극히 어렵다는 걸 감안하면 어떤 종교를 믿었든, 어떤 문화권에서 있었든, 사회적 모순과 불평등이 존재하는 한 모든 문화권에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이 사상의 확산은 맑은 물에 포도주 한 방울을 떨어트린 것과 같았다. 막을 수도, 되돌릴 수도 없다는 점에서는 더더욱.
그러니, 만일 한 세기 뒤에 이 시대를 평가하고자 하는 학자가 있다면, 아먀 유혈의 시대라고 표현하지 않을까 싶다.
세계의 거의 모든 곳에서, 피가 넘치도록 흘러내리고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붉게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질 시간은 아니지만, 하늘은 솟아오른 먼지로 인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추락한 폭격기의 잔해가 지상을 굴러다니고 있었고, 잔해들이 바닥에 한가득 쌓여 있었다.
공수부대의 위협은 단숨에 섬멸되었다. 듣자하니 공수부대의 무기 보급상자와 병력의 투하 위치가 어긋나서 졸지에 권총 한 자루나 그것도 없이 배 뭐시기 게임을 하게 된 공수부대는 빠따나 엽총 들고 나온 민간인과 라이엇 건 들고 나온 경찰에게도 아작나면서 몇 시간 만에 궤멸당한 모양.
그러나 그 뒤 다시 전 지역에 폭격이 퍼부어졌고, 그 와중에 총영사관은 폭삭 무너졌다. 인근에 옹기종기 모여서 건물을 쓰던 다른 외교관들도 어마 뜨거라 하면서 공사관을 버리고 뛰어나온 상황.
“장군님, 이야기를 들어보니 놈들의 공습 주 목표는 철도역이었던 모양입니다.”
“나라도 그랬겠다. 그래서? 철도 사용은…….”
“24시간 내에 재개통이 가능하답니다. 저놈들이 민간인들은 잔뜩 죽였어도 정작 철도역 시설물에는 큰 피해를 못 줬다더군요.”
“다행인가.”
우리에게 다행이라는 말이 아니다. 암스테르담을 방어해야 할 로타르군에게 다행이라는 의미였다.
“본국에서의 별도의 훈령은 없나?”
“일단 장군님을 비롯해서 최우선 귀환 대상자 명단이 왔습니다. 독일을 통해 귀환하시라고…”
“그렇군.”
나는 조용히 침묵했다.
“마음에 걸리십니까?”
“다소, 그렇군.”
나는 한숨을 쉬었다.
“우리의 국익이 직접 걸린 전쟁이 아니니만큼 참전은 어렵겠지만.”
누가 정의인지는 명확한 게 아닐까.
“정의, 정의, 부르짖다 못해 특수전사령부 이름을 저스티스 연대로까지 지어놨으면서 진짜 불의에는……..”
“그 정의는 이 정의와는 조금 다르다.”
국익이 곧 정의라는 이념 아래에서, 그러니 손이 더러워질 만한 일을 많이 저질러야 하는 특수부대원들의 사기를 유지시키기 위해 그런 이름을 지은 것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완전히 손을 떼지는 않겠지만.”
***
여해시, 공군본부.
해상도시의 건설이 가시화되면서 해상도시에는 새로운 이름이 공모되었다. 부산의 일부로 편입시키자는 안이 결국 여러 논란 끝에 기각된 탓이었다.
그리고, 바다의 수호신이라는 이름을 받은 영웅. 백전불패의 성웅. 충무공 이순신의 호를 딴 여해시라는 이름이 차기 수도의 이름으로 결정되었다.
아직 채 완공도 되지 않았음에도 몇몇 정부청사는 이미 수정섬으로 이전했고, 공군본부 역시 그러했다.
물론 기존 공군본부 청사가 부실공사 지적을 받아 총체적 안전점검에 들어간 상황인지라 어차피 옮길 거 좀 일찍 옮겨버린 것에 가깝긴 했지만.
“신형기는 미군의 노스롭 그루먼이 우리에게 제공했던 경전투기 설계를 기반으로 합니다.”
모든 작전에 팬텀을 투입할 수 없었기에, 아우렐리아는 다용도로 쓸 경량 초음속 전투기를 공동개발, 채용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노스롭 그루먼에게서 T-38이라 불릴 고등훈련기의 설계도를 구매하고, 이를 전투기로 개량해 채용하려 했다.
미국 내전의 발발로 공동개발은 무산되었지만, 설계 자체는 아우렐리아 정부에게 남아 있었고, 아우렐리아 공군과 해군에서는 해당 설계를 기반으로 해서 공동으로 전투기를 개발하기로 결의했다.
그리하여 ‘말벌’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본래는 팬텀을 보좌할 전투기로 개발되었지만 여러 사정으로 인해 덩치를 좀 대형화하고, 수직꼬리날개를 늘리는 선에서 멈출까 했던 프로젝트는 주익 형상, 미익 형상 변경, 적외선 추적 장비 등 집적 회로를 활용한 전자장비 장착. 플라이 바이 와이어 장착 등 ROC가 끝도 없이 높아졌다.
거기에 대공미사일과 대공포에 다수의 항공기를 만주에서 상실한 경험에서 시작된 ‘생존가능성 증대 프로젝트.’로 급속도로 발전 중인 레이더에 탐지되는 RCS 수치를 낮추기 위해 동체를 재설계하는 한편 항력을 극적으로 감소시키는 일체형 연료탱크, 적외선 센서, 내장 무장 포드 등을 집어넣으려고 보니 이미 원본 설계의 자취는 찾을 수조차 없는 판이었다.
게다가 ROC가 너무 올라가서 아예 팬텀을 대체할 미래형 전투기로까지 그 지위가 격상되자 당연히 연구개발 일정을 맞추기는 글러먹었고, RCS를 낮추는 건 원 역사의 2차 세계대전 때부터 설계 단계에서부터 고려해올 정도로 역사가 오래된 개념이기는 했지만 그걸 제대로 계산해내는 것도 상당히 빡센 일.
간신히 초대형 슈퍼컴퓨터를 돌려 봤지만 컴퓨터 성능 한계상 곡면의 RCS를 계산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설계 근간을 통째로 갈아엎고 평면 항공기를 만들 순 없었으니 무식하게 크기를 키워서 도시 사이즈의 컴퓨터를 만들자고 제안해봤다가 재떨이로 쳐맞는다거나, 항공기술팀과 레이더 기술팀이 멱살 잡고 싸운다거나 하는 상황이 수도 없이 벌어지는 등 슬슬 ‘이 프로젝트 망하는 건 아닌가’ 하는 수준으로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는 상황, 오죽했으면 개발 완료까지 20년은 걸릴 거라는 비관적인 전망까지 나오고 있었다.
기술실증기와 프로토타입 몇 대 정도는 나왔지만, 한 대를 제외한 모든 기체가 추락해서 파괴된 지경이니까.
“윙드롭 문제는 허용치 이하로 내려갔다는 게 기술팀의 견해입니다.”
테스트 파일럿 여럿을 잡아먹은 현상, 격투전에서 무작위 상황에서 일어나는 이 유체역학적 문제의 대략적인 원인은 알아냈지만 해결 방법이 요원했기에 최소한으로 줄이고자 주익 설계가 변경된 것만 수십 번이었다.
“우리 공군이 이런 전성기를 맞는 것도 오래가지는 않을 거요.”
공군의 중요도는 현재 하늘을 뚫고 올라갔다.
지상전을 벌일 가능성이 극히 떨어진 지금, 아우렐리아의 기갑부대는 무기를 외국에 팔아버리는 바람에 이름만 기갑부대인 보병인 신세인 등 무장과 물자의 보유량 자체가 극도로 떨어졌다. 해군 역시 함선 보유량과 탄약의 비축량이 급감했다.
하지만 공군은 아니다. 핵무기의 시대가 오면서 공군에 대한 중요도는 하늘을 뚫고 올라갔고, 탄도미사일로 운용되는 전략핵무기 외에도 전술핵무기의 운용과 그에 전제되는 제공권의 장악을 위해 육해군으로 가야 할 군비는 죄다 공군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 공군에 의한 독주 체제도 언제든 아작날 수 있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서 또 다른 전훈이 나온다면.
따라서 공군이라는 조직의 입장에서 보면, 지금의 기회를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게 맞다.
“로타르 공화국에 의용군을 파견할 일이 있다면 우리 공군이 앞장서겠다고 이미 비공식적으로 상부에 이야기를 해 뒀소, 물론 결정권은 내각에게 있지만.”
문민통제는 지엄한 원칙, 훼손시킬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럴 생각이 있는지 넌지시 물어보고, 만약 생각 있으면 우리는 적극 협조하겠다고 말해 두는 것조차 안 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딱히 압력을 준 것도 아니고.
제법 속이 편한 발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
“군부의 월권이 도를 넘었습니다.”
대통령의 말에, 내각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숙군
유혈의 시대다.
묵시록의 네 기사가 세계를 지배하는 시기.
모든 곳에 전쟁과 기근과 질병과 죽음이 있었다.
전쟁의 적기사가 땅에서 평화를 제하여 버리니 조금의 틈만 보여도 침략이 이어졌다.
서로가 서로를 침략하고 침략당하는 시대, 주변국을 보아도 미국에서는 내전이 벌어지며 필리핀, 인도네시아에서는 군벌들이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베트남의 군사정권은 사이공과 하노이 등을 젊은 학생들의 피로 물들였으며 이중공화국, 프랑스 인민 공화국에서는 처형당한 이들의 해골이 탑을 이룬다.
자유 프랑스와 독일국, 이스라엘 간의 삼국동맹은 어느새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난 관계로 변하여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고, 남아프리카 왕국과 마다가스카르조차 내전에 휘말렸다.
스칸다나비아 연방과 폴란드 사이에서는 국지전이 벌어졌고 동로마 제국과 캅카스 연방공화국에서는 반정부 세력의 피가 광장을 물들이고 있으며, 티베트, 우랄 연방공화국과 투르키스탄 민주공화국은 혼란 속에서 나라꼴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판이지만 로타르-프랑스 전쟁에 아일랜드 왕국과 독일 제국은 이미 사실상 로타르 편으로 참전한 상태이니, 진정으로 평화를 구가하고 있는 국가는 하나도 없다고 봐야 한다.
하다못해 그 일본조차도 피바람이 불고 있으니.
그리고, 로타르-프랑스 전쟁은 문자 그대로 명분 없는 억지에 불과한 전쟁이었다. 단지 전력차가 압도적일 거라 모두가 생각해서 로타르를 돕는 데에 주저함이 있을 뿐.
그러나 프랑스군은 로타르군에게 처참하게 박살나고 있었고, 위기를 넘긴 로타르 군이 독일의 지원으로 재무장하고 대대적인 반격을 모색한다는 이야기가 들리고 있다.
전쟁의 적기사의 이야기는 이쯤 하고, 질병의 백기사를 보자면, 미국 내전에서 사용된 생물병기는 사용 그 자체가 처참한 실책이었다.
반군은 이 질병이 미국인들을 죽이고 과도한 사망률과 그에 반비례하는 낮은 감염재생산지수로 인해 미군, 그리고 미국 민간인들의 시체로 탑을 쌓는 선에서 만족하고 대규모 확산 없이 소멸하리라 기대했던 듯 하다.
안타깝게도,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통칭 H1N1은 기술도 부족한 반군의 의도대로 움직여주는 놈이 아니었다.
자연선택에 의해 전염성이 떨어지는데 치명적인 바이러스들은 자연히 도태되고, 사람이 죽기 전까지 충분히 다수의 주변인들에게 옮길 수 있는 변종만이 살아남는다.
치사율은 5% 대로 급감하고, 반군과 미군을 막론하고 수많은 이들이 죽어갔다. 전쟁을 치르느라 가뜩이나 허약해지고 영양 보급이 부실해진 몸에서 발생한 폐렴은 침대 위에서 사람들을 익사시켜갔다.
그리하여 이 공격을 지시한 반군 수뇌부마저도 폐에 물이 차올라 손을 써보지도 못하고 차갑고 축축한 지하 땅굴 어딘가에서 몰살당하니, 인과응보라 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것을 조롱하기에는 이 질병은 너무나도 빠르게 퍼져나갔다. 미국은 물론 소련도 쑥밭이 되는 중이었고, 출입국 업무가 정상적으로 진행되는 몇 안 되는 아우렐리아, 독일, 아일랜드, 폴란드, 스칸다나비아 등은 국경을 봉쇄해 감염자 유입을 막고자 했다.
물론 별로 의미는 없었고 어떤 방식으로든 감염자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고, 전염병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인 뒤에야 사그라들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기근의 흑기사는 세계를 가리지 않았다. 비료를 만들 공장은 화약을 찍어내고 있었고, 농사를 지어야 할 너른 들판에는 전차가 돌아다니며 젊은 청년들은 시체가 되어가니 평화로운 국가들조차도 진지하게 자국의 식량 비축량이 충분한지를 고려해야 할 판.
그리고 이러한 시기이기에 군은 비대해졌다. 목소리가 커졌다.
이해 못할 건 없었다.
군부가 비대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시대의 흐름이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걸 넘어서 군이 자신이 가져서는 안 될 것을 탐한다면.
“군부는 이미 선을 넘었습니다. 이놈들은 자기가 군부인지 행정부인지도 분간을 못하는 모양이군요.”
그래, 프랑스의 침공은 전 세계의 비난을 받았다. UN 총회에서 프랑스에 대한 규탄안까지 통과되었다. 하지만 그게 아우렐리아가 파병을 한다는 뜻은 아니지 않은가?
“대통령 각하, 그래도 군부 입장에서는 행정부의 시책을 확인하고 전적으로 협조하겠다는 뜻에서 그렇개 행동한 건데 그걸 그런 식으로 규정할 것까지는…..”
“장관!”
국방장관이 어설프게 후배들에 대한 쉴드를 쳐주려고 했다가 대통령의 기세에 찍어눌렸다.
“이게 상식적으로 이런 식으로 돌아갔어야 할 문제입니까?”
“………..”
군부가 행정부의 의사를 확인한다. 형식상.
하지만 지금 한 내용이 ‘지구 반대편에 있는 국가에 파병할 생각 있으신가요? 우린 갔으면 좋겠는데.’ 이거 아닌가?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군부가 행정부에 압력을 행사하려 했다고까지 해석될 수 있는 문제다.
상대가 정말 별 생각이 없었는지, 아니면 진짜 무슨 꿍꿍이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행정부는 이를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숙군 작업을 강행할 모양이더군.
하긴, 자업자득이다. 내가 봐도 간 보는 짓 많이 하더만.
-국방개혁이라는 이름인데, 지금 군종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기억하나?
“육군, 해군, 공군, 정화대(국가헌병대), 국경수비대, 전략로켓군, 의무군(육해공군의 의무병과 총괄, 대규모 방역이 임무), 병참군(육해공군의 보급 총괄), 저스티스 여단(특수부대), 이렇게 아닙니까.”
전화선 너머에서 장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젠 아니게 될 걸세.
“구체적으로는요?”
-국경수비대는 해안경비대와 육상경비대로 쪼개서 육상경비대는 정화대로, 해안경비대는 해군에 완전 편입시킨다고 하더군, 그리고 자네와 직접 연관된 부분인데, 전략로켓군과 공군을 통합할 모양이야.
“와, 저 실업자 되는 겁니까?”
-그럴 것 같나? 이번 사고를 누가 쳤는데.
“…………”
-귀국하면 이임할 준비나 하게, 공군 사령관.
“다른 편제는 어떻게 됩니까.”
-의무군과 병참군은 통합한 뒤 부대 규모를 키울 예정이네. 어차피 그쪽은 큰 의미는 없지만. 특수전부대도 규모 확대가 예정되어 있고…..
“정화대와 특수전부대의 규모를 키우는군요.”
-그래, 원래 각군 소속이었던 저스티스 여단의 지원 임무를 맡는 육상, 해상, 공중 지원부대를 여단 직할로 옮기고, 거기에 규모도 5배로 늘리라더군, 내각에서는 기존의 육해공군에 대해 굉장히 벼르고 있었던 모양이야. 아, 그리고 정화대도 정식으로 연방경찰 소속으로 통합될 예정이네, 지휘체계는 다소 다르겠지만.
원래 국방장관은 당색과는 무관하게 퇴역 장성이 임명되는 편이었기 때문에-원래는 아니었지만 대전쟁 이후 그렇게 되었다-국방장관도 이 숙군 작업에서 철저히 배제된 모양이었다.
“저는 문민통제를 거스르지 않고 믿을 만하다고 본 모양이군요.”
-자네가 좀 장성진에서 겉돈 것도 있고, 정보국 쪽이랑 친하게 지낸 것도 있고, 뭣보다 내각 인사들 중에는 아직 자네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진 이들이 좀 있네.
“정말 그거 때문이라면 엿이나 먹으라고 대신 전해주십시오. 확 옷 벗고 퇴역해버릴라니까.”
내가 으르렁거리자 잠시 말이 없었다.
-알잖나, 자네 정도 외에는 ‘그곳’에 소속되지 않았으면서 능력까지 증명된 고위 장성이 없어.
고위 장성들 간의 친목질 동아리 비슷한 것, 이름은 따로 없다.
하지만, 그 친목질에서 정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다면, 과연 단순한 친목질로 끝날 수 있을까?
“저는 그 새끼 꼬라지 보기 싫어서 몇 번 얼굴 비춘 뒤 발길을 끊은 거긴 합니다만. 그딴 놈도 선배라고, 그 새끼 옷 벗기 전에 면상 한 대만 후려갈기면 좋겠습니다.”
-아무튼 간에 지금 정부는 심각해, 쿠데타 가능성도 진지하게 여기는 모양이더군, 개헌 전이라면 꿈속의 꿈이지만 지금은….. 많이 쉬워졌지.
효율화는 곧 권력의 집중을 유발한다.
개헌 전에는 국가의 전권을 장악하려면 비현실적일 정도로 많은 곳을 장악해야 했기에 쿠데타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다고 평해졌다.
하지만 개헌 후에는 좀 달라졌다. 물론 난이도가 내려간 것도 어지간한 국가 수준은 된다마는.
-내각에서는 유사시 땅개들 대가리에 폭탄을 던져줄 수 있는 지위에 믿을 만한 사람이 있기를 원하네. 자네는 차라리 기술관료에 가깝잖나. 무엇보다 군비증강을 하기는 해야 하니…..
“도장 찍었습니까?”
-미국 이야기라면, 그렇게 됐네, 그 두 놈들이 휴전 협정에 도장을 찍었어. 인구교환도.
이웃 국가의 내전이 끝났으니 군비를 증강할 필요성이 생겼다. 농담 같지만 농담이 아니다.
‘미국인들을 믿을 수가 없다.’
미국이 자국과 국경을 접한 모든 상대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역사책을 한 번 훑어보면, 군비를 증강해야 한다는 말이 빈말이 아님을 알게 되리라. 언제 뭔 개같은 논리로 전쟁을 선포할지 모르니까.
물론 지금은 19세기가 아니고, 아우렐리아는 멕시코나 스페인 등과는 다르게 핵무기가 있었다. 하지만 세상 일은 모르는 것 아니겠는가. 로타르를 프랑스가 진짜 전면 침공할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이쪽은 상태가 안 좋습니다. 프랑스 놈들, 저지대를 빠르게 돌파하는 건 포기한 모양이에요. 댐이 폭격당했습니다.”
로타르의 북부 지역, 속칭 베네룩스, 저지대 지역은 대부분이 지역이 수면보다 낮은 간척지다. 당연하지만 댐을 터트리면 그쪽으로 진격해오는 걸 막을 수 있고 실제로 저지대 국가들은 외적이 침입해올 때마다 방어용으로 잘 써먹었다.
하지만 전쟁 초기에는 프랑스와 로타르 모두 댐을 건드리지 않았다. 프랑스는 댐을 폭파하면 로타르군에게 괴멸적인 피해를 줄 수 있을지언정 로타르를 합병해야 하는데 이를 포기하는 셈이었고, 로타르는 자국 영토일 뿐 아니라 보급선과 방어작전을 수행하는 병력 전체기 수공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으니 당연히 폭파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어제 프랑스 공군이 댐들을 집중폭격해 파괴해버렸고, 지역 전체가 진흙탕이 되어버렸다. 프랑스의 상황이 그만큼 좋지 않아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 독일이 프랑스에 선전포고했다.’
로타르를 돕겠다는 명분으로 독일군이 본격적인 개입을 시작하자 프랑스는 공세를 전부 중단하고 참호를 파기 시작했다.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독일이 전쟁에 개입한다는 정보를 프랑스가 미리 수집해서 폭격을 결정한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나 확실히 알게 되겠지.
-그쪽의 일은 이쯤이면 충분하네, 귀국해. 이건 내각의 명령이네.
***
라인 강 동쪽 해안, 독일 제국.
“이미 충분한 논의를 거치셨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이제는 답을 듣고 싶군요.”
“……….”
“우리는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호의를 전부 제공했습니다. 이제는 귀국이 응답할 차례입니다.”
“로타르의 국민들은 프랑스에 굴복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독일 제국의 신하로써 살려고 하지 않을 거요.”
“우리는 위선자 개구리들과는 다릅니다.”
“…………..”
“국가 대 국가, 하나 대 하나. 완벽하게 동등한 위치,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저희의 생각이지만 만약 프랑스가 우리가 내건 것과 같은 조건을 내걸었더라면….. 이야기는 많이 달라졌겠죠.”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의 모든 정치적 힘은 파리에 집중되어 왔다. 대전쟁이 끝나고 얼마간은 남부로 그 중심이 옮겨갔었고, 스페인을 2차대전기에 혁명의 이름으로 합병해버린 뒤에는 남부의 입김도 강해지기는 했지만, 아무튼 파리의 위상은 절대적, 로타르가 프랑스에 흡수된다고 해도 그리 좋은 대접을 받았을 리는 없으리라. 프랑스는 말이 만민평등이지 실제로는 같은 프랑스 시민권자들끼리도 차별을 하는 형국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으니까.
“로타르-도이칠란트 연방.”
도이칠란트의 카이저, 로타르의 총통이 공동 국가원수를 맡고, 군사권과 외교권은 독일 제국이, 재무부는 로타르가 고정적으로 가져가며, 의원의 수와 그 외 장관의 수는 1대 1로 고정한다는 제국의 제안.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 당장의 위기를 넘길 수 있다. 게다가 로타르에는 자신을 프랑스인이라 생각하는 자보다 독일인임을 자처하는 이들이 훨씬 많다. 독일과의 합병투표가 있었다면 조작할 것도 없이 합병되었을지도 모를 일이고.
“의회에서 최종 표결을 거쳐야겠지만, 로타르 공화국의 행정부에서는 독일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